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티슬라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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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티슬라프 2세는 1055년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1세 사후 모라바의 올로모우츠 공작이 되었으나, 형과의 갈등으로 헝가리로 망명했다가 돌아와 보헤미아 공작이 되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며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에 대항했고, 1085년 하인리히 4세로부터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되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1092년 사냥 중 사망했으며, 국내 정치에서 프라하 주교의 영향력을 줄이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외국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프르셰미슬 왕조의 위상을 높였다.
1055년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이후 모라바의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형 스피티흐네프 2세와의 분쟁으로 헝가리로 망명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복귀했고 형과 화해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세 번 결혼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아는 조산으로 사망했다. 그는 1057년에 헝가리의 안드라스 1세의 딸인 아델라이드와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아델라이드는 1061년에 사망했다. 1062년, 브라티슬라프는 폴란드의 카지미르 1세의 딸인 스비아토슬라바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프라하의 주교 야로미르와 자주 갈등을 겪었으며, 보헤미아 국내 정치에서 프라하 주교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 1063년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재설립하고 1070년 비셰흐라드 참사회를 창설한 것이 그 예시이다. 비셰흐라드 참사회는 프라하 주교와는 별개로 성좌에 직접 속해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프라하 주교의 권한을 억제하여 보헤미아 왕권 강화에 이바지했고, 후대 통치자들이 더욱 통일된 국가를 통치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2. 생애
1061년 형 스피티흐네프 2세가 사망하면서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공작으로 즉위했다. 1063년에는 모라바 주교구를 설립했지만, 프라하 주교였던 동생 야로미르와 갈등을 빚었다. 야로미르는 1063년 브라티슬라프가 올로모우츠에 새로운 모라비아 교구를 설립한 것을 무시했다. 야로미르는 심지어 프라하에서 제거되어 모라비아로 옮겨진 유물을 무력으로 되찾기까지 했다.
1070년 작센 공작 마그누스와 노르트하임의 오토, 바이에른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고, 1071년에는 폴란드의 공작 볼레스와프 2세가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1073년 8월, 브라티슬라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군대를 물리쳤다.
브라티슬라프는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에 대항하여 하인리히 4세를 지지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고, 1083년에는 보헤미아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입성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와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모두 브라티슬라프가 그의 선임자들이 누렸던 미트라와 튜닉을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티슬라프는 하인리히를 지지했다.
1076년, 작센 전쟁에서 승리한 하인리히 4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마이센 변경백령, 라우지츠 변경백령 및 작센의 오스트마르크 지역을 맡겼다. 하인리히 4세가 이 두 지역에 몇몇 소영역을 더하여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준 것은 바이에른 공국의 일부를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으로 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이 지역을 장악하려 시도했으나, 1082년 5월 12일 마일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2세에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085년 마인츠의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는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왕위를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수여했다. 1085년 6월 15일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보헤미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했다. 1086년 6월 15일, 브라티슬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트리어 대주교 에길베르트에 의해 보헤미아 왕 (보헤미아 왕으로는 브라티슬라프 1세)으로 대관되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1080년 로마 교황청에 슬라브 전례 사용 허가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청원은 1032년 프라하 인근 사자바에 세워져 여전히 운영 중이던 "슬라브"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
1092년 1월 14일 사냥 도중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비셰흐라트에 안치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형제들과의 갈등
1055년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이후 모라바의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형 스피티흐네프 2세와의 분쟁으로 헝가리로 망명했다. 헝가리의 지원으로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복귀한 후 형과 화해했다.
1061년 형 스피티흐네프 2세가 사망하면서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공작으로 즉위했다. 1063년에는 모라바 주교구를 설립했지만, 프라하 주교였던 동생 야로미르와 갈등을 빚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올로모우츠 주교구의 지위를 높이고 프라하 주교의 지위를 낮추려 했으며, 야로미르를 지지하는 보헤미아 귀족들은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모라비아를 강화하기 위해 이 지역을 둘로 나누어 두 동생 콘라트와 오토에게 각각 맡겼다. 또한, 궁정을 프라하 성에서 비셰흐라트로 이전하고, 1070년에는 코레기아트 예배당을 창설했다.
내부적으로 권력을 강화하는 한편, 혼인 정책을 통해 외부 지원자를 확보하려 했다. 헝가리 왕 언드라시 1세의 딸 아델하이드와 결혼했고, 그녀가 사망한 후에는 폴란드 공작 카지미에시 1세의 딸 스바토바와 재혼하여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러나 1070년 및 1071년 양국 국경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1071년 가을 하인리히 4세가 중재하여 마이센에서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1073년 8월, 브라티슬라프 2세는 하인리히 4세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군대를 물리쳤다.
