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석촌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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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석촌동 고분군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백제 시대 고분군이다. 1970년대 이후 발굴 조사를 통해 고구려 적석총과 유사한 백제 적석총의 구조가 확인되었으며, 3호분은 백제 왕릉으로 추정된다. 1호분, 2호분, 3호분, 4호분, 5호분 등 다양한 형태의 고분과 토광묘, 적석총 등이 있으며, 2015년 싱크홀 발생 이후에도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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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석촌동 고분군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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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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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
한국어 | 서울 석촌동 고분군 |
한글 | 서울석촌동고분군 |
한자 | 서울石村洞古墳群 |
로마자 표기 | Seoul Seokchon-dong Gobungun |
문화재 정보 | |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243 |
지정일 | 1975년 5월 27일 |
주소 |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61-6번지 |
시대 | 백제 |
면적 | 49,999m2 |
2. 역사
서울특별시 동남부 한강 남쪽에 있는 백제 한성 시대의 고분군이다.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남서쪽으로 각각 약 2.8km, 약 2km 거리에 있으며, 백제 왕족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1]
1917년 지도에는 약 290기의 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8기만 남아 있다.[1] 고분은 적석총과 흙무덤(墳丘土壙墓)으로 나뉘며, 과거 조사에서는 적석총 66기, 흙무덤 23기가 있었다고 한다.
주요 고분 형태인 적석총은 흙으로 쌓은 기단 위에 깬돌(할석)이나 판돌(판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1] 돌만으로 쌓은 형식(3호분)과 적석 내부에 흙을 채운 형식(4호분 등)이 있다.[3] 이러한 기단식 적석총은 고구려 지역에서 알려져 있어,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했다는 문헌 기록과 일치한다고 여겨진다. 다만 고분 자체는 고구려식과 다른 점이 보여 "백제식 적석총"이라고도 한다.[1] 특히 3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약 50m로 최대 규모이다.
고분군에서는 중국 동진의 도자기도 출토되어, 당시 중국 남조와 백제 간의 교류 모습을 보여준다. 1975년 5월 27일 "석촌동 백제 초기의 적석총"으로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고,[2] 2011년 7월 28일 "서울 석촌동 고분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2]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74년, 1983년, 1984년, 1986년, 1987년에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2. 1.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이 일대는 1916년 조사 당시 90여 기의 돌무지무덤(적석총)과 흙무덤(봉토분)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6] 광복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잦은 전쟁과 혼란으로 고분 유적지는 방치되었고, 무덤 위에 무허가 민가들이 들어설 정도로 훼손되었다.[7][8] 1971년부터 1975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암사동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으나, 이후 도시개발 등으로 유구의 99% 이상이 사라지고 고분군의 서쪽 일부만 현재 모습으로 남았다.[7]1960년대 들어 일제시대 이후 처음으로 한강지역 백제 유적들에 대한 자체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으나, 잦은 홍수로 인해 유적들은 대부분 파괴된 상태였다.[9] 1970년 서울에 거주 중이던 미국인 에디와 넬슨이 토기 파편을 찾기 위해 강변을 다니다 한강변에 지붕의 서까래 같은 것이 꽂혀 있다는 제보를 하였다. 1971년부터 이 지역이 잠실지구개발사업으로 매몰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국립박물관에서 급히 구제적 발굴을 실시하게 된다.[10]
