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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다시게 (182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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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카이 다다시게(1827년)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로, 히메지 번의 번주이자 막부의 로주, 다이로를 역임했다. 1860년 히메지 번주 사카이 타다아키라의 양자가 되어 가독을 상속받았으며, 1862년 교토 수비와 교토 쇼시다이 임시 대행을 맡았다. 1863년 로주 수좌가 되었고, 이듬해 다이로에 임명되어 막부 개혁을 추진했으나, 존왕론을 탄압하는 갑자의 옥을 일으켰다. 보신 전쟁 이후 은거했으며, 메이지 시대에 남작 작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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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이 다다시게 (1827년)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사카이 다다시게
본명ja
출생분세이 10년 6월 19일 (1827년 7월 12일)
사망메이지 28년 (1895년 11월 30일)
국적일본
배우자
관직 정보
작위종5위 하, 종4위 하, 시종, 아악두
무관좌근위권소장
막부에도 막부 로주, 다이로
주군도쿠가와 이에모치 → 요시노부
하리마 히메지번 번주
가문 정보
씨족사카이 씨 (우타노카미 가문 분가 하타모토 가문 → 우타노카미 가문 종가 → 우타노카미 가문 분가 남작 가문)
아버지사카이 다다노리
어머니미상
양아버지사카이 다다아키라
형제다다시게, 다다유키, 다다토시
자녀다다히로, 미쓰노리, 노리유키, 다마코 ( 혼조 무네요시 정실), 스즈코 (히라노 나가요시 실)
양자다다유키, 다다토시
기타 정보
통칭간노스케
묘소도쿄도도시마구고마고메의 소메이 묘원
사카이 다다시게
사카이 다다시게
관직 이력
히메지 번주대수: 8
임기: 1860년 ~ 1867년
전임: 사카이 다다테루
후임: 사카이 다다토시
사카이 가문 우타노카미 파 종가 당주대수: 21
임기: 1860년 ~ 1867년
전임: 사카이 다다테루
후임: 사카이 다다토시

2. 생애

히메지 번 분가인 하타모토 사카이 타다아키라 (5,000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가 번주 사카이 타다아키라의 양자가 되어 만엔 원년(1860년)에 가독을 상속받았다. 이후 에도 막부 말기의 혼란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분큐 2년(1862년)에는 교토 쇼시다이 임시 대행을 맡아 교토의 치안 유지에 관여했으며, 이듬해에는 로주 수좌에 임명되었다. 겐지 2년(1865년)에는 막부 최고 직책인 다이로에 올라 제2차 조슈 정벌의 사후 처리와 막부 군제 개혁 등을 추진했다.

그는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충성을 중요시하여, 번 내에서 대두한 존왕론을 강경하게 탄압했다. 겐지 원년(1864년)에는 중신 카와이 헤이잔을 포함한 다수의 존왕파를 숙청하는 '갑자의 옥'을 일으켰다.[4]

게이오 3년(1867년)에 은거하였으나, 보신 전쟁 발발 후에는 막부에 대한 충의를 내세우며 신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로 인해 양자 타다아츠와 함께 칩거 생활을 했으며, 번 내에서는 그의 측근들이 숙청되는 '보신의 옥'이 벌어지기도 했다.[5]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는 종신 화족의 지위를 얻었고, 메이지 22년(1889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아 별도의 가문을 이루었다. 메이지 28년(1895년) 11월 30일에 향년 68세로 사망했다. 묘지는 소메이 영원에 있었으나, 최근 무연고 묘가 되어 철거될 예정이다.[6][7]

2. 1. 가독 상속과 번주 취임

히메지 번 분가인 하타모토 사카이 타다아키라(5,000석)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가 히메지 번주인 사카이 타다아키라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양자가 되었다. 만엔 원년(1860년) 10월 14일(11월 26일) 양부 타다아키가 사망하자, 같은 해 12월 9일(1861년 1월 19일) 가독을 상속받아 하리마 히메지 번주가 되었다. 이때 위계는 4품격, 좌차는 류마 격(溜間詰格)이 되었다.

