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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나 공 카를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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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아나 공 카를로스는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외손자이자 나바라 왕국의 상속자였다. 그는 어머니 블랑슈 1세가 사망한 후 아버지 후안 2세와 나바라 왕위 계승을 두고 갈등을 겪었으며, 나바라 내전과 카탈루냐 반란을 경험했다. 그는 클레베의 아그네스와 결혼했으나 자녀 없이 사별했고, 세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카를로스는 1461년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으며, 사인은 폐결핵으로 알려져 있지만 독살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아라곤어로 번역하고 '나바라 왕의 연대기'를 저술하는 등 문화적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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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나 공 카를로스
기본 정보
이름카를로스 4세
다른 이름카를로스 데 비아나
로마자 표기Kareullos de Biana
바스크어Karlos IV.a
신분
작위비아나 공, 지로나 공, 세르베라 백작, 간디아 공작
주장한 왕위나바라 왕국의 왕 (1441년 - 1461년, 사실상)
계승 순위나바라 왕위 계승자
통치 기간1441년 – 1461년 (사실상)
선임블랑카 1세와 후안 2세
후임블랑카 2세
섭정후안 2세 (도전자)
가문
가문트라스타마라 가문
아버지후안 2세
어머니블랑카 1세
혼인
배우자이네스 데 클레베리스
출생과 사망
출생일1421년 5월 29일
출생지페냐피엘
사망일1461년 9월 23일
사망지바르셀로나
기타 정보
카를로스 데 비아나
카를로스 데 비아나

2. 배경

카를로스의 어머니 블랑카 1세는 카를로스 3세의 딸이자 상속녀였다. 외할아버지 카를로스 3세와 어머니 블랑카 1세는 모두 나바라 왕국을 카를로스에게 물려주려 했고, 카를로스의 왕위 계승권은 코르테스(의회)에 의해 인정받았다. 그러나 1441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아버지인 후안 2세는 아들 카를로스를 배제하고 왕위를 차지했다.[1]

1423년 카를로스는 외할아버지 카를로스 3세로부터 비아나 공 작위를 받고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공식 지명되었다. 1439년에는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의 딸 아녜스와 결혼했지만,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5] 1441년 어머니 블랑카 1세가 사망한 후, 카를로스는 나바라 왕위를 놓고 아버지 후안 2세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결국 나바라 내전으로 이어졌다.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세력은 그를 "나바라 왕 '''카를로스 4세'''"(Carlos IVan)라고 불렀다.

어머니 블랑카 1세는 유언으로 카를로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명시했지만, 아버지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후안 2세는 이 유언을 따르지 않고 왕위를 독차지했으며, 1444년 후아나 엔리케스와 재혼하면서 부자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진 나바라 귀족들이 카를로스의 편에 섰고, 카를로스는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패배하여 투옥되었다. 이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숙부이자 아라곤 왕나폴리 왕이었던 알폰소 5세에게 망명했다.[6]

1458년 숙부 알폰소 5세가 사망하고 아버지 후안 2세가 아라곤 왕위까지 계승하자, 카를로스는 시칠리아로 이주했다. 1460년 아버지로부터 화해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카를로스가 카스티야와 내통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화해는 무산되고 카를로스는 다시 투옥되었다. 아버지 후안 2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카탈루냐가 카를로스의 투옥에 항의하자, 1461년 그는 석방되어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으로 알려졌으나, 계모 후아나 엔리케스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도 퍼졌다.[7][8]

궁정에서 성장한 카를로스는 지적이고 성실한 성품을 지녔으며, 음악과 문예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했고, 투옥 중에는 나바라 역대 왕들의 연대기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 나바라 귀족이나 카탈루냐 세력에게 명분으로 이용당하는 측면이 있었으며, 아버지에게 거듭 반항하다 불운한 생애를 마감했다.[9][10]

3. 혼인과 자녀

비아나 공 카를로스는 1439년 9월 30일 나바라의 올리테에서 클레베의 아그네스 (1422-1446)와 혼인했다. 아그네스는 클레페 공작 아돌프 1세와 부르고뉴의 마리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며,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3세 "선량공"의 여동생이었다. 하지만 아그네스는 결혼한 지 8년 만인 1448년 4월 6일, 26세의 나이로 자녀 없이 세상을 떠났다.

아내 아그네스가 사망한 후, 카를로스는 브리안다 데 바카를 첩으로 맞이했고, 1449년경 그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아들을 얻었다. 그는 재혼을 원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이사벨라 (1426–1494)와의 혼담이 오갔다. 이사벨라는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의 미망인이었으나, 프랑수아 1세가 1450년 7월 18일에 사망한 이후 프랑스 국왕 샤를 7세가 이 결혼을 반대했다.

