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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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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소는 사마의의 아들이자 사마사의 동생으로, 위나라의 정권을 장악하고 촉한을 멸망시킨 인물이다. 그는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 싸우며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고, 왕릉, 관구검, 제갈탄 등의 반란을 진압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조모가 사마소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살해당하는 사건 이후 조환을 옹립하고 진왕에 봉해졌다. 이후 촉한을 멸망시키고 진나라 건국을 위한 기반을 다졌으며, 아들 사마염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그는 찬탈 과정에서 음모가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안정을 이끌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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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사마소 (오른쪽) 청나라 삽화
사마소 (오른쪽) 사마유 (청나라 시대 삽화)
이름사마소 (司馬昭)
자상 (子上)
시호문황제 (文皇帝)
묘호태조 (太祖)
신분
출신 가문사마씨
아버지사마의
어머니선목황후
배우자문명황후
자녀무제
사마유
사마간
사마기
사마연좌
경조장공주
생애
출생211년
사망265년 9월 6일
사망 장소낙양
경력
조위의 섭정255년 3월 23일 ~ 265년 9월 6일
전임자사마사
후임자무제
진나라 공작263년 12월 9일 ~ 264년 5월 2일
진나라 왕264년 5월 2일 ~ 265년 9월 6일
후임자무제

2. 생애

사마의와 형 사마사를 따라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 싸웠고, 아버지 사마의의 뒤를 이은 형 사마사와 같이 위나라의 정권을 잡았다.[70]

왕릉의 반란, 강유의 침공, 강족과의 연합 공격 등을 격파하며 신성향후에 봉해졌다.[70]

255년, 조방이 폐위되고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을 통솔하여 진압하고 형 사마사가 죽은 뒤 위장군으로 승진했다.[70] 제갈탄의 반란 때는 오나라 군대와 제갈탄을 격파하고 수춘을 포위했다. 문흠의 공격과 손침의 지원을 막아내고, 거짓 소문으로 제갈탄의 군량을 고갈시켰다. 문흠이 제갈탄에게 죽자 문앙, 문호 형제가 투항했고, 이들을 통해 항복을 권유하여 제갈탄을 참수하고 삼족을 멸했다.[70]

이 공으로 상국에 봉해졌으나, 조모가 사마소를 죽이려 하자 가충을 시켜 조모를 살해하고 조환을 옹립하여 사실상 위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70]

스스로 진왕(晋王)에 봉해진 후, 촉나라가 황호에게 휘둘리는 것을 알고 등애종회에게 촉 정벌을 명했다. 등애가 촉을 멸망시킨 후, 유선을 시험하고 안락공에 봉했다. 사마유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가충의 반대로 사마염을 지명하고 중풍으로 얼마 가지 못해 죽었다.[70]

2. 1. 초기 생애 (211년 ~ 249년)

사마의와 형 사마사를 따라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 싸웠고, 아버지 사마의의 뒤를 이은 형 사마사와 같이 위나라의 정권을 잡았다.[70]

왕릉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는 군을 이끌고 이를 격파하였다. 강유가 군을 이끌고 농우를 공격했을 때도, 사마소는 군을 이끌고 여러 차례 막았다. 강유가 강족과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사마소는 군을 이끌고 강족을 격파했고, 강족 병사들은 사마소에게 투항하였다. 이 공으로 신성향후에 봉해졌다.[70]

경초 2년(238년), 신성향후에 봉해졌다. 정시 초, 낙양의 전농중랑장이 되었다. 위나라 황제 조예가 사치를 부리던 시기가 지난 후, 번거로운 노역을 중지하고 농번기를 빼앗지 않아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산기상시로 전임되었다. 정시 5년(244년), 흥세의 역 때 정촉장군에 임명되어 하후현의 부장으로 종군했지만, 전과가 없는 이 계획에 대해 철수를 건의했다.[58]

정시 10년(249년) 정월, 정적 조상 일족이 도성을 떠난 틈을 타 아버지 사마의를 따라 정변(고평릉의 변)을 일으켰다. 형 사마사는 이 계획에 참여했지만, 사마소는 전날 밤까지 알지 못했다.[58] 정변에서 군세를 이끌고 두 궁전을 지키며 조상 배척에 기여했다.

