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까지 서유럽 기독교 세력이 성지 탈환과 이교도 격퇴를 명분으로 감행한 일련의 종교 전쟁을 의미한다.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참전을 호소하면서 시작되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 셀주크 제국의 발흥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 탈환을 목표로 했으며, 제1차 십자군의 성공 이후 여러 차례의 원정이 이어졌다. 십자군은 동서 교류를 활발하게 하고 상업 발달을 가져왔지만, 동로마 제국의 쇠퇴와 이슬람 세계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3세기 말 아크레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는 멸망했지만, 이후에도 다양한 형태로 십자군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십자군은 서유럽 사회와 이슬람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종교적 극단주의와 폭력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독교화 - 콩키스타도르
콩키스타도르는 15세기부터 17세기에 아메리카 대륙 등을 정복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가, 군인, 정복자들을 지칭하며, 종교적 열정과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항해술과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활동했고,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기독교화 - 중세
중세는 유럽 역사에서 500년경부터 1500년경까지의 시기로, 서로마 제국 붕괴 후 게르만 민족 이동, 여러 국가의 등장, 십자군 원정, 흑사병, 백년 전쟁 등을 거치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변화하고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이다. - 예루살렘의 역사 - 성묘교회
성묘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 매장, 부활이 이루어진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의 기독교 성지이며, 여러 교파가 공동 관리하고 건축 양식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종교적·역사적 의미가 큰 건축물이다. - 예루살렘의 역사 - 시온
시온은 종교적, 문화적 맥락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히브리어 성경에서 예루살렘과 관련된 장소를 지칭하며, 유대교에서는 성전, 시온주의에서는 유대인 국가 건설을 지지하는 정치 운동을 의미한다. - 침략전쟁 - 쿠웨이트 침공
쿠웨이트 침공은 1990년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기습 침공하여 점령한 사건으로, 국제 사회의 규탄과 다국적군의 개입으로 걸프 전쟁이 발발하여 쿠웨이트가 해방되었다. - 침략전쟁 - 6.25 전쟁
6.25 전쟁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휴전 협정으로 종결되었으며, 한반도의 분단과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한 한국 전쟁을 의미한다.
십자군 | |
---|---|
지도 | |
명칭 | |
라틴어 | cruciata |
프랑스어 | croisade |
영어 | crusade |
아랍어 | الإفر (al'iifr) |
아랍어 (다른 표기) | الروم (al-Rūm) |
개요 | |
주요 주제 | 중세 후기의 종교 전쟁 |
정의 | 기독교의 팽창과 이슬람의 대응 |
주요 십자군 | |
레반트 | 제1회 십자군 1101년의 십자군 노르웨이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제2회 십자군 제3회 십자군 1197년의 십자군 제4회 십자군 제5회 십자군 제6회 십자군 바론 십자군 제7회 십자군 제8회 십자군 제9회 십자군 |
1291년 이후 | 스미르나 십자군 (1343–1351) 알렉산드리아 십자군 (1365) 사보이아 십자군 (1366) 마디아 십자군 (1390) 니코폴리스 전투 (1396) 바르나 십자군 (1443) 포르투갈의 오트란토 원정 (1481) |
북방 십자군 | 벤드 십자군 (1147) 스웨덴 칼마르 십자군 (1123) 제1회 스웨덴 십자군 (1150년) 제2회 스웨덴 십자군 (1249년) 제3회 스웨덴 십자군 (1293년) 리보니아 십자군 (1198–1290) 프로이센 십자군 (1217–1274) 얼음판 전투 (1241–1242) 리투아니아 십자군 (1283–1410) |
민중 십자군 | 민중 십자군 (1096) 소년 십자군 (1212) 양치기 십자군 (1251년) (1251) 빈민 십자군 (1309) 양치기 십자군 (1320년) (1320) |
반기독교/이단 십자군 | 보스니아 십자군 (1235–1241) 알비파 십자군 (1209–1229) 아라곤 십자군 (1284/5) 디스펜서 십자군 (1382/3) 후스 전쟁 (1419–1434) |
레콩키스타 (718년-1492년) | 바르바스트로 십자군 (1063) 발레아레스 제도 원정 (1113년–1115년) (1113-1115) 나바스데톨로사 전투 (1212) |
주요 전투 (레반트, 1096년-1303년) | |
민중 십자군 | 민중 십자군 |
제1회 십자군 | 제1회 십자군 |
제1회 십자군 이후 | 아르수프 포위전 (1099년) 멜리테네 전투 |
1101년의 십자군 | 1101년의 십자군 |
제1회 십자군 이후 (계속) | 람라 전투 (1101년) (제1차) 람라 전투 (1101년) (제2차) 트리폴리 포위전 하란 전투 람라 전투 (1105년) (제3차) 아르타프 전투 시돈 포위전 샤이자르 전투 (제1차) 알산나브라 전투 사르민 전투 살마다 전투 하브 전투 베네치아 십자군 (야파-티레) 이브나 전투 알레포 포위전 (1124년) 아자즈 전투 (1125년) 마르주알사파르 전투 (1126년) 바린 전투 샤이자르 포위전 에데사 포위전 (1144년) 에데사 포위전 (1146년) 보스라 전투 (1147년) |
제2회 십자군 | 제2회 십자군 |
제2회 십자군 이후 | 이나브 전투 아인탑 전투 아스칼론 포위전 훌라 호수 전투 알부카이아 전투 하림 전투 십자군의 파티마 왕조 침공 (제1차 빌베이스) 알바베인 전투 십자군의 파티마 왕조 침공 (제2차 빌베이스) 다미에타 포위전 (1169년) 몽기사르 전투 마르주아윤 전투 야곱의 여울 전투 십자군의 홍해 원정 벨부아르 성 전투 알풀레 전투 케라크 포위전 크레송 전투 하틴 전투 예루살렘 포위전 (1187년) 티레 포위전 (1187년) 사페드 포위전 (1187년) |
제3회 십자군 | 제3회 십자군 |
1197년의 십자군 | 1197년의 십자군 |
제5회 십자군 | 제5회 십자군 |
제6회 십자군 이후 | 예루살렘 공방전 (1244년) 라포르비 전투 |
제7회 십자군 | 제7회 십자군 |
레반트 십자군의 종말 | 아르수프 함락 카이사레아 함락 하이파 함락 (1265년) 사페드 포위전 (1266년) 안티오키아 포위전 (1268년) 제8회 십자군 크라크데슈발리에 함락 트리폴리 포위전 (1271년) 제9회 십자군 트리폴리 함락 (1289년) 아크레 함락 루아드 함락 |
2. 용어
