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는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화재 진압을 지휘한 소련의 소방관이다. 그는 사고 당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소방부서의 책임자였으며, 4,000mSv의 방사능 피폭을 무릅쓰고 화재 진압에 참여했다. 텔랴트니코프는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사고 후 우크라이나 내무부 국가 소방국 국장을 역임했다. 그는 2004년 암으로 사망했으며, 키예프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코스타나이주 출신 - 이반 디치코
  • 코스타나이주 출신 - 바실리 레비트
    바실리 레비트는 권투 선수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며, 기원, 역사, 현황, 쟁점, 관련 인물, 사건, 미래 전망, 국제 관계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한다.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1951-2004)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
원어 이름레오니드 페트로비치 텔랴트니코우 (Леонід Петрович Телятніков)
로마자 표기Leonid Petrovich Telyatnikov
출생일1951년 1월 25일
출생지소비에트 연방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코스타나이 주 베덴카 (현재 카자흐스탄)
사망일2004년 12월 2일
사망지우크라이나, 키예프
묻힌 곳바이코베 묘지, 키예프
군 복무
소속소련 내무부 산하 준군사 소방대
우크라이나 내무부 국가 소방청
복무 기간1968년–1995년
계급[[파일:Ussr vs mvd-10.png| 15px]] 소령
[[파일:Ussr vs mvd-11.png| 15px]] 중령
[[파일:Ussr vs mvd-13.png|15px]] 소장
지휘코스타나이 준군사 소방대 대장 (1978–1980)
코스타나이 제69 준군사 소방여단 부대장 (1980–1982)
키예프-스비아토신 구역 소방 안전 부서의 보호 대상 그룹 선임 엔지니어, 키예프 집행위원회 (1982–1983)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제2 준군사 소방여단 대장 (1983–1986)
키예프 화재 테스트 연구소 대장 (1986–1989)
키예프 경찰서 및 집행위원회 규제 및 화재 안전 부서 대장 (1989–1993)
우크라이나 내무부 국가 소방청 부청장 (1993–1995), 청장 (1995)
키예프 자원 소방 회사 사장 (1998)
훈장
주요 훈장소련 영웅 (1986)
레닌 훈장 (1986)
우크라이나 용기 훈장 3등급 (1996)
[영국 소방 조합 메달]
[기타 소련 메달]
개인 정보
배우자라리사 이바노바 텔랴트니코바
자녀올레크 텔랴트니코프, 미하일 텔랴트니코프
기타 활동
추가 정보키예프 "젊은 소방관" 조직 창립자

2. 생애 초반

레오니트 페트로비치 텔랴트니코프는 1951년 1월 25일 소비에트 연방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쿠스타나이 구역(현재 카자흐스탄 코스타나이 구역) 브베덴카 마을에서 태어났다.[1][2]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68년 소방관 경력을 시작하기 전 쿠스타나이 자동차 수리 공장에서 잠시 전기 기술자로 일했다.[1]

3. 소방관 경력

텔랴트니코프는 예카테린부르크의 소방학교를 졸업하고 소방 소위[18] 임관했다. 1968년 스베르들로프스크 소방 기술 아카데미에 생도로 입학하여[1][2] 3년 과정을 마치고 1971년에 졸업, 소련 내무부 (MVD)의 준군사 소방대에 합류했다.[1]

3. 1. 카자흐스탄 근무

1971년 스베르들로프스크 소방 기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소련 내무부 (MVD) 준군사 소방대에 합류하여 카자흐스탄 쿠스타나이 라욘에서 소방 안전 검사관으로 2년간 근무했다.[1] 1973년에는 루드니 행정 위원회 MVD로 전출되어 1년 동안 소방 검사관으로 근무했다.[1] 1974년 모스크바에 있는 MVD 고등 공학 소방 기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1] 1978년에 졸업 후 쿠스타나이로 돌아가 1980년까지 쿠스타나이 시 행정 위원회 MVD 준군사 소방대 대장을 역임했다.[1] 1980년부터 1982년까지는 쿠스타나이의 준군사 소방대 69호의 부대장을 맡았다.[1]

