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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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건적은 후한 말기 태평도를 이끌던 장각이 일으킨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장각은 스스로를 '천공장군'이라 칭하며 '창천이사 황천당립'을 구호로 내걸고 후한 왕조 타도를 외쳤으며,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봉기에 참여하여 한때 세력이 백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184년에 진압되었으며, 후한 멸망의 기틀을 마련했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 말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지방 장관의 권한 증대를 초래하여 삼국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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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적의 난은 184년 장각이 이끄는 태평도가 탐관오리의 부정부패와 가혹한 세금에 저항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 반란으로, 후한 왕조의 쇠퇴를 가속화하고 군웅할거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회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도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 사건이다. - 황건적 - 장만성
장만성은 후한 말 황건적의 난 당시 장각의 명령으로 남양을 점령하고 태수 저공을 살해했으나, 진힐에게 패배하여 전사했으며, 그의 반란은 짧았지만 후한 왕조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황건적 | |
---|---|
기본 정보 | |
![]() | |
시기 | 후한 말기 |
발생 시기 | 184년 ~ 205년 |
원인 | 탐관오리의 횡포 기근 전염병 만연 |
목표 | 정부 전복 새로운 사회 질서 확립 |
결과 | 후한 왕조의 약화 군벌 할거 시대의 도래 난 진압 과정에서 조조, 손견, 유비 등 삼국시대 주역들의 성장 |
교단 | |
지도자 | 장각 |
주요 인물 | 장보 장량 마원의 장만성 조홍 한충 손중 관해 요화 배원소 주창 |
군사 | |
병력 규모 | 수십만 명 (최대 36만 명 추정) |
주요 활동 지역 | 기주 청주 서주 형주 예주 연주 |
주요 전투 | 광종 전투 곡양 전투 완성 전투 |
적대 세력 | 후한 조정 각지 군벌 |
기타 | |
관련 용어 | 태평도 창천은 죽고 황천이 일어선다 세설신어 |
2. 황건적의 난 배경
후한 말기, 외척과 환관의 권력 다툼과 부패는 극에 달했고, 백성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1] 자연재해와 질병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각은 태평도라는 종교를 창시하여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2. 1. 태평도와 장각
장각은 동생인 장보, 장량과 함께 태평도라는 종교를 창시하여 하북(河北) 지역의 거록을 중심으로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십여 년 만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거대한 종교 조직으로 성장했다.[1]3. 황건적의 봉기 (184년)
후한 말기, 외척과 환관의 전횡으로 백성들이 고통받자, 184년 장각(張角)은 동생 장보, 장량과 함께 하북(河北) 지역을 중심으로 '천공장군(天公將軍)'을 자칭하며 황건의 난을 일으켰다.[1] 이들은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후한 타도를 외쳤다.
황건군은 평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장각 형제는 이들을 잘 대해주어 큰 인기를 얻었다. 태평도 신도가 늘어나면서 봉기 규모는 한때 백만 명에 달하기도 했다.[1] 그러나 그 해 안에 반란은 진압되었고, 이는 후한 멸망의 기초를 놓았다. 192년 다시 봉기가 일어났으나 조조(曹操)에게 진압되었다.
3. 1. 주요 지도자
이름 | 역할 및 설명 |
---|---|
장각(張角) | 황건적의 최고 지도자, "대현량사(大賢良師)", "천공장군(天公將軍)" 자칭. 태평도 신도 증가 후 184년 황건의 난 주도, 병사.[1] |
장보(張寶) | 장각의 동생, "지공장군(地公將軍)" 자칭. 청주, 서주에서 동한 군에 화살 맞아 사망. 부대 붕괴.[1] |
장량(張梁) | 장각의 동생, "인공장군(人公將軍)" 자칭. 황건적 주요 장수.[1] |
마원의(馬元義) | 황건적 초기 지도자. 수만 명 인솔, 황제 측근과 업 거병 모의. 발각 후 낙양 거열형.[1] |
장만성(張曼成) | 남양 출신, 수만 명 인솔, 군수 저공 살해. 2개월 후 태수 진힐에게 피살.[1] |
조홍 (趙弘) | 장만성 사후 지도자. 완성 점령, 주준 기습에 피살.[1] |
한충 (韓忠) | 조홍 사후 잔여 병력 인솔, 완성 재점령. 주준 기습에 항복, 진힐에게 피살.[1] |
손하 (孫夏) | 한충 사후 잔여 병력 지휘. 주준 상대 완성 방어 중 전사, 세력 분산.[1] |
파재(波才) | 주준 격파, 황보숭 연합군에 대패.[1] |
팽탈 (彭脫) | 황보숭, 주준에게 서화에서 격파.[1] |
뤄지 (卜己) | 황보숭, 주준에게 복양 근처 동군에서 격파. 산둥성 창정에서 생포, 7천 명 참수.[1] |
공도(龔都) | [1] |
관해(管亥) | 공융 포위, 유비 도움받은 태사자에 의해 역전.[1] |
당주(唐周) | [1] |
손중(孫仲) | [1] |
유벽(劉辟) | [1] |
하만(何蔓) | [1] |
하의(何儀) | [1] |
황소(黃邵) | [1] |
장요(張饒) | 기주에서 20만 명 인솔, 공융 전투 승리.[1] |
마상(馬相) | 188년 잔당 인솔, 익주 반란. 면죽현 현령 이승, 파군 태수 조부, 익주 자사 희검 살해, 황제 칭. 가룡에 진압.[1] |
조지(趙祗) | 마상과 익주 반란.[1] |
4. 황건적의 난 진압과 후한의 쇠퇴
184년 장각을 필두로 일어난 황건의 난은 초기에는 성공적인 듯 보였으나, 장각이 병사하고 장보, 장량이 전사하면서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조정에서 파견한 황보숭, 주준, 조조 등에 의해 진압되었다.