1974년 가을, 김원룡 교수가 이끈 서울대박물관 발굴단이 3·4호분을 긴급 발굴조사하였고, 그 결과 국내성(환런) 인근의 고구려 돌무지무덤과 유사한 백제 돌무지무덤의 구조와 축조 양식이 확인되며 1975년 5월 27일에 1513평이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다.[7] 1983년에는 고분들 사이를 관통하는 도로공사로 인해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갔다.[7] 이때 이형구 교수의 노력으로 석촌동 3호분과 그 일대가 다시 조사되면서 대형 돌무지무덤 7기와 널무덤, 독무덤 등 30여 기 이상이 확인되었고,[11] 1983년 문화재위원회는 사적의 지정면적을 기존 1513평에서 4928평으로 넓히기로 결정했다.[7]
1985년, 정부는 석촌동 고분을 포함한 강남 일대의 '백제유적보존령'을 내리고 석촌동·방이동 고분군과 몽촌토성 등에 519억원을 들여 정비하고,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고분군은 1513평의 사적면적을 10배가 넘는 1만 7000평으로 확대한다.[7] 1987년에는 인근의 민가들이 철거되면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백제고분공원이 조성되었다.[12]
이곳의 돌무지무덤은 외형상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돌무지무덤과 같지만 내부 구조면에서는 서로 다른 유형이다. 3호 돌무지무덤은 무덤의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고구려식이며, 2호와 4호 돌무지무덤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기단부만 남은 1호 돌무지무덤은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남분은 고구려식이고 북분은 백제식이다. 무덤 내부와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와당, 금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3호 돌무지무덤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6]
2015년에 싱크홀이 발생한 후로 현재 계속 발굴조사중에 있다. 2020년 조사결과 여러 호의 돌무지무덤이 이어져있는 연접적석총의 형태로 확인이 되었고, 돌무지무덤의 밑에 목곽분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화장 후 분골한 인골이 발굴되었다.
2. 2. 1970년대 이후 발굴 조사
이 일대는 1916년 조사 당시 90여 기의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봉토분(흙무덤)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석촌'이라는 마을 이름도 돌무지무덤이 많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6] 광복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잦은 전쟁과 사회 혼란으로 고분 유적지는 방치되었고, 무덤 위에 무허가 민가들이 들어설 정도로 훼손되었다.[7][8] 1970년대부터 잠실지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가 시작되었다.1974년 가을, 김원룡 교수가 이끈 서울대박물관 발굴단은 3·4호분을 긴급 발굴조사하여 국내성(환런) 인근의 고구려 적석총과 유사한 백제 적석총의 구조와 축조 양식을 확인하였다.[7] 이를 계기로 1975년 5월 27일, 1513평이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다.[7]
1983년에는 고분들 사이를 관통하는 도로공사로 인해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가는 일이 발생했다.[7] 이때 이형구 교수의 노력으로 석촌동 3호분과 그 일대가 다시 조사되면서 대형 돌무지무덤 7기와 널무덤, 독무덤 등 30여 기 이상이 확인되었고,[11] 문화재위원회는 사적의 지정 면적을 기존 1513평에서 4928평으로 확대했다.[7]
1985년, 정부는 석촌동 고분을 포함한 강남 일대의 '백제유적보존령'을 내리고, 5190억원을 들여 석촌동·방이동 고분군과 몽촌토성 등을 정비하였다. 석촌동 고분군은 사적 면적이 1513평에서 1만 7000평으로 확대되었다.[7] 1987년에는 인근 민가들이 철거되면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백제고분공원이 조성되었다.[12]
이곳의 적석총은 외형상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적석총과 같지만 내부 구조는 다르다. 3호 적석총은 무덤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고구려식이고, 2호와 4호 적석총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를 흙으로 채운 백제식이다. 1호 적석총은 기단부만 남았는데, 남분은 고구려식, 북분은 백제식으로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다. 무덤 내부와 주변에서는 백제 토기와 와당, 금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3호 적석총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된다.[6]
2015년에는 싱크홀 발생 이후 계속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다. 2020년 조사 결과 여러 호의 적석총이 연결된 연접적석총 형태로 확인되었고, 적석총 밑에서 목곽분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화장 후 분골한 인골도 발굴되었다.
