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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딩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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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뷔딩겐은 독일 헤센주에 위치한 도시로, 포겔스베르크 언덕 아래 베터라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 16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일 목골 주택 가도와 독일 관광 가도에 속한다. 700년경 나무 교회가 세워졌고, 847년 문서에 처음 언급되었다. 1330년 시장 도시 지위를 얻었으며, 1442년부터 이젠부르크-뷔딩겐 백작이 지배했다. 1521년 마르틴 루터가 도시를 통과했고,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교, 칼뱅주의로 개종했다. 1936년 주둔 도시가 되었으며, 2007년까지 미군이 주둔했다. 현재는 주변 도시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으며, 뷔딩겐 성, 슈타이네르네스 하우스, 오버호프 등 역사적인 건축물과 호이존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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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딩겐
지도
뷔딩겐의 위치 (베테라우크라이스 내)
뷔딩겐의 위치 (베테라우크라이스 내)
역사적인 중심지
기본 정보
종류도시
문장
위치50° 17′ 27″ N 9° 6′ 45″ E
국가독일
헤센주
행정 구역다름슈타트
베테라우 군
해발 고도134m
면적122.87km²
우편 번호63654
지역 번호06042, 06041, 06048, 06049
차량 번호판FB, BÜD
지방 자치체 코드06 4 40 004
행정 주소Eberhard-Bauner-Allee 16
63654 Büdingen
하위 행정 구역16개 구역
웹사이트www.stadt-buedingen.de
정치
시장벤야민 하리스
임기 시작2021년
소속 정당CDU

2. 지리

뷔딩겐은 습하고 늪이 많은 계곡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성과 구시가지는 수백 년 된 참나무 널빤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널빤지는 수직적인 너도밤나무 말뚝 (기둥) 위에 가로로 놓여 있다. 이러한 기초에 공기가 닿지 않도록 수위는 충분히 높게 유지되어야 한다.

1972년부터 뷔딩겐 시는 다음 16개 구역으로 구성된다.

뷔딩겐 시의 구역
아울렌디바흐
뷔헤스
뷔딩겐 (핵심 또는 중심)
칼바흐
디바흐 암 하크
뒤델스하임 (가장 큰 자치구)
두덴로드
에카르트하우젠
로르바흐
미헬라우
오를레샤우젠
린더뷔겐
롤바흐
폰하우젠
볼프
볼퍼본



같은 해, 뷔딩겐 구(Landkreis)는 해체되고 뷔딩겐과 프리드베르크 구가 합쳐져 베터라우 구가 신설되었으며, 프리드베르크가 새로운 구청 소재지가 되었다. 뷔딩겐 시민들은 뷔딩겐이 베테라우군에 편입된 것에 대해 당시에도 현재도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군청 소재지인 프리트베르크 (헤센)까지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지 않아 이러한 반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

2. 1. 위치

뷔딩겐은 포겔스베르크 언덕 아래, 베터라우 남쪽, 해발 약 16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겔른하우젠에서 북서쪽으로 15km,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동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으며, 역사적으로 오버헤센에 속한다.

제멘바흐 강을 따라 위치한 이 도시는 바르바로사 도시인 게른하우젠에서 북서쪽으로 15km, 하나우에서 북쪽으로 25km,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북쪽으로 약 35km 거리에 있다. 핵심 시가지의 동쪽은 뷔딩겐 숲과 접해 있으며, 남쪽은 뷔딩겐-메어홀츠 구릉을 경계로 한다. 또한 독일 목골 주택 가도와 독일 관광 가도 알프스-발트해 루트에 면해 있다.

2. 2. 지질

뷔딩겐은 습하고 늪이 많은 계곡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성과 구시가지는 수백 년 된 참나무 널빤지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널빤지는 수직적인 너도밤나무 말뚝 (기둥) 위에 가로로 놓여 있다. 이러한 기초에 공기가 닿지 않도록 수위는 충분히 높게 유지되어야 한다.

2. 3. 구성

1972년부터 뷔딩겐 시는 다음 16개 구역으로 구성된다.

뷔딩겐 시의 구역
아울렌디바흐
뷔헤스
뷔딩겐 (핵심 또는 중심)
칼바흐
디바흐 암 하크
뒤델스하임 (가장 큰 자치구)
두덴로드
에카르트하우젠
로르바흐
미헬라우
오를레샤우젠
린더뷔겐
롤바흐
폰하우젠
볼프
볼퍼본



같은 해, 뷔딩겐 구(Landkreis)는 해체되고 뷔딩겐과 프리드베르크 구가 합쳐져 베터라우 구가 신설되었으며, 프리드베르크가 새로운 구청 소재지가 되었다. 뷔딩겐 시민들은 뷔딩겐이 베테라우군에 편입된 것에 대해 당시에도 현재도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군청 소재지인 프리트베르크 (헤센)까지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지 않아 이러한 반감을 더욱 키우고 있다.

3. 역사

1442년부터 뷔딩겐의 영주들은 이젠부르크-뷔딩겐의 백작으로 알려졌다. 루드비히 2세는 1480년과 1510년 사이에 오래된 요새 주변에 22개의 탑이 있는 거대한 새로운 방어벽을 건설했는데, 이 벽은 거의 완전히 현존하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중세 요새 중 하나이다.[1]

1578년 황제 루돌프 2세는 뷔딩겐 백작에게 "유빌라테" 시장(라틴어 jubilate: "찬양하다"에서 유래)을 보상으로 주었고, 이는 축제의 기회가 되었다.[1] 1806년 이젠부르크-뷔딩겐 백국은 이젠부르크-비르슈타인 공국에 병합되었다. 빈 회의 이후, 이젠부르크 공국은 1816년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헤센 선제후국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뷔딩겐은 헤센-다름슈타트에 속하게 되었다.[1] 1840년, 에른스트 카시미르 3세는 대공의 칙령에 의해 세습 공작 지위로 승격되었다.[1]

1822년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에서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었다. 뷔딩겐은 뷔딩겐 군 법원의 소재지가 되었고, 1852년에는 뷔딩겐 지구가 설치되었다.[1] 1839년에는 노동자 학교(이후 상업 학교)가, 1867년과 1868년 사이에는 마틸덴호스피탈이 건설되었다. 1879년에는 신용 협동 조합 (오늘날 ''Volksbank'')이 설립되었다.