황건적의 난은 비록 후한 타도에는 실패했지만, 후한 말기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지방 장관의 권한이 점차 증대되는 계기를 제공하여 결과적으로 후한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란은 1년 안에 진압되었지만, 중앙 정부가 병사 모집과 관련하여 지방 관리에 막대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후한 말의 군벌주의와 삼국 시대를 초래하여 후한에 치명타를 가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황하를 따라 황건적 깃발 아래 소규모 분쟁이 계속되었으며, 이는 황건적의 난이 중국 역사 기록에서 삼국 시대의 시작으로 기록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1. 백파적
188년 3월 16일에서 4월 13일 사이, 곽태는 약 10만 명의 황건적 잔당을 이끌고 서하군(현재의 산시성 펀양시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서하군의 백파곡(白波谷)에서 기원했기 때문에 "백파적"(白波賊)으로 불렸다. 백파적은 흉노 지도자 우푸뤄와 동맹을 맺고 태원군(현재의 산시성 타이위안시 일대)과 하동군(현재의 산시성 윈청시 일대)을 공격했다.[1][2] 189년 10월 27일에서 11월 25일 사이, 백파적은 하동군을 공격했고, 군벌 동탁은 그의 사위 우보를 파견하여 이들을 공격했지만, 우보는 이들을 격퇴하지 못했다.[3][4]195년 중반경, 헌제는 이각과 곽사에게 인질로 잡혀 있다가 황궁 장안에서 탈출하여 낙양으로 돌아왔다. 동승과 양봉(楊奉|양봉중국어)[5]은 이각과 곽사가 황제를 추격하여 장안으로 데려가려 할 때 헌제를 낙양에서 보호했다. 동승과 양봉은 이락, 한섬, 호재 등을 이끄는 백파적을 소환하여 헌제를 도왔다.[6]
5. 황건적의 난의 영향
황건적의 난은 후한 타도에는 실패했지만, 후한 말기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지방 장관의 권한이 점차 증대되는 계기를 제공하여 결과적으로 후한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다.[1]
반란은 1년 안에 진압되었지만, 후한 멸망의 기초를 놓았다. 중앙 정부는 병사 모집과 관련하여 지방 관리에게 막대한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는 후한 말의 군벌주의와 삼국 시대를 초래했으며, 후한에 치명타를 가했다.[2] 반란은 후한의 쇠퇴를 가속화했으며, 진압된 후에도 황하를 따라 황건적 깃발 아래 소규모 분쟁이 계속되었다.[2] 이는 황건적의 난이 중국 역사 기록에서 삼국 시대의 시작으로 기록되는 이유이기도 하다.[2]
6. 황건적 관련 인물
이름 | 역할 및 최후 |
---|---|
장각(張角) | 황건적의 수령. 난 발발 시기에 병사. "대현량사(大賢良師)",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함.[1] |
장보(張寶) | 장각의 차남. 청주와 서주에서 동한 군과의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사망. 군대는 붕괴됨. "지공장군(地公將軍)"이라 칭함.[1] |
장량(張梁) | 장각의 막내 동생. 황건적의 주요 장수.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칭함.[1] |
마원의(馬元義) | 수만 명의 황건적을 이끌고 황제 측근(중상시 中常侍)과 결탁, 업에서 거병 모의. 발각되어 낙양에서 거열형.[1] |
장만성(張曼成) | 남양 출신. 수만 명의 황건적을 일으켜 군수 저공 褚貢을 살해. 2개월 후 태수 진힐 秦頡에게 살해됨.[1] |
조홍 (趙弘) | 장만성 사후 황건적 지도자. 완성 점령, 주준의 기습 공격으로 사망.[1] |
한충 (韓忠) | 조홍 사후 잔여 병력 이끌고 완성 재점령, 주준에 맞섬. 주준의 기습에 항복했으나 진힐에게 살해됨.[1] |
손하 (孫夏) | 한충 사후 잔여 병력 지휘관. 주준에 맞서 완성 방어 중 전투에서 사망. 황건적 세력 흩어짐.[1] |
파재(波才) | 주준을 전투에서 격파. 한 달 후 황보숭, 주준 연합군에 대패.[1] |
팽탈 (彭脫) | 황보숭과 주준에게 서화에서 격파됨.[1] |
