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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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섭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키가 크고 위엄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유관에게 학문을 배우고 효렴으로 두 번 천거되었으나, 자신을 추천한 사람이 죽자 벼슬을 버리고 상을 치렀다. 184년, 황보숭과 함께 장각의 반란군을 토벌했으며, 환관의 전횡을 비판하다가 한양 태수로 부임했다. 양주 자사 경비가 부정한 정치를 펼치자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경비는 반란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한수 등이 한양성을 포위했을 때, 부섭은 굳게 성을 지키며 항복을 거부하고 전사했으며, 장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부섭은 키가 8척으로, 위엄이 있었다. 젊어서 태위 유관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효렴에 두 번 천거되었다. 자신을 천거해 준 군의 장이 사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상을 치렀다.[1] 184년 (광화 7년), 호군사마가 되어 좌중랑장 황보숭과 함께 장각이 일으킨 황건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1]
서적
後漢書
2. 생애
환관들의 전횡을 비판하며, 우순이 사죄를 추방한 고사를 들어 그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환관 조충의 미움을 사 안정 도위로 임명되었으나, 병 때문에 면직되었다. 이후 의랑에 임명되었을 때, 서강이 이반하고 변장과 한수 등이 롱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사도 최렬은 양주 포기론을 주장했다. 부섭은 이에 격렬하게 반론하여 영제의 지지를 얻어냈다.
조충은 황건적의 난 토벌 공로를 논할 때 동생 조연을 보내 부섭을 회유하려 했으나, 부섭은 "사사로운 상을 바라지 않는다"라며 거절했다. 이 일로 조충의 원한을 샀고, 권력자들의 미움을 받아 한양 태수로 좌천되었다. 부섭은 한양군에서 강족을 회유하고 둔전을 개척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쳤다.
187년 (중평 4년), 양주 자사 경비가 금성군의 왕국과 한수 등의 반란군을 공격하려 할 때, 부섭은 경비가 인심을 잃었다는 것을 알고 패전을 예상했다. 그는 경비에게 신상필벌을 분명히 할 것을 간언했지만, 경비는 듣지 않고 출진했다가 부대 내 반란으로 목숨을 잃었다. 반란군은 한양을 포위했고, 부섭은 적은 병사와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굳게 성을 지켰다.
북지군의 호기 수천 명이 부섭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아들 부간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했지만, 부섭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왕국이 항복을 권유했지만, 부섭은 오히려 그를 꾸짖고 187년 4월[1], 장렬하게 전사했다. 사후 영제는 그에게 장절후(壯節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부섭은 키가 8척(尺)이었으며, 용모가 위엄이 있었다. 본래 자는 '''유기'''(幼起)였으나, 공자(孔子)의 제자 남용(南容)이 《시경(詩經)》의 백규(白圭)를 하루에 세 번 읽었다는 사실에 감복하여 자를 바꾸었다.
젊었을 때 태위(太尉) 유관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효렴(孝廉)에 두 번 천거되었으나 그를 천거한 태수의 부음을 듣자 관직을 버리고 상복을 입었다.
이후 호군사마(護軍司馬)가 되었고, 좌중랑장(左中郞將) 황보숭(皇甫嵩)과 함께 장각(張角)의 난을 토벌하였다.
2. 2. 환관과의 갈등과 양주 포기 논쟁
부섭은 평소 환관을 혐오하여 천자에게 상소를 올렸다. 장각이 趙|조중국어와 魏|위중국어에서 봉기하여 황건적이 여섯 주(州)를 어지럽히고 있지만, 영천(潁川)에서 싸워 진 적이 없었으니 황건적은 조정을 곤경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라고 하였다.[3] 그러면서 순임금이 네 가지 흉을 속히 없앴음을 기억하여 참언하는 무리와 간신배를 주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
부섭은 장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환관 조충이 그의 상소를 보고 미워하여 영제(靈帝)에게 무고하였다. 영제는 부섭의 말을 기억하여 벌하지 않았으나, 후(侯)에 봉하지는 않고 안정의 도위(都尉)로 전임시켰다.[4] 이후 부섭은 병으로 사임하고 의랑(議郞)으로 전임되었다.