1936년 뷔딩겐은 주둔 도시가 되었고, 1945년부터 미군이 주둔했다. 마지막 미군(제1기병연대 제1대대)은 2007년 8월 15일 뷔딩겐을 떠나 71년간의 군사 주둔지로서의 도시 역사를 마감했다.[1]

1739년 뷔딩겐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간의 우편 서비스가 시작되어 주 1회 우편 마차와 2명의 기마 우편 배달부가 운행되었다. 기센-겔른하우젠 철도는 뷔딩겐역을 포함하여 1870년 11월 30일 뷔딩겐과 겔른하우젠 사이에 개통되었다. 1879년에는 김나지움이 신축되었고, 체육관과 교장 관저가 포함되었다. 1888년과 1895년 사이에 상수도가 건설되었고, 부분적으로 하수도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1910년에 시립 가스 공장이, 1913년에는 뷔딩겐에 전등이 설치되었다.[1]

1972년 헤센 주의 지역 개편은 뷔딩겐에서 "타국 행정 기구에 의한 지방 자치의 특별 수업"으로 인식되었다. SPD 주도의 주 정부와 연계된 FDP의 주도로 1970년부터 이루어진 개혁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목표는 군과 자치체의 수를 대폭 줄이는 것이었다.[13]

'''시정촌 재편'''

1971년 11월 26일, 알트비델름스, 아우렌디바흐, 뷔헤스, 칼바흐, 디바흐 암 하크, 두덴로트, 에커츠하우젠, 로어바흐, 미헬라우, 올레스하우젠, 린더뷔겐, 롤바흐, 폰하우젠, 볼프, 볼퍼본의 경계 변경 협정이 자유 의사에 따른 합병의 결과로 체결되었다. 듀델스하임 대표 위원회는 7표 대 6표로 뷔딩겐과의 교섭 중단을 결정했다. 1971년 12월 13일, 시 운영 위원회는 미텔그륀다우와 협정을 체결했다. 주 정부는 1971년 12월 21일 알트비델름스, 미헬라우, 미텔그륀다우, 볼퍼본과의 협정을 "현재 진행 중인 계획적 조정에 비추어" 되돌렸다. 주 정부는 알트비델름스는 로네부르크로, 미텔그륀다우는 그륀다우로, 미헬라우와 볼퍼본(및 게른하르)는 쾨펜로트로 합병할 것을 계획했다. 1972년 7월 11일에 제정되어 1972년 8월 1일에 발효된 법률에 의해, 볼퍼본과 (자치체 대표의 의사에 반하여) 듀델스하임은 뷔딩겐에 합병되었다[13]。미텔그륀다우의 합병 상대에 관한 소송은, 후에 행정 재판소에서 기각되었다.[13]

'''군역 재편'''

뷔딩겐 군의 폐지를 수반하는 군역 재편은 지역 관계자들의 격렬한 저항과 엄중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현재의 군 분할 결정은 주 의회 FDP 의원단의 1971년 8월 28일 구상에 기초하고 있다. 뷔딩겐시는 프리트베르크 군으로의 편입을 압도적 다수로 부결하고, 하나우 군으로의 편입에 찬성표를 던졌다. 편입 협정은 1972년 4월 19일에 뷔딩겐에서 서명되었다. 헤센 주 의회는 위의 결정을 무시한 1972년 7월 11일의 재편성 법률에 의해 1972년 8월 1일 발효로 현재의 군 구성을 구축했다.[13]

3. 1. 초기 역사

700년경, 알려지지 않은 영주에 의해 생 레미지우스의 나무 교회가 세워졌다. 847년, "뷔딩겐"이 문서에 처음 언급되었지만, 독일과 로렌에 같은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이 몇 개 더 있어 어느 뷔딩겐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 1050년경 생 레미지우스 교회에 층이 추가되었고, 그 이후로 기본적으로 건물이 변하지 않았다.[1]

1131년에 뷔딩겐 가문이 처음 언급되었고, 1155년에 부르크라프가 되었다. 1206년에 뷔딩겐의 villa|도시la가 공식적으로 언급되었다. 1247년 이전에 게를라흐 2세와 함께 뷔딩겐의 지배 가문은 단절되었다.[1]

그들의 상속자는 호엔로에-브라우넥, 이젠부르크-켐페니히, 트림베르크, 호엔로에 그리고 이젠부르크 가문이었다. 1330년 7월 26일, 신성 로마 황제 루이 4세는 뷔딩겐의 루터에게 시장 도시 지위를 부여했다.[1]

1353년의 자유 칙령을 통해 부르크라프 하인리히 2세는 뷔딩겐 사람들에게 자유와 약간의 독립을 부여했다. 그 대가로 사람들은 도시를 방어해야 했고, 그래서 사격 협회가 창설되었다. 이 협회는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격 협회 중 하나로 존재한다.[1]

"뷔딩겐"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최종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지명 연구가들은 추측으로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하고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왕의 법정((Thing))을 의미하는 ''budingun''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연구자들은 부오도(Buodo)의 후손을 의미하는 ''Buodingen''이 기원이라고 주장한다.[1]

늦어도 1131년부터 등장하는 "폰 뷔딩겐"을 칭하는 일족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조상이 베테라우에 많은 재산을 소유한 고위 귀족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이 원(原) 뷔딩겐 주민들은 슈타우펜 가문의 충실한 신봉자였다. 폰 뷔딩겐 가문은 성계 제후인 마인츠 대주교와 Kloster Fulda|풀다 수도원de 간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헤센 방백령에 접한 베테라우 지방의 거의 중앙 부근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뷔딩겐 영주 가문은 수 세기 동안 주권을 확대하려는 양 세력의 버퍼 존재였다.[1]

3. 2. 중세 시대

"예루살렘 문" (또는 "아랫 문")


