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 브류하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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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빅토르 브류하노프는 소련의 기술자이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초대 소장이다. 1935년에 태어나 1959년 타슈켄트 국립대학을 졸업한 후 앙그렌 화력 발전소에서 근무했으며, 1970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임명되어 발전소 건설을 지휘했다. 발전소 건설 과정에서 자재 수급의 어려움과 도난 문제로 인해 완공이 지연되었고,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사고 발생을 즉시 인지하지 못했다. 사고 이후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91년 가석방되었으며, 이후 우크라이나 국영 에너지 회사에서 근무하며 체르노빌 사고의 여파를 청산하는 일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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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브류하노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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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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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빅토르 페트로비치 브류하노프 |
로마자 표기 | Bikteu Peteuropichi Beuryuhanopeu |
개인 정보 | |
출생 | 1935년 12월 1일 |
출생지 | 타슈켄트 |
사망 | 2021년 10월 13일 (85세) |
사망지 | 키이우 |
국적 | 소련, 우크라이나 |
경력 | |
직업 | 엔지니어, 정치인 |
소속 정당 |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
주요 경력 |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소장 (1970년 ~ 1986년) |
사건 | |
주요 사건 | 체르노빌 사고 |
수상 | |
수상 내역 | 노동적기훈장 인민 우정 훈장 레닌 훈장 |
2. 생애
1935년에 유리 기술자와 청소부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교에 진학했으며 1959년에 타슈켄트 국립대학 에너지학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앙그렌 화력 발전소에 취업했다. 이 발전소에서 브류하노프는 탈기 장치 설치인, 급수 펌프 운전기사, 터빈 보조 운전자, 터빈 워크숍 선임 엔지니어, 교대 감독자를 거쳐 1960년에는 워크숍 책임자가 되었다.
소련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자재 부족과 도난 등의 문제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건설은 계속 지연되었다. 발전소가 완공된 뒤에도 브류하노프는 발전소 관련 및 프리피야티 행정, 발전소 확충 업무로 인해 원자로 운영 부문에 관여하지 못했다. 초창기 4기의 원자로를 건설 및 운영한 기술진들이 모두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 부소장 니콜라이 포민이 발전소 운영을 맡게 되었다.
1966년 슬라비안스카 화력 발전소에서 선임 감독과 부 수석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갑자기 그만두고 1970년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소장으로 임명되었다.
3.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건설
3. 1. 소련 정부의 지원과 초기 건설 과정
소련 정부는 1970년 브류하노프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소장으로 임명한 뒤 우크라이나 지방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임지인 우크라이나 지방 북쪽에 위치한 체르노빌은 허허벌판이었다. 브류하노프가 이 사실을 소련 정부에 보고하자 소련 정부는 돈은 얼마든지 써도 좋으니 발전소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브류하노프는 견적서를 작성한 뒤 키이우에 있는 국영은행에 가서 발전소 건설 견적서를 제출했고, 국영은행에서는 그에 맞는 돈을 지급했다. 이렇게 브류하노프는 계속 키이우의 국영은행에서 돈을 타다가 체르노빌에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다. 하지만 돈만 많을 뿐, 자재를 구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고, 그나마도 툭하면 도둑이 와서 자재를 훔쳐가는 바람에, 브류하노프는 자재가 고갈될 때마다 공사를 중단하고 자재를 구하러 다녀야 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원래 1975년 12월에 완공되어야 했지만 이 문제로 인해 몇 년 늦게 완공되었으며, 그나마도 석관은 자재가 부족해서 만들지 못한 채 가동했다. 브류하노프가 국영은행에서 지급받아 발전소를 짓는데 사용한 돈 총액은 대략 정도였다.
3. 2. 건설 지연과 완공
소련 정부는 1970년 브류하노프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소장으로 임명하고 우크라이나 지방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체르노빌은 허허벌판이었고, 브류하노프는 소련 정부에 자재 부족 문제를 보고했다. 소련 정부는 돈을 충분히 지원하며 발전소 건설을 지시했다.
브류하노프는 키이우의 국영은행에서 건설 자금을 받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했다. 하지만 자재를 구하기 어려웠고, 도둑으로 인해 자재가 자주 도난당했다. 이 때문에 브류하노프는 자재가 부족할 때마다 공사를 중단하고 자재를 구해야 했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는 원래 1975년 12월에 완공될 예정이었으나, 몇 년 늦게 완공되었다. 또한, 자재 부족으로 석관은 건설되지 못한 채 가동되었다. 브류하노프가 발전소 건설에 사용한 총액은 대략 정도였다.
4.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브류하노프는 사고 사실을 즉시 인지하지 못했다. 집 앞에 원자력 발전소에서 유출된 흑연 덩어리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구토 증세를 단순히 음식을 잘못 먹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헬기가 많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4. 1. 사고 당시 정황
1986년 4월 2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브류하노프는 자택 앞에 원자력 발전소에서 유출된 흑연 덩어리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고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구토 증세가 나타났으나 단순히 음식을 잘못 먹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헬기가 많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원자력 발전소에 사고가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5. 처벌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혐의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도네츠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주범은 아나톨리 댜틀로프이고 브류하노프는 단순 관리감독 소홀만 적용받았으며, 1991년에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다.
6. 사고 이후
1991년 브류하노프는 가석방 후 관료로 복직했다. 러시아 국제 무역부에서 잠시 일하다가 1995년 키이우로 이주해서 우크라이나 국영 에너지 회사인 우크린테네르고의 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여기서 그는 2015년 12월 80번째 생일까지 일했으며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사고 여파를 청산 및 복구하는 일을 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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