3. 2. 우크라이나 근무

1980년 소방 대령으로 진급한 후 키예프로 이동했다. 키예프 집행 위원회 ROVD 소방 안전 부서의 특수 물체 감독을 위한 그룹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1982년 쿠스타나이에서 키예프로 이주했으며, 키예프-스뱌토신 구 화재 안전부 특수 시설 감독 그룹의 수석 엔지니어로 근무했다.[1] 1983년 소방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키예프 소방서장 및 사단장이 되었다.[1] 같은 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를 담당하는 제2 준군사 소방대의 지휘를 맡았고, 가족과 함께 프리피야트로 이사했다.[1]

4.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는 사진 속 장소의 화재 진압을 지휘했다.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소방부서 책임자로서 1986년 4월에 발생한 폭발 사고 당시 화재 진압을 지휘했다. 텔랴트니코프와 그의 부하들은 4,000mSv의 방사능 피폭을 무릅쓰고 화재 진압을 위해 불타는 발전소 지붕 위로 올라갔다.

4. 1. 사고 당시 상황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는 체르노빌 소방서의 지휘관으로, 사고 당일은 비번이었다. 하지만 프리피야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전화로 경보 신호를 받았다. 그는 새벽 1시 32분에서 33분 사이에 제복으로 갈아입고 부하들을 소집한 후 체르노빌로 향했다.[3] 소방수들이 진압 임무를 시작하고 약 10분 후(1시 45분)에 원자로에 도착하여 전반적인 지휘를 시작하였다.[4][5]

텔랴트니코프는 4호기 제어실을 방문하여 부수석 엔지니어인 아나톨리 댜틀로프로부터 터빈 홀 지붕의 화재는 진압되었고, 3호기 및 환기 블록의 지붕이 우선순위라는 말을 들었다.[7] 그는 3호기 지붕에 올라 최소 5개의 불덩이를 확인했지만, 원자로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그는 피해가 없는 원자로와 기계실의 화재를 진화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다.

그는 육안 조사를 통해 많은 화재의 위치를 파악했다.[6]

> 우리는 4호기의 건물을 조사했다. 부서진 콘크리트 패널로 생긴 구멍을 통해 화재가 관찰되지 않은 케이블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 반응로 홀에서는 불꽃이나 빛과 같은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무엇이었을까? 중앙 홀에는 반응로의 "상단부"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곳에서 탈 것으로 예상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것이 빛을 낸 것은 반응로 자체라고 판단했다. 나는 FFU-2(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만 담당하는 소방 부대)에 전화하여 상황을 보고했고, 이는 키예프로 전달되었다...

텔랴트니코프와 그의 부하들은 4,000mSv의 방사능 피폭을 무릅쓰고 화재 진압을 위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불타오르는 지붕 위로 올라갔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키예프 소방여단이 도착하기 전까지 불길이 번지는 것을 막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계속 화재 진압을 지휘하던 중, 2시 30분에 바실리 이그나텐코를 포함한 최초 출동 소방관들에 대한 구조 작업을 지시했다. 이때 볼로디미르 프라비크, 빅토르 키베노크, 바실리 이그나텐코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신속히 구조했다.[8] 프라비크는 텔랴트니코프에게 발전소 3호기 지붕의 불이 꺼졌다고 보고했고, 텔랴트니코프는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의 몸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근처 구급차에 태워 대피시켰다.[9] 그러나 이들은 응급처치와 최대한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사망했다.

