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충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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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충설은 모세오경의 저작 시기를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보는 성서 비평 이론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을 토대로 문서설의 연대보다 늦게 잡으며, 엘로힘 문서(E)의 존재를 부정하고, 신명기 문서(D)를 가장 오래된 문서로, 야훼 문서(J)와 제사장 문서(P)를 후대의 문서로 배치한다. 또한 야훼 문서(J)와 제사장 문서(P)가 신명기 문서(D)에 종속된다고 주장하며, 문서설과 비교하여 편집자의 역할을 축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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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로힘 문서는 기원전 8세기경 북이스라엘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며 하느님의 이름을 '엘로힘'으로 사용하고 아브라함 시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하여 모세의 예언자적 역할을 강조하는 오경의 자료 중 하나이다. - 문서설 - 율리우스 벨하우젠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성서학자로, 토라의 기원에 대한 비평적 연구로 유명하며 문서 가설을 확립하여 후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성서학 - 나그함마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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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적 배경
문서설 지지자들이 모세 오경의 연대를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 사이로 비정하였다면, 보충설 지지자들은 좀 더 이후인 7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비정하고 있다.[18] 이렇게 연대를 늦춘 가장 주요한 이유는 초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에 따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성경에만 의존한 추정이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활동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18]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성경에 이름이 등장하는 모든 장소들에서 발굴작업을 했는데, 훨씬 후인 7세기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19] 고고학적 증거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7세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뚜렷한 활동양상이 없다면, 모세오경의 수립은 기원전 7세기 이후로 비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19]
고고학적 발견들은 현대 문서설 지지자들의 주장보다 보충설 지지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문서 기록자들이 원래 모세 오경의 저술 시기를 기원전 10세기에서 6세기로 보았지만, 보충설은 모세 오경의 저술 시기를 기원전 7세기에서 5세기로 늦게 잡는다. 이러한 재평가의 주요 요인은 초기 이스라엘인들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서 처음 활동한 시기를 여호수아의 정복 시기인 기원전 13세기로 추정한다.
2. 1.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재평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초기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변화하면서, 모세 오경의 저작 연대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도전을 받게 되었다. 문서설 지지자들이 모세오경의 연대를 기원전 10세기에서 7세기 사이로 비정하였다면, 보충설 지지자들은 좀 더 이후인 7세기에서 5세기 사이로 비정하고 있다.[18]이스라엘 민족이 기원전 13세기에 가나안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성경에만 의존한 추정이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서 활동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18] 실제로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성경에 이름이 등장하는 모든 장소들에서 발굴작업을 했는데, 훨씬 후인 7세기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19]
고고학적 증거들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7세기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뚜렷한 활동양상이 없다면, 모세오경의 수립은 기원전 7세기 이후로 비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주장이다.[19]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들은 현대 문서설 지지자들의 주장보다 보충설 지지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2. 2. 문서설의 등장과 한계
2. 3. 보충설의 등장과 발전
3. 보충설의 주요 내용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문서설의 주요 지지자였으며, 모세오경이 편집자들에 의해 결합된 4개의 독립적이고 완전한 이야기의 혼합물이라고 제안했다.[6] 반면, 반 세터스가 개략적으로 설명한 보충 가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측면에서 문서 가설과 다르다.
; 엘로힘 문서(E)의 존재 부정
보충설은 문서설에서 독립적인 문서로 간주하는 엘로힘 문서(E)의 존재를 부정한다. 대신 구전이나 파피루스 형태로 전해져 오던 기록들의 내용이 야훼 문서(J)로 흡수되었다고 주장한다. J 문서가 다수의 초기 전승들을 수집한 결과물이지, 문서설 지지자들의 주장처럼 엘로힘 문서와 여호와 문서의 여러 명의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두 개의 독립적인 문서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충설은 J 문서와 E 문서가 기원전 6세기에 형성된 하나의 단일 문서(J 또는 JE문서)라고 주장한다.