이후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공주 (1436–1463)와의 결혼이 합의되었다. 카타리나는 포르투갈 국왕 에두아르두 1세의 딸이었으나, 이 결혼은 계속 지연되다가 카를로스가 1461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카를로스는 세 명의 첩과의 사이에서 세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비고
안나1451-1477메디나셀리 백작부인, 제5대 메디나셀리 백작 루이스 데 라 세르다 이 데 라 베가와 결혼
필리프1456–1488팔레르모 대주교
후안?–1526우에스카 주교


4. 부왕과의 갈등 및 나바라 내전

1441년 어머니 블랑슈 1세가 사망한 후, 나바라의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졌다. 블랑슈 1세는 유언으로 아들 카를로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했으나, 남편인 후안 2세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후안 2세는 이 유언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며 부자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6]

갈등은 1444년 후안 2세가 카스티야 귀족 여성인 후아나 엔리케스와 재혼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계모가 된 후아나 엔리케스는 카를로스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곧 아들인 페르난도(훗날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를 낳은 후 노골적으로 나바라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후안 2세에 반대하던 나바라 귀족들은 카를로스를 지지했고, 결국 내전이 발발했다. 지지자들은 카를로스를 "나바라 왕 '''카를로스 4세'''"(Carlos IVan)라고 칭했다. 카를로스는 카스티야의 후안 2세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452년 아버지에게 패배하여 포로 신세가 되었다.[1][6]

카를로스는 아버지 사후에 왕위를 주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나폴리로 망명하여 숙부인 알폰소 5세에게 의탁했다.[1][6] 1458년 알폰소 5세가 사망하고 아버지 후안 2세가 아라곤 왕위까지 계승하자, 카를로스에게는 시칠리아와 나폴리의 왕위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는 1459년 아버지와 화해하고 나바라로 돌아왔다.[1][6]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카를로스가 카스티야의 이사벨과의 결혼을 추진하자, 후안 2세는 이를 카스티야와의 내통으로 의심하여 1460년 카를로스를 다시 투옥시켰다.[1][7] 이에 카탈루냐인들이 카를로스를 지지하며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확산되는 반란에 직면한 후안 2세는 결국 아들을 석방하고, 그를 카탈루냐의 영구 총독이자 왕국의 상속자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1][7]

1461년 석방된 카를로스는 바르셀로나에서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같은 해 결핵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었지만, 계모 후아나 엔리케스에 의한 독살설이 끊이지 않았다.[7][8]

카를로스는 궁정 교육을 받아 지적이고 성실했으며 음악과 문예에 조예가 깊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카스티야어로 번역하고, 투옥 중에는 나바라 역대 왕들의 연대기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 귀족 세력이나 카탈루냐인들에게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아버지에게 거듭 반항하며 불운한 삶을 마감했다.[9][10]

5. 카탈루냐의 반란과 죽음

1458년 숙부 알폰소 5세가 사망하고 아버지 후안 2세가 아라곤 왕위를 계승하자, 카를로스는 시칠리아로 이주했다. 1460년, 아버지로부터 화해 제의를 받았으나, 카를로스가 카스티야와 내통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화해는 무산되고 카를로스는 다시 투옥되었다.

아버지 후안 2세에게 반발하던 카탈루냐는 카를로스의 투옥에 강하게 항의했고, 결국 1461년 카를로스는 석방되어 바르셀로나로 갔다. 바르셀로나 시민들은 카를로스를 열렬히 환영했지만[7][8], 그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채 그해 9월 23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으로 알려졌으나, 계모인 후아나 엔리케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1][7][8]

카를로스는 궁정에서 자라 지적이고 성실했으며, 음악과 문학을 아꼈던 교양 있는 왕자였다.[1][9][10]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아라곤어로 번역했으며, 이 번역본은 1509년 사라고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또한 투옥 기간 동안 나바라 왕들의 연대기인 《Crónica de los reyes de Navarra|크로니카 데 로스 레예스 데 나바라spa》를 저술하기도 했다.[1]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 귀족들이나 카탈루냐에게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였고, 아버지에게 계속 반항하며 불우한 생애를 마감했다.[9][10]

6. 문화적 유산

카를로스는 음악과 문학을 좋아했던 교양 있고 상냥한 왕자였으며[1], 지적이고 성실한 성품을 지녔다.[9][10]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아라곤어로 번역했으며, 이 번역본은 1509년 사라고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1] 또한, 투옥되어 있는 동안 나바라 왕들의 연대기인 ''나바라 왕의 연대기''를 저술하기도 했다.[1][9][10]

7. 가계


  • '''아버지''': 아라곤의 후안 2세
  • '''어머니''': 나바라의 블랑슈 1세
  • * '''친조부모'''
  • ** '''할아버지''':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2]
  • ** '''할머니''': 알부케르케의 레오노르[2]
  • * '''외조부모'''
  • ** '''할아버지''': 나바라의 카를로스 3세
  • ** '''할머니''':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 * '''친증조부모'''
  • ** '''증조할아버지''': 카스티야의 후안 1세[3]
  • ** '''증조할머니''': 아라곤의 레오노르[3]
  • ** '''증조할아버지''': 산초 알폰소[4]
  • ** '''증조할머니''':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4]
  • * '''외증조부모'''
  • ** '''증조할아버지''': 나바라의 카를로스 2세
  • ** '''증조할머니''': 발루아의 조안
  • ** '''증조할아버지''':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
  • ** '''증조할머니''': 후아나 마누엘

참조

[1] 서적 Charles (Prince of Viana)
[2] 서적 John II of Aragon
[3] 서적 Ferdinand I, King of Aragon
[4] 서적 Historia genealogica da casa real portugueza https://archive.org/[...] Lisboa Occidental
[5] 서적 バード
[6] 서적 バード、田澤、関、西川
[7] 서적 バード、田澤、関
[8] 서적 西川
[9] 서적 田澤
[10] 서적 西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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