뷔딩겐 성






700년경, 알려지지 않은 영주에 의해 생 레미지우스의 나무 교회가 세워졌다.[5] 847년, "뷔딩겐"이 문서에 처음 언급되었지만, 독일과 로렌에 같은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이 몇 개 더 있었기 때문에 어떤 뷔딩겐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5] 1050년경 생 레미지우스 교회에 층이 추가되었고, 그 이후로 기본적으로 건물이 변하지 않았다.[5]

1131년에 뷔딩겐 가문이 처음 언급되었다.[5] 그들은 1155년에 부르크라프가 되었다.[5] 뷔딩겐의 villala("도시")는 1206년에 공식적으로 언급되었다.[5] 뷔딩겐의 지배 가문은 게를라흐 2세와 함께 1247년 이전에 단절되었다.[5]

그들의 상속자는 호엔로에-브라우넥, 이젠부르크-켐페니히, 트림베르크, 호엔로에 그리고 이젠부르크 가문이었다.[5] 1330년 7월 26일, 신성 로마 황제 루이 4세는 뷔딩겐의 루터에게 시장 도시 지위를 부여했다.[5]

1353년의 자유 칙령을 통해 부르크라프 하인리히 2세는 뷔딩겐 사람들에게 자유와 약간의 독립을 부여했다.[5] 그 대가로 사람들은 도시를 방어해야 했고, 그래서 사격 협회가 창설되었다.[5] 이 협회는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격 협회 중 하나로 존재한다.[5]

1442년부터 뷔딩겐의 영주들은 이젠부르크-뷔딩겐의 그래프로 알려졌다.[5] 1480년과 1510년 사이, 루드비히 2세는 오래된 요새 주변에 22개의 탑이 있는 거대한 새로운 방어벽을 건설했다.[5] 이 벽은 거의 완전히 현존하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중세 요새 중 하나이다.[5]

1521년에 마르틴 루터가 뷔딩겐을 통과했다고 전해진다.[5] 같은 해, 도시는 프로테스탄트교가 되었고, 이후 칼뱅주의가 되었다.[5]

1576년, 흑사병이 많은 주민들을 죽였고, 1632년에도 다시 발생했다.[5] 1590년, 대화재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5] 1633년과 1634년 사이에는 114명이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첫 번째 기소는 1567년에 이루어졌다.[5] 30년 전쟁 중인 1634년, 도시는 스웨덴 점령군을 물리친 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5]

3. 3. 종교 개혁과 관용

마르틴 루터가 1521년에 뷔딩겐을 통과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뷔딩겐은 프로테스탄트교로 개종하였고, 이후 칼뱅주의를 따르게 되었다. 1601년, 그래프 볼프강 에른스트는 오늘날 볼프강-에른스트-김나지움으로 알려진 라틴 학교를 설립하였다.

1712년, 그래프 에른스트 카시미르 1세는 종교적 반대자들의 뷔딩겐 정착을 허용하는 관용 칙령을 발표했다. 그 결과, 1724년까지 위그노, 발도파정교분리주의자들이 살았던 아랫문(예루살렘 문) 근처에 교외 지역이 형성되었다.

뷔딩겐에서는 1532년부터 1699년까지(특히 1633년부터 1653년 사이에 절정) 수많은 마녀 재판이 열렸으며, 485명이 요술 혐의로 기소되었다. 400명 이상이 처형되면서, 뷔딩겐 백작령은 마녀 사냥의 중심지 중 하나로 여겨진다.[6] 2012년 10월 12일, 뷔딩겐 시의회는 마녀 재판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7]

1564년에는 베흐터스바흐 출신의 파울하버 가문 여성이 뷔딩겐에서 마녀로 고발되었다. 게오르크 폰 이젠부르크-뷔딩겐은 그녀에게 고문을 명령했지만, 그녀는 심한 고문에도 침묵을 지켜 혐의가 확대되는 것을 막았다.[8] 이젠부르크 궁정 설교자였던 안톤 프레토리우스는 마녀 재판과 고문에 반대하며 1597년에 한 여성을 고문실에서 풀어주는 데 성공했다. 그는 1598년에 『마법과 마술에 관한 철저 보고서』를 저술하여 투쟁을 이어갔다.[9]

3. 4. 근현대

1330년 7월 26일, 신성 로마 황제 루이 4세는 뷔딩겐의 루터에게 시장 도시 지위를 부여했다.[1]

1353년 자유 칙령으로 부르크라프 하인리히 2세는 뷔딩겐 사람들에게 자유와 약간의 독립을 부여했다. 그 대가로 사람들은 도시를 방어해야 했고, 사격 협회가 창설되었다. 이 협회는 오늘날까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격 협회 중 하나로 존재한다.[1]

1442년부터 뷔딩겐의 영주들은 이젠부르크-뷔딩겐의 그래프로 알려졌다. 지역 전쟁 후, 그래프 루드비히 2세는 1480년과 1510년 사이에 오래된 요새 주변에 22개의 탑이 있는 거대한 새로운 방어벽을 건설했다. 이 벽은 거의 완전히 현존하며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중세 요새 중 하나이다.[1]

1521년에 마르틴 루터가 통과했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도시는 프로테스탄트교가 되었고, 이후 칼뱅주의가 되었다.[1]

1576년과 1632년, 흑사병이 많은 주민들을 죽였다.[1]

1590년, 대화재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1]

1633년과 1634년 사이에 114명이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첫 번째 기소는 1567년에 이루어졌다. 30년 전쟁 중인 1634년, 도시는 스웨덴 점령군을 물리친 제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

1578년 황제 루돌프 2세는 뷔딩겐의 그래프/백작에게 "유빌라테" 시장(라틴어 jubilate: "찬양하다"에서 유래)을 보상으로 주었다. 이는 축제의 기회가 되었다.[1] 1806년 이젠부르크-뷔딩겐 백국은 이젠부르크-비르슈타인 공국에 병합되었다. 빈 회의 이후, 이젠부르크 공국은 1816년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헤센 선제후국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뷔딩겐은 헤센-다름슈타트로 넘어갔다.[1] 1840년, 그래프 에른스트 카시미르 3세는 대공의 칙령에 의해 세습 공작 지위로 승격되었다.[1]

