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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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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모셋은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영국인들에게 영어로 인사를 건넨 아베나키족 출신의 인물이다. 그는 메인주에 거주하며 영국 어부들에게 영어를 배웠으며, 왐파노아그족 추장 마사소이트를 방문하기 위해 플리머스 식민지를 방문했다. 사모셋은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스콴토와 함께 돌아와 식민지 개척자들과 마사소이트의 만남을 주선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이름은 기록에 따라 사모셋, 서머셋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1653년경 메인주 페마퀴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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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셋
인물 정보
사모셋의 그림
사모셋 (1621년경)
출생1590년경
사망1653년경
민족아베나키족
직업사가모어 (추장)
활동 시기17세기
생애 및 활동
주요 활동플리머스 식민지와의 접촉
알려진 언어영어 (유창)
아베나키어

2. 초기 생애 및 배경

사모셋은 아베나키족의 일원으로, 1621년 당시 왐파노아그족 추장 마사소이트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메인만의 영국 어업 기지 근처 먼건 섬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2]

2. 1. 아베나키 부족과 사모셋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식민지의 정착민들은 캠프 한가운데로 걸어와 영어로 인사를 하는 사모셋을 보고 놀랐다. 사모셋은 현재 메인주에 도착한 초기 영국인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9]

당시 메인 주에 살던 아베나키족의 일원이었던 사모셋은 대추장에 종속된 부족을 다스리는 소추장이었고, 마사소이트 대추장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모헤간 섬에서 고기를 잡으러 온 영국 어부들에게서 서투른 영어를 배웠다.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필그림과 그날 밤을 보낸 후, 이틀 뒤 사모셋은 스콴토를 데리고 돌아왔는데, 스콴토는 사모셋보다 영어를 훨씬 유창하게 구사했다.[10]

사모셋의 철자는 영국인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에 따라 다양했다. 어떤 기록에는 사모셋(Samoset)으로 등장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서머셋(Somerset)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미국 원주민 이름의 영국식 표현은 아마도 영국 탐험가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서양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요크셔 출신 크리스토퍼 레벳 선장은 1623년에서 1624년에 걸친 뉴잉글랜드 탐사에서 이 사람을 서머셋이라고 불렀다. 레벳 선장은 1624년 현재의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사모셋과 다른 미국 원주민 추장들을 대접했다.[11]

사모셋은 메인주에 거주했던 동부 아베나키족 부족의 사감 또는 부속 추장이었다. 그는 메인만에 있던 영국 어업 기지에서 먼건 섬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에게 영어를 조금 배웠고, 대부분의 지역 선장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2]

아베나키어는 플리머스 식민지 주변 지역의 노셋족과 왐파노아그족의 매사추세트어와 관련된 알곤킨어족 언어이며,[3] 사모셋은 역사적인 사건 당시 왐파노아그족 추장인 마사소이트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정착지에 들어가 영어로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맥주를 요청했다.[4] 그는 그날 밤 필그림과 함께 묵었고, 나중에 사슴 가죽을 교환하기 위해 다른 다섯 명의 인디언과 함께 돌아왔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날 교환을 거절했지만,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사모셋은 1621년 3월 22일에 파툭셋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스콴토와 함께 돌아왔다. 스콴토는 사모셋보다 영어를 훨씬 잘했고, 마사소이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3]

1624년, 영국 선장 크리스토퍼 레빗은 메인주 포틀랜드 항구에서 사모셋과 다른 인디언 지도자들을 접대했다.[5] 사모셋은 1653년경 페마퀴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

2. 2. 영어 학습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사람들은 캠프 한가운데로 걸어와 영어로 인사를 하는 사모셋을 보고 놀랐다. 사모셋은 현재 메인주에 도착한 초기 영국인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9]

당시 메인 주에 살고 있던 아베나키족의 일원이었던 사모셋은 모헤간 섬에서 고기를 잡으러 온 영국 어부들에게서 서투른 영어를 배웠다.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그날 밤을 보낸 후, 이틀 뒤 자신보다 영어를 훨씬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스콴토를 데리고 돌아왔다.[10] 1621년 3월 22일에 파툭셋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스콴토와 함께 돌아왔으며, 스콴토는 사모셋보다 영어를 훨씬 잘했고, 마사소이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3]

