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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스와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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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볼레스와프 4세는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의 아들로, 1146년 이복 형 블라디슬라프 2세를 추방하고 폴란드 대공이 되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간섭으로 실롱스크를 조카에게 반환하고, 프로이센 정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이 있었고, 교회에 많은 기부를 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두 번 결혼하여 세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아들 레셰크가 마조비아 공작을, 미에슈코 3세가 크라쿠프와 그니에즈노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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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레스와프 4세
기본 정보
볼레스와프 4세 곱슬머리 공
볼레스와프 4세 곱슬머리 공
이름볼레스와프 켕지에자비
로마자 표기Bolesław Kędzierzawy
생년1122년경
사망일1173년 1월 5일 (51세)
통치
작위폴란드 대공
통치 기간1146년–1173년
이전 통치자브와디스와프 2세 망명공
다음 통치자미에슈코 3세 늙은 공
가족
가문피아스트 왕조
아버지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
어머니살로메아 폰 베르크
배우자노브고로드의 비아체슬라바
마리아
자녀마조비아 공 레셰크

2. 생애

볼레스와프 4세는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베르크의 살로메아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131년 이전에 형 레셰크와 카지미에슈가 사망하면서 그는 부모의 맏아들이 되었다. 1138년 아버지의 사망 당시 13세였으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마조비아 공국과 동부 쿠야비로 구성된 영토를 상속받았다.[1]

통치 초기에는 어머니와 보이보드 브셰보르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는데, 이들은 그의 이복형인 대공 블라디슬라프 2세가 국가 통일을 회복하려는 시도에 맞섰다.[1]

1141년, 블라디슬라프 2세의 동의 없이 젱치차에서 아들들과 회동을 가진 살로메아는 막내딸 아그네스를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 2세와 약혼시켜 동맹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대공 키예프의 브세볼로트 2세가 블라디슬라프 2세와 동맹을 맺으면서 이 시도는 실패했다. 1142년에서 1143년 사이에는 키예프 루스에 대사로 파견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1]

1144년 살로메아 사후, 젱치차 주는 블라디슬라프 2세에게 반환되어야 했으나, 헨리크와 카지미에시 2세를 위한 영토를 남기려는 생각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1145년 내전이 발발했다. 초기에는 패배했으나, 필리차 강 전투에서 반격했다. 하지만 키예프 군대의 참전으로 상황이 역전되어 볼레스와프는 물러나야 했다.[1]

이후 블라디슬라프는 의붓형제들을 제거하려 했고, 이에 젊은 공작들은 피오트르 브와스토비치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는 브와스토비치를 키예프로 추방했고, 이는 그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1146년, 브와스토비치의 운명으로 인해 브와디스와프 2세에 대한 반란이 거세게 일어났고, 결국 브와디스와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망갔다.

볼레스와프 4세는 실레시아 공국과 크라쿠프를 차지하고 대공이 되었다. 이후 브와디스와프 2세는 폴란드로의 군사 원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볼레스와프 4세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교황 에우제니오 3세와도 관계를 맺었으나, 브와디스와프의 아내 아그네스의 음모로 폴란드에 금령이 선포되기도 했다.[1]

1157년, 프리드리히 1세가 폴란드로 원정을 오면서 볼레스와프는 제국의 봉신으로 선포되었다. 1163년에는 브와디스와프의 아들들이 실레지아의 유산을 되찾았다.[1]

볼레스와프 4세는 프러시아인 정복을 위한 프러시아 십자군을 시작했으나 1166년에 실패했다. 이후 카지미에시 2세의 반란이 일어났고, 볼레스와프는 반란군의 요구를 수용하여 통치를 유지했다.[1]

그는 교회에 많은 기부를 한 것으로 유명하며, 1151년경 체르비인스크에 수도원을 설립했다. 1137년 비아체슬라바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으며, 첫 아내 사후 마리아와 결혼했다.[2]

볼레스와프 4세와 비아체슬라바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볼레스와프1156년1172년
1160년경1178년 이후슈므스크와 도로히친의 공작 바실코 야로폴코비치와 결혼
레셰크1162년경1186년마조비아 공작


2. 1. 초기 생애와 통치

볼레스와프 4세는 폴란드 공작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베르크의 살로메아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131년 이전에 형 레셰크와 카지미에슈가 사망하면서 그는 부모의 맏아들이 되었다. 1138년 아버지 볼레스와프 3세 크시보우스티가 사망했을 당시 볼레스와프 4세는 13세였으며,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물려받은 영토인 마조비아 공국 ( 마조비아와 동부 쿠야비로 구성)을 통치할 법적 나이가 되었다.[1]

통치 초기에 젊은 볼레스와프 4세는 어머니와 보이보드 브셰보르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는데, 이들은 그의 이복형인 대공 블라디슬라프 2세의 야심을 두려워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는 국가의 통일을 회복하려 했고, 하위 공작들을 폐위시키려 했다.[1]