1601년 그래프 볼프강 에른스트는 오늘날 볼프강-에른스트-김나지움으로 알려진 라틴 학교를 설립했다.[1] 1712년 그래프 에른스트 카시미르 1세는 종교적 반대자들의 뷔딩겐 정착을 허용하는 관용 칙령을 발표했다. 그 결과 1724년까지 위그노, 발도파, 종파 그리고 다른 정교분리주의자들이 살았던 아랫문(예루살렘 문)에 교외가 생겼다.[1]

1822년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에서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었다. 뷔딩겐은 뷔딩겐 군 법원의 소재지가 되었고, 1852년에는 뷔딩겐 지구가 설치되었다.[1] 1839년에는 노동자 학교(나중에 상업 학교라고 불림)가 설립되었다.[1] 1867년과 1868년 사이에 마틸덴호스피탈이 건설되었다.[1] 1879년에는 신용 협동 조합 (오늘날 ''Volksbank'')이 설립되었다.[1]

1936년 뷔딩겐은 주둔 도시가 되었고, 1945년부터 미군이 주둔했다. 마지막 미군(제1기병연대 제1대대)은 2007년 8월 15일 뷔딩겐을 떠났고, 71년간 군사 주둔지로서의 도시 역사를 마감했다.[1]

1739년에 뷔딩겐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간의 우편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주 1회 우편 마차와 2명의 기마 우편 배달부가 운행되었다.[1] 1870년 11월 30일, 기센-겔른하우젠 철도가 뷔딩겐역을 포함하여 뷔딩겐과 겔른하우젠 사이에 개통되었다.[1] 1879년에는 김나지움이 신축되었고, 체육관과 교장 관저가 포함되었다.[1] 1888년과 1895년 사이에 상수도가 건설되었고, 부분적으로 하수도 시스템이 설치되었다.[1] 1910년에 시립 가스 공장이 설립되었고, 1913년에 뷔딩겐은 전등을 받았다.[1]

3. 5. 나치 시대와 제2차 세계 대전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뷔딩겐에서는 유대인과 유대교 시설에 대한 침해가 이루어졌다. 1938년에 마지막 유대인이 뷔딩겐을 떠났다. 1938년 11월 9일 밤, 뷔딩겐의 돌격대 기동 습격반이 도이델스하임에 나타났고, 도이델스하임에 거주하는 지지자들이 이에 따랐다. 계획적인 집단 박해(수정의 밤)의 일환으로 뷔딩겐과 도이델스하임의 나치 신봉자(및 돌격대)로 구성된 폭도들이 시나고그에 난입하여, 창문을 부수고 커튼에 불을 질렀다. 테이블, 긴 의자, 성경대, 기타 가구는 훼손되었고, 차에 실려 광장으로 옮겨져 군중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소각되었다. 도이델스하임에 살고 있던 유대인 주민의 집은 강제로 열리고 훼손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약탈도 이루어졌다. 한 55세의 인물은 화장실에서 끌려 나와 배설물을 뒤집어쓰고 52세의 동생과 함께 구타당하고 발로 걷어차이며 시청까지 쫓겨났다. 이 형제는 거기서 머리에 자루를 씌우고 빗자루를 들고 춤을 강요받았다. 또 다른 51세의 인물은 2명의 도이델스하임 주민에게 납치되었고, 그동안 누군가가 목덜미에 올라타 있었다. 유대인 주민들은 그 후 시청 홀로 끌려가 욕설을 듣고 조롱받았다. 몇몇은 밧줄을 목에 감고, 가루 봉지를 머리에 씌워 창문 밖으로 군중에게 노출되었다[11]. 옛 시청에 부착된 놋쇠판은 이러한 뷔딩겐 유대인의 운명을 기념하고 있다. "죽은 자를 회상하고, 산 자를 경계하기 위해 – 국가 사회주의자의 독재로 생존 기반을 빼앗기고, 박해받고, 살해당한 뷔딩겐 사회의 유대인 구성원을 기억하고, 명심하기 위해 – 우리는 뷔딩겐의 모든 유대인의 고통을 슬퍼한다."

뷔딩겐에는 베테라우 – 마인 – 타우버 진지군(리틀 지크프리트 라인)에 속하는 19기의 토치카가 있었다. 이 중 18기는 전후 미군에 의해 폭파되었다. 유일하게 암 하인에 토치카가 남아 있다[12].

1960년 4월 15일, 마르부르크의 조각가 디터 파흐라트가 제작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희생자 기념비가 제막되었다. 이 기념비는 현재 막스 할버슈타트 공원 내의 시립 학교 앞에 세워졌으며, 선량한 시민에 대한 전쟁의 비인도적 폭력, 전장에서의 희생자, 고향에서 추방된 사람들, 전쟁 포로 수용소, 정치범 수용소, 강제 수용소에서 전쟁 중·전후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 사람들을 추모하고 있다. 파흐라트는 이 기념비가 전몰한 병사뿐만 아니라 전쟁의 희생자 모두를 기념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전몰 병사를 위한 또 다른 기념비가 민간 주도로 뷔딩겐 묘지에 세워져 있으며, 여기에는 전몰한 뷔딩겐 병사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디터 바흐라트가 제작한 제2차 세계 대전의 희생자 기념비

3. 6. 전후

1601년 그래프 볼프강 에른스트는 오늘날 볼프강-에른스트-김나지움으로 알려진 라틴 학교를 설립했다. 1712년 그래프 에른스트 카시미르 1세는 종교적 반대자들의 뷔딩겐 정착을 허용하는 관용 칙령을 발표했다. 그 결과 1724년까지 위그노, 발도파, 종파 그리고 다른 정교분리주의자들이 살았던 아랫문(예루살렘 문)에 교외가 생겼다.[13]