; 문서들의 연대기적 재배치
보충설은 모세오경 문서들의 연대순 배열을 문서설과는 다르게 제시한다. 보충설은 신명기 문서(D)를 가장 오래된 문서로 보며, 야훼 문서(J)와 제사장 문서(P)를 후대의 문서로 본다.[21]
마르틴 노트를 비롯한 초기 모세오경 학자들은 신명기가 기원전 6세기의 저자가 바빌론 유수 이전의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8년 프랭크 무어 크로스는 신명기가 실제로는 요시아의 개혁을 지지하기 위해 기원전 7세기경에 쓰여진 원 신명기 문서(Dtr1)를, 노트의 주장처럼 기원전 6세기의 저자가 개정하며 바빌론 유수가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주제를 포함시켰다고 주장하는 신명기 이중 편집(dual-redactor) 이론을 제시했다.[22][8] 이 이중 편집 이론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이며, 반 세터스 역시 이 이론에 동조한다.[23][9]
보충설은 야훼 문서(J)의 저작 시기를 문서설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 즉 유수기로 본다. 이는 1970년대에 수행된 연구들에 기반하는데, 특히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는 1976년 논문에서 야훼 문서(J)가 기원전 8-7세기 경의 종교적 저작물들에 영향을 받아 쓰여진 문서임을 논증하였다.[24][10] 반 세터스는 야훼 문서(J)가 "일부는 문학적 형태로, 나머지는 민간 설화의 형태로 전해져오던 파편들"을 사용해 신명기 문서(D)위에 신학적 창조 이야기를 확장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5][11]
반 세터스는 제사장 문서(P)가 야훼 문서(J)로부터 독립적인 문서가 아니라, 야훼 문서(J)에 종속적인 문서였음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J 문서가 유수기의 문서라면 P 문서는 기원전 5세기경, 즉 유수 이후인 제 2 성전기에 쓰여진 것이어야만 한다.
정리하자면, 보충설은 신명기 문서(D), 야훼 문서(J), 제사장 문서(P) 순서(DJP)로, 문서설은 야훼 문서(J), 엘로힘 문서(E), 신명기 문서(D), 제사장 문서(P) 순서(JEDP)로 배치하여 두 이론은 연대순에서 차이를 보인다. 보충 가설은 신명기 편집자(D)가 원래의 가장 초기의 오경 저자이며, 기원전 7세기 말에 기록되었고, 야훼 문헌(J)은 포로기(기원전 540년경)에, 제사장 문헌(P)은 포로기 이후(기원전 40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7]
; 야훼 문서(J)와 제사장 문서(P)의 종속성
보충설은 야훼 문서(J)와 제사장 문서(P)를 독립적인 문서가 아닌, 신명기 문서(D)에 종속적인 문서로 본다.[26][11] 신명기 문서만이 독립적으로 형성된 문서이고, 야훼 문서는 신명기 문서에 "고해성사식 교정"을 통해 바빌론 유수가 오게 된 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문서라고 주장한다.[27][12]
보충설은 제사장 문서(P) 역시 종속적인 문서라고 주장하는데, P 문서가 "더 큰 여호와 문서(J)의 맥락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며 제사장 문서의 저자들이 J 문서의 교정자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8][13] 즉, 제사장 문서(P)가 야훼 문서(J)를 보완하고 수정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충설은 교정자의 존재 없이도 모세오경의 통일성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처음 하나 이후로 독립적인 문서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교정자를 필요가 사라진다. 현재의 문서설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다수의 교정자에 의한 정교한 시스템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28][13]
3. 1. 엘로힘 문서(E)의 존재 부정
보충설은 문서설에서 독립적인 문서로 간주하는 엘로힘 문서(E)의 존재를 부정한다. 대신 구전이나 파피루스 형태로 전해져 오던 기록들의 내용이 야훼 문서(J)로 흡수되었다고 주장한다. J 문서가 다수의 초기 전승들을 수집한 결과물이지, 문서설 지지자들의 주장처럼 엘로힘 문서와 여호와 문서의 여러 명의 저자들이 직접 기록한 두 개의 독립적인 문서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충설은 J 문서와 E 문서가 기원전 6세기에 형성된 하나의 단일 문서(J 또는 JE문서)라고 주장한다.3. 2. 문서들의 연대기적 재배치