1138년 부친이 사망하자, 실롱스크 공이자 이복 형인 브와디스와프 2세가 폴란드 대공이 되었다. 젊은 볼레스와프 4세는 마조비아와 쿠야비를 계승하여 마조비아 공이 되었다.[1]

2. 2. 형제간의 투쟁

1141년, 과부 공작부인 살로메아는 대공 블라디슬라프 2세의 동의 없이 젱치차에서 아들들과 회동을 조직했다. 이 자리에서 그녀는 막내딸 아그네스를 키예프의 므스티슬라프 2세와 약혼시켜 동맹을 확보하고, 사망 시 아들들 간에 젱치차 영토를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는데, 대공 키예프의 브세볼로트 2세가 블라디슬라프 2세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 즈베니슬라바가 대공의 장남 볼레스와프 4세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1142년에서 1143년 사이에 볼레스와프 4세와 그의 형제들은 대공에 의해 키예프 루스에 대사로 파견되는 굴욕을 겪었다.[1]

1144년 살로메아가 사망하자, 볼레스와프 3세의 유언에 따라 젱치차 주는 대공 블라디슬라프 2세의 시니어 영지로 반환되어야 했다. 그러나 헨리크와 카지미에시 2세를 위해 이 영토를 남겨두려는 생각은 블라디슬라프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1]

1145년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초기에는 젊은 공작들이 패배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볼레스와프 4세와 그의 형제들은 필리차 강 전투에서 블라디슬라프의 군대를 재편성하며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곧 키예프 군대가 블라디슬라프의 동맹으로 참전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고, 볼레스와프는 결국 물러나 어머니의 영토에 대한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1]

젊은 공작들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블라디슬라프는 의붓 형제들을 제거하려는 최종 해결책을 모색했고, 이에 젊은 공작들은 대공의 강력한 보예보드 피오트르 브와스토비치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블라디슬라프는 브와스토비치를 실명시키고 벙어리로 만들어 키예프로 추방했고, 이는 오히려 그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브와스토비치는 키예프인들에게 블라디슬라프와의 동맹을 깨뜨리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1]

2. 3. 브와디스와프 2세 축출

1146년 초, 피오트르 브워스토비치의 운명으로 인해 브와디스와프 2세 정부에 대한 반란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마조비아를 정복하고(볼레스와프 4세가 도망치게 됨) 1146년 봄에 포즈난을 대폴란드에서 포위한 후에는 브와디스와프 2세의 최종 승리가 유력해 보였다. 그러나 브와디스와프 2세 자신의 영토에서의 반란과 그니에즈노 대주교가 그에게 가한 파문으로 인해, 고공은 예상치 못한 패배를 겪었다. 브와디스와프 2세와 그의 가족은 처음에 보헤미아로, 나중에는 독일로 국경을 넘어 신성 로마 제국으로 도망가 콘라트 3세 왕의 숙소를 제공받았다.

젊은 공작들은 폴란드 지역을 그들 사이에 재분배했다. 실레시아 공국과 크라쿠프의 수위 영지는 볼레스와프 4세가 차지했으며, 그는 또한 고공의 칭호를 받았다. 서부 대폴란드 공국은 그의 형제 미에슈코 3세가 유지했으며, 헨리크는 마침내 오랫동안 약속받았던 산도미에시 영토를 받았다. 막내 동생 카시미르 2세는 다시 영지를 받지 못했다.

2. 4. 외세의 개입

브와디스와프 2세는 그의 아내인 바벤베르크의 아그네스(콘라트 3세의 이복 여동생)의 음모 덕분에, 처남에게 폴란드로의 군사 원정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급하게 조직된 원정은 폐위된 대공의 이전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1146년 8월에 오데르강 근처 폴란드 국경에서 패배했다.[1]

그 후 몇 년 동안, 볼레스와프 4세는 그의 남동생들과 함께 브와디스와프의 동맹국인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위해 1148년에 젊은 공작들은 크루슈비차에서 회동을 열었고, 벤디쉬 십자군 과정에서 폴란드 국경에 도달한 독일 북부 변경백의 호전적인 변경백인 알브레히트 1세를 초대했다. 그곳에서 볼레스와프는 그의 여동생 폴란드의 유디트와 변경백의 아들 브란덴부르크의 오토 1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볼레스와프와 미에슈코는 또한 서슬라브족 루티치 부족에 대항하는 독일인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하여, 슈프레강 중부 지역에 대한 독일의 지배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피아스트 공작의 두 번째 중요한 동맹국은 베틴 가문의 변경백 마이센의 콘라트였다.[1]

처음에는 볼레스와프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와 같은 또 다른 반대 세력인 교황 에우제니오 3세 치하의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도 어려웠다. 1147년에 교황 특사 훔볼트는 볼레스와프를 새로운 대공이자 폴란드의 지배자로 인정했다. 그러나 1년 후, 브와디스와프의 아내 아그네스의 음모에 의해 선동되어, 새로운 교황 특사 가이가 전 대공의 복귀를 거부한 것과 관련하여 폴란드로 도착하여, 폴란드에 대한 금령을 선포했다. 젊은 공작들이 폴란드 교회 계층을 일관되게 지원한 덕분에, 이 처벌은 사실상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1]