1822년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에서 행정과 사법이 분리되었다. 뷔딩겐은 뷔딩겐 군 법원의 소재지가 되었고, 1852년에는 뷔딩겐 지구가 설치되었다. 1839년에는 노동자 학교(나중에 상업 학교라고 불림)가 설립되었다. 마틸덴호스피탈은 1867년과 1868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1879년에는 신용 협동 조합 (오늘날 ''Volksbank'')이 설립되었다. 1936년 뷔딩겐은 주둔 도시가 되었고, 1945년부터 미군이 주둔했다. 마지막 미군(제1기병연대 제1대대)은 2007년 8월 15일 뷔딩겐을 떠났고, 71년간 군사 주둔지로서의 도시 역사를 마감했다.[13]

1739년에 뷔딩겐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간의 우편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주 1회 우편 마차와 2명의 기마 우편 배달부가 운행되었다. 기센-겔른하우젠 철도는 뷔딩겐역을 포함하여 1870년 11월 30일 뷔딩겐과 겔른하우젠 사이에 개통되었다. 1879년에는 김나지움이 신축되었고, 체육관과 교장 관저가 포함되었다. 1888년과 1895년 사이에 상수도가 건설되었고, 부분적으로 하수도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시립 가스 공장은 1910년에 설립되었고, 뷔딩겐은 1913년에 전등을 받았다.[13]

1972년 헤센 주의 지역 개편은 뷔딩겐에서는 "타국 행정 기구에 의한 지방 자치의 특별 수업"(폴크마어 슈타인)으로 인식되었다. SPD 주체의 주 정부 연계 파트너인 FDP 주도로 이루어진 1970년부터의 개혁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목표는 군과 자치체의 수를 대폭 줄이는 것이었다.[13]

'''시정촌 재편'''

자유 의지에 따른 합병의 결과, 1971년 11월 26일에 알트비델름스, 아우렌디바흐, 뷔헤스, 칼바흐, 디바흐 암 하크, 두덴로트, 에커츠하우젠, 로어바흐, 미헬라우, 올레스하우젠, 린더뷔겐, 롤바흐, 폰하우젠. 볼프, 볼퍼본의 경계 변경 협정이 체결되었다. 듀델스하임의 대표 위원회는 7표 대 6표로 뷔딩겐과의 교섭 중단을 결정했다. 1971년 12월 13일에 시의 운영 위원회는 미텔그륀다우와 협정을 체결했다. 주 정부는 1971년 12월 21일에 알트비델름스, 미헬라우, 미텔그륀다우, 볼퍼본과의 협정을 "현재 진행 중인 계획적 조정에 비추어" 되돌렸다. 주 정부는 알트비델름스는 로네부르크로, 미텔그륀다우는 그륀다우로, 미헬라우와 볼퍼본(및 게른하르)는 쾨펜로트로 합병할 것을 꾀했다. 1972년 7월 11일에 제정되어 1972년 8월 1일에 발효된 법률에 의해, 볼퍼본과 (자치체 대표의 의사에 반하여) 듀델스하임은 뷔딩겐에 합병되었다[13]。미텔그륀다우의 합병 상대에 관한 소송은, 후에 행정 재판소에서 기각되었다.[13]

'''군역 재편'''

뷔딩겐 군의 폐지를 수반하는 군역 재편은, 지역 관계자들의 격렬한 저항과 엄중한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현재의 군 분할 결정은, 주 의회의 FDP 의원단의 1971년 8월 28일의 구상에 기초하고 있다. 뷔딩겐시는, 프리트베르크 군으로의 편입을 압도적 다수로 부결하고, 하나우 군으로의 편입에 찬성표를 던졌다. 편입 협정은, 1972년 4월 19일에 뷔딩겐에서 서명되었다. 헤센 주 의회는, 위의 결정을 무시한 1972년 7월 11일의 재편성 법률에 의해, 1972년 8월 1일의 발효로 현재의 군 구성을 구축했다[13]

4. 행정

뷔딩겐은 2011년 기준 개신교 신자가 57.9%, 로마 가톨릭 신자가 13.9%이며, 기타 종교 신자 또는 무종교인은 28.2%이다.

뷔딩겐은 다음 도시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3]

국가도시주/지역체결일
체코브룬탈모라바-실레지아주2001년 4월 28일
벨기에기스텔웨스트플란데른주40년 이상
독일헤르츠베르크브란덴부르크주1990년 9월 27일
프랑스루데악코트다르모르주1983년 5월 28일
루마니아세베슈알바주2007년
미국틴리 파크일리노이주1989년 10월



뷔딩겐의 자매 도시 심볼 마크

  • 기스텔: 지역 재편 이전부터 뷔딩겐의 시구 중 하나인 아우렌디바흐와 자매 도시 협정이 맺어졌다.[17]
  • 루데악: 1983년 5월 28일 양 도시의 시장 이브 로퍼와 에버하르트 바우너에 의해 자매 도시 협정이 체결되었다. 매년 봄, 볼프강-에른스트-김나지움과 슐레 암 도르베르크의 학생들은 루데아크의 학생들과 교환 유학을 한다.[18]
  • 틴리 파크: 1989년 10월, 공자 페르디난트 츠 이젠부르크 운트 뷔딩겐과 뷔딩겐에 주재했던 패트릭 E. 레어 대위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자매 도시 관계가 시작되었다.[19]
  • 헤르츠베르크: 독일 재통일 이전인 1990년 9월 27일에 자매 도시 협정이 체결되었다. 동서독 장벽이 무너지기 수년 전부터 뷔딩겐 복음주의 교회와 헤르츠베르크 복음주의 교회 간의 교류가 있었다.[20]
  • 브룬탈: 2001년 4월 28일에 자매 도시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9년 당시 브룬탈 시장 페트르 크레이치가 자매 도시를 찾던 중, 군수 그나들을 통해 뷔딩겐 시에 연락이 닿았다.[21]
  • 세베슈: 2007년에 뷔딩겐의 시구 미헬라우, 볼퍼르본, 린더뷔겐, 폰하우젠과 세베슈 간의 자매 도시 관계를 맺기 위한 첫 접촉이 이루어졌다.[22]

4. 1. 시의회

뷔딩겐 시의회는 2011년 3월 27일 선거 이후 37석으로 구성되어 있다.[14]