2. 2. 보헤미아 공작 즉위와 내정
1055년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이후 모라바의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형 스피티흐네프 2세와의 분쟁으로 헝가리로 망명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복귀했고 형과 화해했다.
1061년 스피티흐네프 2세가 사망하면서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공작으로 즉위했다. 1063년에는 모라바 주교구를 설립했지만, 프라하 주교였던 동생 야로미르와 갈등을 빚었다. 야로미르는 보헤미아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브라티슬라프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저항을 이어갔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모라비아를 둘로 나누어 두 동생 콘라트와 오토에게 맡겼다. 올로모우츠 주교구로의 승격은 모라비아를 강화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또한, 궁정을 프라하 성에서 비셰흐라트로 이전하고, 1070년에 코레기아트 예배당을 창설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헝가리 왕 언드라시 1세의 딸 아델하이드와 결혼했으나, 그녀가 사망한 후 폴란드 공작 카지미에시 1세의 딸 스바토바와 재혼하여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관계 개선을 꾀했다. 그러나 1070년과 1071년 양국 국경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071년 가을 하인리히 4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와 볼레스와프 2세를 마이센으로 불러 평화 협정을 맺게 했지만, 볼레스와프 2세는 곧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1070년 작센 공작 마그누스, 노르트하임 공작 오토의 반란이 일어났고, 1071년에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2세가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1073년 8월 브라티슬라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군을 물리쳤다.
1081년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고, 1083년 브라티슬라프 2세가 이끄는 보헤미아 군대가 로마에 입성했다. 하인리히 4세를 지지했던 브라티슬라프 2세는 교황과의 우호 관계를 위해 슬라브식 전례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076년, 서임권 투쟁에서 승리한 하인리히 4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마이센 변경백령, 라우지츠 변경백령 및 작센의 오스트마르크 지역을 맡겼다. 1082년 5월 12일 마일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2세에게 승리했지만, 이 지역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1085년 마인츠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는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왕위를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수여했다. 1086년 6월 15일, 브라티슬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트리어 대주교 에길베르트에 의해 보헤미아 왕 (보헤미아 왕으로는 브라티슬라프 1세)으로 대관되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의 만년은 동생 콘라트 폰 브륀 및 장남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1092년 사냥 중 사고로 낙마하여 사망했으며, 유해는 비셰흐라트에 안장되었다.
2. 3.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1055년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이후 모라바의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형 스피티흐네프 2세와의 분쟁으로 헝가리로 망명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복귀했고 형과 화해했다.
1061년 형 스피티흐네프 2세가 사망하면서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공작으로 즉위했다. 1063년 모라바 주교구를 설립했지만, 프라하 주교였던 동생 야로미르와 갈등을 빚었다. 야로미르는 브라티슬라프가 올로모우츠에 새로운 모라비아 교구를 설립한 것을 무시했다. 심지어 프라하에서 제거되어 모라비아로 옮겨진 유물을 무력으로 되찾기까지 했다.
1070년 작센 공작 마그누스와 노르트하임의 오토, 바이에른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고, 1071년에는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2세가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1073년 8월, 브라티슬라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군대를 물리쳤다. 하인리히 4세는 폴란드를 침공했지만, 새로운 작센 반란으로 인해 1075년에 다시 돌아와야 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랑엔잘차 전투에서 하인리히 4세를 도와 반란군을 물리쳤고, 보헤미아군은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하인리히 4세는 야로미르를 게르만으로 데려가 게브하르트라는 이름으로 재상으로 삼아 브라티슬라프 2세는 크게 안도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하인리히 4세의 통치에 반대한 반왕들에 대항하는 전쟁에도 참여했다. 플라르크하임 전투에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지원군 덕분에 황제군은 슈바벤 공작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이길 수 있었고, 브라티슬라프 2세는 루돌프의 황금 창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이후 황금 창은 국가 행사에서 브라티슬라프 2세 앞에서 운반되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고, 1083년 브라티슬라프 2세가 이끄는 보헤미아 군대가 로마에 입성했다. 하인리히 4세를 지지했던 브라티슬라프 2세는 교황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 슬라브식 전례를 요청했지만, 교황은 이를 거절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가 선임자들이 누렸던 미트라와 튜닉을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을 확인했지만, 브라티슬라프 2세는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에 대항하고 하인리히 4세를 지지하여 미트라의 중요성은 무효화되었다.
