요제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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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제프 2세는 1741년에 태어나 1790년에 사망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그는 계몽 전제주의를 추구하며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지만, 여러 반발에 직면하여 많은 정책을 철회해야 했다. 요제프 2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공동 통치를 하다가 1780년 단독 통치를 시작하여 종교 관용령, 농노 해방령 등을 발표했다. 그는 중앙 집권적 정부를 만들고, 법 체계를 개혁했으며, 예술 후원에도 힘썼다. 그러나 그의 급진적인 개혁은 귀족, 교회, 일반 백성들의 반발을 불렀고,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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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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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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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이름 | Josephus Benedictus Joannes Antonius Michael Adamus (요제푸스 베네딕투스 요안네스 안토니우스 미카엘 아다무스) |
출생 | 1741년 3월 13일 |
출생 장소 | 쇤브룬 궁전, 빈, 오스트리아 대공국, 신성 로마 제국 |
사망 | 1790년 2월 20일 (48세) |
사망 장소 | 빈, 오스트리아 |
매장 장소 | 황실 납골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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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가톨릭교 |
통치 | |
군주 칭호 | 신성 로마 황제 |
재위 기간 | 1765년 8월 18일 – 1790년 2월 20일 |
대관일 | 1764년 4월 3일 |
대관 장소 |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
대관 유형 | 대관식 |
이전 군주 | 프란츠 1세 |
다음 군주 | 레오폴트 2세 |
기타 칭호 |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 국왕, 크로아티아 국왕, 보헤미아 국왕 |
이전 군주 (기타 칭호) |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
다음 군주 (기타 칭호) | 레오폴트 2세/7세 |
섭정 | 마리아 테레지아 (1765–1780) |
섭정 유형 | 공동 통치자 |
가문 | |
왕가 |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 |
아버지 | 프란츠 1세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지아 |
배우자 | |
배우자 | 이사벨라 (1760년 결혼, 1763년 사망) 마리아 요제파 (1765년 결혼, 1767년 사망) |
자녀 | |
자녀 | 마리아 테레지아 여대공 마리아 크리스티나 |
2. 생애
요제프 2세는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중에 태어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큰 사랑을 받았다. 1760년 마리아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열렬히 사랑했으나, 1763년 그녀가 천연두로 사망하자 큰 슬픔에 빠졌다. 1765년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지만, 그녀에게는 무관심했고, 1767년 그녀마저 사망한 후 독신으로 지냈다.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의 사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요제프 2세는 어머니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여 갈등을 빚었다.[29] 1772년 폴란드 분할에 참여해 영토를 넓혔지만, 1778년~1779년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대립하여 바이에른 지방 병합에 실패했다.
1780년 어머니 사후 단독 통치를 시작한 그는 1781년 농노 해방령과 종교 관용령을 발포하여 프랑스 혁명 이전 유럽에서 가장 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했다.[30] 교회 보조금을 삭감하고,[31] 교육 및 환자 간호를 하지 않는 교단과 수도원을 해산시켜[31] 재정을 확충했으며, 귀족 특권 폐지, 프라터 공원 개방, 초등학교 설립,[30] 빈 종합병원 설립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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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농사일을 하는 요제프 2세. "민중 황제"라고 불린 요제프 2세는 농민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
그러나 상공업 발전과 부국강병을 위한 그의 개혁은 대부분 저항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1790년 프랑스 혁명의 격화 속에서 병사했고, 동생 레오폴트 2세가 황위를 계승했다.
1777년 프랑스를 방문해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의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많은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2세에게 비판받고,[29] 스스로 "선의를 가졌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자"라는 묘비명을 선택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의 개혁 이념은 "요제프주의 사상"으로 불리며 후대 오스트리아 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1848년 혁명 당시 즉위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의 이름을 따서 즉위했다.
