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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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에 있는 대성당으로, 기독교 초기 바실리카 양식을 간직하고 있으며, 여러 차례 재건축과 복원을 거쳤다. 초기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증한 라테라노 궁전에 세워졌으며, 지진과 화재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현재의 외관은 알레산드로 갈릴레이가 설계한 신고전주의 양식이며, 내부에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설계한 벽감과 사도들의 조각상이 있다. 또한, 라테라노 오벨리스크, 스칼라 산타, 라테라노 세례당, 회랑 등의 부속 시설을 갖추고 있다. 5차례의 라테라노 공의회가 열렸으며,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가톨릭교회에서는 "모든 교회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이 성전의 헌당 기념일을 기념하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유대인 난민들의 피난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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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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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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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명칭 |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당 |
원어 명칭 (이탈리아어) | Arcibasilica Papale Romana Maggiore di San Giovanni in Laterano |
원어 명칭 (라틴어) | Archibasilica Sanctissimi Salvatoris ac Sanctorum Ioannis Baptistae et Ioannis Evangelistae ad Lateranum |
위치 | 로마 |
국가 | 이탈리아 |
종파 | 가톨릭교회 |
전례 양식 | 라틴 교회 |
봉헌 대상 | 예수 (주요), 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 (부차적) |
축성 연도 | 324년 |
유형 | 교황 대성전, 대성당 |
건축 양식 | 바로크 건축, 신고전주의 건축 |
기공 | 4세기 |
완공 연도 | 1735년 |
길이 | 140m |
폭 | 73m |
네이브 폭 | 65m |
재료 | 대리석, 화강암, 시멘트 |
교구 | 로마 교구 |
교구장 | 교황 프란치스코 |
수석 사제 | 발다사레 레이나 |
웹사이트 | 라테라노 대성당 공식 웹사이트 |
세계유산 지정 | |
공식 명칭 | 로마 역사 지구, 교황령 (로마 시내의 성좌 재산)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
지정 연도 | 1980년 |
지정 회의 | 제4차 회의 |
유형 | 문화 |
지정 번호 | 91 |
지정 기준 | i, ii, iii, iv, vi |
지역 | 유럽 및 북아메리카 |
건축 | |
건축가 | 알레산드로 갈릴레이 |
2. 역사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로마 황실 기병 근위대"의 유적 위에 세워졌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193년에 이 요새를 건설했다. 밀비오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승리한 후, 근위대는 폐지되었고 요새는 철거되었다. 요새의 상당한 유적들이 본당 바로 아래에 있다.
교황청이 아비뇽에 머물던 시기(1309년~1377년)에 라테라노 대성전과 대성전 부속 건물은 쇠퇴했다. 1307년과 1361년 두 차례의 화재로 크게 손상되었다. 아비뇽의 교황들은 복구 및 유지 관리를 위해 자금을 보냈으나, 이전의 화려함을 되찾지는 못했다. 교황청이 로마로 돌아온 후, 대성전과 라테라노 궁전은 피해가 커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대성당과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임시로 거처했다. 이후 바티칸 궁전이 성 베드로 대성전 옆에 건설되어 교황의 거주지가 되었다.
교황 식스토 5세는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재건 프로젝트를 맡겼다. 원래의 라테라노 궁전은 철거되고 새 건물이 들어섰으며, 라테라노 궁전 앞 광장에는 산 조반니 아돌로라타 병원과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인 라테라노 오벨리스크가 세워졌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게 대성전 내부 개조를 의뢰했다.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새로운 파사드 설계를 위한 공모전을 열었고, 알레산드로 갈릴레이가 당선되어 1735년에 현재의 파사드가 완성되었다.