우르바노 2세가 처음 십자군을 소집했을 당시에는 "십자군"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 당시에는 "여행"(iter|이테르la) 또는 "순례"(peregrinatio|페레그리나티오la)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12세기에 "십자가를 지닌 자"(crucesignatus|크루케시그나투스la, signed with the cross영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 종교전쟁을 가리키는 특정한 용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129]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십자군"을 의미하는 영어 crusade|크루세이드영어는 croisade프랑스어 < croiséefro, crozadaoc, cruzadaes, crociatait < crociatala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십자가하다", "십자가되다", "십자가 표를 하다", "십자가를 취하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중세 영어에서는 13세기-15세기에 croiserie, 15-17세기에는 croisée라고 불렀으며, 1575년경 croisade가 처음 나타나 1760년경까지 주로 사용되었다.[130] 역사학자들이 1095년부터 시작된 기독교 종교전쟁을 "십자군"(crusade)이라고 부르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사건들을 하나의 단어로 묶는 것은 초기 십자군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129]
11세기 말, 셀주크 제국의 발흥과 동로마 제국의 쇠퇴는 십자군 전쟁의 주요 배경이었다.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 이후, 교황권 강화와 동방 교회와의 재통합을 꾀하던 교황의 의도도 십자군 전쟁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158]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 순례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성지 회복에 대한 열망이 높아졌다.[156]
당시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을 사라센인이라고 불렀다. "무슬림" 및 "이슬람"이라는 단어는 16세기 이전까지 유럽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139] "사라센인"은 원래 그리스-로마 시대에 아라비아 속주의 사막에 사는 비아랍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140] 시간이 지나면서 아랍 부족들도 사라센인에 포함되었고, 12세기에는 오늘날의 "무슬림"과 같은 의미로 중세 문헌에서 사용되었다.[141] 반면 무슬림들은 서유럽인들을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인"과 구별하여 "프랑크인" 또는 "라틴인"이라고 불렀다.[142][143] 알리 이븐 알아시르 같은 중세 무슬림 역사가들은 십자군을 "프랑크 전쟁"(Frankish Wars영어, حروب الفرنجة|후룹 알파랑가ar)이라고 불렀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서양의 "십자군"이라는 말을 그대로 가져와 "십자가 원정들"(campaigns of the cross영어, حملات صليبية|하말라트 살리비야ar)이라고 부른다.[144]
3. 십자군 전쟁의 배경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후, 아랍인들은 군사 정복을 통해 급속히 팽창하여 인도 아대륙 북서부,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남이탈리아, 이베리아반도까지 세력을 넓혔다. 637년 예루살렘 공방전으로 예루살렘은 비잔티움 제국에서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다.[145][146][147]
이슬람 지배 하에서도 유럽 기독교 세계와의 무역, 정치적 관계는 지속되었고, 천주교도들의 성지순례도 허용되었다. 무슬림 영토 내 기독교도들은 딤미 지위로 법적 보호를 받았으며, 종교 간 통혼도 드물지 않았다.[148]
그러나 튀르크족의 서진으로 상황이 변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족이 비잔틴 군대를 대패시킨 것이 변곡점으로 지목되지만, 이는 셀주크 제국의 아나톨리아 팽창 과정 중 하나일 뿐이었다.[149] 천주교도 순례자들과 상인들을 통해 전해진 소식에 따르면 시리아 지역 항구들과 예루살렘의 상황은 점차 각박해졌다.[150]
기독교도들은 우마이야 칼리파조에게 정복당했던 이베리아반도를 재정복하는 레콩키스타를 8세기부터 진행해 왔으며, 1085년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탈환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151] 1091년에는 로제 드 오트빌이 시칠리아 토후국을 무너뜨렸다.[152]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로 기독교 세계가 분열된 가운데, 그레고리우스 개혁 이후 교황령은 서임권 투쟁을 통해 권력을 증대시키려 했다.[154][155] 교황령은 종교적 선전선동을 통해 무슬림으로부터 팔레스타인 성지를 되찾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요구와 관심을 높였다. 십자군 종군은 죄를 씻을 수 있는 보속 형태로 여겨졌다.[156]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소규모 용병부대를 기대했지만, 같은 해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 소집을 설교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우르바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도움으로써 동서 교회를 재통합하고 자신이 그 수장이 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라 추측한다.[158]
클레르몽 공의회 직후 피에르 레르미트는 수천 명의 기독교도 빈민들을 이끌고 나타났는데,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 부른다.[159] 이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면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161] 군중 십자군은 라인란트 학살이라는 유럽사 최초의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력사태를 일으켰다.[162] 스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 등지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행위가 일어났다.[163] 이들은 키베토트 전투에서 튀르크족에게 대패하여 3천 명만 살아남았다.[164]
셀주크 제국이 소아시아를 점령하자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누스(재위 1081년-1118년)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 십자군 전쟁의 발단(1095년)이었다. 알렉시오스 1세가 요청한 것은 동로마 제국에 대한 용병 제공이었지, 십자군과 같은 독자적인 군대는 아니었다.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 클레르몽에서 열린 교회 회의(클레르몽 공의회)가 끝날 무렵, 모인 프랑스의 기사들에게 예루살렘 탈환 활동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프랑스인들에게 성지를 이슬람교도의 손에서 탈환하자고 호소하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이라는 성서에서 유래한 표현을 인용하여 군대 파병을 호소했다.[106]