2. 1. 어린 시절

요제프 2세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초기인 1741년 3월 13일에 태어났다. 당시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요제프는 그녀에게 희망과 같은 존재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로 가서 갓 태어난 요제프를 안고 눈물로 구원을 호소했다.[43]
요제프 2세의 교육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직접 계획했다. 요제프는 재능이 있어 제왕 교육을 잘 소화했지만, 고집이 세서 불친절하고 거만했다. 그는 예수회원들에게 일반 교육을 받았고, 체육과 음악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44]
어린 시절 요제프는 장난감 병사나 말을 가지고 전쟁 놀이를 즐겼다. 이는 훗날 그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심취하고 호전적인 군주가 되는 모습의 전조로 보인다. 또한, 요제프는 계몽주의 서적에 심취했는데, 부모는 그에게 신앙심을 심어주려 노력했지만 오히려 반가톨릭 성향을 굳게 만들었다.[45]
성년이 된 요제프는 어린 시절보다 부드럽고 절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자만심과 냉소적인 성격은 훗날 두 번째 아내나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냉담함과 저항심으로 나타났다.[46]
그는 요제푸스 베네딕투스 요한네스 안토니우스 미카엘 아다무스(Josephus Benedictus Joannes Antonius Michael Adam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오스트리아 대공으로 태어났다. 그의 정규 교육은 데이비드 흄, 에드워드 기번, 볼테르, 장-자크 루소의 저술과 ''백과전서''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2. 2. 가족들과의 관계
요제프 2세는 두 번 결혼했지만, 두 결혼 모두 비극적으로 끝났다. 첫 번째 부인은 루이 15세의 외손녀인 마리아 이사벨라였고, 두 번째 부인은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였다.
원래 마리아 테레지아는 요제프 2세를 나폴리 왕국의 마리아 루도비카 공주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그 다음 신붓감으로 마리아 이사벨라가 나타났다. 요제프 2세는 마리아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보고 반하여 그녀와 결혼할 것을 고집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부르봉 왕조와의 관계를 깊게 하기 위해 이 결혼에 찬성했다. 1760년 9월 7일에 대리 약혼이 이뤄졌고, 10월 6일에 결혼식이 거행되었다.[47]

그러나 이사벨라는 깊은 우울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으로 황제 가문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사벨라는 요제프 2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혼한 지 1년 반쯤 지난 1762년, 두 사람 사이에서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났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1763년, 두 사람은 다시 아이를 가졌으나, 아기는 태어난 지 몇 분 후에 죽었고, 이사벨라 역시 출산 직전에 걸린 천연두 때문에 병상에 누웠다. 요제프 2세가 밤낮없이 이사벨라를 간호했으나, 이사벨라는 7일 후인 1763년 11월 27일에 사망했다.[48]
이사벨라가 죽은 후, 카우니츠 재상의 건의에 따라 요제프 2세는 1765년 1월 23일 바이에른 공국의 마리아 요제파와 결혼했다. 그러나 요제프 2세는 죽은 첫 아내를 잊지 못하고, 이사벨라의 아버지에게 요제파가 “키가 작고 뚱뚱하며 얼굴에는 붉은 점이 있고 썩은 이빨에 매력도 전혀 없”다며, 자신을 “불쌍히 생각해 주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요제파는 빈 궁정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요제프 2세는 그녀에게 모욕까지 주었다. 결국 요제파는 1767년에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요제프 2세는 요제파의 병상에도,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49]

요제프 2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는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첫 번째 손주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1770년에 8살이 채 되지 않아 죽었다. 이는 요제프 2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요제프 2세는 이후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못하고 정치에만 몰두했다.[50]
소년기의 요제프 2세는 형제들에게 경멸하는 언동을 서슴지 않았다.[46] 이후에도 요제프 2세는 형제들에게 냉소하며 야유했기 때문에 형제들과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50]
3. 통치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사망하면서 요제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에 여러 번 갈등을 겪었다.[29] 1772년에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1778년부터 1779년까지 벌어진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서는 숭배하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 전쟁을 벌이게 되어 바이에른 지방으로의 영토 확장 계획은 좌절되고, 인강 연안의 작은 영토를 얻는 데 그쳤다.
1780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자 단독 통치를 시작했다. 1781년 농노 해방령을 발포하여 군주가 농민을 직접 통치하고자 했으며, 이는 프랑스 혁명 이전 유럽에서 가장 혁명적인 개혁이었다.[30] 같은 해 종교 관용령을 발포하여 루터파, 칼뱅파, 정교회 주민에게 시민권상의 평등을 인정했다. 또한 교회에 대한 보조금을 축소[31]하고, 교육과 환자 간호를 하지 않는 많은 교단과 수도원을 해산[31]시켜 그 재산을 국가가 장악하여 재정을 풍족하게 했다. 행정과 사법 개혁을 통해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여 약화시켰다.[30] 그 외에도 황실 영지였던 프라터 공원을 일반 시민에게 개방하고, 초등학교를 많이 짓거나[30], 빈 종합병원을 설립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개혁은 귀족 세력과 교회의 약화를 목표로 상공업 발전과 부국강병·왕권 강화를 도모했지만, 대부분 저항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1790년, 프랑스 혁명이 격화되는 가운데 병으로 사망했으며, 동생 레오폴트 2세가 황제 자리를 계승했다.
