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증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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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 증산성은 흰 돌로 쌓아 '시루메산성'으로도 불리며, 백제 성왕 16년(538) 사비 천도 후 수도 방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둘레 약 600m, 높이 2~3m로, 서·남·북쪽에 문터가 있었으며, 성벽은 자연 지형을 이용했다. 성 안에서는 백제 토기, 기와 조각, 우물터가 발견되었으며, 부여 이중산성, 옥녀봉산성과 연결되어 있다.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고성성으로 언급되며,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 역할도 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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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증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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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부여 증산성 |
한자 표기 | 扶餘 甑山城 |
지정 종류 | 사적 |
지정 번호 | 156 |
지정일 | 1967년 3월 25일 |
위치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 산86번지 |
시대 | 백제 |
면적 | 29,283m2 |
2. 역사
백제 성왕 대에 수도 사비 방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기록에 등장하는 고성성(古城城)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백제 부흥운동 당시 부흥운동군의 중요한 거점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모습 때문에 '시루메산성'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2. 1. 백제 시대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성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 듯 하다고 하여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백제 산성이다.성왕 16년(538년) 수도를 사비(현재의 부여군)로 옮기고 나서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2m에서 3m 정도로, 현재는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지만 남쪽 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쪽, 남쪽, 북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지만 다른 성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한 편이다. 성 안에서는 백제 토기와 기와 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동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 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바라보면서 연결되어 있다.
증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정월에 백제 고성성(古城城)을 쳐서 이겼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고성성으로도 여겨지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한 거점으로도 여겨지는 중요한 산성이다.
2. 2. 백제 부흥운동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정월에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는 기록에 등장하는 '고성성'이 바로 증산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증산성은 백제 부흥운동 당시 부흥운동군의 중요 거점 중 하나였던 중요한 산성으로 여겨진다.3. 구조
백제 성왕 16년(538년) 사비 천도 이후 수도 방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2m에서 3m 정도였으나, 현재는 대부분 무너진 상태이다. 다만 성의 남쪽 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으나 다른 성에 비해 정교하지는 않은 편이다.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 및 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마주보며 연결되어 있다.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모습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 듯 하다고 하여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불린다.
3. 1. 내부 시설
성 안에서는 백제 시대의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당시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성의 동쪽에는 우물터가 남아 있어 식수 등 생활용수를 공급했던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쪽, 남쪽, 북쪽 세 곳에 문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4. 주변 유적과의 연계
부여군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 및 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마주보며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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