가평 원년(249년), 촉한강유가 롱우에 침공하자 안서장군·지절이 되어 관중에 주둔하며 여러 군대를 감찰했다. 적의 본거지를 기습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강유를 철수시키고, 선봉 구안을 고립시켜 항복시켰다. 안동장군으로 전임되어 허창으로 돌아갔다.[59]

2. 2. 권력 장악 과정 (249년 ~ 255년)

사마의와 형 사마사를 따라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 싸웠고, 아버지 사마의의 뒤를 이은 형 사마사와 같이 위나라의 정권을 잡았다.[70]

왕릉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는 군을 이끌고 이를 격파하였다. 강유가 늘 군을 이끌고 농우를 공격했는데, 사마소가 군을 이끌고 여러 차례 막았다. 또한 강유가 강족과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사마소가 군을 이끌고 강족을 격파하니, 강족의 여러 병사들은 사마소에게 투항하였다. 이 공으로 신성향후에 봉해졌다.[70]

경초 2년(238년), 신성향후에 봉해졌다. 정시 초, 낙양의 전농중랑장이 되었다. 조예가 사치를 극에 달했던 시기 이후, 번거로운 노역을 중지하고 농번기를 빼앗지 않았기 때문에 만백성으로부터 환영받았다. 이후 산기상시로 전임되었다. 정시 5년(244년), 흥세의 역 때 정촉장군에 임명되어 하후현의 부장으로 종군했지만, 전과가 없는 이 계획에 대해 철수를 건의했다.[58]

정시 10년(249년) 정월, 정적 조상 일족이 도성을 떠난 틈을 노려 아버지 사마의를 따라 정변(고평릉의 변)을 일으켰다. 형 사마사는 이전부터 이 계획에 참여했지만, 사마소는 전날 밤까지 알지 못했다. 정변에서 군세를 이끌고 두 개의 궁전을 지키며 조상 배척에 기여했다.[58]

가평 원년(249년), 촉한강유가 롱우에 침공했다. 사마소는 안서장군·지절이 되어 관중에 주둔하며 여러 군대를 감찰했다. 적의 본거지를 기습하는 것처럼 위장하여 강유를 철수시키고, 선봉 구안을 고립시켜 항복으로 몰아넣었다. 안동장군으로 전임되어 허창으로 돌아갔다.[58]

가평 4년(252년), 도독으로서 제갈탄, 호준 등과 함께 를 정벌하려 했지만, 양군이 패전했다(동흥의 전투). 여러 장수들의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정권을 담당한 사마사는 스스로의 책임을 물어 그들을 문책하지 않았고, 측근인 사마소가 책임을 져 작위를 삭감당했다.[59]

가평 5년(253년), 다시 강유의 침공을 요격하기 위해 행정서장군에 임명되어 장안에 주둔했다. 강유는 적도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사마소는 이를 거짓이라고 간파하고 동요하지 않아 강유는 철수했다(적도의 전투). 그 후, 신평군의 강족의 반란을 평정하고, 북방의 이민족을 상대로 무위를 떨쳐 공적으로 다시 신성향후에 복귀했다. 정원 원년(254년)에는 신제 조모의 옹립에 기여하여 고도후로 진작되었다.[58]

254년, 사마소가 낙양에 있을 때 조방의 측근들은 황제가 사마소를 기습하여 죽이고 그의 군대를 빼앗아 사마사에게 대항할 것을 제안했다. 조방은 불안해하며 그 제안을 실행하지 않았지만, 음모는 발각되었고, 사마소는 그의 형을 도와 황제를 폐위시키고 조모를 옹립했다. 황제 폐위 후, 장수 관구검문흠이 255년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사마사에게 진압되었다.[11]

정원 2년(255년) 정월, 수춘에서 관구검·문흠의 난이 일어났다. 사마사가 10만 군세를 지휘하여 토벌하는 동안 중령군의 관직을 겸하여 낙양을 지켰다. 난이 진압된 후, 병으로 중태가 된 사마사를 허창에서 문병했지만, 곧 사망했다.[60]

2. 3. 권력 강화와 찬탈 준비 (255년 ~ 265년)