1777년 프랑스를 방문하여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회담을 주선하고 부부 사이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며, 이듬해 마리는 첫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많은 개혁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어머니와 비교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존경했던 프리드리히 2세에게 "첫걸음보다 두 번째 걸음을 먼저 내딛는다"고 비꼬임을 당했으며[29], 요제프 2세 자신이 선택한 묘비명은 "선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잠들다"라는 풍자적인 것이다. 그러나 요제프 2세가 제시한 개혁 이념, 즉 "요제프주의 사상"은 이후 오스트리아의 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3. 1. 로마 왕 즉위 (1764년)
요제프는 1764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 왕으로 즉위했다. 1764년 3월,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들은 요제프의 로마 왕 즉위에 만장일치로 찬성표를 던졌다. 관례에 따라 요제프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이리하여 요제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 취임 예정자가 되었다.[51]
3. 2. 공동 통치 (1765년 ~ 1780년)
요제프는 국가 평의회(Staatsrat)의 일원이 되어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읽을 수 있도록 회의록을 작성했다. 이 문서에는 종교적 관용, 교회의 권력 축소, 농민의 봉건적 부담 경감, 무역과 지식에 대한 제한 철폐 등 그의 후대 정책과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모든 재난의 씨앗이 담겨 있었다.[2] 그는 농노 해방을 시도했지만, 그의 사후에 그것은 지속되지 못했다.요제프는 합리성에 의해 지휘될 때 국가의 권력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강도에서 자코뱅과 유사했다. 그러나 절대 군주로서 그는 또한 법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국가를 대변할 그의 권리와 그의 통치의 현명함을 확신했다. 그는 인류를 형성하기 위한 그의 철학적 계획이 용서할 수 있는 반대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1760년, 정략결혼 상대인 파르마의 이사벨라와 결혼한 요제프는 그녀와 완전히 사랑에 빠졌지만, 이사벨라는 요제프의 누이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동행을 더 좋아했다. 1769년 요제프를 처음 만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그를 야심차고 세상을 불태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묘사했다. 1777년 변장 여행 중 요제프를 만났던 프랑스 장관 베르젠느는 그를 "야심차고 전제적인" 인물로 평가했다.
1765년 아버지 프란츠 1세가 사망한 후, 요제프 2세는 황제가 되었고 어머니에 의해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황제로서 그는 진정한 권력이 거의 없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녀의 남편이나 아들이 그녀의 세습 영토에서 그녀의 최고 통치권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결심했다. 요제프는 공동 통치자 직을 사임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어머니가 종교적 관용에 대한 반감을 누그러뜨리도록 할 수 있었다.
1772년의 폴란드 제1분할과 1778년~1779년의 바이에른 계승 전쟁의 경우처럼, 요제프는 어머니의 인내심과 성질에 큰 부담을 주었지만, 궁극적으로 황후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1780년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요제프는 자신의 본능을 따를 완전한 자유가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요제프는 많은 여행을 했다. 1769년 나이세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밀리에 만났고, 1770년 모라비아 노이슈타트에서 다시 만났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는 카우니츠 공작과 함께 했는데, 프리드리히와의 그의 대화는 폴란드 제1분할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제프는 이것과 그의 집안의 영토를 확장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조치에 열렬한 승인을 했다. 1775년 프리드리히가 심하게 병들자, 요제프는 보헤미아에 군대를 집결시켜 프로이센으로 진격하여 실레시아를 요구할 예정이었으나, 프리드리히는 회복되었고, 그 후 요제프를 경계하고 불신하게 되었다.[2]
1777년 요제프는 막시밀리안 3세 사망 후 바이에른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그 해 4월 그는 "팔켄슈타인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여왕이자 그의 누이인 마리아 앙투아네트를 방문했다. 그는 백과전파 학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고 아첨을 받았지만, 그의 관찰은 프랑스 왕정의 몰락을 예측하게 했고, 프랑스군이나 해군에 호감을 갖지 않았다.[3]
1778년 그는 바이에른 계승을 주장하는 경쟁자를 지지한 프리드리히에 대항하기 위해 모인 군대를 지휘했다. 이것이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었다. 프리드리히가 새로운 전쟁을 시작하려 하지 않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평화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실제 전투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요제프가 그의 영토에 대한 그의 잠재적인 계획을 경계하고 프리드리히를 그들의 보호자로 여겼던 다른 독일 군주들에 대한 영향력 대부분을 잃게 했다.