이듬해인 분큐 원년(1861년) 3월 22일(5월 1일), 종5위하 가쿠토(雅楽頭)에 서임되었고, 같은 날 종4위하 시종(侍従)으로 승진하며 가쿠토 직은 계속 겸임했다. 또한 류마즈메(溜間詰)가 되었다.

2. 2. 교토 쇼시다이 임시 대행

분큐 2년(1862년) 5월, 막부의 명에 따라 교토 수호와 교토 쇼시다이 임시 대행의 특명을 받고 상경했다. 이는 안세이 대옥 시기 교토 쇼시다이였던 와카사 오바마 번주 사카이 타다요시가 만엔 원년(1860년) 사쿠라다몬 외의 변으로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에도 계속 직을 유지하다 조정의 파면 요구를 받은 데 따른 것이다. 막부는 타다요시를 파면하고 후임으로 오사카 성대 마쓰다이라 무네히데를 내정했으나, 무네히데 또한 안세이 대옥 당시 지샤 봉행으로서 나오스케의 측근이었기에 조정이 동의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쇼시다이 직책이 공석이 되는 막부 성립 이래 이례적인 상황이 발생했고, 사카이 다다시게는 마키노 타다야스가 정식으로 후임 쇼시다이에 임명된 같은 해 9월 말까지 약 4개월간 임시로 쇼시다이 직무를 대행했다.

2. 3. 로주 수좌 및 다이로 취임

분큐 3년(1863년) 6월 18일, 교토 시중 경비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로주 수좌에 임명되었다. 로주로 재직하는 동안 효고 개항 문제를 둘러싼 조정과의 대책 마련에 힘썼다. 같은 해 연말,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상경이 결정되자, 히타치 미토 번주 도쿠가와 요시아키, 무사시 시노부 번주 마쓰다이라 타다스미와 함께 에도성 루스이 역(留守居役, 부재중 성 관리 책임자)을 맡았다.

겐지 원년(1864년) 6월 18일 로주 직에서 물러났으나, 약 8개월 후인 겐지 2년(게이오 원년, 1865년) 2월 1일에는 다이로에 취임하였다. 다이로로서 제2차 조슈 정벌의 사후 처리와 막부군의 서양식 군제 도입 등 막부 정치 개혁에 힘썼다.

한편, 번 내에서 존왕론이 대두하자 "도쿠가와 가문의 대대로 가신으로서 막부와 존망을 함께하는 것이 도리"라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겐지 원년에는 중신 카와이 헤이잔을 유폐하고 다수의 존왕파를 숙청하는 이른바 "갑자의 옥" 사건을 일으켰다[4].

게이오 3년(1867년) 2월에 은거하여, 차남이자 양자인 타다아츠에게 가독을 넘겨주었다.

2. 4. 존왕양이파 탄압

히메지 번 내에서 존왕론이 힘을 얻자, 사카이 다다시게는 이를 강경하게 탄압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도쿠가와 가문의 대대로 가신으로서 막부와 존망을 함께하는 것이 도리이다"라고 주장하며, 막부에 대한 충성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겐지 원년(1864년)에는 번의 중신이었던 카와이 헤이잔을 유폐시키고 다수의 존왕파 인사들을 숙청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갑자의 옥'(甲子の獄)이라고 불린다.[4]

2. 5. 보신 전쟁과 좌절

게이오 3년(1867년) 2월에 은거하여, 차남이자 양자인 타다아츠에게 가독을 양도했다. 그러나 보신 전쟁이 발발하고 토바·후시미 전투의 책임을 물어 타다아츠는 에도에서 칩거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에도에 있던 타다즈미도 근신하고 있었으나, 이를 참지 못하고 게이오 4년(1868년) 5월 5일 에도성의 신정부군 대도독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탄원서의 내용은 근신 중인 도쿠가와 가문의 처우에 대한 불만과 함께, 사카이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대대로 가신이므로 주종 관계를 끊고 조정에 섬기는 것은 군신의 의리에 반하며, 차라리 소령을 반납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대응에 고심한 신정부는 타다아츠를 대신하여 먼 친척인 이세사키 번주 가문에서 사카이 타다쿠니를 급히 양자로 들여 사카이 종가를 상속시키고, 그에게 타다즈미를 설득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히메지 번의 최고 의사 결정자를 자처하던 타다즈미는 15세에 불과한 타다쿠니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타다아츠마저 타다즈미의 생각에 동조하면서 사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입지를 잃은 히메지 번은 신정부의 압박 속에서 번 내의 사쿠보 파(佐幕派, 막부 지지파) 숙청에 나서 타다즈미와 타다아츠의 측근을 일소하는 사건("보신의 옥")을 일으켰다.