보충설은 모세오경 문서들의 연대순 배열을 문서설과는 다르게 제시한다. 보충설은 신명기 문서(D)를 가장 오래된 문서로 보며, 야훼 문서(J)와 제사장 문서(P)를 후대의 문서로 본다.[21]마르틴 노트를 비롯한 초기 모세오경 학자들은 신명기가 기원전 6세기의 저자가 바빌론 유수 이전의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8년 프랭크 무어 크로스는 신명기가 실제로는 요시아의 개혁을 지지하기 위해 기원전 7세기경에 쓰여진 원 신명기 문서(Dtr1)를, 노트의 주장처럼 기원전 6세기의 저자가 개정하며 바빌론 유수가 죄에 대한 심판이라는 주제를 포함시켰다고 주장하는 신명기 이중 편집(dual-redactor) 이론을 제시했다.[22][8] 이 이중 편집 이론은 현재 학계에서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이며, 반 세터스 역시 이 이론에 동조한다.[23][9]
보충설은 야훼 문서(J)의 저작 시기를 문서설보다 늦은 기원전 6세기, 즉 유수기로 본다. 이는 1970년대에 수행된 연구들에 기반하는데, 특히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는 1976년 논문에서 야훼 문서(J)가 기원전 8-7세기 경의 종교적 저작물들에 영향을 받아 쓰여진 문서임을 논증하였다.[24][10] 반 세터스는 야훼 문서(J)가 "일부는 문학적 형태로, 나머지는 민간 설화의 형태로 전해져오던 파편들"을 사용해 신명기 문서(D)위에 신학적 창조 이야기를 확장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25][11]
반 세터스는 제사장 문서(P)가 야훼 문서(J)로부터 독립적인 문서가 아니라, 야훼 문서(J)에 종속적인 문서였음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J 문서가 유수기의 문서라면 P 문서는 기원전 5세기경, 즉 유수 이후인 제 2 성전기에 쓰여진 것이어야만 한다.
정리하자면, 보충설은 신명기 문서(D), 야훼 문서(J), 제사장 문서(P) 순서(DJP)로, 문서설은 야훼 문서(J), 엘로힘 문서(E), 신명기 문서(D), 제사장 문서(P) 순서(JEDP)로 배치하여 두 이론은 연대순에서 차이를 보인다. 보충 가설은 신명기 편집자(D)가 원래의 가장 초기의 오경 저자이며, 기원전 7세기 말에 기록되었고, 야훼 문헌(J)은 포로기(기원전 540년경)에, 제사장 문헌(P)은 포로기 이후(기원전 40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7]
3. 3. 야훼 문서(J)와 제사장 문서(P)의 종속성
보충설은 야훼 문서(J)와 제사장 문서(P)를 독립적인 문서가 아닌, 신명기 문서(D)에 종속적인 문서로 본다.[26][11] 신명기 문서만이 독립적으로 형성된 문서이고, 야훼 문서는 신명기 문서에 "고해성사식 교정"을 통해 바빌론 유수가 오게 된 신학적 배경을 설명하는 문서라고 주장한다.[27][12]보충설은 제사장 문서(P) 역시 종속적인 문서라고 주장하는데, P 문서가 "더 큰 여호와 문서(J)의 맥락이 없이는 의미가 없다"며 제사장 문서의 저자들이 J 문서의 교정자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8][13] 즉, 제사장 문서(P)가 야훼 문서(J)를 보완하고 수정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충설은 교정자의 존재 없이도 모세오경의 통일성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처음 하나 이후로 독립적인 문서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교정자를 필요가 사라진다. 현재의 문서설 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다수의 교정자에 의한 정교한 시스템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28][13]
4. 문서설과의 차이점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모세오경이 네 개의 독립적이고 온전한 이야기들이 편집자에 의해 융합된 것이라는 문서설을 주장했다.[20] 반면 문서설은 반 세터즈가 정리한 바와 같이, 크게 다음의 세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문서 가설의 주요 지지자였으며, 모세 오경이 편집자들에 의해 결합된 4개의 독립적이고 완전한 이야기의 혼합물이라고 제안했다.[6] 반면, 반 세터스가 개략적으로 설명한 보충 가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측면에서 문서 가설과 다르다.