3. 3. 단독 통치와 개혁 (1780년 ~ 1790년)
1780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사망하자 요제프 2세는 단독 통치를 시작하며 자신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계몽 전제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교육 확산, 교회 토지 세속화, 종교 수도회와 성직자 축소 등을 통해 국가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이끌어내려 했다. 관용 특허령(1781)으로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하여 통일을 꾀했다.[4]요제프 2세는 어머니가 시작한 농민 해방 조치를 이어받아 1781년 농노제를 폐지했다. 1789년에는 농민들에게 노역 대신 현금 지불을 요구했으나, 이는 귀족, 성직자, 상인, 농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물물교환 경제에는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4] 1787년에는 사형을 폐지했는데, 이 개혁은 1795년까지 유지되었다.
모든 남녀 학생에게 초등 교육을 의무화하고, 소수의 학생들에게는 실용적인 고등 교육을 제공했다. 재능 있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만들고 유대인과 다른 종교 소수자들을 위한 학교 설립을 허용했다. 1784년에는 국가의 교육 언어를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변경하도록 명령했다.
18세기에는 의료 분야에서 중앙 집중화가 추세였다. 도시들은 지역 병원을 운영할 예산이 부족했고, 군주제는 값비싼 전염병과 검역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요제프 2세는 1784년에 개원한 빈 대학병원이라는 하나의 대형 병원 건설을 통해 빈에서 의료 서비스를 중앙 집중화하려고 시도했다. 중앙 집중화는 위생 문제를 악화시켜 전염병을 일으켰고 새로운 병원에서 사망률이 20%에 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은 다음 세기에 의학 분야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7]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요제프 2세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국왕 부부를 도우려 했다. 그는 구출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나, 여러 이유로 실패했다. 1791년 6월 21일 탈출 시도가 있었지만, 국왕이 동전 뒷면에서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에 도움을 요청하고 프랑스의 군사 기밀을 제공하기도 했지만,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도움을 거부했다.
개혁은 저항 세력에 의해 저지되는 경우가 많았다. 존경했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 "첫걸음보다 두 번째 걸음을 먼저 내딛는다"고 비꼬임을 당하기도 했다.[29] 요제프 2세는 "선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잠들다"라는 묘비명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러나 요제프 2세가 제시한 개혁 이념, 즉 "요제프주의 사상"은 이후 오스트리아의 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3. 3. 1. 주요 개혁 내용
요제프 2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공동 통치하다가, 1780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계몽 전제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52]- 종교 개혁:
- 1773년 가톨릭 예수회를 해산하여 교육기관을 교회로부터 독립시켰다.[52]
- 국가 행정에 참여하던 가톨릭 성직자들을 전문 관료로 대체하고, 교회 재산을 국유화하거나 국가 복지 시설에 귀속시켰다.[52]
- 1781년 관용 특허령을 발표하여 개신교, 동방정교회, 유대교 등에게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다.[52]
- 가톨릭 교회를 국가의 도구로 만들고자 교황의 권력에 반발했다.
- 성직자들은 십일조를 박탈당하고 정부 감독하의 신학교에서 공부해야 했으며, 주교들은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했다.
- 비생산적이라 여긴 명상 수도회를 폐쇄하고(700개 이상), 수도사와 수녀의 수를 줄였다. (65,000명 -> 27,000명)[52]
- 가톨릭 미사 방식을 단순화하고, 성일 수를 줄이고, 교회 장식을 줄이도록 명령했다.
- 1782년 관용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에 대한 여러 제한을 제거했다.
- 1789년 갈리치아 지역 유대인들을 위한 종교적 관용 헌장을 발표했으나, 공동체 자치를 폐지하고 독일화와 비유대인 의복 착용을 장려했다.
- 사회 개혁:
- 1781년 농노제를 폐지했다.[4]
- 1789년 농민들에게 노역 대신 현금 지불을 요구했으나, 귀족, 성직자 등의 반발을 샀다.[4]
- 1787년 사형을 폐지했다 (1795년까지 유지).[4]
- 교육 개혁:
- 모든 남녀 학생에게 초등 교육을 의무화하고, 일부 학생에게 실용적인 고등 교육을 제공했다.
-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만들고, 유대인 등을 위한 학교 설립을 허용했다.
- 1784년 교육 언어를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변경했다.
