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 (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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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수(向秀)는 죽림칠현 중 한 명으로, 혜강, 여안과 친분이 깊었다. 노장사상을 숭상하여 《장자》에 주석을 단 《장자주》를 저술하고, 《주역》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 혜강, 여안과 교류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으나, 두 사람이 처형된 후 관직에 나아가 산기시랑, 황문시랑 등을 역임했다. 문학 작품으로 《사구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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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석은 오호십육국시대 전량의 마지막 군주로, 권력 투쟁으로 즉위했으나 혼란스러운 통치와 불안정한 외교 정책을 펼치다 전진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동진으로 망명했다. - 진나라 (위진)의 작가 - 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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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은 죽림칠현의 한 명이자 위나라 종실의 인척으로 유교적 권위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은둔 생활을 즐겼고, 여안을 변호하다가 종회의 모함으로 사마소에 의해 처형당한 인물이다. - 죽림칠현 - 산도 (서진)
산도는 죽림칠현 중 한 명으로, 위나라 말부터 서진 시대에 이르러 이부상서, 태자소부, 사도를 역임했으며 노장사상에 심취했고 사마씨 정권에 협력했다.
상수 (서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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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62년, 혜강과 여안이 처형당하자, 향수는 군(郡)의 초빙을 받아 상계리(上計吏)에 올랐다. 이후 산기시랑(散騎侍郎), 황문시랑(黄門侍郎),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하였으나 재직 중에 병사했다.[1]
저서로는 《사구부(思舊賦)》가 있는데, 어느 추운 날 저녁 옛집을 지나가다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혜강, 여안과 함께했던 옛 일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어 지었다고 한다.[1]
2. 1. 초기 생애와 사상
죽림칠현 중 한 명으로, 혜강, 여안과 친분이 깊었다. 노장사상을 숭상하여 도가서인 《장자》에 주석을 단 《장자주》를 저술하였으며, 《주역》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1]혜강·여안과 친교가 깊어, 혜강과 함께 대장장이 일을 하거나, 여안과 함께 밭일을 하는 등 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혜강과 여안은 속습에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 데 비해, 향수는 독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향수를 비웃었다.[1]
노장사상을 좋아하여, 『장자』의 주석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자 혜강은 "이 책에 어째서 더 이상 주석 따위가 필요하겠는가. 바로 읽는 사람의 즐거움을 방해할 뿐이다."라고 반대했지만, 주석이 완성되자 세상에서 절찬을 받아 "이것을 읽는 자는 초연하게 마음에 깨달음을 얻고, 한순간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여안은 "장주는 죽지 않았다"라고 칭찬했다.[1]
또한, 『주역』의 주석을 만들었지만, 이쪽은 "대의는 볼 만하지만, 『장자』의 주석이 절륜한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라며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1]
2. 2. 혜강, 여안의 죽음과 관직 진출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명으로, 혜강(嵆康), 여안(呂安)과 친분이 깊었다. 혜강, 여안과 함께 대장장이 일을 하거나 밭일을 하는 등 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혜강과 여안은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했지만, 향수는 독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향수를 비웃었다.노장사상을 좋아하여, 『장자』의 주석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자 혜강은 "이 책에 어째서 더 이상 주석 따위가 필요하겠는가. 바로 읽는 사람의 즐거움을 방해할 뿐이다."라고 반대했지만, 주석이 완성되자 세상에서 절찬을 받았다. 사람들은 "이것을 읽는 자는 초연하게 마음에 깨달음을 얻고, 한순간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여안은 "장주는 죽지 않았다"라고 칭찬했다.
또한, 『주역』의 주석을 만들었지만, "대의는 볼 만하지만, 『장자』의 주석이 절륜한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라며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경원 4년 (263년)에 절친한 친구인 여안과 혜강이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상을 바보 취급하며 거만하게 행동하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다"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자, 군의 초빙에 응하여 상계리가 되어 수도로 올라갔다. 사마소가 "그대는 은자의 뜻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라고 묻자, 향수는 "은자는 까다로울 뿐 성왕의 마음에 미치지 못합니다. 존경할 만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 후, 산기시랑·황문시랑·산기상시 등을 역임하고, 재직 중에 사망했다.
3. 저서
4. 죽림칠현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명으로, 혜강(嵆康), 여안(呂安)과 친분이 깊었다.[1] 노장사상을 숭상하여 도가서인 《장자》에 주석을 단 《장자주(莊子洼)》를 저술하였으며, 《주역(周易)》에 주석을 달기도 했다.[1]
혜강·여안과 친교가 깊어, 혜강과 함께 대장장이 일을 하거나, 여안과 함께 밭일을 하는 등 부귀를 추구하지 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1] 혜강과 여안은 속세에 얽매이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 데 비해, 향수는 독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향수를 비웃었다.[1]
노장사상을 좋아하여, 『장자』의 주석을 만들려고 했다.[1] 그러자 혜강은 "이 책에 어째서 더 이상 주석 따위가 필요한가. 바로 읽는 사람의 즐거움을 방해할 뿐이다."라고 반대했지만, 주석이 완성되자 세상에서 절찬을 받아 "이것을 읽는 자는 초연하게 마음에 깨달음을 얻고, 한순간에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말했다.[1] 여안은 "장주는 죽지 않았다"라고 칭찬했다.[1]
또한, 『주역』의 주석을 만들었지만, 이쪽은 "대의는 볼 만하지만, 『장자』의 주석이 절륜한 데에는 미치지 못한다"라며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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