서쪽의 강(羌)이 반역하여 변장 · 한수가 난을 일으켰을 때, 양주는 전국에서 군세와 물자를 모아두었다. 사도(司徒) 최열은 공경 백관이 모은 회의에서 양주를 포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부섭은 목소리를 드높이며 최열을 죽여 천하를 안정시키자고 하였고, 상서랑(尙書郞) 양찬(楊贊)이 부섭이 대신을 모욕하였다고 상주하였기 때문에 영제는 부섭을 불러 문책하였다. 부섭은 묵돌(冒頓)이 반역하였을 때 번쾌(樊噲)는 10만 명의 군세로 흉노(匈奴)의 땅을 횡행하려 하여 계포(季布)가 번쾌를 죽여야 한다고 하였던 일을 언급하며, 양주는 천하의 요충지이며 나라의 울타리와도 같다고 답하였다. 영제는 부섭의 말이 옳다고 여겼고, 이후 그를 존중하였다.
2. 3. 조충의 회유와 거절, 그리고 한양 태수 부임
부섭은 환관을 혐오하여 천자에게 그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2] 이 상소는 황건적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운 부섭이 후(侯)에 봉해지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환관 조충이 그의 상소를 보고 그를 미워하여 영제(靈帝)에게 무고했기 때문이다. 영제는 부섭의 말을 기억하여 벌하지 않았으나, 후(侯)에 봉하지도 않고 안정군(安定郡)[4]의 도위(都尉)로 전임시켰다.[3]
이후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된 조충은 황건적 토벌의 논공행상을 하면서, 집금오(執金吾) 견거(堅擧) 등의 건의에 따라 아우인 성문교위(城門校尉) 조연을 부섭에게 보내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부섭은 "이 부섭이 어찌하여 사사로이 포상을 구하겠습니까?"라며 거절하였다. 조충은 더욱 그를 미워했으나, 명성을 두려워하여 해치지는 못했다. 많은 귀인과 권력자들 또한 그를 미워하여, 부섭은 조정에 계속 있을 수 없어 한양군(漢陽郡) 태수(太守)가 되어 조정을 떠났다.
2. 4. 경비에 대한 간언과 최후
조충은 조칙으로 황건적 토벌의 논공행상을 하였는데, 집금오(執金吾) 견거(堅擧) 등이 '''"부남용(傅南容 ; 부섭)이 공적을 세웠는데도 후에 봉해지지 않아, 천하가 실망하고 있습니다. 현자를 등용하여 민심을 따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건의했다.[5] 조충은 그 말에 따라 아우인 성문교위(城門校尉) 조연을 보내 부섭을 회유하려 했으나, 부섭은 '''"이 부섭이 어찌하여 사사로이 포상을 구하겠습니까?"'''라며 거절하였다. 조충은 더욱 그를 미워하였으나, 명성을 두려워하여 해치지는 못했다.[6]
많은 귀인과 권력자들 또한 그를 미워하여 부섭은 조정에 계속 있을 수 없었고, 한양태수(漢陽太守)가 되어 조정을 떠났다. 한양태수 시절, 부섭은 백성을 사랑하고 강족을 회유하여 40여 리(里)의 둔전을 개척했다.[7]
중평 4년(187년), 양주자사(凉州刺史) 경비가 왕국과 한수를 토벌하려 할 때, 부섭은 경비에게 백성들의 불만과 군사 훈련 부족을 지적하며 신중할 것을 간언했다. 경비는 듣지 않았고, 결국 반란으로 인해 정구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 4월, 한수 등이 한양성을 포위하자 부섭은 굳게 성을 지켰다. 북지의 호기(胡騎) 수천 명이 부섭에게 항복을 권유하고, 아들 부간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으나, 부섭은 '''"성인은 절의를 이루며, 그에 버금가는 자는 절의를 지킨다."'''라며 거절했다. 왕국이 황연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자, 부섭은 '''"부절을 받은 신하가 반역을 일으켜 도적들을 위해 설교한단 말이냐!"'''라며 꾸짖고, 결국 전사하였다. 시호는 장절후(壯節侯)이다.
3. 가족 관계
참조
[2]
문서
조는 기주(冀州)의 속국, 위는 기주의 속군.
[3]
문서
예주(豫州)의 속군.
[4]
문서
양주(凉州)의 속군.
[5]
문서
농서군(隴西郡)의 속현.
[6]
문서
이민족 기병.
[7]
문서
부간의 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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