4. 1. 독립적인 문서의 수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모세오경이 네 개의 독립적이고 온전한 이야기들이 편집자에 의해 융합된 것이라는 문서설을 주장했다.[20] 반면 보충설은 이와 같이, 크게 다음의 세가지 측면에서 차이가 있다.4. 2. 문서들의 연대순
율리우스 벨하우젠으로 대표되는 문서 가설은 모세오경이 네 개의 독립적이고 완전한 이야기들이 편집자에 의해 융합된 것이라고 주장한다.[20] 반면 보충 가설은 문서설과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차이를 보인다.보충 가설은 신명기 편집자(D)가 원래의 가장 초기의 오경 저자이며, 기원전 7세기 말에 기록되었고, 야훼 문헌(J)은 포로기(기원전 540년경)에, 제사장 문헌(P)은 포로기 이후(기원전 40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7]
마르틴 노트를 비롯한 초기 오경 학자들은 신명기 편집자(D)가 바빌론 유수 이전의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6세기 작가라고 주장했다. 1968년 프랭크 무어 크로스는 신명기 편집자(D)가 실제로는 "이중 편집자"에서 유래했으며, 원래의 신명기 편집자(Dtr1)는 요시야의 개혁을 지지하는 7세기 작가이고, 노트의 6세기 후반 신명기 편집자(Dtr2)가 이전 작품을 수정하여 죄에 대한 벌이라는 주제를 부여하여 바빌론 유수를 설명했다고 제안했다.[8] 이 "이중 편집자" 관점은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하게 받아들여지는 견해일 가능성이 높다. 반 세터스는 7세기 개혁과 6세기 유수에 대한 강조가 모두 "신명기 ... 이전의 핵심 내용에 이후의 확장이 더해진 것"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며 이 견해를 지지했다.[9]
문서 가설이 야훼 문헌(J)이 기원전 10세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반면, 보충 가설은 이를 6세기, 즉 포로기 시대로 훨씬 늦게 본다. 한스 하인리히 슈미트의 1976년 연구는 야훼 문헌(J)이 기원전 8세기와 7세기의 초기 종교 저술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주어, J를 10세기의 작품으로 평가한 원래의 평가를 반박했다.[10] 반 세터스는 야훼 문헌(J)이 "문학적 형태의 단편, 대중적인 모티프와 이야기"를 사용하여 신학적 창조 이야기를 만들었으며, 신명기 편집자의 기존 작품을 확장했다고 주장한다.[11] 그는 포로기 이후 시대에 신명기 편집자(D)와 야훼 문헌(J)에 의해 만들어진 확립된 신학적 작품(DJ)이 있었다고 이론화한다.
반 세터스는 제사장 문헌(P)이 야훼 문헌(J)과 독립적이지 않고 실제로 이에 크게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J가 포로기에 기인한다면, P는 포로기 이후, 즉 제2 성전 시대, 아마도 5세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대기 재평가는 신명기 편집자를 최초의 저자(DJP)로 보는 반면, 문서 가설은 신명기 편집자를 후기 저자(JEDP)로 본다.
4. 3. 편집자의 역할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모세오경이 네 개의 독립적이고 온전한 이야기들이 편집자에 의해 융합된 것이라고 주장했다.[20] 반면 보충설에서는 편집자의 역할이 축소되거나 불필요하다고 본다. 보충설은 후기 자료인 J와 P를 독립적인 문서로 보지 않고 이전의 자료에 직접 추가된 것으로 본다.[11] [신명기 학자]만이 유일하게 독립적인 자료이며, [야훼] (J)는 [바빌론 유수]에 대한 신명기적 설명에 대한 응답이자 신학적 교정으로서의 "고백적 재구성"이라고 제안한다.[12] 또한 [제사장 자료] (P) 역시 독립적이지 않다고 보며, 많은 P 텍스트가 "더 큰 J의 맥락 없이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제사장 저자를 J의 편집자로 본다.[13] 이러한 이유로, 보충설에서는 "첫 번째 자료 이후에는 별도의 자료가 없으므로 편집자가 필요하지 않다. 현재 문서설 학자들이 사용하는 정교한 다중 편집자 시스템은 불필요하다"고 본다.[13]5. 한국 개신교계의 반응과 논쟁
5. 1. 보수적 관점
5. 2. 진보적 관점
5. 3. 사회적 영향
6. 결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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