4. 지중해 동해안 십자군
무함마드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한 후, 아랍인들은 7세기와 8세기에 걸쳐 급속히 팽창하여 인도 아대륙 북서부,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남이탈리아, 이베리아반도, 피레네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63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이 지역은 이슬람 세계로 넘어갔다.[145][146][147]
이후로도 아랍 세계와 유럽 기독교 세계는 어느 정도 관용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무역과 정치적 교류를 지속했다. 천주교도들의 성지순례가 허용되었고, 무슬림 영토 내 기독교도들은 딤미 지위를 통해 법적 보호를 받았다.[148] 그러나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이러한 평화로운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는 이러한 변화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겨진다.[149]
한편, 기독교도들은 레콩키스타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를 재정복하고 있었으며, 1085년 알폰소 6세가 톨레도를 탈환하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151] 1091년에는 로제 드 오트빌이 시칠리아 토후국을 무너뜨렸다.[152]
이러한 상황에서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나 기독교 세계가 분열되었고,[153] 서임권 투쟁이 계속되면서 교황령은 종교적 선동을 통해 무슬림으로부터 성지를 되찾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요구를 확산시켰다. 십자군 종군은 죄를 씻을 수 있는 보속의 형태로 여겨졌다.[156]
12세기 초, 교황들은 십자군 국가들을 돕기 위해 소규모 십자군을 파병했다. 풀크 5세 당주 백작의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콘라트 3세의 십자군, 성전기사단 창설 등이 주요 사건이었다.[181] 이마드 앗딘 장기가 1144년 에데사를 함락하자 제2차 십자군이 소집되었으나,[183][184][185]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86]
이후 살라딘이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31] 이에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었으나, 프리드리히 1세는 살레프 강에서 익사하고,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 공략에 실패했다.[207][209]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을 소집했으나,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는 등 본래 목적에서 벗어났다.[212] 1212년에는 어린이 십자군 사건이 일어났다.[216]
1217년 제5차 십자군이 소집되었으나 다미에타 함락 후 이집트 본토 공격에 실패했다.[217][218] 프리드리히 2세는 제6차 십자군에서 외교를 통해 예루살렘 일부를 회복했다.[220] 1239년 남작 십자군은 외교와 음모를 통해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를 이끌었다.[222]
1244년 화레즘 용병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자 루이 9세가 제7차 십자군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224] 1265년-1271년, 맘루크조 바이바르스가 십자군 국가들을 해안 전초기지로 몰아냈다.[228]
1270년 루이 9세의 제8차 십자군은 튀니스에서 실패하고, 에드워드 1세의 제9차 십자군도 휴전 후 종료되었다.[230]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는 완전히 멸망했다.[233]
4. 1. 제1차 십자군 (1096년-1099년)
1095년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기독교도들에게 이슬람교도에 대한 군사 행동을 촉구하며, 참가자들에게 사면(죄의 보상의 면제)을 부여한다고 선언했다. 이 호소에 응답한 기사들은 1096년에 예루살렘 원정군을 일으켰다.
클레르몽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유럽 각지의 제후와 기사들은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1096년에는, 프랑스의 설교자인 아미앵의 은둔자 피에르(피에르 엘레르미트)가 이끄는 4만 명의 민중과 하급 기사 군세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했는데, 이를 민중십자군이라고 한다. 민중십자군은 동쪽으로 이동하는 도중 여러 곳에서 유대인을 학살하고, 헝가리 왕국과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충돌을 반복하며 소아시아에 상륙했다. 그러나 통제력이 없고 군사력도 약했던 민중십자군은 룸 셀주크 왕조의 킬리치 아르슬란 1세에게 궤멸당했고, 많은 이들이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이들은 어떠한 군사적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붕괴되었다. 그러나 피에르를 비롯한 극소수는 살아남아 제1차 십자군에 다시 참여했다.
1096년 12월, 각지에서 출발한 제후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집결했다. 하지만 민중 십자군의 추태를 보고 있던 동로마 황제는 그들에게 신뢰를 두지 않고, 십자군에게 신하의 맹세와 구 제국 영토의 반환, 성지 주변 정복 시에는 신국가를 동로마의 종주권 하에 두도록 요구했다. 이를 받아들인 십자군은 니케아 공성전과 도뤼라이온 전투 등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고, 아나톨리아에서 시리아로 진군했다.
도중, 이슬람교도 지배하의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예루살렘을 목표로 했다. 이 과정에서 십자군에 의한 약탈, 학살, 강간이 있었다고 한다. 이슬람교도의 여러 영주들은 십자군에 대해 무방비 상태였으며, 연합하여 대응할 수도 없어 궤멸했다. 한편, 십자군 측도 분파와 내부 갈등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098년에는 브로뉴 백작 보두앵이 동쪽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있는 에데사로 분파하여 진군하여, 에데사 백국을 세웠다. 본대는 1097년부터 1098년에 걸쳐 시리아 북부의 대도시 안티오키아에서의 안티오키아 공성전에서 승리했지만, 주요 장군 중 한 명인 보에몽이 여기에 머물러 영주가 되려는 태도를 보이며, 보에몽 1세 (안티오키아 공)이 되었다. 남은 본대는 레몽 생질과 고드프루아 드 부용 등에 의해 이끌려 계속 남하하여, 1099년, 군세는 마침내 예루살렘 정복에 성공했다.