2. 3. 최근 발굴 조사
1974년 가을, 김원룡 교수가 이끈 서울대박물관 발굴단이 3·4호분을 긴급 발굴조사하여 국내성(지금의 지안 시) 인근의 고구려 적석총과 유사한 백제 적석총의 구조와 축조 양식이 확인되었고, 1975년 5월 27일에 1513평이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다.[7]1983년에는 도로공사로 3호분의 기단부가 잘려나갔으나, 이형구 교수의 노력으로 석촌동 3호분과 그 일대가 다시 조사되면서 대형 돌무지무덤 7기와 널무덤, 독무덤 등 30여 기 이상이 확인되었다.[11] 같은 해 문화재위원회는 사적 지정 면적을 기존 1513평에서 4928평으로 넓히기로 결정했다.[7]
1985년, 정부는 석촌동 고분을 포함한 강남 일대의 '백제유적보존령'을 내리고, 석촌동 고분군의 사적 면적을 1513평에서 10배가 넘는 1만 7000평으로 확대했다.[7] 1987년에는 인근 민가들이 철거되면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고 백제고분공원이 조성되었다.[12]
이곳의 적석총은 외형상 고구려의 발달된 기단식 적석총과 같지만, 내부 구조는 서로 다르다. 3호 적석총은 무덤 안팎을 모두 돌로 쌓은 고구려식이며, 2호와 4호 적석총은 기단과 계단 외부를 돌로 쌓았지만 내부는 흙으로 채웠다는 점에서 백제식이다. 기단부만 남은 1호 적석총은 두 기의 무덤이 남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남분은 고구려식이고 북분은 백제식이다. 무덤 내부와 주변에서 백제 토기와 와당, 금제 귀걸이 등이 출토되었다. 3호 적석총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6]
2015년에 싱크홀이 발생한 후로 현재 계속 발굴 조사 중이다. 2020년 조사 결과 여러 호의 적석총이 이어져 있는 연접적석총 형태로 확인되었고, 적석총 밑에 목곽분이 추가로 확인되었다. 화장 후 분골한 인골이 발굴되었다.
3. 주요 고분
1917년 지도에 따르면 석촌동 고분군에는 약 290기의 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 도시 개발로 인해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8기만 남아 있다.[1] 고분의 형태는 대략 적석총과 墳丘土壙墓(토총)로 나뉘며, 주가 되는 적석총은 기단 위에 할석·판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1]
적석총 중에는 적석만으로 이루어진 형식(3호분)과 적석 내부에 흙을 채우는 형식(4호분 등)이 있다.[3] 이러한 기단식 적석총은 고구려 지역에서 알려져 있어, 백제의 건국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했다는 문헌 정보와 일치한다고 여겨진다.[3] 다만 고분 자체는 고구려식과는 다른 점이 보여 "백제식 적석총"이라고도 칭한다.[1]
이 고분군에서는 중국 동진의 도자기도 출토되어, 당시 중국 남조와 백제 간의 교류 모습을 보여준다.
- 5호분: 원형 봉토묘로, 직경 17m, 높이 3m이다. 고분군 중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아 발굴 조사에서는 봉토만 조사되었다.[1] 흙을 쌓아 올린 위에 덮개돌을 덮고, 그 위에 다시 얇게 흙을 덮는 부석봉토분 형태이다.[1]
최근 조사에서는 위에 언급된 것 외에도 적석총이 새롭게 발견되었다.[4]
3. 1. 석촌동 1호분
일찍이 파괴된 고분 위에 흙이 덮이고 민가가 들어서 상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발굴 조사에서 드러난 적석 상태에 의하여 2기의 고분이 합쳐져 이루어진 쌍분으로 보인다.[13]
즉 동서 9.9m, 남북 8.9m 크기의 북분과 동서 9.6m, 남북 9.8m 크기의 남분이 합쳐진 것인데, 남·북분 서쪽 기단부는 너비 3.2m의 적석단으로 이어졌다.[13]