사모셋의 이름 철자는 영국인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에 따라 다양했다. 어떤 기록에는 사모셋(Samoset)으로 등장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서머셋(Somerset)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미국 원주민 이름의 영국식 표현은 영국 탐험가들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으로 보이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서양에서 부르던 것이었다. 요크셔 출신 크리스토퍼 레벳 선장은 1623년에서 1624년에 걸친 뉴잉글랜드 탐사에서 이 사람을 서머셋이라고 불렀다. 1624년 영국 선장 크리스토퍼 레빗은 메인주 포틀랜드 항구에서 사모셋과 다른 인디언 지도자들을 접대했다.[5] 레벳 선장은 1624년 현재의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사모셋과 다른 미국 원주민 추장들을 만났다.[11]

사모셋은 메인주에 거주했던 동부 아베나키족 부족의 사감 또는 부속 추장이었다. 그는 메인만에 있던 영국 어업 기지에서 먼건 섬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에게 영어를 조금 배웠고, 대부분의 지역 선장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2] 아베나키어는 플리머스 식민지 주변 지역의 노셋족과 왐파노아그족의 매사추세트어와 관련된 알곤킨어족 언어이며,[3] 사모셋은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정착지에 들어가 영어로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맥주를 요청했다.[4] 그는 그날 밤 필그림과 함께 묵었고, 나중에 사슴 가죽을 교환하기 위해 다른 다섯 명의 인디언과 함께 돌아왔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날 교환을 거절했지만,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3. 플리머스 식민지 방문

사모셋은 플리머스 식민지를 방문하여 정착민들과 교류한 아메리카 원주민이다. 1621년 3월 16일, 사모셋은 플리머스 식민지에 들어가 영어로 인사를 건넸고, 이는 정착민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메인주에 온 영국 어부들에게서 영어를 배웠으며, 먼건 섬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과 교류하며 대부분의 지역 선장들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2]

사모셋은 아베나키족의 일원으로, 마사소이트 대추장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그는 플리머스 정착민들에게 파툭세트라고 불리던 이 지역에 4년 전 전염병이 돌아 주민들이 모두 사망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7] 그는 무르트 관계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나우세츠 사람들이 영국인들에게 분노하고 있으며, 이는 헌트라는 선장이 파툭세트와 나우세트에서 27명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7]

사모셋은 며칠 후 스콴토와 함께 돌아왔고, 스콴토는 마사소이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3] 1624년에는 영국 선장 크리스토퍼 레빗이 메인주 포틀랜드 항구에서 사모셋과 다른 인디언 지도자들을 접대하기도 했다.[5] 사모셋은 1653년경 페마퀴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

3. 1. 첫 만남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식민지의 정착민들은 캠프 한가운데로 걸어와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사모셋을 보고 놀랐다. 사모셋은 현재의 메인주에 도착한 초기 영국인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9]

당시 메인 주에 살던 아베나키족의 일원이었던 사모셋은 대추장에 종속된 부족을 다스리는 소추장이었고, 마사소이트 대추장을 만나기 위해 방문 중이었다. 그는 모헤간 섬에서 고기를 잡으러 온 영국 어부들에게서 서투른 영어를 배웠다. 플리머스 식민지에서 그날 밤을 보낸 사모셋은 이틀 후 자신보다 영어를 훨씬 유창하게 구사하는 스콴토를 데리고 돌아왔다.[10]

사모셋의 이름 철자는 영국인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에 따라 'Samoset' 또는 'Somerset'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미국 원주민 이름의 영국식 표기는 영국 탐험가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으로 보이며, 이들 중 다수는 서부 출신이었다. 요크셔 출신 크리스토퍼 레벳 선장은 1623년에서 1624년 사이의 뉴잉글랜드 탐험에서 그를 서머셋이라고 불렀다.[11]

사모셋은 메인주에 거주했던 동부 아베나키족 부족의 사감 또는 부속 추장이었다. 그는 메인만의 영국 어업 기지에서 먼건 섬 근처의 어부들에게서 영어를 조금 배웠고, 대부분의 지역 선장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2]