- 의료 개혁:
- 의료 서비스 중앙 집중화를 시도, 1784년 빈 대학병원을 개원했다.[7]


3. 3. 2. 개혁의 한계와 반발
요제프 2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공동 통치를 하다가, 1780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계몽 전제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4]요제프 2세는 관용 특허령(1781)을 통해 제한적인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독일어 사용을 의무화하여 통일을 꾀했다. 또한 농노제를 폐지하고(1781), 농민들에게 노역 대신 현금 납부를 요구했다.(1789)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귀족, 성직자, 상인, 농민들의 반발을 샀는데, 이는 그들의 물물교환 경제에 돈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4] 1787년에는 사형을 폐지했으나, 이 개혁은 1795년까지 유지되었다.
요제프 2세의 종교 정책은 가톨릭 교회의 현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교황의 권력에 반발하며 가톨릭 교회를 국가의 도구로 만들려고 했다. 성직자들은 십일조를 박탈당하고 정부 감독 하의 신학교에서 공부해야 했으며, 주교들은 왕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했다. 또한 수도원 토지를 매각하여 주교구, 교구, 세속 성직자 수를 늘리는 데 사용했다. 그는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 명상 수도회를 조롱하며 수도원의 3분의 1을 폐쇄하고 수도사와 수녀의 수를 줄였다. 교회의 교회 재판소는 폐지되었고, 결혼은 민사 계약으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반교권적이고 자유주의적인 혁신은 교황 비오 6세가 1782년에 요제프 2세를 방문하게 만들었지만, 요제프 2세는 교황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4]
1782년 관용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에 대한 많은 제한과 규정을 제거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발발 후, 요제프 2세는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를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3. 4. 외교 정책
요제프 2세는 영토 확장을 목표로 외교 정책을 추진했지만, 이웃 국가들의 반발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그는 플랑드르 주민들의 스헬트 강 항해를 금지한 장벽 조약을 없애려 했으나 프랑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후 러시아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분할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 역시 프랑스를 비롯한 주변국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7]요제프 2세는 바이에른을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와 교환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조직한 대공연맹 결성으로 인해 실패했다. 1772년에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로이센, 러시아와 함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다.[29] 그러나 1778년부터 1779년까지 벌어진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서는 숭배하던 프리드리히 2세와 전쟁을 벌여 바이에른 지방으로의 영토 확장 계획이 좌절되고, 인강 연안의 작은 영토를 얻는 데 그쳤다.
3. 5. 문화 정책
요제프 2세는 모든 남녀 학생에게 초등 교육을 의무화하고, 소수 학생에게는 실용적인 고등 교육을 제공했다. 재능 있는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만들고, 유대인 등 종교 소수자들을 위한 학교 설립도 허용했다. 1784년에는 국가 교육 언어를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변경하도록 명령했다.[30]요제프 2세는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한 군주로, "음악의 왕"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의 고급 문화를 보다 게르만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 《후궁탈출》의 작곡을 의뢰했고, 젊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요제프 2세 황제 서거를 위한 칸타타》를 작곡하도록 의뢰받았으나,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공연되지는 않았다.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와 동명의 영화에서 요제프 2세는 제프리 존스가 연기한 선의를 가졌지만 다소 어리숙한 군주로 묘사되며,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쉽게 조종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셰퍼는 자신의 희곡이 허구이며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요제프 2세는 독일어를 국어로 삼으려 했으며,[31] 대학 강의 언어를 라틴어에서 독일어로 바꾸게 했다.[30] 빈의 예술을 독일화하기 위해 독일 연극 극장(징슈필) 설립을 생각했다.[32]
모차르트를 궁정 음악가로 고용했지만, 모차르트에게 주어진 일은 겨울 동안 무도회용 음악을 작곡하는 것뿐이었고, 봉급 또한 800플로린에 불과했다. 대신 그는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총애했다.