2. 1. 고대 로마와 초기 기독교 시대
원래 이 장소에는 초기 로마 제국 시대에 라테라누스 씨족의 저택이 있었다. 라테라누스 씨족은 몇몇 황제의 관재인으로 봉사하였으며,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는 평민 출신으로는 최초로 집정관에 오른 인물이었다. 라테라누스 씨족 중 한 명인 플라티우스 라테라누스는 네로 황제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재산을 몰수당했다.[5]라테라노 궁전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막센티우스 황제의 누이인 파우스타와 결혼하면서 황제의 소유가 되었다. 당시 ‘파우스타의 집(''Domus Faustae'')’으로 알려졌던 이 궁전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주교에게 기증하였다.[5] 같은 해, 이곳에서 도나투스파에 대항하는 주교회의가 소집되어 도나티즘을 이단으로 선언했다. 이후 궁전에 딸린 대성당은 로마 주교의 주교좌 성당으로 사용되었다.
324년, 교황 실베스테르 1세는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을 '하느님의 집(''Domus Dei'')'으로 선포하고 공식적으로 봉헌했다. 대성당 내부에는 교황좌가 배치되었고, 중앙 입구에는 라틴어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지극히 거룩한 라테라노 성당(''Sacrosancta Lateranensis ecclesia 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4]
2. 2. 중세 시대와 아비뇽 유수
10세기에 교황 세르지오 3세는 대성당의 세례당을 새로이 축성하면서 성 요한 세례자에게 봉헌하였다.[7] 12세기에 교황 루치오 2세는 성 요한 복음사가에게 다시 봉헌하였다.[7]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는 주교좌 성당의 공동 수호성인이지만, 주보 성인은 여전히 구세주 그리스도이다.[7]교황 멜키아테 시대부터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 시대에 교황청이 1309년 아비뇽으로 옮겨질 때까지, 모든 교황은 라테라노 궁전에 거주하였다. 아비뇽 유수 동안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은 방치되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7] 1307년과 1361년에 두 차례의 화재로 크게 손상되었다.[7] 아비뇽에 있던 교황들은 로마에 있는 주교들에게 재건과 유지 비용 명목으로 자금을 전달하였으나, 과거의 화려함을 되찾지는 못했다.
2. 3.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재건
16세기 교황 식스토 5세는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게 대성전 재건을 맡겼으며, 이 과정에서 초창기 라테라노 궁전은 철거되고 새 건물이 들어섰다.[14] 17세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게 성당 내부 장식을 맡겼다.[14] 18세기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새로운 외관 설계를 위한 공모전을 열었고, 알레산드로 갈릴레이의 안이 채택되어 1735년 현재의 외관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파사드로 인해 교회 정면에 남아 있던 바실리카 시대의 모습은 모두 제거되었다.3. 주요 특징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 정문 벽에는 "도시와 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자 머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7] 이는 이 대성전이 전 세계 모든 교회의 "모교회"임을 의미한다. 12세기에는 라테란의 성직자들이 높은 제단에 언약의 궤와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여러 성물이 있다고 주장하여, 이 대성전은 새로운 계약의 성전으로 여겨졌다.[7]
대성전과 라테란 궁전은 두 번 재헌당되었다. 교황 세르지우스 3세는 10세기에 세례자 요한에게, 교황 루치오 2세는 12세기에 복음사가 요한에게 헌당했다. 따라서 세례자 요한과 복음사가 요한은 대성전의 공동 수호 성인이 되었으며, 주보 성인은 여전히 그리스도 구세주이다. 대성전은 구세주에게 봉헌되었으며, 주보 축일은 8월 6일 예수 변용 축일이다. 대성전은 두 성 요한의 가장 중요한 성소가 되었지만, 두 성인을 함께 공경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후대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라테란 궁전에 설립되어 대성전과 두 성인을 섬기는 데 헌신했다.
교황 밀티아데스를 시작으로 모든 교황은 교황 클레멘스 5세가 1309년 교황청을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길 때까지 라테란 궁전에 거주했다. 라테란 궁전은 라테란 공의회가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3. 1. 건축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바실리카 양식을 일부 간직하고 있다. 바로크 시대에 증축된 웅장한 외관과 화려한 내부 장식이 특징이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에게 대성전 내부 개조 작업을 맡겼다. 보로미니가 설계한 12개의 벽감에는 1718년에 로마의 대표적인 로코코 조각가들이 만든 사도들의 조각상이 설치되었다.