그 후,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 예루살렘의 왕이 되고, 레몽은 해안 지방의 트리폴리 백작이 되었다. 이렇게 시리아에서 팔레스타인에 걸친 지중해 동쪽 해안에 예루살렘 왕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이라는 4개의 십자군 국가가 건설되었다.[107]
1101년에는 이전의 성공에 고무되어 대규모의 성지 원정이 이루어졌다. 이 집단에는 여러 나라에서 모인 평민들과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전했던 영주와 병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부대로 나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거쳐 육로로 소아시아에 침입했으나, 이슬람 국가 연합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어 도주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노예가 되었고, 카이로를 우회하는 등의 방법으로 성지에 도착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4. 2. 12세기 십자군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소집을 설교한 이후, 12세기 초 교황들은 새로이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을 돕기 위해 동지중해 지역으로 소규모 십자군들을 계속 파병했다.[181] 1120년대의 주요 사건들로는 풀크 5세 당주 백작의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십자군, 성전기사단의 창설 등이 있다.[181]
1144년 모술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가 에데사를 함락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서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이 소집되었다.[183][184][185]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각기 프랑스와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군했지만, 다마스쿠스 공방전에서 패배하는 등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186] 제1차 십자군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십자군들은 애먼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라인란트, 쾰른,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을 일으켰다.[187][188]
한편,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기독교도 제후들이 계속 승리했다. 포르투갈왕 아폰수 1세가 리스본을, 러몸 버렁거 4세 데 바르셀로나 백작이 토르토사를 함락시켰다.[189][190] 북유럽에서는 색슨인들과 데인인들이 아직 고대신을 믿는 슬라브족 민족인 벤트인을 토벌하는 벤트 십자군에 참여했다.[191]
이후 이슬람 세력은 살라딘을 중심으로 통합되었고,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이 대패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31]
이에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소집하는 아우디타 트레멘디 칙서를 발표,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다.[204]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잉글랜드왕 리처드 1세, 프랑스왕 필리프 2세 등이 참전했으나, 프리드리히 1세는 살레프 강에서 익사하고,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거리까지 진격했지만 자원 부족으로 예루살렘 공략에는 실패했다.[207][209]
4. 3. 13세기 십자군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 소집을 개시했다. 주로 프랑스에서 십자군이 모였지만 잉글랜드와 독일에서도 호응이 있었다.[212] 십자군은 베네치아에 집결했고,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와 독일왕 필리프 폰 슈바벤은 자신들의 세속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했다.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해양력 확장을, 필리프는 자기 조카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와 매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를 동로마 황제로 복위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는 현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알렉시오스 4세의 친삼촌)를 폐위시켜야 했다.[213] 베네치아에 도달한 기사 수가 적어 십자군은 배삯을 지불할 수 없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약탈로 배삯을 충당하기로 했다. 그 전초전으로 십자군은 기독교도 도시 자다르를 공성했다. 인노첸시오 3세는 즉각 제4차 십자군을 파문했지만,[214] 나중에 철회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암살당하며 원정의 본래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이후 물러갔다가 두 번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약탈하여 교회를 분탕질하고 시민 대다수를 학살했다. 제4차 십자군은 본래 목적지인 예루살렘에서 1,000마일 떨어진 곳에도 도달하지 못했다.[215]
13세기에는 민중 사이에서 열광적 신앙심이 폭발적으로 나타났고, 1212년 어린이 십자군 같은 사건도 일어났다. 청소년 및 소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어른들이 실패했던 성지 탈환이 자신들의 순수함으로 가능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동지중해에 도달한 어린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러한 사건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희박하지만, 당시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이 대의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216]
1217년, 인노첸티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집트-시리아의 살라흐 앗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제5차 십자군)을 소집했다. 헝가리왕 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가 지휘했으며, 병력은 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 프리지아에서 모집되었다. 레오폴트와 장 드 브리엔이 다미에타를 공격해 함락시켰으나,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간 병력은 격퇴당해 항복했다.[217][218] 다미에타는 무슬림에게 반환되었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다.[219]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조약을 파기해 파문당했기에 십자군 지휘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를 요구, 1228년 아크레에 도착했다. 시칠리아에서 성장한 프리드리히 2세는 기독교 군주 중 무슬림 문화를 가장 잘 이해했으며, 무슬림 근위병과 하렘도 가졌다. 제6차 십자군은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적 수완으로 무력을 동원한 협상 형태로 진행되었다.[220] 예루살렘 대부분과 예루살렘-아크레 간 좁은 영토를 기독교도에게 넘기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는 무슬림이 통제하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 술탄 알카밀과 동맹도 맺었다. 이러한 조약은 프리드리히의 야심을 의심케 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직할령이 공격받자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221]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싸우는 동안 세속 제후들이 원정을 벌였다. 1239년 남작 십자군은 나바라왕 티발트 1세와 콘월 백작 리처드가 이끌었다. 이들은 무력 외교와 아이유브조 파벌 간 반목을 조장하는 공작을 병행했다.[222] 이때가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였으나, 알카밀 사후 아이유브조의 분열과 약화에 기인한 사상누각이었다.[223]