메이지 원년(1868년) 9월 14일, 타다즈미는 친동생인 시즈오카 번사 사카이 타다히로의 집에서 동거하는 것이 허락되면서 사태는 겨우 수습되었다. 후에 타다아츠도 타다히로의 집에 맡겨졌다.[5]

메이지 13년(1880년) 11월, 종신 화족이 되었다. 메이지 22년(1889년) 5월에는 타다쿠니의 아들 사카이 타다오키가 이은 사카이 백작가와는 별도로 한 가문을 세우는 것이 허락되어, 영세 화족으로서 남작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28년(1895년)에 사망했으며, 향년 68세였다. 묘지는 소메이 영원에 있었으나, 최근 무연고 묘가 되어 철거가 예정되어 있다.[6][7]

2. 6. 메이지 시대

보신 전쟁 중 토바·후시미 전투 이후, 양자인 사카이 타다아츠는 전쟁의 책임을 지고 에도에서 칩거 명령을 받았다. 당시 에도에 함께 있던 다다시게 역시 근신 중이었으나, 게이오 4년(1868년) 5월 5일, 그는 신정부군 대도독부에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처우에 불만을 표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탄원서에서 그는 사카이 가문이 대대로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이었으므로 주종 관계를 끊고 조정에 섬길 수 없다며, 차라리 영지를 반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신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대응에 고심하다가, 타다아츠 대신 이세사키 번주 가문에서 양자로 들어와 사카이 종가를 계승한 사카이 타다쿠니에게 다다시게를 설득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당시 15세였던 타다쿠니의 설득은 효과가 없었고, 다다시게는 물론 타다아츠마저 다다시게의 생각에 동조하면서 상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결국 히메지 번은 신정부의 압력으로 번 내의 좌막파(佐幕派, 막부 지지파)에 대한 숙청을 단행하여 다다시게와 타다아츠의 측근들을 제거하는 "보신의 옥"을 겪게 되었다.

메이지 원년(1868년) 9월 14일, 다다시게는 친동생인 시즈오카 번사 사카이 타다히로의 집에서 함께 지내는 것이 허락되면서 사태가 수습되었다. 이후 타다아츠도 타다히로의 집에 맡겨졌다.[5]

메이지 13년(1880년) 11월, 다다시게는 종신 화족이 되었다. 이후 메이지 22년(1889년) 5월 11일[8], 타다쿠니의 아들 사카이 타다오키가 이끄는 사카이 백작가와는 별도로 분가하는 것이 허락되어, 영세 화족으로서 남작 작위를 받았다.

메이지 28년(1895년) 11월 30일에 사망했으며, 향년은 68세였다. 그의 묘지는 도쿄의 소메이 영원에 있었으나, 최근 무연고 묘로 분류되어 철거될 예정이다.[6][7]