4. 2. 시장

FWG 뷔딩겐 소속 에리히 슈파머는 2003년 10월 12일 선거에서 58.5%의 득표율로 뷔딩겐 시장에 처음 당선되었다. 이 선거의 투표율은 51.0%였다.[15] 그는 2009년 9월 27일 선거에서 56.3%의 득표율로 재선되었으며, 당시 투표율은 71.7%였다.[16]

4. 3. 자매 도시

뷔딩겐은 다음 도시들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3]

국가도시주/지역체결일
체코브룬탈모라바-실레지아주2001년 4월 28일
벨기에기스텔웨스트플란데른주40년 이상
독일헤르츠베르크브란덴부르크주1990년 9월 27일
프랑스루데악코트다르모르주1983년 5월 28일
루마니아세베슈알바주2007년
미국틴리 파크일리노이주1989년 10월



각 도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 기스텔: 지역 재편 이전부터 뷔딩겐의 시구 중 하나인 아우렌디바흐와 자매 도시 협정이 맺어졌다.[17]
  • 루데악: 1983년 5월 28일 양 도시의 시장 이브 로퍼와 에버하르트 바우너에 의해 자매 도시 협정이 체결되었다. 매년 봄, 볼프강-에른스트-김나지움과 슐레 암 도르베르크의 학생들은 루데아크의 학생들과 교환 유학을 한다.[18]
  • 틴리 파크: 1989년 10월, 공자 페르디난트 츠 이젠부르크 운트 뷔딩겐과 뷔딩겐에 주재했던 패트릭 E. 레어 대위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자매 도시 관계가 시작되었다.[19]
  • 헤르츠베르크: 독일 재통일 이전인 1990년 9월 27일에 자매 도시 협정이 체결되었다. 동서독 장벽이 무너지기 수년 전부터 뷔딩겐 복음주의 교회와 헤르츠베르크 복음주의 교회 간의 교류가 있었다.[20]
  • 브룬탈: 2001년 4월 28일에 자매 도시 협정이 체결되었다. 1999년 당시 브룬탈 시장 페트르 크레이치가 자매 도시를 찾던 중, 군수 그나들을 통해 뷔딩겐 시에 연락이 닿았다.[21]
  • 세베슈: 2007년에 뷔딩겐의 시구 미헬라우, 볼퍼르본, 린더뷔겐, 폰하우젠과 세베슈 간의 자매 도시 관계를 맺기 위한 첫 접촉이 이루어졌다.[22]

5. 경제 및 사회 기반 시설

뷔딩겐은 아우토반 A66번 노선 그륀다우=리프로스 분기점이나 A45번 노선 알텐슈타트 분기점을 통해 아우토반망에 연결된다. 남서부 시구는 2007년 건설된 함머스바흐 분기점(A45번 노선)도 이용할 수 있다.[24]

뷔딩겐은 연방 도로 B457번 노선 및 B521번 노선을 따라 위치한다. B457번 도로는 기센에서 니다를 거쳐 A66번 노선의 그륀다우=리프로스 분기점에 이른다. B521번 도로는 뷔헤스를 기점으로 뒤델스하임을 지나 알텐슈타트 및 니데라우를 거쳐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이른다.[24]

뷔딩겐에는 다음과 같은 기업들이 있다.


  • 아큐뮬레이터렌파브리크 조넨샤인(Accumulatorenfabrik Sonnenschein GmbH): 1957년부터 1982년까지, 후에 연방 우정 통신 장관이 된 크리스티안 슈바르츠-실링이 대표를 맡았다. 2000년 이후 엑사이드(Exide GmbH)를 거쳐 엑사이드 코퍼레이션(Exide Corporation)에 인수되었다. 과거의 조넨샤인(Sonnenschein GmbH)과 현재의 엑사이드 테크놀로지(Exide Technologie GmbH)는 여전히 뷔딩겐의 최대이자 가장 중요한 고용주이다.
  • 칼라 케미 드루크파르벤(Color Chemie Druckfarben GmbH): 1980년에 설립되었으며, 수성 염료와 래커를 생산한다. 독일에서 골판지용 페인트 시장 점유율은 약 60%이다. , 오스트리아, 프랑스, 폴란드에 자회사 및 지점을 두고 있다.
  • 레더 첼트지스테메 운트 젤비스(Räder ZeltSysteme und Service AG): 천막 시스템의 제조, 판매, 임대 회사이다.
  • VR 방크 마인-킨치히-뷔딩겐(VR Bank Main-Kinzig-Büdingen): 뷔딩겐에 본사를 두고 있다.


뷔딩겐에는 다음과 같은 공공기관이 있다.

  • 볼프강-에른스트 김나지움
  • 암 도어베르크 본교 과정·실과학교
  • 직업학교
  • 경제학, 경영학, 경제 정보학 직업 고등 전문학교
  • 기초 과정 학교
  • 뷔딩겐-폰하우젠 스트레스 프리 학습 지원 센터 (LFZ 스트레스 프리)
  • 군청(베테라우 군 위원회) 지소
  • 토지 등기소
  • 뷔딩겐 지방 법원
  • 경찰서

5. 1. 교통

뷔딩겐의 주요 간선 도로. 파란색 선은 아우토반, 빨간색 선은 연방도.


뷔딩겐은 아우토반 A66번 노선 그륀다우=리프로스 분기점이나 A45번 노선 알텐슈타트 분기점을 통해 아우토반망에 연결된다. 남서부 시구는 2007년 건설된 함머스바흐 분기점(A45번 노선)도 이용할 수 있다.

뷔딩겐은 연방 도로 B457번 노선 및 B521번 노선을 따라 위치한다. B457번 도로는 기센에서 니다를 거쳐 A66번 노선의 그륀다우=리프로스 분기점에 이른다. 그 과정에서 뷔헤스와 뷔딩겐을 지나 롤바흐, 아울렌디바흐, 폰하우젠 근처를 통과한다. B521번 도로는 뷔헤스를 기점으로 뒤델스하임을 지나 알텐슈타트 및 니데라우를 거쳐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이른다.