1244년, 화레즘 용병대가 이집트로 와서 다마스쿠스 토후 아스살리흐 이스마일과 계약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용병대의 독단으로 보이며, 예루살렘 함락 후 라포르비 전투에서 기독교도-시리아 무슬림 연합군을 격파했다.[224] 이에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집트 공격을 위한 제7차 십자군을 소집, 1249년 이집트에 도착했지만[225] 성공하지 못했다. 루이는 만소우라에서 패배하고 다미에타로 후퇴 중 포로가 되었다.[226] 10년 기한의 휴전 조약 체결 후 루이는 몸값을 내고 풀려나 1254년까지 시리아에 머물며 십자군 국가 공고화를 도모했다.[227] 1265-1271년, 맘루크조 술탄 바이바르스가 프랑크인들을 해안 소규모 전초기지로 몰아냈다.[228]
13세기 말 동지중해는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가 얽혀 복잡했다. 바이바르스는 기독교도-몽골 동맹 방지, 킵차크 칸국-일 칸국 불화 조장, 루스 스텝 노예 수급로 유지라는 세 가지 목표를 가졌다. 그는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와 외교를 맺고 만프레디가 교황청 및 샤를 1세 당주 백작(루이 9세의 동생)과 대립하는 것을 도왔다. 십자군 국가는 분열되었고, 삽바스 전쟁 결과 아크레-티레 영토를 빼앗은 베네치아는 바이바르스의 이집트와 무역했다. 바이바르스는 니케아 황제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하여 제노바인들의 자유 통행도 보장했다.[229]
프랑스에서는 샤를 당주가 영향력 확대를 꾀하며 시칠리아와 비잔티움 영토를 탈취하고, 딸들을 라틴계 비잔티움 제위 요구자들에게 시집보냈다. 1270년, 샤를의 형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샤를은 형을 설득해 예루살렘 대신 튀니스의 아랍 반군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루이의 십자군은 풍토병으로 초토화되었고 루이도 8월 25일 튀니스에서 사망했다. 루이의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 등 소규모 수행단만 남아 제9차 십자군을 이끌었다. 에드워드는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할 뻔한 뒤 10년 휴전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로써 동지중해의 유의미한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230] 1281년, 프랑스인 교황 마르티노 4세 선출로 교황청 권력이 샤를 당주를 뒷받침하게 되었다. 샤를은 제4차 십자군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 십자군을 준비했으나,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배후 조종으로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는 대반란이 일어났다. 샤를 당주는 시칠리아 지배력을 상실했고, 아라곤왕 페로 3세가 시칠리아왕을 칭했다. 마르티노 4세는 페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소집했으나 실패했다. 1285년, 지중해 제국 건설을 꿈꾸던 샤를 당주는 모든 노력이 무산된 채 사망했다. 루이와 샤를 형제는 자신들을 교황청을 옹위하는 신의 도구로 여겼던 것 같다.[231]
5. 유럽 대륙 십자군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12세기 첼레스티노 3세, 인노첸티오 3세, 호노리우스 3세, 그레고리오 9세 등 여러 교황들에게 영향을 주어, 북동유럽 일대를 기독교화하기 위한 북방 십자군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236]
이후 유럽 대륙에서는 여러 십자군이 일어났다. 인노첸시오 3세는 카타리파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1209년–1229년)을 소집했고,[241] 독립 보스니아 교회 토벌을 위한 보스니아 십자군도 있었다.[243]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등이 칼라트라바 기사단, 산티아고 기사단을 형성하여 십자군 원정을 도왔다.[244]
5. 1. 북방 십자군
발트해 연안의 이교도 지역을 기독교화하기 위한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십자군이다. 첼레스티노 3세를 비롯한 여러 교황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236] 1147년 벤트 십자군에는 색슨인, 데인인, 폴인들이 참여하여 폴라비아 슬라브족을 강제 개종시켰다.[236]독일기사단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검우기사단을 흡수하여 리보니아 기사단을 조직했다.[236][238] 1193년 첼레스티노 3세가 십자군을 소집하자 베르톨트 폰 하노버 주교가 1198년 호응했지만, 패배하고 전사했다. 인노첸티오 3세는 다시 십자군을 모집했고, 브레멘 주교 하르트비히 폰 우틀레데가 검우기사단과 함께 발트 지역 북동부를 가톨릭 세력권에 편입시켰다.[236] 1226년 콘라트 1세는 독일기사단에 헤움노를 헌납하여 십자군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게 했다.[236][237]
검우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인들에게 패배하자, 그레고리오 9세는 1237년 검우기사단의 잔여 병력을 독일기사단에 합류시켜 리보니아 기사단을 만들었다.[238] 12세기 중반, 독일기사단은 프루센 정복을 완료하고,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리투아니아를 굴복시키고 개종시켰다.[239] 프스코프 공화국, 노브고로드 공화국 같은 동방정교회 세력과도 분쟁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다. 1240년 네바 강 전투에서 노브고로드군이 스웨덴인이 주력인 가톨릭 군대를 격파했고, 2년 뒤 빙상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노브고로드군에게 대패했다.[240]
5. 2. 알비 십자군
알비 십자군(1209년–1229년)은 인노첸시오 3세가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 소집한 십자군이다.[241] 카타리파는 툴루즈 백국을 중심으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십자군은 카타리파를 잔인하게 진압했고,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툴루즈 백작위의 유일한 상속녀 잔이 루이 9세의 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 백작과 결혼했고, 잔과 알퐁스 사이에 자식이 없이 잔이 사망하자 툴루즈 백국은 카페 왕조의 직할령이 되었다. 이는 프랑스 왕의 입장에서 알비 십자군의 실제 동기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42]
5. 3. 보스니아 십자군
보스니아 교회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토벌하기 위해 헝가리 왕국이 주도한 십자군이다. 1216년, 보스니아를 개종시키기 위한 사절이 파견되었으나 실패했다. 1225년 호노리우스 3세는 헝가리인들에게 보스니아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243] 하지만 헝가리인들이 모히 전투에서 몽골에게 패배하면서 십자군은 실패했다. 1234년 그레고리오 9세가 재차 십자군을 독려했지만, 이번에는 보스니아인들이 헝가리인들을 격퇴했다.[243]5. 4. 레콩키스타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등 이베리아 기사단이 이합집산하여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산티아고 기사단을 형성했고, 이들을 돕는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다.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1212년에서 1265년 사이에 무어인, 무와히드조 등 무슬림 세력을 크게 몰아냈고, 교황이 승인한 이베리아 십자군들의 도움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라나다 토후국은 1492년까지 존속했지만, 그라나다마저 멸망한 이후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된다.[244]
6. 14세기, 15세기, 16세기 십자군
14세기에는 소규모 십자군 시도들이 있었다. 1309년, 잉글랜드, 프랑스 북동부, 독일에서 3만여 명의 농민들이 모였으나 아비뇽에서 해산했다.[245] 1365년, 키프로스 왕 피에르 1세는 알렉산드리아 십자군을 일으켜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는데, 이는 종교적 동기뿐만 아니라 경제적 동기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246]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메흐메트 2세는 여세를 몰아 1456년 헝가리로 쳐들어왔고, 후녀디 야노시가 베오그라드에서 농성했다.[250] 에네아스 실비우스(훗날의 교황 비오 2세)와 조반니 다 카페스트라토가 십자군 소집을 선동했고, 신성로마제국의 공후들이 원조를 약속했다.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으나, 구체적인 결과는 없었다. 1487년 4월,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발도파 이단 토벌을 위한 십자군을 요청했으나, 도피네에서만 미미한 행동이 있었을 뿐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251]