오전 3시 30분경, 텔랴트니코프 역시 메스꺼움과 구토 등 방사선 노출 초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11] 그는 프리피야트 병원인 위생대 126호로 후송되었으나,[14] 증상이 가벼워 보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실제로는 심각하게 피폭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겉보기에는 멀쩡하여 동료 소방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울 정도였다.[3]

4. 2. 화재 진압 활동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소방부서 책임자로, 1986년 4월에 발생한 폭발 사고 이후 화재 진압을 지휘했다.[3] 그는 비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피야티에서 전화로 경보 신호를 받고 새벽 1시 32분에서 33분 사이에 현장에 도착했다.[3] 즉시 부하들을 소집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소방수들이 진압 임무를 시작한 지 10분 후인 1시 45분에 도착하여 전반적인 지휘를 시작했다.[4][5]

텔랴트니코프는 4호기 건물을 육안으로 조사하여 화재 위치를 파악했다. 그는 부서진 콘크리트 패널 구멍을 통해 케이블실을 관찰했고, 중앙 반응로 홀에서 빛을 확인했다.[6] 그는 FFU-2(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전담 소방 부대)에 전화하여 상황을 보고했고, 이는 키예프로 전달되었다.[6]

그는 3호기 지붕에 올라가 최소 5개의 불덩이를 확인했지만, 원자로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다. 텔랴트니코프는 피해가 없는 원자로와 기계실의 화재를 진화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다.[7]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키예프 소방여단이 도착하기 전까지 불길이 번지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텔랴트니코프는 4호기 제어실을 방문하여 부수석 엔지니어인 아나톨리 댜틀로프로부터 터빈 홀 지붕의 화재가 진압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3호기 및 환기 블록 지붕 화재 진압을 우선 과제로 설정했다.[7]

2시 30분, 텔랴트니코프는 바실리 이그나텐코를 포함한 최초 출동 소방관들의 구조 작업을 지시했다. 이때 볼로디미르 프라비크, 빅토르 키베노크, 바실리 이그나텐코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신속히 구조했다.[8] 프라비크는 텔랴트니코프에게 발전소 3호기 지붕 화재가 진압되었다고 보고했고, 텔랴트니코프는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의 건강 상태가 심각함을 인지하고 구급차로 대피시켰다.[9] 그러나 이들은 응급처치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사망했다.

텔랴트니코프 자신도 3시 30분경 메스꺼움과 구토 등 방사능 노출 초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여 병원으로 후송되었다.[11] 그는 증상이 가벼워 보여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실제로는 심각하게 피폭된 상태였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료 소방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울 정도로 겉보기에는 멀쩡했다.[3]

텔랴트니코프와 그의 부하들은 4,000mSv의 방사능 피폭을 무릅쓰고 불타는 지붕 위로 올라가는 등 위험을 감수하며 화재 진압에 헌신했다.

4. 3. 방사능 피폭과 건강 이상

텔랴트니코프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화재 진압을 지휘하면서 4,000mSv의 방사능에 피폭되었다. 그는 비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1시 32분에서 33분 사이에 경보를 받고 현장에 도착, 1시 45분부터 지휘를 시작했다.[3][4][5] 3호기 지붕 등에서 최소 5개의 불덩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바실리 이그나텐코를 포함한 최초 출동 소방관들이 쓰러진 것을 발견하고 구조했다.[8][9]

3시 30분경, 텔랴트니코프는 메스꺼움과 구토 등 방사선 노출 초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11] 그는 프리피야트 병원(위생대 126호)으로 후송되었으나, 증상이 경미해 보여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울 정도로 겉보기에는 멀쩡했다.[3][14]

그러나 재앙의 규모와 최초 대응자들의 방사선 부상 심각성이 파악되면서, 텔랴트니코프는 다른 소방관 및 발전소 직원들과 함께 모스크바 제6병원으로 이송되었다.[12] 그는 버스와 항공편으로 이송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의식을 잃는 등 상태가 악화되었다.[3] 골수 손상으로 백혈구 수치가 감소하고 면역 체계가 약화되었으며, 40°C가 넘는 과 폐, 호흡기 염증에 시달렸다.[3]

텔랴트니코프의 정확한 피폭량은 불분명하다. 그는 1987년 인터뷰에서 200~400 렘이라고 밝혔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450렘 또는 520렘을 받았다고 주장한다.[14][15][3]