1082년 마일베르크에서 다시 반란군을 격퇴했고, 하인리히 4세는 이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1085년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왕의 칭호를 부여했다. 1085년 6월 15일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보헤미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슬라브족이 거주하는 마이센과 라우지츠를 탐냈지만, 하인리히 4세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들을 얻지 못했다. 1075년부터 1086년까지 로어라우지츠를 통치했지만, 1088년 마이센 변경백 에그베르트 2세의 반란으로 하인리히 4세는 이 지역을 오스트마르크의 하인리히에게 양도했다. 이후 브라티슬라프 2세는 하인리히 4세의 군사적 모험에 냉담해졌고, 충성심은 유지했지만 군사적 지원은 자제했다.
2. 4. 보헤미아 왕 즉위
1055년 아버지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사망한 이후 모라바의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즉위했지만, 형 스피티흐네프 2세와의 분쟁으로 헝가리로 망명했다. 그러나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올로모우츠 공작으로 복귀했고 형과 화해했다.
1061년 형 스피티흐네프 2세가 사망하면서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공작으로 즉위했다. 1063년에는 모라바 주교구를 설립했지만, 프라하 주교였던 동생 야로미르와 갈등을 빚었다. 야로미르는 1063년 브라티슬라프가 올로모우츠에 새로운 모라비아 교구를 설립한 것을 무시했다. 야로미르는 심지어 프라하에서 제거되어 모라비아로 옮겨진 유물을 무력으로 되찾기까지 했다.
1070년 작센 공작 마그누스와 노르트하임의 오토, 바이에른 공작이 반란을 일으켰고, 1071년에는 폴란드의 공작 볼레스와프 2세가 보헤미아를 침공했다. 1073년 8월, 브라티슬라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군대를 물리쳤다.
브라티슬라프는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에 대항하여 하인리히 4세를 지지했다. 1081년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고, 1083년에는 보헤미아 군대를 이끌고 로마에 입성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와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모두 브라티슬라프가 그의 선임자들이 누렸던 미트라와 튜닉을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티슬라프는 하인리히를 지지했다.
1076년, 작센 전쟁에서 승리한 하인리히 4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마이센 변경백령, 라우지츠 변경백령 및 작센의 오스트마르크 지역을 맡겼다. 하인리히 4세가 이 두 지역에 몇몇 소영역을 더하여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준 것은 바이에른 공국의 일부를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으로 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이 지역을 장악하려 시도했으나, 1082년 5월 12일 마일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2세에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085년 마인츠의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는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왕위를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수여했다. 1085년 6월 15일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보헤미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했다. 1086년 6월 15일, 브라티슬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트리어 대주교 에길베르트에 의해 보헤미아 왕 (보헤미아 왕으로는 브라티슬라프 1세)으로 대관되었다.
1092년 1월 14일 사냥 도중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비셰흐라트에 안치되었다.
2. 5. 교황과의 관계
브라티슬라프 2세는 1080년 로마 교황청에 슬라브 전례 사용 허가를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 청원은 1032년 프라하 인근 사자바에 세워져 여전히 운영 중이던 "슬라브"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
1055년 아버지의 사후 모라비아의 일부 (올로모우츠)를 통치하게 되었으나, 형 스피티흐네프 2세와의 분쟁으로 헝가리로 도망쳤다. 이후 헝가리의 지원을 받아 모라비아-올로모우츠 공작으로 복귀했다.
1061년 형이 사망한 후 브라티슬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공작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통치는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동생들과의 다툼으로 채워졌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1068년 동생 야로미르를 프라하 주교로 임명하면서, 즉시 신설된 (1063년) 올로모우츠 주교구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프라하 주교의 지위를 낮추었다. 야로미르에게도 보헤미아 귀족들 중 많은 지지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브라티슬라프의 통치 기간 동안 끊임없는 저항을 이어갔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모라비아를 강화하기 위해 이 지역을 둘로 나누어 두 동생 콘라트와 오토에게 각각 맡겼다. 또한, 궁정을 프라하 성에서 비셰흐라트로 이전하고, 여기에 유명한 코레기아트 예배당 (프라하)을 창설했다 (1070년).
브라티슬라프 2세는 폴란드 공작 카지미에시 1세의 딸 스바토바와의 재혼을 통해, 전통적으로 관계가 좋지 않던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070년 및 1071년 양국의 국경 지역에서 우발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보헤미아 공작과 폴란드 공작은 로마 왕 (및 로마 황제)의 신하였기 때문에, 1071년 가을 하인리히 4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와 볼레스와프 2세를 마이센으로 불러 평화 협정을 맺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고, 볼레스와프 2세는 그 후 곧 보헤미아를 침공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인리히 4세는 1072년 이에 응하여 출병했지만,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의 싸움 (서임권 투쟁) 때문에 이를 수행할 수 없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작센 귀족과의 전투 (작센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하인리히 4세의 지원자였으며, 1081년 하인리히 4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전할 군대를 소집했다. 1083년, 브라티슬라프 2세와 그의 보헤미아인들은 하인리히 4세와 함께 로마에 입성했다. 보헤미아는 슐레지엔를 둘러싼 폴란드와의 국경 분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호메르크 전투 (1075년) 및 플라르히하임 전투 (1080년)에 참전하여, 반란을 일으킨 독일 귀족을 토벌하고, 이탈리아에 출병했다. 1076년 작센 전쟁에서 승리한 하인리히 4세는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마이센 변경백령, 라우지츠 변경백령 및 작센의 오스트마르크 지역을 맡겼다.