이 시기 지중해 주변에서 오스만 제국에게 유의미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체는 베네치아가 유일했지만, 베네치아의 "십자군"은 상업적 이윤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은 1718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럽 기독교 세계가 무슬림 세계를 최대 가상적국으로 간주하는 것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와 다투면서, 독일의 개신교도 제후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였다.[252]
6. 1. 대 오스만 십자군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진출이 가속화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1390년 루이 2세 드 부르봉 공작은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을 상대로 바르바리 십자군을 이끌었으나, 10주간의 공방전 끝에 10년 기한의 휴전을 맺고 철수했다.[247]1393년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시슈만이 니코폴리스를 공격하자, 이듬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튀르크족에 대항하는 새로운 십자군 소집을 선언했다.[248] 이 십자군은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지휘했으며, 많은 프랑스 귀족들이 합류했다. 지기스문트는 방어적인 전략을 주문했지만, 십자군은 다뉴브 강에 도착하자마자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십자군을 격파하고 3,000명의 포로를 잡았다.[249]

오스만 제국은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하여, 1444년 술탄 무라드 2세가 흑해 해변 바르나에서 바르나 십자군을 궤멸시켰다. 이 십자군은 교황청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4년 뒤에는 마지막 헝가리 원정대도 격파되었다.[248]
6. 2. 후스 십자군
후스 전쟁이라고도 하는 후스 십자군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보헤미아 종교개혁 지도자 얀 후스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 토벌하려 한 십자군이다. 얀 후스는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15세기 초에 총 다섯 차례(1420년, 1421년, 1422년, 1427년, 1431년)의 십자군이 소집되었으나, 이는 교리 차이로 반목하던 후스파 내부 종파들이 단결하여 십자군을 격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후스 전쟁은 1436년에 끝났지만, 천주교회의 승리라고 할 수 없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천주교회는 급진 후스파를 제거하기 위해 온건 후스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교리를 용인해주는 바젤 협정을 맺어야 했다.[253]
7. 십자군 전쟁의 영향과 유산
십자군 운동은 교회에서 성전 이론과 순례 개념을 바탕으로 법적, 신학적 용어로 정의되었다. 신학은 구약의 이스라엘 전쟁을 신약의 그리스도 중심적 견해와 결합했다. 성전은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고대 개념을 기반으로 했으며, 4세기 신학자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기독교화했다. 신학자들은 이교도에 대한 성전이 기독교에 대한 반대 때문에 옳다는 정당성을 널리 받아들였다.[72] 성지는 그리스도의 재산이었고, 그 회복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다. 알비 십자군은 프랑스 교회의 방어였고, 북방 십자군은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가 사랑했던 땅을 기독교화하기 위한 원정이었다.[73]
1265년부터 1271년까지 바이바르스는 프랑크인들을 몇몇 작은 해안 기지로 몰아냈다.[74] 그는 라틴인과 몽골의 동맹을 막고, 몽골 내부, 특히 금장군과 페르시아 일칸국 사이에 불화를 조장하며, 러시아 대초원에서 노예 병력을 확보하려 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 만프레드가 샤를과 교황의 공격에 저항하는 데 실패하도록 지원했다. 십자군 국가 내부의 불화는 성 사바스 전쟁과 같은 갈등을 초래했다. 베네치아는 아크레에서 제노바 사람들을 몰아내고 티레로 갔으며, 그곳에서 이집트와 계속 무역을 했다. 실제로 바이바르스는 콘스탄티노플의 새로 복위된 통치자, 미하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니케아 황제)와 제노바 사람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협상했다.[75]
1270년 샤를은 자신의 형제인 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8차 십자군)을 자신의 이익에 이용하여 그를 설득하여 튀니지를 공격하게 했다. 십자군 군대는 질병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루이 9세 자신도 8월 25일에 튀니지에서 사망했다.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미래의 잉글랜드 왕인 에드워드 왕자와 소수의 수행원은 분쟁이 끝난 후에 도착했지만, 에드워드 왕자의 십자군으로 알려진 원정을 계속하여 성지로 향했다.[76] 에드워드는 암살 시도에서 살아남았고, 10년간의 휴전을 협상한 후 잉글랜드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것은 동지중해에서 마지막으로 중요한 십자군 원정을 끝맺었다.[77]
7. 1. 서유럽 사회의 변화
십자군 원정은 서유럽 사회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교황의 권위는 강화된 반면, 봉건 제후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많은 제후들이 전사하거나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십자군 원정은 상업의 발달과 도시의 성장을 촉진했다. 십자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동방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발달하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의 도시들이 성장했다.[124] 특히 베네치아는 제4차 십자군을 이용하여 자다르와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124]
십자군 전쟁은 동방과 서방의 경제권 사이의 교류를 강화했다.[86] 순례자와 십자군의 수송은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와 같은 이탈리아 해상 도시에 특히 유리했다. 시리아의 요새화된 지역에서 상업적 특권을 획득한 이 도시들은 비단, 향신료와 같은 상품뿐만 아니라 기타 원료 식품 및 광물 제품의 무역에서 선호되는 중개자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와의 무역은 기존 한계를 넘어 확장되었고, 상인들은 기술적 개선으로 더욱 이점을 얻었고, 장거리 무역 전체가 확장되었다.[86]
동방과의 접촉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동방의 문화재가 서유럽으로 유입되었고, 이는 훗날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는 데 기여했다.[123] 또한 근동 지역의 뛰어난 성곽 건축 기술이 서유럽에 전파되기도 했다.[123]
7. 2. 이슬람 세계에 미친 영향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에 통합과 지하드 의식 강화라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누르 알 딘은 1149년 이나브 전투에서 십자군을 격파하고, 1150년에는 에데사 백작 조셀랭 2세를 사로잡는 등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36] 1153년 아스칼론 공성전에서 십자군이 승리했지만, 이듬해 누르 알 딘은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시리아 전체를 통합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슬람 세력의 결집을 가속화했다.