내부 구조는 남분에서만 확인되었는데, 길이 20cm~30cm 크기의 깬돌(표갠돌)로 네 벽을 쌓고 바닥에 10cm 안팎의 깬돌 조각·자갈 등을 깐 석곽 4개가 있었다. 4개의 석곽 중 중앙에 가장 큰 것이 장축을 동서 방향으로 놓였으며, 작은 석곽 3개는 북쪽 적석벽에 잇대어 동서 방향으로 1열을 이루고 놓여 있었다. 가장 큰 중앙의 석곽은 길이 약 2.5m, 너비 약 2.3m이고, 1호 소형석곽은 길이 약 1.8m·너비 1.2m, 2호 소형석곽은 길이 1.6m·너비 1.4m, 3호 소형석곽은 길이 1.2m·너비 1m이다.[13]
평면 모양이 이 적석총과 거의 같은 것으로는 고구려의 적석총인 중국 길림성 환인현 고려묘자촌 제15호분, 평안북도 송암일 제45호분 등이 있다.[13]
1호분은 쌍분으로, 고분 2기가 남북으로 나란히 있다.[1] 북쪽 무덤은 3세기 중반, 남쪽 무덤은 3세기 말~4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 내부와 주변에서 백제 시대의 토기, 기와, 금제 귀걸이가 발견되었다.[1]
3. 2. 석촌동 2호분
제2호분은 복원 정비 이전에 길이 약 25m, 너비 약 20m, 높이 3~4m 크기의 봉우리 모양으로 남아있었다. 봉우리 모양 분구 기저부 주위에는 민가가 있었고 돌담이 둘러 있었으며, 파괴된 분구 위에는 약 10~3cm 두께로 흙이 덮여 있었다.[14]
발굴 조사 결과, 제2호분의 분구는 다음과 같이 축성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먼저 1단 바깥둘레에 1m 정도 높이로 포갠 돌을 쌓고 그 내부에 진흙을 다져 채웠다. 그 다음 2단은 1단 적석 가장자리에서 얼마쯤 안쪽으로 들어가서 포갠 돌을 쌓은 다음 다시 그 내부에 진흙을 채웠다. 마지막으로 3단은 1, 2단과 같은 방법으로 축성하고 정상부에는 둥그렇게 흙을 덮은 것으로 보인다. 1단의 동, 서, 남쪽 면에는 지탱석이 각각 1개씩 남아 있었다. 내부구조는 동북 1/4구역과 서북 1/4구역의 일부만 발굴 조사되어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동북 1/4구역 바닥에 자갈과 막돌 조각이 섞여 깔려 있었고, 깔린 돌 사이에는 붉은 갈색 연결 토기편이 흩어져 있었다.[14]
복원 정비된 제2호분은 다음과 같은 규모이다.[14]
구분 | 길이(동서) | 길이(남북) | 높이 | 단의 너비 |
---|---|---|---|---|
제1단 | 16.4m | 16.5m | 90cm | 2m |
제2단 | 12.5m | 12.6m | 90cm | 2m |
제3단 | 8.5m | 8.6m | 1.7cm | (흙에 덮여 불확실) |
전체 높이 | 3.5m |
1단 바닥 서북쪽에서는 장축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둔 목곽 토광묘 1기가 발견되었는데, 크기는 길이 2.5m, 북쪽 너비 1.6m, 중앙 너비 0.4m, 남쪽 너비 0.65m, 길이 0.1m~0.15m이다.[14]
이러한 구조 형식의 적석총은 분구, 내부 구조 등 고분 전체를 돌로 쌓아 축조한 고구려식의 전형적인 적석총이 변하여 백제화된 것으로 보인다.[14]
3. 3. 석촌동 3호분
- 형태: 방형 계단식 적석총 (3단 이상)
- 규모: 동서 50.8m, 남북 48.4m, 추정 높이 4.5m 이상
석촌동 고분군 중 가장 큰 계단식 적석총으로, 무덤 전체가 돌로 덮여 있으며 3단 이상으로 쌓았다.[1] (3단 이상은 무너져서 정확한 단수는 알 수 없다.[3]) 민가 조성으로 인해 매장 시설은 크게 손상되었다. 고분 주변에서는 중국 동진의 도기 조각, 금제 장식, 백제 토기 조각이 발견되었다.[1]
이 고분은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며[1],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보는 설이 있다.