하인리히 4세가 이 두 지역에 몇몇 소영역을 더하여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준 것은 바이에른 공국의 일부를 오스트리아 변경백령으로 한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는 이 지역을 장악하려 시도했으나, 1082년 5월 12일 마일베르크에서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2세에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1085년에는 오스트리아에 있던 영토마저 포기해야 했지만, 마인츠의 제국 회의에서 하인리히 4세는 보헤미아와 폴란드의 왕위를 브라티슬라프 2세에게 수여했다. 폴란드 왕위가 폴란드 전역에 대해 실효성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이 칭호는 슐레지엔 지역이 확실히 보헤미아 영토에 편입되었음을 의미하며, 상당한 위신을 얻을 수 있었다. 1086년 6월 15일, 브라티슬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트리어 대주교 에길베르트에 의해 보헤미아 왕 (보헤미아 왕으로는 브라티슬라프 1세)으로 대관되었다.
2. 6. 말년과 사망
1085년 6월 15일에 프라하에서 대관식을 치르면서 보헤미아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했다. 1086년 6월 15일, 브라티슬라프 2세는 프라하에서 트리어 대주교 에길베르트에 의해 보헤미아 왕 (보헤미아 왕으로는 브라티슬라프 1세)으로 대관되었다.
브라티슬라프 2세의 만년 통치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모두에 권위가 미치고 안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동생 콘라트 폰 브륀 및 장남 브르제티슬라프 2세와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1092년 1월 14일에 사냥 도중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비셰흐라트(Vyšehrad)에 안치되었다. 1092년 사냥 중의 사고로 낙마하여 사망했으며, 유해는 비셰흐라트에 안장되었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4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사후 곧바로 후계자 다툼을 시작했고, 보헤미아 왕위는 소멸했다. 보헤미아 왕위가 부활하는 것은 셋째 아들 브라티슬라프 1세의 손자인 증손 오타카르 1세 시대이다.
3. 결혼과 자녀
아델라이드와의 사이에서는 유디트(1056/58-1086)와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2세 (약 1060년–1100년 12월 22일)를 낳았으며, 유디트는 폴란드의 카지미르 1세의 아들인 블라디슬라프 1세 헤르만과 결혼했다.
스비아토슬라바와의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의 보르지보이 2세 (약 1064년-1124년 2월 2일), 보헤미아의 블라디슬라프 1세 (-1125년 4월 12일), 보헤미아의 소베슬라프 1세 (-1140년 2월 14일)를 포함한 다섯 자녀를 두었다.
4. 평가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정책은 12세기의 선례가 되었고, 13세기 초 보헤미아가 영구적인 왕국 지위를 얻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외국 공주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프르셰미슬 왕조의 위상을 유럽 왕조들 사이에서 높였다. 브라티슬라프 2세의 아버지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1019년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를 납치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브라티슬라프 2세의 후계자들은 중앙 및 동유럽의 주요 왕가들과의 왕조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4. 1. 유산
브라티슬라프 2세는 프라하의 주교 야로미르와 자주 갈등을 겪었으며, 보헤미아 국내 정치에서 프라하 주교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 1063년 올로모우츠 주교구를 재설립하고 1070년 비셰흐라드 참사회를 창설한 것이 그 예시이다. 비셰흐라드 참사회는 프라하 주교와는 별개로 성좌에 직접 속해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프라하 주교의 권한을 억제하여 보헤미아 왕권 강화에 이바지했고, 후대 통치자들이 더욱 통일된 국가를 통치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한 브라티슬라프 2세의 정책은 12세기의 선례가 되었고, 13세기 초 보헤미아가 영구적인 왕국 지위를 얻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한, 외국 공주와의 결혼 동맹을 통해 프르셰미슬 왕조의 위상을 유럽 왕조들 사이에서 높였다. 브라티슬라프 2세의 아버지 보헤미아 공작 브르제티슬라프 1세가 1019년 슈바인푸르트의 유디트를 납치해야 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브라티슬라프 2세의 후계자들은 중앙 및 동유럽의 주요 왕가들과의 왕조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참조
[1]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 A Thousand Years of Europe’s History
[2]
서적
Dějiny národa českého v Čechách i v Morav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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