5. 입원 및 치료

소련 정부는 사고의 실체와 재난의 범위, 최초 출동한 소방관들이 받은 방사선 부상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하면서 텔랴트니코프를 포함한 입원 소방관 및 공장 직원을 모스크바로 대피시키기로 결정했다. 텔랴트니코프는 버스를 타고 키예프의 보리스필 국제공항으로 이동한 후 비행기로 모스크바까지 이송되어, 스레드마시(원자력 에너지 부서)와 올 유니온 물리학 연구소가 운영하는 6번 병원으로 옮겨졌다.[12]

이때 텔랴트니코프는 방사선 노출로 인한 심각한 증상을 겪기 시작했다. 프리피야트에서 키예프까지 버스로 이동하던 중 의식을 잃었고 상태는 계속 악화되었다.[3] 그의 골수는 이온화 방사선에 의해 손상되어 백혈구 수가 감소하고 면역 체계가 약화되어 세균 감염에 취약해졌다. 그는 40°C가 넘는 에 시달렸으며, 폐와 호흡기에 염증이 발생했다.[3] 텔랴트니코프의 백혈구 수치가 회복되지 않아 골수 이식을 시도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그의 여동생과 아버지가 잠재적 골수 기증자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3]

그러나 텔랴트니코프는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1986년 7월 격리 병동에서 퇴원하여 폐를 감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거즈 마스크를 착용한 채 6번 병원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13] 이때 그는 부하들인 블라디미르 프라비크 소방 중위, 빅터 키베노크 소방 중위, 바실리 이그나텐코 소방 중사 등 소방관들의 사망 소식을 처음 들었다.[13] 그는 1986년 8월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라트비아 해안의 휴양소로 옮겨져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요양했다.[13] 1986년 9월 5일에 요양원에서 퇴원했다.[14] 같은 달에 카자흐스탄에 있는 부모님을 방문할 수 있었다.[13] 그러나 입원 중 잦은 약물 복용으로 에 부담이 컸고, 텔랴트니코프는 이 합병증을 치료하기 위해 1986년 말까지 세 번 병원을 방문했다.[14] 1986년 12월 22일, 7개월 간의 치료와 회복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퇴원했다.[14]

6. 체르노빌 사고 이후

체르노빌 사고 이후 텔랴트니코프는 소련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이즈베스티야 표지 기사와 TV 및 라디오에 출연하였다.[16] 1986년 9월 25일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는 그에게 레닌 훈장과 소련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1]

1987년, 텔랴트니코프는 불가리아, 일본, 미국, 영국 등 여러 국가를 방문하며 국제 친선 활동을 펼쳤다.[3] 영국에서는 마거릿 대처 총리를 만나고 영국 소방관 연합으로부터 메달을 받았으며,[3][16] 미국에서는 소방관 회의에서 연설을 했다.[14] 일본에서는 핵 군축을 위한 국경 없는 의사회 회의에 참석했다.[3]

영국 소방 협회 회장이 체르노빌 소방대의 지휘관인 텔랴트니코프 소령에게 용기를 기리기 위해 용감성을 나타내는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6. 1. 복귀와 사회 활동

회복과 해외 여행이 끝난 후, 텔랴트니코프는 소방서에서 MVD 화재 테스트 연구소의 사령관으로 근무했다.[1] 1989년까지 이 직책을 역임했으며,[1] 그해 키예프 지역 집행 위원회 내무부 소방안전부 규제 및 기술부 부국장으로 승진했다. 소련 해체 때까지인 1993년까지 이 직위를 유지했다.[1]

새롭게 독립한 우크라이나에서 텔랴트니코프는 국가 소방대 내에서 더 높은 직위로 승진했다. 1993년, 우크라이나 내무부 소방국장이 되었으며,[1] 1995년에는 소방 소장으로 진급하여 내무부 소방국 국장으로 승진, 전체 우크라이나 국가 소방 장비의 사령관이 되었다.[1][2] 텔랴트니코프는 같은 해에 제대했다.[1]