요제프 2세의 독일주의는 독일 사상가들에게 주목을 받았고, 많은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빈에 희망을 걸었다.[31] 시인 프리드리히 고틀리프 클롭슈토크는 빈에 국민 문화원 설립을 계획했고,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또한 빈을 "독일인의 국민 극장"을 세우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다.[31]
이러한 독일주의적 문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요제프 2세 자신은 이탈리아 취향의 인물이었다.[34] 이러한 정책은 독일 민족주의 고양에 부응한 측면도 있지만, 당시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로 된 연극은 귀족들만을 위한 것이었고, 수지가 맞지 않게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35] 연극에는 언어 보급과 교육의 효과도 있었으므로, 독일어로 하는 편이 시민들도 이해하기 쉽고 교육에도 좋으며, 관객도 증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35]
4. 요제프주의
요제프 2세의 개혁을 일관하는 내정면의 진보성은 ‘요제프주의’로서 19세기로 계승되었다. Josephinismusde의 유산은 오스트리아 계몽주의를 통해 계속될 것이다. 요제프 2세가 제시한 개혁 이념은 이른바 "요제프주의 사상"으로서, 그 후 오스트리아의 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29] 이후 1848년 혁명 중에 즉위한 프란츠 대공은 자유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요제프 2세의 이름을 빌려 "프란츠 요제프 1세"로 즉위했다.
요제프 2세는 즉위하여 여러 개혁을 단행했는데, 관용령으로 가톨릭을 누르고, 예민령·형벌령·폐지령 등을 발표하고, 1789년 세제개혁을 단행하여 영주의 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 그러나 1785년 네덜란드, 헝가리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교회정책은 성직자들로부터 반항을 받았으며, 외교면에서도 실패가 많았다.
5. 사망과 유산
1788년 11월, 요제프 2세는 건강이 악화된 채 빈으로 돌아왔다. 그의 장관 카우니츠는 그의 병실 방문을 거부했고 2년 동안 그를 만나지 않았다. 그의 형 레오폴트 2세는 피렌체에 머물렀다. 지치고 낙담한 요제프는 신하들이 그의 계획을 수행할 수 없거나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제프는 1790년 2월 20일에 사망했다. 그는 빈에 있는 황실 납골당 42번 무덤에 안장되었다. 그는 자신의 묘비명에 "여기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모든 노력에서 실패한 통치자의 무덤이 있다"(Hier liegt ein Fürst, der trotz der besten Meinung keiner seiner Pläne durchsetzen konnte|여기에는 최선을 다했지만 모든 노력에서 실패한 통치자의 무덤이 있다de)라고 적어달라고 요청했다.[21]
요제프의 뒤를 이어 그의 형 레오폴트 2세가 황제가 되었다. 요제프 2세에 대한 대중적 기억은 다양하다. 사후 그의 영토 전역에 중앙 정부가 건설한 많은 기념비가 세워졌다.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은 1918년 독립하면서 이 기념비들을 철거했다. 체코인들은 요제프 2세에게 교육 개혁, 종교 관용, 검열 완화를 인정했지만, 체코 문화의 쇠퇴를 초래했다고 비난받는 그의 중앙 집권화 및 독일화 정책을 비난했다.[26]
부다페스트의 요제프바로시 구역은 1777년 황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현재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1777년 직접 프랑스를 방문하여 여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의 남편 루이 16세와 회담하고, 부부 사이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그 이듬해 마리는 처음으로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군주로서 많은 개혁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비교하여 요제프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 쉽다. 존경했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에게도 "첫걸음보다 두 번째 걸음을 먼저 내딛는다"고 비꼬였으며,[29] 요제프 자신이 선택한 묘비명은 "선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잠들다"라는 풍자적인 것이다. 그러나 요제프가 제시한 개혁 이념은 이른바 "요제프주의 사상"으로서, 그 후 오스트리아의 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후세, 1848년 혁명 중에 즉위한 프란츠 대공은 자유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요제프 2세의 이름을 빌려 "프란츠 요제프 1세"로 즉위했다.
6. 평가
데릭 비얼스는 요제프 2세를 예카테리나 2세(러시아 제국)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계몽주의 3대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22]
요제피니즘의 유산은 오스트리아 계몽주의를 통해 계속되었다. 비얼스는 요제프 2세의 계몽 사상이 "가짜 콘스탄티노플 편지" 작성자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편지들은 오랫동안 요제프 2세의 글로 여겨졌으나, 수세기 동안 황제에 대한 기억을 왜곡했다.[23] 이러한 전설적인 인용문들은 요제프 2세를 볼테르나 디드로 같은 철학자처럼 보이게 하여, 실제보다 더 급진적인 인물로 과장했다.