조각가 | 작품 |
---|---|
카밀로 루스코니 | 성 안드레아, 성 마태오, 성 야고보 (대), 성 요한 |
프란체스코 마라티 | 성 시몬 |
안젤로 데 로시 | 성 야고보 (소) |
주세페 마추올리 | 성 필립보 |
로렌초 오토니 | 성 타데오 |
피에르에티엔 모노 | 성 베드로, 성 바오로 |
소 피에르 르 그로 | 성 바르톨로메오, 성 토마스 |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새로운 건물 외관 설계를 위한 공모전을 열었고, 23명 이상의 건축가가 참가했다. 세바스티아노 콘카가 심사위원장을 맡았으며, 알레산드로 갈릴레이가 최종 우승자로 선정되었다. 오늘날 보이는 건물 외관은 1735년에 완성되었으며, 갈릴레이는 고대 바실리카 양식 대신 신고전주의 양식을 선택했다.
3. 2. 라테라노 오벨리스크
라테라노 궁전 앞 광장에는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14] 무게는 약 455톤으로 추정된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집트의 투트모세 3세 파라오의 의뢰를 받아 투트모세 4세가 카르나크 신전 앞에 세웠던 것이다.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이 오벨리스크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운송할 계획이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가 대신 로마로 운송하여 서기 357년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세웠다. 이후 오벨리스크는 한때 부러져 키르쿠스 아래에 묻혔다가 16세기에 발견되어 발굴되었다. 식스토 5세는 1588년 8월 3일 현재 위치에 새로운 받침대 위에 다시 세웠다.[14]
3. 3. 스칼라 산타 (거룩한 계단)
스칼라 산타(거룩한 계단)는 28개의 나무로 덧씌운 하얀 대리석 계단이다. 이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본시오 빌라도에게 재판받으러 갈 때 밟았던 계단이라고 전해진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가져와 라테라노 궁전에 설치하였으며,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 때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교황 비오 9세 때부터 예수 고난회 수도자들이 관리하고 있다.[16]순례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고통을 함께 나눈다는 의미에서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는 전통이 있다. 양쪽의 대리석상들은 《유다의 입맞춤》과 《군중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빌라도》로서 1854년 조각가 야코메티의 작품이다. 계단 꼭대기의 쇠창살 사이로는 성 라우렌시오 예배당이 보이는데, 여기에는 천사들이 그렸다는 그리스도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16]
성계단(Scala Sancta)은 나무로 덮인 흰색 대리석 계단으로, 한때 예루살렘의 본디오 빌라도 관저로 이어졌던 계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동안 그분의 발걸음으로 성화되었다고 전해진다. 나무 계단의 틈새를 통해 대리석 계단을 볼 수 있다.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 성 헬레나 황후가 예루살렘에서 라테라노 궁전으로 옮겨왔다고 전해지며,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가 Sancta Sanctorum이라 불리는 고대 팔라티노 예배당 앞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 페라우 펜초니는 벽에 있는 프레스코화 일부를 완성했다.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 부지 내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재판을 받으러 올라갔다고 전해지는 28개의 계단이 이전된 예배당이 있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이자 열렬한 기독교 신자였던 헬레나가 예루살렘 순례 중에 빌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처형을 명령한 로마의 유대 총독)의 궁전에서 로마로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이 계단에서는 경건한 기독교 신자들이 항상 기도하며 무릎으로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올라가면 로마 교황의 개인 기도실인 산타 산토룸(Sancta Sanctorum)이 있다.
3. 4. 라테라노 세례당
팔각형의 라테라노 세례당은 산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약간 떨어져 있다. 교황 식스토 3세가 세웠으며,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5] 세례당은 여러 세대에 걸쳐 로마의 유일한 세례당이었으며, 완전 침수를 위한 커다란 수조를 중심으로 한 팔각형 구조는 이탈리아 전역의 다른 세례당의 모델이 되었고, 필사본의 "생명의 샘"이라는 상징적인 모티프가 되었다.3. 5. 회랑

13세기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회랑은 우아하게 꼬인 상감 세공을 한 대리석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 사이의 중간 형태를 보여준다.[6] 바셀렉투스와 코스마티의 작품이다.