1157년, 콘라트 왕의 조카인 프리드리히 1세가 1155년에 교황 하드리아노 4세에 의해 신성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의 숙모 아그네스(브와디스와프의 아내)의 지속적인 압력 덕분에, 폴란드로 새로운 원정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볼레스와프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이번 원정은 잘 조직되었고, 황제는 볼레스와프 4세가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볼레스와프가 수세기 동안 폴란드의 자연적인 방어선이었던 오데르강 중부 앞의 늪지대를 방어하지 않고, 실레지아의 그워구프와 비톰 오드르잔스키 요새를 방어하지 않는 등, 매우 안전을 중시하는 전술을 선택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황제군은 빠르게 진격하여 곧 포즈난을 포위했다.[1]

어려운 상황을 감안하여, 볼레스와프는 굴욕적인 협상을 받아들여야 했고, 1157년 8월 30일 크시슈코보에 있는 그의 진영에서 제국의 봉신으로 선포되었다. 볼레스와프는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 대가로 그는 바르바로사로부터 폴란드 영토에 대한 더 많은 지배권을 친절하게 받았다. 또한 그는 황제에게 엄청난 공물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바르바로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큰 실망 속에 폴란드 왕좌를 되찾지 못했다. 볼레스와프는 크리스마스마그데부르크에서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남동생 카지미에시 2세를 인질로 보냈다. 2년 후 브와디스와프는 망명지에서 사망했으며,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1]

1163년 이전에, 故 브와디스와프의 아들들인 곱슬머리의 볼레스와프 1세와 미에슈코 4세는 볼레스와프 4세와 맺은 합의를 고집하는 황제의 지원을 받아, 실레지아의 유산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들의 복귀는 대공으로서의 볼레스와프의 권력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독일과의 친교 덕분에, 실레지아 피아스트 가문의 장자 분파는 적어도 실레지아 영토(브로츠와프, 레그니차, 그워구프, 오폴레, 라치부시)를 문제없이 유지할 수 있었다.[1]

2. 5. 프루시 십자군 원정

볼레스와프 4세는 폴란드 북동부 국경 너머 발트해 연안에 정착한 이교도 프러시아인을 정복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이 초기 프러시아 십자군은 볼레스와프 4세의 마조비아 지역 여러 곳이 발트족에게 반복적으로 점령되면서 구상되었다. 대공은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고 교황과 황제의 협력을 압박했다. 초기 작전은 성공적이었지만, 이 지역을 정복하려는 시도는 1166년에 실패했다. 전투 중 대공의 동생인 산도미에르츠의 헨리크가 사망했다.[1]

2. 6. 카지미에시 2세의 반란

볼레스와프 3세 사후, 그의 유언과 달리 대공은 산도미에시를 시니어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는 볼레스와프 3세의 아들 중 유일하게 영토 상속 예정이었던 막내 동생 카지미에시 2세의 분노를 일으켰다.[1]

카지미에시는 형인 대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3세, 귀족 미에후프의 약사, 보예보드 피오트르 브워스토비치의 아들 스뱌토슬라프, 그니에즈노 대주교, 크라쿠프 대주교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거의 모든 소폴란드 귀족들도 그의 편에 섰다.[1] 1168년 2월 반란군은 옝제유프에 모여 미에슈코 3세를 새로운 대공으로 선포하고 카지미르에게 산도미에르를 공식 수여했다.[1] 그러나 볼레스와프는 반란군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여 통치를 유지했다.[1] 그는 헨리의 공작령을 비스리차는 카지미르에게, 산도미에르는 자신에게, 나머지는 미에슈코 3세에게 주는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1]

2. 7. 교회와의 관계

볼레스와프 4세는 교회에 많은 선물과 기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의 지원으로 풍요로워진 곳은 다음과 같다.

  • 브로츠와프 인근의 성 마리아와 성 카타리나 성당, 성 빈센트 성당
  • 트젬에슈노의 베네딕토회 수도원
  • 웽치차 인근의 에 있는 툼 콜레기아테 교회


1151년경에는 체르비인스크에 정규 참사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2. 8. 결혼과 자녀

볼레스와프 4세는 1137년에 비아체슬라바(1125년경 출생 – 1162년 3월 15일경 사망)와 결혼했다. 비아체슬라바는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의 브세볼로트 므스티슬라비치의 딸이었다. 이들 사이에는 세 자녀가 있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볼레스와프1156년1172년
1160년경1178년 이후1172/73년경 슈므스크와 도로히친의 공작 바실코 야로폴코비치와 결혼
레셰크1162년경1186년마조비아 공작



첫 번째 아내가 사망한 후, 볼레스와프 4세는 출신이 불분명한 마리아와 결혼했으나, 이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2]

참조

[1] 논문 Constructing memory: holy war in the Chronicle of the Poles by Bishop Vincentius of Cracow https://www.academia[...] 2014
[2] 간행물 O matce Lestka Bolesławica i początkach mennictwa mazowieckiego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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