뷔딩겐은 기센에서 니다를 거쳐 게른하우젠에 이르는 란-킨치히 철도 연선에 있다. 역은 핵심 시가지(뷔딩겐(오버헤센)역)와 뷔헤스(뷔헤스-뒤델스하임역)에 있다. 양방향으로 60분 간격으로 열차가 발착하며, 러시 시간에는 30분마다 열차가 운행된다. 기센까지는 75분, 게른하우젠 환승으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까지는 55분 만에 도착한다. 란-킨치히 철도는 니다(레기오날반/레기오날 익스프레스 32, 프랑크푸르트/프리트베르크 방면)나 글라우부르크=슈톡하임(레기오날반/레기오날 익스프레스 34, 프랑크푸르트/바트 필벨 방면)에서 환승할 수도 있다.

뷔딩겐역 앞에서는 알텐슈타트, 괴델른, 오르텐베르크, 쾨펜로트, 로네부르크, 함머스바흐, 쇼텐-지헨하우젠, 쇼텐-호엘로츠코프, 프리드베르크 등 주변 지역으로 향하는 11개 버스 노선이 연결된다. 5월 초부터 10월 말까지 주말 및 공휴일에는 포겔스베르거 풀칸-익스프레스(VB-94)가 호엘로츠코프에서 뷔딩겐으로 출발한다.[24]

가장 가까운 국제공항은 프랑크푸르트에 있으며, 자동차로 30~40분 거리에 있다.

5. 2. 기업


  • 뷔딩겐에 본사를 둔 아큐뮬레이터렌파브리크 조넨샤인(Accumulatorenfabrik Sonnenschein GmbH)은 1957년부터 1982년까지, 후에 연방 우정 통신 장관이 된 크리스티안 슈바르츠-실링이 대표를 맡았다. 이 기업은 2000년 이후 엑사이드(Exide GmbH)에, 따라서 엑사이드 코퍼레이션(Exide Corporation)에 속해 있다. 과거의 조넨샤인(Sonnenschein GmbH)과 현재의 엑사이드 테크놀로지(Exide Technologie GmbH)는 여전히 뷔딩겐의 최대이자 가장 중요한 고용주이다.
  • 칼라 케미 드루크파르벤(Color Chemie Druckfarben GmbH)은 1980년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의 제품은 수성 염료와 래커이다. 독일에서 골판지용 페인트의 시장 점유율은 약 60%이다. 칼라 케미는 , 오스트리아, 프랑스, 폴란드에 자회사 및 지점을 두고 있다.
  • 레더 첼트지스테메 운트 젤비스(Räder ZeltSysteme und Service AG)는 천막 시스템의 제조, 판매, 임대 회사이다.
  • VR 방크 마인-킨치히-뷔딩겐(VR Bank Main-Kinzig-Büdingen)은 뷔딩겐에 본사를 두고 있다.

5. 3. 공공 기관

볼프강-에른스트 김나지움

  • 볼프강-에른스트 김나지움
  • 암 도어베르크 본교 과정·실과학교
  • 직업학교
  • 경제학, 경영학, 경제 정보학 직업 고등 전문학교
  • 기초 과정 학교
  • 뷔딩겐-폰하우젠 스트레스 프리 학습 지원 센터 (LFZ 스트레스 프리)

뷔딩겐 구 법원

  • 군청(베테라우 군 위원회) 지소
  • 토지 등기소
  • 뷔딩겐 지방 법원
  • 경찰서

6. 문화 및 관광

목조 건축물이 늘어선 뷔딩겐의 마르크트 광장


뷔딩겐은 헤센의 로텐부르크라고도 불릴 만큼 역사적인 건축물과 잘 보존된 중세 도시 방어 시설로 유명하며, 독일 목조 가옥 거리에 속해 있다.

1503년에 완성된 운터토어(예루살렘 문)는 뷔딩겐의 주요 볼거리 중 하나로, 루트비히 백작의 아들이 예루살렘 순례 후 샤프스 문을 본떠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슈타우펜 왕조 시대에 지어진 뷔딩겐 성은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지금도 이젠부르크 운트 뷔디겐 후작 가문이 살고 있다. 성관 외곽은 방문객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건물 내부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성 뒤편에는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이용된다.

본시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은 슈타이네르네스 하우스로, 완전한 석조 건물이다. 이 건물은 도시 방어 시설의 일부였으며, 뮐 문에 있는 다리 옆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16세기에 지어진 오버호프는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보여주며, 2013년부터 후작령 시대 문서를 보관하는 문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25]

1485년에 건축된 역사적인 시청사는 현재 "호이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뷔딩겐의 역사, 로마 시대 및 중세 시대 출토품, 역사적인 수공예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1] 뷔딩겐에는 이 외에도 뷔딩겐 성관 박물관, 오버호프의 건축 모형 박물관, 50년대 박물관, 운터토어의 잔트로젠 박물관, 슐라크하우스의 정육점 박물관 등 다양한 박물관이 있다.[1]

뷔딩겐에서는 매년 사육제, 오순절, 구시가지 축제, 갈루스 마켓, 뷔딩거 바이나흐츠차우버(크리스마스 마켓)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특히 2년에 한 번씩 7월 둘째 주말에는 중세 축제가 열려 볼거리를 제공한다.

6. 1. 건축물

뷔딩겐은 헤센의 로텐부르크라고도 불린다. 역사적 중심 지구에는 수백 년 전의 건축물이 많이 남아있다. 당시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많은 건물의 1층이 묵직한 사암으로 건설되었다. 보존 상태가 좋은 중세 도시 방어 시설은 뷔딩겐의 볼거리이다. 시벽, 방어탑, 시문의 대부분이 보존되어 있으며, 일부는 사람이 걸어서 통행할 수 있다. 뷔딩겐은 독일 목조 가옥 거리에 속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다리가 있는 운터토어(예루살렘 문)로, 1503년에 완성되었다. 이 문은 루트비히 백작의 아들이 순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예루살렘의 샤프스 문을 본떠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뷔딩겐 성은 슈타우펜 왕조 시대에 지어진 수성으로, 16세기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뷔딩겐 영주 시대부터 이미 성관으로 불렸으며, 현재도 이젠부르크 운트 뷔디겐 후작의 가족이 살고 있다. 성관의 외곽은 방문객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으며, 건물 자체는 가이드 투어를 통해 둘러볼 수 있다. 성관 바로 뒤에는 넓은 공공 성관 공원이 있어, 현재 뷔딩겐 주민들의 휴식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본시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은 슈타이네르네스 하우스이다. 이 건물은 다른 목조 건축과는 달리 완전한 석조 건축물이다. 요새와 같은 벽을 가지고 있으며, 뮐 문에 있는 중요한 다리 옆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다. 이 건물은 도시 방어 시설의 일부였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 건축은 오버호프이다. 16세기의 통 장인의 노후화된 집은 2013년부터 후작령 시대의 문서를 보관하는 문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25]