4. 라테라노 공의회
라테라노 궁전은 1123년부터 1517년까지 총 다섯 차례의 세계 공의회(라테라노 공의회)가 개최된 장소이다.[5]
공의회 | 연도 | 주요 내용 |
---|---|---|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 | 1123년 | 성직자 서임권 투쟁 종결, 성직자 결혼 금지 |
제2차 라테라노 공의회 | 1139년 | 교회 분열 종식, 성직자 규율 강화 |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 | 1179년 | 교황 선출 방식 개정, 이단 척결 |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 | 1215년 | 교황의 수위권 확인, 성체성사 교리 확립, 연례 고해성사 의무화 |
제5차 라테라노 공의회 | 1512년-1517년 | 교회 개혁 논의 |
5. 라테라노 조약
1929년 2월 11일 교황 비오 11세의 전권 대리 가스파리 추기경과 이탈리아 왕국의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 사이에 합의가 성립되어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명칭은 조약이 조인된 라테라노 대성전과 라테라노 궁전의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6. 현대 가톨릭 교회에서의 의미
로마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 성당으로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의 상징적인 중심지 역할을 한다. 대성당 중앙 입구에는 라틴어로 ‘전 세계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머리인 지극히 거룩한 라테라노 성당(''Sacrosancta Lateranensis ecclesia omnium urbis et orbis ecclesiarum mater et caput'')’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4], 이는 이 대성전이 '모든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칭호는 가톨릭 교회의 일치와 신앙의 근원을 상징한다.
교황 실베스테르 1세는 324년에 대성전을 공식 봉헌하며 '하느님의 집(Domus Dei)'으로 선포하였고, 내부에 교황좌를 배치하여 로마 주교의 주교좌 성당으로 삼았다.[4] 교황좌는 주교의 권위를 상징한다.
가톨릭교회의 로마 일반 전례력에서 11월 9일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라테라노에 대성당을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날인 ‘라테라노 대성당 봉헌 축일’이다. 전 세계 가톨릭 교회는 이날을 기념하며, 이는 가톨릭 교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7. 한국과의 관계
한국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교회의 로마 일반 전례력에 따라 매년 11월 9일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Dedicatio Basilicae Lateranensis)을 지키며, 전 세계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신앙의 유산을 기린다. 1960년대 초, 최덕홍(스테파노) 신부가 한국인 최초로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1년 11월 9일,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아 대성당에서 봉헌된 특별 미사를 집전하고, 한국인 최초의 로마 유학생이었던 최 신부를 기렸다.
1620년, 조선 출신의 예수회 신부 베드로 기베가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귀국 후 순교했으며, 이는 한국과 라테라노 대성당의 역사적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8. 기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비오 12세는 라테라노 궁전과 그 부속 건물들을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로부터 유대인과 다른 난민들을 위한 안전한 피난처로 제공했다.[9] 피난민 중에는 메우치오 루이니, 알치데 데 가스페리, 피에트로 네니 등 유명 정치인들도 있었다.
성 빈첸트 드 폴 자선 수녀회와 그들이 돌보던 60명의 고아 난민들은 비아 카를로 에마누엘레에 있는 수녀원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로마 교황청 신학원 주방에서 일하던 마리아 밤비나 수녀회는 자신들의 수녀원 한 채를 제공했다. 이 부지에는 이탈리아 군인들도 주둔했다.[9]
빈첸초 파지올로와 신학원 부원장 피에트로 팔라치니는 유대인을 도운 공로로 야드 바셈으로부터 의인으로 인정받았다.[10][11]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로마 역사 지구, 교황령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의 일부로 등재되어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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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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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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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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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간행물
Notes on a group of reliqu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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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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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적
世界で一番美しい天井装飾
エクスナレッジ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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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球の歩き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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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로마 똘레랑스의 제국
(주)살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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