사마의와 형 사마사를 따라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 싸웠고, 사마사와 같이 위나라의 정권을 잡았다.[70]

왕릉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격파하였다. 강유가 군을 이끌고 농우를 공격했을 때, 여러 차례 막았다. 강유가 강족과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강족을 격파하여 강족 병사들이 사마소에게 투항하였다. 이 공으로 신성향후에 봉해졌다.[70]

255년, 위나라 황제 조방이 사마사에게 폐위당하자 관구검문흠과 결탁하여 회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70] 사마소는 군을 통솔하여 관구검, 문흠을 격파하여 관구검은 죽고 문흠은 오나라로 도주하였다. 형 사마사가 죽자 위장군으로 승진하였다.[70] 254년, 사마소가 낙양에 있을 때 위나라 황제 조방의 측근들이 황제가 사마소를 기습하여 죽일 것을 제안했다. 조방은 불안해하며 실행하지 않았지만, 음모는 발각되었고, 사마소는 그의 형을 도와 황제를 폐위시키고 조모를 옹립했다. 황제 폐위 후, 장수 관구검문흠이 255년에 반란을 일으켰지만 사마사에게 진압되었다.[11]

그러나 사마사는 전투로 인해 악화된 심각한 눈병을 앓고 있었고, 한 달도 채 안되어 3월 23일에 사망했다.[11] 그 당시 사마소는 허창에서 형과 함께 있었다. 14세의 황제 조모는 황권 회복을 시도했다. 그는 사마사가 관구검과 문흠의 반란을 막았고 동남 제국이 아직 완전히 평정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사마소에게 허창에 머물 것을 명하고, 사마사의 보좌관 부가에게 주력 부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부가와 종회의 조언에 따라, 사마소는 조서에 반하여 낙양으로 돌아갔고,[12] 정부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13] 이후로 그는 조모나 곽태후를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았다.

257년 제갈탄이 양주자사 악침을 죽이고 회남에서 반란을 일으켰다.[70] 사마소는 친히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오나라를 먼저 격파하고 제갈탄까지 격파하였다. 제갈탄은 수춘으로 도주하였고, 사마소는 수춘을 포위하였다. 문흠이 군을 이끌고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사마소는 이를 격파하였다. 손침이 제갈탄을 도와주러 군을 이끌고 사마소를 공격했지만 사마소가 오나라의 장수 손침을 격파하였다.[70]

사마소가 거짓으로 "오나라의 구원이 온다"라고 수춘에 헛소문을 퍼트리게 하자 제갈탄은 방심하여 군량을 아끼지 않고 사용하여 군량이 떨어졌고, 수춘의 병사들은 사마소에게 투항했다. 제갈탄과 문흠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문흠이 패하자, 의심 끝에 제갈탄이 문흠을 죽였다. 이에 그의 아들 문앙, 문호가 사마소에게 투항하고 사마소는 문앙에게 시켜 적들에게 항복을 권하게 하였다. 수춘에서 항복하는 병사들이 많아지자 사마소가 총공격을 하여 제갈탄을 참수하고 제갈탄의 삼족을 멸하였다.[70]

이 공으로 사마소를 상국으로 봉했다.[70] 이후 사마소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여 황제와 황태후에게 거의 권력을 남기지 않았다. 또한 위나라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일련의 사건들을 만들었다. 256년, 황제에게 황제의 예복, 관, 신발을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측근들을 시켜 제국 전역의 장군들에게 그의 의도를 암시함으로써 여론을 살폈다. 257년, 가충제갈탄의 의도를 엿보게 하기 위해 보냈는데, 제갈탄은 가충을 심하게 꾸짖었다.[14] 이로 인해 사마소는 제갈탄을 승진이라는 명목으로 수도로 소환했다. 제갈탄은 이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켜 동오에 신종했다.[15] 사마소는 제갈탄의 거점인 수춘으로 진격하여 포위했고, 258년에 도시를 함락했다. 제갈탄과 그의 가족을 죽였지만, 시민들과 증원군으로 파견된 오나라 병사들을 포함한 많은 관련자들을 관대하게 대했다. 그는 시민들을 처벌하고 모든 병사들을 죽이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고대인들은 군대를 사용함에 있어서, 국가를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므로, 지도자만 죽이면 그만이다. 만약 오나라 병사들이 도망쳐 돌아간다면, 그들은 중앙 국가의 위대함을 알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관대함은 사마씨 가문을 대중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제갈탄이 죽은 후, 그 다음 몇 년 동안 감히 사마소에게 더 이상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258년, 황제로 하여금 그에게 구석(九錫), 승상직, 그리고 진공의 칭호를 내리게 했는데, 이는 그를 찬탈에 더 가깝게 만들었으며, 그는 이를 아홉 번이나 공개적으로 거절했다.[17]