뤄지 (卜己) | 황보숭, 주준과 교전. 복양 근처 동 군을 근거지로 삼음. 양곡, 산둥성 북쪽 창정 근처에서 생포, 7,000명 이상 병사 참수됨.[1] |
공도(龔都)[1] | |
관해(管亥)[1] | |
당주(唐周)[1] | |
손중(孫仲)[1] | |
유벽(劉辟)[1] | |
하만(何蔓)[1] | |
하의(何儀)[1] | |
황소(黃邵)[1] | |
이름 | 역할 및 최후 |
고승 | |
등무 | |
배원소 | |
변희 | |
엄정 | |
정원지 | |
주창 | |
장각 | 황건적의 수령. 난이 발발했을 때 병으로 죽었다. "대현량사(大賢良師)"이자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함. |
장보 | 장각의 둘째 아들. 청주와 서주에서 동한 군과의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죽었으며, 그가 이끌던 군대는 이후 붕괴됨. "지공장군(地公將軍)"이라 칭함. |
장량 | 장각의 막내 동생. 황건적의 주요 장수.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칭함. |
6. 1. 정사(正史) 기록
후한(後漢) 말기 외척이나 환관의 전횡으로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가자 후한 영제 때에 장각(張角)은 동생인 장보(張寶), 장량(張梁)과 함께 하북(河北) 지역의 거록(鋸鹿)을 중심으로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후 10여 년 사이에 수십만 명의 신도를 얻어 일대 교단(敎團)으로 성장했으며, 184년 장각을 필두로 황건의 난을 일으켰으나 장각, 장보, 장량이 모두 사망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192년 다시 봉기를 일으켰으나 조조(曹操)에 의해 진압당했다.[1]이름 | 역할 및 최후 |
---|---|
장각(張角) | 황건적의 수령, 난 발발 시기에 병사. 스스로 "대현량사(大賢良師)",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칭함.[1] |
장보(張寶) | 장각의 차남, 청주와 서주에서 동한 군과의 전투 중 화살에 맞아 사망. 군대는 붕괴됨. 스스로 "지공장군(地公將軍)"이라 칭함.[1] |
장량(張梁) | 장각의 막내 동생이자 황건적의 주요 장수. 스스로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칭함.[1] |
마원의(馬元義) | 수만 명의 황건적을 이끌고 황제 측근(중상시 中常侍)과 결탁, 업에서 거병 모의. 발각되어 낙양에서 거열형.[1] |
장만성(張曼成) | 남양 출신, 수만 명의 황건적을 일으켜 군수 저공 褚貢을 살해. 2개월 후 태수 진힐 秦頡에게 살해됨.[1] |
조홍 (趙弘) | 장만성 사후 황건적 지도자. 완성 점령, 주준의 기습 공격으로 사망.[1] |
한충 (韓忠) | 조홍 사후 잔여 병력 이끌고 완성 재점령, 주준에 맞섬. 주준의 기습에 항복했으나 진힐에게 살해됨.[1] |
손하 (孫夏) | 한충 사후 잔여 병력 지휘관. 주준에 맞서 완성 방어 중 전투에서 사망. 황건적 세력 흩어짐.[1] |
파재(波才) | 주준을 전투에서 격파. 한 달 후 황보숭, 주준 연합군에 대패.[1] |
팽탈 (彭脫) | 황보숭과 주준에게 서화에서 격파됨.[1] |
뤄지 (卜己) | 황보숭, 주준과 교전. 복양 근처 동 군을 근거지로 삼음. 양곡, 산둥성 북쪽 창정 근처에서 생포, 7,000명 이상 병사 참수됨.[1] |
공도(龔都)[1] | |
관해(管亥)[1] | |
당주(唐周)[1] | |
손중(孫仲)[1] | |
유벽(劉辟)[1] | |
하만(何蔓)[1] | |
하의(何儀)[1] | |
황소(黃邵)[1] |
6. 2.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기록
참조
[1]
서적
Houhanshu vol. 8
[2]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
[3]
서적
Houhanshu vol. 9
[4]
서적
Houhanshu vol. 72
[5]
서적
Houhanshu vol. 72
[6]
서적
Houhanshu vol.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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