1849년 헝가리 독립 선언은 요제프 2세가 정식으로 즉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헝가리 국왕이 아니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모든 행위는 무효라고 선언했다.[24]
1888년 헝가리 역사가 헨릭 마르찰리는 요제프에 대한 3권짜리 연구를 출판했는데, 이는 그의 통치에 대한 최초의 현대 학술 연구이자 기록 보관소를 체계적으로 활용한 첫 연구였다. 마르찰리는 요제프를 자유주의 영웅으로 묘사했다. 러시아 학자 파벨 파블로비치 미트로파노프는 1907년에 전기를 출판, 1910년 독일어로 번역되어 한 세기 동안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미트로파노프는 요제프가 인기 있는 황제가 아니었고 그의 자유주의는 신화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요제프가 계몽주의가 아닌 권력 정치에 영감을 받았으며, 어머니보다 더 폭군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독단과 성급함이 그의 실패 이유였다고 분석했다.
P. G. M. 딕슨은 요제프 2세가 귀족의 특권, 자유, 편견을 짓밟아 많은 적을 만들었고, 결국 그들이 승리했다고 지적했다. 요제프의 헝가리 개혁 시도는 잘 방어된 봉건적 자유 앞에서 절대주의의 약점을 보여준다.[25] 그의 개혁은 계몽된 절대주의, 자연법, 중상주의, 생리학의 영향을 받은 포괄적인 프로그램이었다. 이질적인 전통 구조를 대체할 통일된 법적 체계를 수립하려는 목표로,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따라 국가의 중앙 입법 권한 개념을 기반으로 했다. 요제프의 즉위는 마리아 테레지아 치하의 이전 개혁과 단절을 보였지만, 요제피니즘 시대의 끝에는 그러한 단절이 없었다. 요제프 2세의 개혁은 레오폴트와 그 후계자들에 의해 계속되었고, 1811년 알게마이네 비어거리체 게제츠부흐에서 "오스트리아" 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는 20세기까지 이어지는 후속 개혁의 기반을 제공했다.
미국 학자 솔 K. 파도버는 "혁명적인 황제: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1934)에서 요제프의 급진주의를 칭찬하며, "봉건적 특권에 대한 전쟁"이 그를 "인류의 해방자"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요제프의 실패는 성급함, 재치 부족, 불필요한 군사 모험 때문이지만, 황제가 모든 계몽 군주 중 가장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파도버는 뉴딜 민주당원을 묘사했지만, 1930년대 나치 역사가들은 요제프를 아돌프 히틀러의 전조로 만들었다.
1960년대, 미국인 폴 버나드는 요제프에 대한 독일 민족주의적, 급진적, 반교회적 이미지를 거부하고 장기적인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는 요제프의 개혁이 당시 필요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경제적 후진성과 불행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많은 실패를 했다. 영국 역사가 팀 블래닝은 정책의 모순이 실패를 초래했다고 주장했다. 요제프는 소규모 소작농 소유를 장려하여 대규모 토지 소유만이 감당할 수 있는 경제 현대화를 지연시켰다. 프랑스 역사가 장 베랑제는 많은 좌절에도 불구하고 요제프의 통치가 "오스트리아 군주국의 현대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단계를 나타낸다"고 결론지었다. 실패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빨리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데릭 비얼스의 연구는 30년 이상 많은 기록 보관소 조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비얼스는 요제프의 성격(임의적인 행동, 친절함,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을 살펴본다. 요제프가 모차르트의 음악을 진정으로 감사했고 그의 오페라를 존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얼스는 요제프의 외교 정책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며, 요제프가 헌법을 넘어서고 조언을 거부하는 전제군주였지만, 권력 남용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요제프 2세는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한 "음악의 왕"으로 알려졌으며, 오스트리아 고급 문화를 게르만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 《후궁탈출》 작곡을 의뢰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요제프 2세 황제 서거를 위한 칸타타》를 의뢰받았지만, 기술적 어려움으로 공연되지 않았다.
요제프 2세는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와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한다. 영화에서 제프리 존스가 연기한 그는 선의를 가졌지만 어리숙한 군주로, 제한적이지만 열정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고,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쉽게 조종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셰퍼는 희곡이 허구이며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아니라고 밝혔다. 요제프 2세는 2006년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대니 휴스턴이 연기했다.