사마소가 가충을 보내 조모의 죽임을 벼르고 있던 차에, 더욱 큰 위협을 느낀 당시 위의 천자 조모는 사병 300명을 풀어 사마소를 죽일 계책을 펼친다. 하지만 이를 눈치챈 사마소는 조모의 계략을 무마시키고 이를 빌미로 천자를 살해했다. 그 후 조환을 앞세워 위의 천자로 옹립함으로써 사실상 사마소는 위의 모든 전권을 잡게 되었다.[70] 260년 5월경, 사마소는 다시 조모에게 구석과 승진을 하사하는 조서를 강요했고, 조모는 이를 다시 거절했지만[18] 이 일로 조모의 분노를 샀다. 그는 측근인 왕심, 왕경, 왕업을 불러 모아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사마소에 맞서 행동할 것이라고 말했다.[19] 그는 친히 황실 호위를 이끌고 칼을 든 채 사마소의 저택으로 향했다. 사마소의 동생 사마주가 저항하려 했지만 조모의 시종들이 크게 외치자 사마주의 군사들은 도망쳤다. 가충이 도착하여 황실 호위를 가로막았다. 조모가 직접 싸웠고, 가충의 군사들은 황제를 공격하는 것을 감히 하지 못하고 도망치고 있었다.[20] 가충의 휘하 장수 중 한 명인 성제(成濟)는 가충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묻고 가충이 결과에 상관없이 사마씨의 권력을 지키라고 하자 창을 들고 조모를 찔러 죽였다.[21] 이로 인해 사마소는 매우 당황했다.[22]

조모가 죽자 민심은 가충의 처형을 요구했지만, 사마소는 먼저 곽태후에게 조모의 시호를 평민으로 강등하고 평민의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했다.[23] 그는 또한 왕경과 그의 가족을 처형했다. 다음 날, 그의 숙부 사마부의 간청을 받은 사마소는 곽태후에게 조모를 다시 공작으로 추존하고 황태자의 예로 장례를 치르도록 명령했다.[24] 사마소는 그 후 조환을 수도로 불러 황제가 되도록 했다. 이제 곽태후는 더 이상 발언권이 없었다.[25] 이 모든 사건들 속에서 사마소는 구석과 승진을 거절하여 국상(國相)과 진공(晉公)의 지위를 받았다.[26] 며칠 후, 사마소는 성제와 그의 형제들을 반역죄로 공개적으로 고발하여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처형하여 민심을 달래는 한편 가충은 살려두었다.[27] 황제의 죽음 이후에도 사마소에게 감히 대항하는 자는 없었다. 6월 27일, 조환은 낙양에 입성하여 황제가 되었다.[28] 이틀 후, 사마소는 조환에게 구석과 국상, 그리고 진공의 지위를 하사하도록 강요했고, 그는 진심으로 거절했다.[29] 10월에도 한 번 더 거절했다.[30][31]

자신의 전권을 토대로 자신 스스로를 진왕(晋王)에 봉한다. 그 후 대륙의 통일을 위해 전쟁을 준비한다. 이때 강유에게 의지하며,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는 촉나라가 환관 황호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등애종회에게 명해 촉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결국 등애가 촉의 험난한 산세를 넘어, 종회보다 더 빠른 시간에 촉나라를 항복시키며 그가 내린 토벌령을 수행하게 된다.[70] 262년, 강유의 끊임없는 국경 공격에 격분한 사마소는 강유를 암살하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순욱에 의해 반대되었다.[32] 종회는 강유가 그의 군대를 지치게 했으며, 촉을 완전히 멸망시키기에 적절한 시기라고 믿었다.[33] 사마소는 종회, 제갈서, 등애에게 침공군을 지휘하게 했고, 263년 가을에 출발했다.[34]