아베나키어는 플리머스 식민지 주변 지역의 노셋족과 왐파노아그족의 매사추세트어와 관련된 알곤킨어족 언어이며,[3] 사모셋은 역사적인 사건 당시 왐파노아그족 추장 마사소이트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정착지에 들어가 영어로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맥주를 요청했다.[4] 그는 그날 밤 필그림과 함께 묵었고, 나중에 사슴 가죽을 교환하기 위해 다른 다섯 명의 인디언과 함께 돌아왔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날 교환을 거절했지만,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사모셋은 1621년 3월 22일에 파툭셋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스콴토와 함께 돌아왔다. 스콴토는 사모셋보다 영어를 훨씬 잘했고, 마사소이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3]

1624년, 영국 선장 크리스토퍼 레빗은 메인주 포틀랜드 항구에서 사모셋과 다른 인디언 지도자들을 접대했다.[5]

1622년에 출판된 플리머스 식민지 초기 시절에 대한 기록인 '''무르트 관계'''는 사모셋의 방문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 16일 금요일, 날씨가 좋고 따뜻했다. ... (중략) ... 한 야만인이 나타났고, 이는 경보를 울리게 했다. 그는 매우 대담하게 혼자서 집들을 따라 훈련장으로 곧장 다가왔고, 우리는 그를 가로막았다. ... (중략) ... 그는 우리에게 영어로 인사를 했고,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는 몽치곤에 고기를 잡으러 오는 영국인들 사이에서 약간의 엉터리 영어를 배웠고, 보통 오는 대부분의 선장, 지휘관 및 선장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 (중략) ... 그는 이 지역 출신이 아니라 모라티곤 출신이며, 그곳의 사가모어 또는 영주 중 한 명이고, 이곳에 8개월 동안 있었다고 말했다. ... (중략) ... 그는 이 나라 전체, 모든 지방, 그들의 사가모어, 그들의 사람 수와 힘에 대해 이야기했다. ... (중략) ... 그는 맥주를 달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에게 독한 술과 비스킷, 버터, 치즈, 푸딩, 그리고 청둥오리 조각을 주었는데, 그는 이 모든 것을 좋아했고, 영어권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런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을 파툭세트라고 불린다고 말했고, 약 4년 전에 모든 주민들이 특별한 전염병으로 죽었고, 남자, 여자, 아이가 아무도 남지 않아, 실제로 우리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의 소유를 방해하거나 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 (중략) ...

>

> 다음 날, 그는 우리가 가장 가까운 이웃인 마사소이트로 갔다고 말했다. 그들은 60명의 강자라고 한다. ... (중략) ... 토요일 아침, 우리는 야만인을 돌려보내고 칼, 팔찌, 반지를 주었다. 그는 1~2일 안에 다시 와서 우리 이웃인 마사소이트 중 일부와 우리와 거래할 비버 가죽을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7]

다른 자료에 따르면 사모셋은 순례자들에게 맥주를 요청했다고 한다.[8]

3. 2. 스콴토와의 동행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사람들은 캠프 한가운데로 걸어와 영어로 인사를 하는 사모셋을 보고 놀랐다. 사모셋은 현재 메인 주에 도착한 초기 영국인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9]

당시 메인 주에 살던 아베키 부족의 일원이었던 사모셋은 대추장에 종속된 부족을 다스리는 소추장이었고, 마사소이트 대추장을 만나러 왔다. 그는 엉터리 영어 수준이었지만, 모헤간 섬에서 고기를 잡으러 온 영국 어부들에게 영어를 배웠다. 사모셋은 플리머스 식민지 캠프에서 필그림과 그날 밤을 보낸 후, 이틀 뒤 자신보다 영어를 훨씬 유창하게 구사하는 스콴토를 데리고 돌아왔다.[10]

사모셋은 메인주에 거주했던 동부 아베나키족 부족의 사감 또는 부속 추장이었다. 그는 메인만의 영국 어업 기지에서 먼건 섬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에게 영어를 조금 배웠고, 대부분 지역 선장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2]

아베나키어는 플리머스 식민지 주변 지역의 노셋족과 왐파노아그족의 매사추세트어와 관련된 알곤킨어족 언어이다.[3] 사모셋은 당시 왐파노아그족 추장인 마사소이트를 방문하고 있었다. 1621년 3월 16일, 그는 플리머스 정착지에 들어가 영어로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맥주를 요청했다.[4] 그는 그날 밤 필그림과 함께 묵었고, 나중에 사슴 가죽을 교환하기 위해 다른 다섯 명의 인디언과 함께 돌아왔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교환을 거절했지만,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사모셋은 1621년 3월 22일에 파툭셋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스콴토와 함께 돌아왔다. 스콴토는 사모셋보다 영어를 훨씬 잘했고, 마사소이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3]