살라딘은 누르 알 딘의 뒤를 이어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고, 1187년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대파하여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이는 이슬람 세계에서 지하드 의식을 고취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39]

이러한 십자군과의 충돌은 이슬람 세계에 서유럽에 대한 적대감을 형성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는 서구 열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현대에 이르러 십자군은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에게 중요한 상징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들은 십자군을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것을 정당한 지하드로 간주한다. 이슬람권에서는 십자군을 프랑크인의 침략으로 인식하고 있다.[128]
7. 3. 한국의 관점과 교훈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극단주의와 폭력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서구 극우 성향 집단들은 십자군 상징과 반이슬람적 수사법을 사용하여 종교적, 인구 통계적 위협을 주장하며, 이슬람과의 투쟁을 정당화하려 한다.[87] 이는 종교적 관용과 평화 공존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이다.현대 무슬림 사상가, 정치인, 역사가들은 십자군 전쟁과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같은 정치적 발전 사이의 유사점을 지적하며 서구 제국주의를 비판한다.[87] 이러한 역사적 평행성은 현대 지하드와 기독교 국가들에 대한 투쟁이라는 사상을 고무하는 정치 이슬람의 핵심이 되기도 한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십자군"이라고 언급하여 이슬람권의 반발을 샀다.[87] 이는 종교적, 문화적 갈등을 심화시킬 수 있는 발언이었다.
십자군 전쟁의 역사는 종교적 신념이 폭력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서로 다른 문명 간의 대화와 이해를 통해 종교적 관용과 평화 공존의 가치를 재확인해야 한다.
8. 십자군 서술의 사학사
십자군의 역사서술은 십자군 시대 동안의 "역사의 역사"에 관한 것이다. 이 주제는 복잡하며, ''십자군 선정 서지, 현대 역사서술''[88] 및 ''십자군(서지 및 자료)''[89] [90]에서 개요를 제공한다. 십자군을 기술하는 역사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 십자군 1차 자료: 중세 시대에 쓰여진 작품(일반적으로 십자군 참여자 또는 당시에 쓰여진 것), 기록 보관소의 편지와 문서, 고고학적 연구 등을 포함한다.
2. 2차 자료: 16세기 초의 초기 통합 작품부터 현대까지 이어진다.
3. 3차 자료: 주로 백과사전, 서지 및 계보학이다.
참조
[1]
서적
The Crusades
Greenwood Publishing
2004
[2]
논문
(제목 없음)
2012
[3]
논문
(제목 없음)
2004
[4]
논문
(제목 없음)
1996
[5]
논문
(제목 없음)
2006
[6]
논문
(제목 없음)
2012
[7]
논문
(제목 없음)
2012
[8]
논문
(제목 없음)
2004
[9]
논문
(제목 없음)
2012
[10]
논문
(제목 없음)
2012
[11]
논문
(제목 없음)
2012
[12]
논문
(제목 없음)
2012
[13]
논문
(제목 없음)
2012
[14]
논문
(제목 없음)
2012
[15]
논문
(제목 없음)
2012
[16]
논문
(제목 없음)
2012
[17]
논문
(제목 없음)
2004
[18]
논문
(제목 없음)
2012
[19]
논문
(제목 없음)
2012
[20]
논문
(제목 없음)
2012
[21]
논문
(제목 없음)
2012
[22]
논문
(제목 없음)
2006
[23]
논문
(제목 없음)
2004
[24]
논문
(제목 없음)
2006
[25]
간행물
Zengi (d. 1146)
2006
[26]
간행물
Baldwin III
1911
[27]
간행물
Chapter XVII. The Latin States under Baldwin III and Amalric I, 1143–1174
http://images.librar[...]
1969
[28]
간행물
Zengi and the Fall of Edessa
http://images.librar[...]
1969
[29]
간행물
Edessa, City of
2006
[30]
간행물
Chapter XV. The Second Crusade
http://images.librar[...]
1969
[31]
간행물
Chapter XVIII. The Rise of Saladin, 1169–1189
http://images.librar[...]
1969
[32]
간행물
Second Crusade (1147–1149)
2006
[33]
간행물
Chapter XVI. The Career of Nūr-ad-Din
http://images.librar[...]
1969
[34]
간행물
Tortosa (Spain)
2006
[35]
간행물
Wendish Crusade (1147)
2006
[36]
서적
Raymund of Antioch
Cambridge University Press
[37]
서적
Amalric
Cambridge University Press
[38]
서적
Saladin
Cambridge University Press
[39]
서적
Damietta
[40]
서적
Baldwin IV
Cambridge University Press
[41]
서적
Raynald of Châtill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42]
서적
Raymund of Tripoli
Cambridge University Press
[43]
서적
Guy of Lusignan (d. 1194)
[44]
서적
Hattin, Battle of (1187)
[45]
서적
Chapter XIX. The Decline and Fall of Jerusalem, 1174–1189
http://images.librar[...]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23-06-01
[46]
서적
Third Crusade (1189–1192)
[47]
서적
The Crusades of Frederick Barbarossa and Henry VI
http://images.librar[...]
[48]
서적
The Third Crusade: Richard the Lionhearted and Philip Augustus
http://images.librar[...]
2016-03-04
[49]
간행물
[50]
백과사전
Summons to a Crusade, 1215
https://sourcebooks.[...]
Fordham University
[51]
서적
Pope Honorius III
New York
[52]
서적
The Fifth Crusade
http://images.librar[...]
2023-03-26
[53]
서적
The Fifth Crusade
[54]
서적
St. Francis of Assisi
New York
[55]
서적
Frederick II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56]
서적
The Crusade of Frederick II
http://images.librar[...]
2024-01-13
[57]
논문
Crucesignatus: its origins and early usage
https://www.academia[...]
[58]
서적
Crusade of Emperor Frederick II (1227–1229)
[59]
서적
Pope Gregory IX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60]
서적
Crusade of 1239–1241
[61]
서적
The Crusade of Theobald of Champagne and Richard of Cornwall, 1239–1241
http://images.librar[...]