종회, 제갈서, 등애는 촉군으로부터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는데, 촉군의 전략은 위군을 유인한 다음 포위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실패했는데, 위군은 예상보다 빠르게 촉의 국경 도시들을 지나 양안관으로 진격하여 점령했다. 제갈서는 결국 축출되어 포로로 보내졌는데, 등애가 자신의 군대와 제갈서의 군대를 합치고 싶었던 반면, 제갈서는 원래 계획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군사적 상황을 독점하려던 종회를 만났고, 종회는 제갈서의 비겁함을 언급하는 조서를 보냈고, 이후 제갈서의 군대는 종회와 합쳐졌다.[35] 강유는 재정비하여 위군의 추가 진격을 막을 수 있었지만,[36] 등애가 위험한 산길을 넘어 강유로 진격하여 제갈첨을 격파하고[37] 촉의 수도인 성도로 직접 향했다. 등애의 빠른 진격에 놀란 촉의 황제 유선은 강유가 등애에 맞서 수도를 방어하기에 충분히 빨리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위나라에 항복했다.[38] 263년 봄에 사마소는 다시 구석과 승진을 거절했지만,[39] 작전 중에 최근의 성공을 고려하여 263년 12월 9일에 황제 조환은 사마소에게 진공(晉公)의 작위, 구석, 그리고 상국(相國)의 지위를 하사했고, 사마소는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40]

이후 그는 잡혀온 촉의 후주 유선의 마음과 인물됨을 시험하기 위해 술자리를 갖게 되는데 그를 시험키 위해 면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를 들은 사마소는 후주 유선을 무능하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건들지 아니하고, 그를 안락공으로 임명하며 편히 쉬게 해준다.[70]

촉나라가 멸망한 후 또 다른 혼란이 찾아왔다. 등애는 사마소와의 서신 왕래에서 거만해져 사마소의 의심을 샀다. 스스로 반란을 계획하고 있던 종회는 사마소와 등애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거짓 편지를 조작했고,[41] 사마소는 종회에게 등애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사마소는 종회를 경계하여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장안에 주둔했다.[42] 종회는 등애의 군대를 장악하여 자신의 군대와 합병한 후, 강유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삼아,[43] 264년에 반란을 선포했다.[44] 그러나 그의 군대는 그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와 강유를 모두 죽였고,[45] 사마소는 촉나라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후에 후계자로 형에게 입양시킨 아들 사마유를 자신을 이을 정권자로 지명하려고 했으나 가충의 반대로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하게 되는데, 사마염을 후계자로 지명할 땐 벌써 중풍을 맞고 쓰러져 겨우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에 사마소는 얼마 가지 못해 죽게 된다.[70]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사마방
사마의고조 선황제
장춘화선목황후 장씨
사마사세종 경황제
형수하후휘경회황후 하후씨
형수양휘유경헌황후 양씨
부인왕원희문명황후 왕씨, 왕숙의 딸
아들사마염세조 무황제, 왕원희 소생
며느리양염무원황후 양씨
며느리양지무도황후 양씨
아들사마유제헌왕, 왕원희 소생
아들사마조성양애왕, 왕원희 소생, 요절
아들사마정국요동도혜왕, 왕원희 소생, 요절
아들사마광덕광한상왕, 왕원희 소생, 요절
경조공주서평(西平)의 견덕(甄德)[54]에게 시집, 아들 하나를 낳음, 평원후 견덕의 후처[69]
동생사마간
누이남양공주
측실수화 이염
측실수용 왕선
측실수의 서염
측실첩여 오숙
측실충화 조궤
아들사마감낙안평왕, 육남, 297년 사망
아들사마기연왕, 칠남, 숙부 사마경의 양자
아들사마영조팔남, 요절
아들사마연조낙평왕, 구남
장산공주왕기에 시집감


4. 평가

사마소는 형 사마사와 함께 조위(曹魏)를 찬탈할 기반을 다져 음모가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성공 요인을 분석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습착치는 제갈탄(諸葛誕) 등의 반란을 진압한 후 주모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사면했으며, 나라에서 파견된 제갈탄의 원군 포로들도 모두 사면한 점을 들어 "이후 천하 사람들이 (사마소의) 무위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덕의(德義)를 사모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61]