3. 연보


  • 분세이 10년 6월 19일 (1827년 7월 12일): 하타모토 사카이 타다아키라의 장남으로 탄생.
  • 만엔 원년 (1860년)
  • * 10월 14일 (11월 26일): 양부이자 본가 히메지 번주인 사카이 타다아키라 사망.
  • * 12월 9일 (1861년 1월 19일): 양부의 뒤를 이어 가독을 계승하고, 하리마 히메지 번주가 됨. 위계는 4품격, 좌차는 류마 격이 됨.
  • 분큐 원년 3월 22일 (1861년 5월 1일): 종5위하・가쿠토(雅楽頭)에 서임됨. 같은 날, 종4위하로 승서하고, 시종(侍従)으로 전임함. 가쿠토 겸임은 유지됨. 또한, 류마즈메(溜間詰)가 됨.
  • 분큐 2년 (1862년)
  • * 5월: 막부의 명으로 상경하여, 교토 쇼시다이 임시 대행을 맡음 (같은 해 9월 말까지). 이는 안세이 대옥 이후 사카이 타다요시 파면과 후임 마쓰다이라 무네히데 임명에 대한 조정의 반대로 쇼시다이 직이 공석이 된 이례적인 상황 때문이었음.
  • 분큐 3년 (1863년)
  • * 6월 18일 (8월 2일): 교토 시중 경비의 공적으로 로주 수좌(老中首座)에 임명됨.
  • * 10월 11일 (11월 21일): 캇테카케(勝手掛, 재정 담당), 해륙 어비향 담당(海陸御備向掛, 국방 담당)을 겸임함.
  • * 11월 5일 (12월 15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상락(上洛, 교토 방문)에 따라, 관련 업무 및 수행을 담당함.
  • 겐지 원년 (1864년)
  • * 번 내에서 대두한 존왕론에 대해 "도쿠가와 가문의 대대로 가신으로서 막부와 존망을 함께하는 것이 도리"라며 강경하게 대응, 중신 카와이 헤이잔을 유폐하고 다수의 존왕파를 숙청하는 '갑자의 옥' 사건을 일으킴.[4]
  • * 6월 18일 (7월 21일): 로주 직에서 면직되고, 류마즈메(溜間詰)가 됨.
  • 겐지 2년 (1865년)
  • * 1월 15일 (2월 10일): 사콘노에곤노쇼쇼(左近衛権少将)로 전임됨. 가쿠토(雅楽頭) 겸임은 유지됨.
  • * 2월 1일 (2월 26일): 다이로에 취임함. 제2차 조슈 정벌의 사후 처리, 막부군의 서양식 군제 도입 등 막부 정치 개혁에 힘씀.
  • 게이오 원년 (1865년)
  • * 11월 12일 (12월 29일): 다이로 직에서 면직되고, 류마즈메(溜間詰)가 됨.
  • 게이오 3년 2월 28일 (1867년 4월 2일): 은거하여 차남이자 양자인 타다아츠에게 가독을 물려줌.
  • 게이오 4년 (1868년)
  • * 5월 5일: 보신 전쟁 중, 토바·후시미 전투의 책임을 물어 칩거 중이던 타다아츠와 함께 근신함. 에도성의 신정부군 대도독부에 도쿠가와 가문과의 주종 관계를 유지하며 소령 반납을 원한다는 탄원서를 제출함. 신정부는 먼 친척인 사카이 타다쿠니를 후임 번주로 세워 타다시게 설득을 시도했으나 실패함. 이후 번 내 사쿠보 파 숙청 사건('보신의 옥')이 발생함.[5]
  • * 9월 14일 (메이지 원년): 친동생인 시즈오카 번사 사카이 타다히로의 집에서 동거하는 것이 허락되어 사태가 수습됨.[5]
  • 메이지 13년 (1880년) 11월: 종신 화족이 됨.
  • 메이지 22년 (1889년) 3월 2일: 사카이 타다오키의 사카이 백작가와는 별도로 가문을 세우는 것이 허락되어 영세 화족에 편입되고 남작 작위를 받음.
  • 메이지 28년 (1895년) 11월 30일: 사망. 향년 68세. 묘지는 소메이 영원에 있었으나, 최근 무연고 묘가 되어 철거될 예정임.[6][7]

4. 등장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Himeji Castle Chronology https://www.hyogo-c.[...] 2020-07-27
[2] 서적 The Collapse of the Tokugawa Bakufu, 1862-1868 Univ of Hawaii Pr
[3] 서적 平成新修旧華族家系大成 霞会館
[4]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5] 서적 戊辰戦争と「朝敵」藩-敗者の維新史-
[6] 뉴스 江戸幕府最後の大老、姫路城主・酒井忠績の墓が撤去危機 理由は…墓地の管理料滞納 https://www.kobe-np.[...] 神戸新聞 2019-02-25
[7] 문서 東京都よりのお知らせ
[8] 간행물 授爵叙任及辞令 官報 188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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