6. 2. 소련 붕괴 이후

소련 붕괴 이후, 텔랴트니코프는 새롭게 독립한 우크라이나 소방대에서 고위직으로 승진했다. 1993년 우크라이나 내무부 주 소방국 부국장이 되었고,[1] 1995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내무부 국가 소방국장이 되면서 우크라이나 전체 소방 장비를 지휘하게 되었다.[1][2] 같은 해 텔랴트니코프는 퇴임했다.[1]

6. 3. 죽음과 기념

텔랴트니코프는 53세의 나이에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으로 사망하였다. 2006년 4월 25일 체르노빌 사고 20주년 행사에서, 텔랴트니코프가 묻힌 키예프의 바이코베 묘지에 그의 기념비가 건립되었다.[1]

퇴직 후 1998년부터 키예프 자원 소방 협회 회장으로 소방 활동에 계속 참여했다.[1] 그는 이 직책에서 사후에도 계속 개최될 연례 어린이 소방 축제를 조직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이후 그의 명예를 기려 재헌정되었다.[3] 1996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쿠치마의 명령에 따라 텔랴트니코프는 우크라이나 용기 훈장 3급을 수여받았다.[1]

2003년, 텔랴트니코프는 턱 부위의 암 진단을 받았다.[3][17] 독일에서 무료 치료를 받도록 초청받아 그 나라로 가서 두 번의 수술을 포함한 6개월의 치료를 받았다.[3] 의사들은 그가 회복할 것이라고 낙관했지만, 2004년 가을에 암이 재발했고, 텔랴트니코프는 그 해 12월 2일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7]

그의 사망 소식은 뉴스 매체를 통해 알려졌으며, 그의 가족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조의 서한을 받았다.[3]

7. 그의 부하들

다음은 레오니트 텔랴트니코프의 지휘 아래 체르노빌 화재 진압에 참여한 소방관들이다.


  • 소방 중위 블라디미르 프레빅[1]
  • 소방 중위 빅토르 키베노크[1]
  • 소방 중사 바실리 이그나텐코[1]
  • 소방 중사 니콜라이 티테노크[1]
  • 소방 병장 블라디미르 티시츄라[1]
  • 소방 병장 미콜라 바스추크[1]

8. 수상 내역

훈장내용
--소련 영웅
--레닌 훈장
--우크라이나 용기 훈장
--적기훈장



텔랴트니코프는 회복 후 소련 언론에서 명예를 얻었으며, 이즈베스티야의 표지 기사와 텔레비전 및 라디오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16] 1986년 9월 25일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의 법령에 따라 레닌 훈장과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1]

참조

[1] 웹사이트 Telyatnikov Leonid Petrovich http://www.warheroes[...] 2021-02-14
[2] 웹사이트 Telyatnikov Leonid Petrovich: Hero of the Soviet Union, Veteran of Chernobyl https://вдпо.рф/vete[...] 2021-02-27
[3] 웹사이트 Non-Heroic Hero https://ptm01.ru/tel[...] 2021-03-05
[4] 서적 Chernobyl: The History of a Nuclear Catastrophe Basic Books 2020
[5] 웹사이트 Firefighters Against the Atom. How it Was http://nuclearno.ru/[...] 2006-02-05
[6] 서적 From Chernobyl to Fukushima S. Podgornov 2012
[7] 문서 Plokhy (2018), p. 107
[8] 서적 Midnight in Chernobyl Simon and Schuster 2019
[9] 문서 Plokhy (2018), p. 95
[10] 문서 Karplan (2012), p. 16
[11] 문서 Plokhy (2018), p. 97
[12] 문서 Higgenbotham (2019), p. 151
[13] 문서 Higgenbotham (2019), p. 300
[14] 웹사이트 Firefight at Chernobyl https://fire.omeka.n[...] Fire Files Digital Library 1987-09-17
[15] 웹사이트 Telyatnikov, Leonid Petrovich http://memory.chorno[...] National Chornobyl Museum 2021-03-14
[16] 문서 Higgenbotham (2019), p. 307
[17] 문서 Higgenbtham (2019), p. 334
[18] 문서 공산권 국가에서는 군인, 경찰, 소방관이 계급을 공유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