2023-06-01
[62]
서적
Baldwin II of Constantinople
[63]
논문
The Crusades of 1239–1241 and Their Aftermath
https://www.jstor.or[...]
[64]
서적
Gaza, Battle of (1239)
[65]
서적
Baldwin II (emperor of Romania)
Cambridge University Press
[66]
서적
Chapter XIV. The Crusades of Louis IX
http://images.librar[...]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21-12-07
[67]
서적
Louis IX. of Fra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68]
서적
Pope Innocent IV
New York
[69]
서적
Crusade of Louis IX to the East (1248–1254)
[70]
서적
Mansurah
[71]
백과사전
Crusade of the Pastoureaux
[72]
논문
[73]
논문
[74]
논문
[75]
논문
[76]
논문
[77]
논문
[78]
백과사전
Tortosa (Spain)
[79]
백과사전
Wendish Crusade (1147)
[80]
논문
[81]
백과사전
Constantinople, Latin Empire of
[82]
논문
[83]
백과사전
Teutonic Order, The
[84]
논문
[85]
백과사전
Finance of Crusades
[86]
웹사이트
Trade in Medieval Europe
https://www.worldhis[...]
2019-01-08
[87]
논문
[88]
웹사이트
Select Bibliography of the Crusades
http://images.librar[...]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20-06-20 # webarchive date
[89]
백과사전
Historiography, Modern
[90]
백과사전
Crusades (Sources and Bibliography)
[91]
웹사이트
Selected Sources{{snd}}The Crusades
https://sourcebooks.[...]
[92]
서적
Holy Warriors
[93]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https://catalog.hath[...]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94]
서적
The Later Crusades, 1274–1580: From Lyons to Alcazar
Oxford University Press
[95]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pour la délivrance de la Terre Sainte
https://catalog.hath[...]
Paris
[96]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https://catalog.hath[...]
Berlin
[97]
서적
The crusades
https://catalog.hath[...]
London
[98]
서적
Histoire des croisades
https://catalog.hath[...]
Paris
[99]
서적
The history of the crusades
https://catalog.hath[...]
London
[100]
서적
Holy Warriors
[101]
백과사전
[102]
백과사전
[103]
서적
世界史用語集
山川出版社
2020-12-15
[104]
서적
詳説世界史
山川出版社
2022-03-05
[105]
서적
十字軍という聖戦
NHKブックス
[106]
서적
山内 1997
[107]
서적
図説 十字軍
河出書房新社
2019-02-28
[108]
서적
山内 1997
[109]
서적
井上 2008
[110]
서적
堀越 2006
[111]
서적
Crusade of 1239–1241
[112]
서적
The Crusade of Theobald of Champagne and Richard of Cornwall, 1239-1241
http://images.librar[...]
1977
[113]
서적
Baldwin II of Constantinople
[114]
논문
The Crusades of 1239–1241 and Their Aftermath
1987
[115]
서적
Gaza, Battle of (1239)
[116]
백과사전
Baldwin II (emperor of Romania)
wikisource:1911 Ency[...]
1911
[117]
서적
図説 十字軍
河出書房新社
2019-02-28
[118]
서적
図説 十字軍
河出書房新社
2019-02-28
[119]
서적
名画で読み解く「世界史」
世界文化社
2013
[120]
서적
図説 十字軍
河出書房新社
2019-02-28
[121]
서적
堀越 2006
[122]
서적
山内 1997
[123]
서적
パーシー 2001
[124]
서적
石坂ら 1980
[125]
서적
新人物往来社編 2011
[126]
서적
図説 十字軍
河出書房新社
2019-02-28
[127]
서적
笈川 2010
[128]
웹사이트
ISISがバチカンを襲うのは時間の問題だ
http://www.newsweekj[...]
ニューズウィーク日本語版
2017-08-28
[129]
서적
2012
[130]
사전
Crusade
[131]
서적
1997
[132]
서적
2001
[133]
서적
2001
[134]
서적
2009
[135]
서적
2006
[136]
서적
2006
[137]
서적
2006
[138]
서적
1997
[139]
서적
2002
[140]
서적
2003
[141]
논문
[142]
사전
OED
[143]
사전
OED
[144]
논문
[145]
논문
[146]
논문
[147]
논문
[148]
논문
[149]
논문
[150]
논문
[151]
논문
[152]
논문
[153]
논문
[154]
논문
[155]
논문
[156]
논문
[157]
논문
[158]
논문
[159]
논문
[160]
논문
[161]
논문
[162]
논문
[163]
논문
[164]
논문
[165]
논문
[166]
논문
[167]
논문
[168]
논문
[169]
논문
[170]
논문
[171]
논문
[172]
논문
[173]
논문
[174]
논문
[175]
논문
[176]
논문
[177]
논문
[178]
논문
[179]
논문
[180]
논문
[181]
논문
[182]
논문
[183]
논문
[184]
논문
[185]
논문
[186]
논문
[187]
논문
[188]
논문
[189]
논문
[190]
논문
[191]
논문
[192]
논문
[193]
논문
[194]
논문
[195]
논문
[196]
논문
[197]
논문
[198]
논문
[199]
논문
[200]
논문
[201]
논문
[202]
논문
[203]
논문
[204]
논문
[205]
논문
[206]
논문
[207]
논문
[208]
논문
[209]
논문
[210]
논문
[211]
논문
[212]
논문
[213]
논문
[214]
논문
[215]
논문
[216]
논문
[217]
논문
[218]
논문
[219]
논문
[220]
논문
[221]
논문
[222]
논문
[223]
논문
[224]
논문
[225]
논문
[226]
논문
[227]
논문
[228]
논문
[229]
논문
[230]
논문
[231]
논문
[232]
논문
[233]
논문
[234]
논문
[235]
논문
[236]
논문
[237]
논문
[238]
논문
[239]
논문
[240]
논문
[241]
논문
[242]
논문
[243]
논문
[244]
논문
[245]
논문
[246]
논문
[247]
논문
[248]
논문
[249]
논문
[250]
논문
[251]
논문
[252]
논문
[253]
논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