역사적 시청사는 뷔딩겐 시장의 중심이며, 실내 시장, 무도장, 유희장으로 사용되었고, 상층은 중죄 재판소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호이존 박물관"이 입주해 있으며, 시의회의 의사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육류 상인 박물관이 입주해 있는 슐라크하우스

6. 2. 박물관

1485년에 건축된 역사적인 시청사 내에 호이존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뷔딩겐의 역사, 로마 시대 및 중세 시대의 출토품, 역사적인 수공예품을 주제로 전시하고 있다.[1]

뷔딩겐에는 다음과 같은 박물관들이 있다.[1]

  • 뷔딩겐 성관 박물관
  • 오버호프의 건축 모형 박물관
  • 50년대 박물관
  • 운터토어의 잔트로젠 박물관
  • 슐라크하우스의 정육점 박물관

6. 3. 행사


  • 사육제 일요일에는 전통적으로 운터토어에서 "도시 공략"이 행해진다.
  • 1353년 뷔딩겐 사격회에서 주최하는 하우프트 운트 리터시센이 1535년부터 매년 오순절에 개최된다.
  • 구시가지 축제는 매년 오순절 일요일에 개최된다.
  • 중세 축제는 2년에 한 번(문화의 밤과 격년으로 개최) 7월 두 번째 주말에 개최된다.
  • 란트파르티(교외로의 피크닉)는 9월 두 번째 주말에 개최된다.
  • 갈루스 마켓은 9월 넷째 일요일에 구시가지에서 개최된다.
  • 연극 클럽 "아이네 슈타트 슈필트 테아터"는 헤센의 하계 휴가 시작 전에 오버호프 문화 센터의 야외 극장에서 "여름 무대"를, 10월 말에 빌리-친칸-할레(뷔르거하우스)에서 "겨울 무대"를 상연하고 있다.
  • 뷔딩거 바이나흐츠차우버(직역하면 "뷔딩겐의 크리스마스 마법")는 두 번째 대림절 주말에 개최된다.

참조

[1] 웹사이트 Ergebnisse der letzten Direktwahl aller hessischen Landkreise und Gemeinden https://statistik.he[...] Hessisches Statistisches Landesamt 2022-09-05
[2] 웹사이트 Büdingens Beitrag zum Einstein-Jahr https://web.archive.[...]
[3] 웹사이트 Partnerstädte https://www.buedinge[...] Büdinger Verschwisterungsverein 2021-02-10
[4] 서적 Duden, Aussprachewörterbuch Dudenverl
[5] 뉴스 DOD lists closing dates for 31 Germany bases http://www.stripes.c[...] Stars and Stripes 2007-07-12
[6] 서적 Hexenmeister. Frankfurt am Main
[7] 뉴스 Büdingen: Hexen rehabilitiert http://www.fr-online[...] Frankfurter Rundshau 2012-10-17
[8] 웹사이트 Opfer von Hexenprozessen - Anton Praetorius http://www.anton-pra[...] 2015-07-08
[9] 웹사이트 Anton Praetorius http://www.anton-pra[...] 2015-07-08
[10] 서적 Ich Kämpfe : Der alten Garde des Führers zum 10. Jahrestag der Machtergreifung am 30. Januar 1943. Zentralverlag der NSDAP
[11] 간행물 Unbewältigte Vergangenheit. – Die jüdischen Mitbürger in der Zeit der nationalsozialistischen Verfolgung (1933–1945). Chronik Düdelsheim – 792–1992.
[12] 서적 Little siegfried-line: Die Geschichte der Wetterau-Main-Tauber-Stellung. S. Roderer Verlag, Regensburg
[13] 웹사이트 Gesetz zur Neugliederung der Landkreise Büdingen und Friedberg http://www.landesrec[...] 2015-07-09
[14] 웹사이트 2011年3月27日のビューディンゲン市議会議員選挙結果 http://www.statistik[...] ヘッセン州統計局 2015-07-10
[15] 웹사이트 2003年10月12日のビューディンゲン市長選挙結果 http://www.statistik[...] ヘッセン州 2015-07-10
[16] 웹사이트 2009年9月27日のビューディンゲン市長選挙結果 http://www.statistik[...] ヘッセン州統計局 2015-07-10
[17] 웹사이트 Partnerstädte - Gistel in Belgien http://www.stadt-bue[...] 2015-07-11
[18] 웹사이트 Partnerstädte - Loudéac in Frankreich http://www.stadt-bue[...] 2015-07-11
[19] 웹사이트 Partnerstädte - Tinley Park in den USA http://www.stadt-bue[...] 2015-07-11
[20] 웹사이트 Partnerstädte - Herzberg in Deutschland http://www.stadt-bue[...] 2015-07-11
[21] 웹사이트 Partnerstädte - Bruntal in Tschechien http://www.stadt-bue[...] 2015-07-11
[22] 웹사이트 Partnerstädte - Sebeş in Rumänien http://www.stadt-bue[...] 2015-07-11
[23] 뉴스 Ortsumgehung Orleshausen: Chance für neues Konzept? http://www.kreis-anz[...] Kreis-Anzeiger 2014-02-19
[24] 웹사이트 Vogelsberger Vulkan-Express http://www.vgo.de/vg[...] 2015-07-11
[25] 뉴스 Akten in Baufälligem Bandhaus. FAZ 201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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