요제프 2세는 비엔나 방어용 글라시스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비엔나 역사 지구를 방어하는 리니엔발은 약 500m 너비의 해자와 글라시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방어 목적으로 식물과 건물이 없었다. 요제프 2세 치세에 해자는 매립되었고, 글라시스에 마차길과 산책로가 건설되었으며, 관상수, 등불, 벤치가 설치되었다. 이 녹지 공간은 19세기 후반 링슈트라세와 관련 건물들이 건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다.[27]
1777년 프랑스를 방문하여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와 남편 루이 16세와 회담하고 부부 사이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며, 이듬해 마리는 첫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군주로서 많은 개혁이 실패하여,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비교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 쉽다. 존경했던 프리드리히 2세에게 "첫걸음보다 두 번째 걸음을 먼저 내딛는다"고 비꼬였으며,[29] 요제프 자신이 선택한 묘비명은 "선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잠들다"라는 풍자적인 것이다. 그러나 요제프가 제시한 개혁 이념은 "요제프주의 사상"으로서 오스트리아 개혁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1848년 혁명 중 즉위한 프란츠 대공은 자유주의자들을 달래기 위해 요제프 2세의 이름을 빌려 "프란츠 요제프 1세"로 즉위했다.
7. 가족 관계
요제프 2세는 2번 결혼했으나,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첫 번째 아내는 루이 15세의 외손녀인 마리아 이사벨라이고, 두 번째 아내는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이다.
관계 | 이름 | 비고 |
---|---|---|
부왕 | 프란츠 1세 | |
모후 | 마리아 테레지아 | |
누나 | 마리아 엘리자베트 | |
누나 | 마리아 안나 | |
누나 | 마리아 카롤리나 | |
여동생 | 마리아 크리스티나 | |
여동생 | 마리아 엘리자베트 | |
남동생 | 카를 요제프 | |
여동생 | 마리아 아말리아 | 파르마 공작 부인 |
남동생 | 레오폴트 2세 | |
여동생 | 마리아 카롤리나 | |
여동생 |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레 | |
여동생 | 마리아 요제파 | |
여동생 | 마리아 카롤리나 | |
여동생 | 마리 앙투아네트 | |
남동생 | 페르디난트 | |
여동생 | 마리 앙투아네트 | |
남동생 | 막시밀리안 프란츠 | |
첫 번째 아내 | 마리아 이사벨라 | 1760년 결혼, 1763년 사망 |
장녀 | 마리아 테레지아 | 1762년 출생, 1770년 사망 |
차녀 | 마리아 크리스티네 | 1763년 출생 직후 사망 |
두 번째 아내 |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 | 1765년 결혼, 1767년 사망 |
요제프 2세는 1760년 파르마의 이사벨라와 결혼하여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관계를 강화했다.[47] 이사벨라의 어머니는 프랑스 루이 15세의 장녀였고, 아버지는 파르마 공작 필립이었다. 요제프 2세는 이사벨라를 사랑했지만, 이사벨라는 임신과 조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1763년 이사벨라는 천연두로 사망했고, 요제프 2세는 큰 충격을 받았다.[48]
정치적인 이유로 1765년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와 재혼했지만, 이 결혼은 2년 만에 불행하게 끝났다.[49] 요제프 2세는 마리아 요제파에게 냉담했고, 1767년 그녀가 천연두로 사망했을 때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49]
1770년, 요제프 2세의 유일한 자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흉막염으로 사망하면서 그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50]
8. 기타
예술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안토니오 살리에리 등의 여러 작곡가를 후원하였다. 많은 계몽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요제프 2세는 예술을 사랑하고 후원했으며, 그러한 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음악의 왕"으로 알려졌고, 오스트리아의 고급 문화를 보다 게르만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 《후궁탈출》의 작곡을 의뢰했다. 젊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그를 위해 《요제프 2세 황제 서거를 위한 칸타타》를 작곡하라는 의뢰를 받았지만, 기술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공연되지 않았다.[27]
요제프 2세는 피터 셰퍼의 희곡 《아마데우스》와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아마데우스》에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영화판에서 그는 제프리 존스가 연기했는데, 선의를 가졌지만 다소 어리숙한 군주로 묘사되며, 제한적이지만 열정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고,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쉽게 조종당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셰퍼는 자신의 희곡이 여러 면에서 허구이며 역사적 사실을 묘사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요제프 2세는 2006년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대니 휴스턴이 연기했다.[27]
요제프 2세는 또한 비엔나의 방어용 글라시스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비엔나 역사 지구를 방어하는 리니엔발은 약 500m 너비의 해자와 글라시스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방어 목적으로 식물과 건물이 없도록 유지되었다. 요제프 2세 치세에 해자는 매립되었고, 글라시스를 통과하는 마차길과 산책로가 건설되었으며, 그 지역에는 관상수가 심어지고 등불과 벤치가 설치되었다. 이 녹지 공간은 19세기 후반 링슈트라세와 관련 건물들이 건설될 때까지 지속되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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