진서 주석인 『양양기(襄陽記)』(습착치 저작)에 따르면, 경원 4년(263년) 촉한 공격에 대해 오나라 조정에서는 사마소가 실패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장제조조가 백성을 위세로만 억눌렀고 조비조예도 이를 계승해 민심을 잃었지만, 사마의 부자는 정권을 잡은 후 공을 세우고 가혹한 정치를 없애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회남에서 세 번의 반란과 조모의 죽음에도 사마씨 정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적을 용서 없이 제거하고 현자를 등용하여 능력을 발휘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사마씨의 위무와 민심을 바탕으로 촉한 공격이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결국 그의 예측이 맞았다.

4. 1. 부정적 평가

사마소는 형 사마사와 함께 수많은 음모와 정쟁을 주도하여 위(魏)를 찬탈할 발판을 굳혔기 때문에 음모가로 비난받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사마소 측은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조씨(曹氏)에 의한 반격을 경계했다. 죽림칠현 중 한 명인 혜강이 살해된 것도 그의 부인이 무제 조조의 증손녀였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게다가 황제 조모 살해에도 실질적으로 관여했다.[61]

세설신어』에 따르면, 동진 명제가 왕도로부터 찬탈 경위를 듣고 얼굴을 가리며 "만약 공이 말한 대로라면 어찌 (진의) 황조(皇祚)를 오래 보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환온 또한 한가롭게 지낼 때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며 "나는 방명을 남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문(사마사와 사마소)의 냄새도 남길 수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61]

4. 2. 중도진보적 관점에서의 평가

사마소는 형 사마사와 함께 위(魏)를 찬탈하기 위한 기반을 다졌기 때문에 음모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조조의 증손녀를 부인으로 둔 죽림칠현혜강이 살해되고, 황제 조모가 살해된 사건에도 사마소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다.[61]

세설신어에 따르면, 동진의 명제는 왕도로부터 찬탈 과정을 듣고 "만약 공이 말한 대로라면 어찌 (진의) 황조(皇祚)를 오래 보전할 수 있겠는가"라며 얼굴을 가렸다고 한다. 또한 환온은 "나는 방명을 남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경문(사마사와 사마소)의 냄새도 남길 수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한편, 사마소가 찬탈에 성공한 이유에 대한 분석도 있다. 제갈탄 등의 반란을 진압한 후 주모자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사면했으며, 에서 온 제갈탄의 원군 포로들도 사면했다. 습착치는 이를 두고 "이 이후, 천하의 사람들은 (사마소의) 무위를 두려워하는 동시에 덕의(德義)를 사모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61]

진서의 주석 『양양기(襄陽記)』(습착치의 저작)에 따르면, 263년 촉한(蜀漢) 공격 당시 오나라 조정에서는 사마소의 실패를 예상하는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장제는 조조가 백성을 위세로만 억눌렀고, 조비와 조예도 이를 계승하여 민심을 잃었지만, 사마의 부자는 정권을 잡은 후 공을 세우고 가혹한 정치를 없애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회남에서 세 번의 반란과 조모의 죽음에도 사마씨 정권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적을 용서 없이 제거하고 현자를 등용하여 능력을 발휘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장제는 이러한 사마씨의 위무와 민심을 바탕으로 촉한 공격이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결국 그의 예측이 맞았다.

5. 대중문화 속의 사마소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삼국무쌍 7''에서 처음으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하며, 여기서 그는 게으르고 태평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실제로는 재능 있는 리더이자 전략가로 묘사된다. 이후 ''무쌍 오로치 3''에서도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다시 등장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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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Writing Against the State: Political Rhetorics in Third and Fourth Century China https://books.google[...] BRILL 2015-01-02
[6] 문서 xinmao day of the 8th month of the 2nd year of the Xianxi era. (咸熙二年秋八月辛卯,帝崩于露寝,时年五十五。) Jin Shu
[7] 문서 Sima Zhao's biography in Book of Jin recorded that he was a younger full-brother of Sima Shi. (文皇帝讳昭,字子上,景帝之母弟也。) Jin S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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