4. 이후의 행적

사모셋은 메인주에 거주했던 동부 아베나키족 부족의 사감 또는 부속 추장이었다. 메인만에 있던 영국 어업 기지에서 먼건 섬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에게 영어를 조금 배웠고, 대부분의 지역 선장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2]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정착지에 들어가 영어로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맥주를 요청했다.[4] 그는 그날 밤 필그림과 함께 묵었고, 이후 사슴 가죽을 교환하기 위해 다른 다섯 명의 인디언과 함께 돌아왔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식민지 개척자들은 그날 교환을 거절했지만,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했다. 3월 22일, 사모셋은 파툭셋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스콴토와 함께 돌아왔다. 스콴토는 사모셋보다 영어를 훨씬 잘했고, 마사소이트와의 만남을 주선했다.[3]

4. 1. 크리스토퍼 레빗과의 만남

1621년 3월 16일, 플리머스 식민지에 정착한 사람들은 캠프 한가운데로 걸어와 영어로 인사를 건네는 사모셋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사모셋은 현재 메인주에 도착한 초기 영국인들에게서 영어를 배웠다.[9]

당시 메인 주에 살고 있던 아베나키족의 일원이었던 사모셋은 마사소이트 대추장을 만나기 위해 방문하고 있던 소추장이었다. 그는 모헤간 섬에서 고기를 잡으러 온 영국 어부들에게서 서투르나마 영어를 배웠다. 플리머스 식민지의 캠프에서 필그림과 그날 밤을 보낸 후, 이틀 뒤 사모셋은 자신보다 영어를 훨씬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스콴토를 데리고 돌아왔다.[10]

사모셋의 이름 철자는 영국인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에 따라 다양했다. 어떤 기록에는 사모셋(Samoset)으로 등장하지만, 다른 기록에서는 서머셋(Somerset)이라고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미국 원주민 이름의 영국식 표현은 영국 탐험가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나온 것으로 보이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서양에서 부르던 것이었다. 요크셔 출신 크리스토퍼 레빗 선장은 1623년에서 1624년에 걸친 뉴잉글랜드 탐사에서 이 사람을 서머셋이라고 불렀다. 레벳 선장은 1624년 현재의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사모셋과 다른 미국 원주민 추장들을 대접했다.[11]

4. 2. 사망

사모셋은 1653년경 페마퀴드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3]

5. 이름의 철자 및 어원

사모셋의 이름 철자는 그를 언급하는 사람에 따라 달랐다. 어떤 기록에서는 '사모셋(Samoset)'으로, 다른 기록에서는 '소머셋(Somerset)'으로 나타났다.[6] 이는 아마도 많은 선원들의 고향인 잉글랜드 웨스트 컨트리의 서머싯에서 유래된 민간 어원일 것이다.[6] 1623년에서 1624년에 걸친 뉴잉글랜드 탐사에서 요크셔 출신 크리스토퍼 레벳 선장은 이 사람을 서머셋이라고 불렀다. 레벳 선장은 1624년 현재의 메인주 포틀랜드에서 사모셋과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추장들을 대접했다.[11]

6. 역사적 의의 및 평가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사모셋' 문서의 '역사적 의의 및 평가'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서적 Mourt's Relation or Journal of the Plantation at Plymouth https://archive.org/[...] John Kimball Wiggin 2008-12-02
[2] 간행물 Indian History https://archive.org/[...] Z.G. Mitchell 1878
[3] 웹사이트 Samoset http://www.notablebi[...]
[4] 간행물 Samoset, Lord on Monhegan and Pemaquid https://books.google[...] 1888
[5] 간행물 Maine: A Guide 'Down East,' Federal Writers' Project https://books.google[...] Houghton-Mifflin Company 1937
[6] 학술지 Note on the Indian Sagamore Samoset https://books.google[...] The Society 2008-12-02
[7] 웹사이트 Mourt's Relation: A Journal of the Pilgrims at Plymouth, 1622, Part I http://www.histarch.[...] 2008-11-25
[8] 서적 The Colonists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01
[9] 서적 http://books.google.[...]
[10] 서적 http://books.google.[...]
[11] 간행물 Maine: A Guide 'Down East,' Federal Writers' Project http://books.google.[...] Houghton-Mifflin Company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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