3. 4. 석촌동 4호분
4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17m인 방형 계단식 적석총(3단)이다. 본래 묘구에 나중에 돌을 덮은 것으로 보인다.[1] 고분에서는 벽돌 조각, 토기 조각,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1] 개로왕 시기 기록에 '큰 돌을 가져다 덧널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라는 기록이 있어 비유왕의 무덤으로 추론하는 연구가 제시되기도 한다.[16]
3. 5. 석촌동 5호분
분구는 흙으로 쌓은 봉토분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이 일대에 남아있는 유일한 봉토분이므로 분구 일부만 발굴 조사하고 내부 구조는 확인하지 않았다.[17]
분구는 내부 구조 위에 흙을 다져 쌓아 덮고 그 위에 강돌과 막돌을 섞어 한 벌 깐 다음에 다시 그 위에 흙을 엷게 덮은 즙석분구이다.[17]
이와 흡사한 즙석분구의 봉토분인 가락동 고분군 제1·2호분이 이 고분에서 동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1969년 발굴 조사에서 가락동 제1호분은 토광 안에 목관을 안치한 목관토광묘 형식이었고, 제2호분은 목관토광묘와 옹관묘 형식의 것이 함께 묻힌 구조였다. 가까이에 있고 거의 같은 시기인 백제 전기 고분 2기라는 점으로 미루어 석촌 제5호분도 목관토광묘 형식으로 추정된다.[17]
분구의 현재 크기는 지름 17m, 높이 3m인 원형 봉토분이다.[17]
3. 6. 석촌동 제2호 토광묘
석촌동 제2호 토광묘는 생토층을 파서 묘광을 만들었는데 평면은 장방형이고 장축은 동남동에서 서북서로 두었다. 벽면은 바닥에서 위로 향하여 약간 경사졌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동쪽에는 회백색의 목이 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으며 묘광 바닥에서 약간 위인 흙속에서 지름 1.6cm~1.7cm 크기의 민 고리 금귀고리 1개가 드러났다.[18]
토광묘의 크기는 길이 223cm, 너비 76cm, 높이 21cm이다. 이러한 구조형식의 토광묘는 제3호분과 근접한 동쪽 지점에서 10여 기가 드러났는데 적석총 바닥보다 아래층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토광묘는 적석총보다 앞선 시기의 묘제였음을 짐작케한다.[18] 제2호 토광묘는 본래 북쪽 10m 위치에 있었다.[1]
3. 7. 석촌동 제3호 토광묘
제3호 토광묘는 표토 밑 70cm에서 드러났고 평면은 네 모서리가 둥그스럼한 장방형이며 장축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두었다. 벽면은 수직이고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바닥의 북서쪽 모서리에 회청색의 목이 짧은 단지 1개가 놓여 있었다.[19]
묘광의 규모는 길이 230cm·너비 84cm·높이 18cm이다. 이 모형 토광묘는 원형 토광묘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하여 원형 토광묘에 방수시설을 하고 그 바로 위 50cm 되는 곳에 원형 그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형식의 토광묘는 이 지역에서 3기가 드러났다.[19]
길이는 2.08미터이다.[1]
3. 8. 내원외방형 적석총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 분구, 내부구조, 기단부 등이 파괴되어 흙이 덮이고 그 위에 민가가 들어서 고분의 원형을 밝힐 수 없었다. 그러나 발굴 조사를 통해 고분 기단부의 서남 모서리와 서·북쪽의 석축 기단 일부를 찾아냈다. 찾아낸 고분 기단부의 석축 부분을 바탕으로 복원 정비한 결과, 안쪽은 지름 11.4m의 원형을 이루고 바깥쪽은 변 길이 16m의 방형이 되었다.[20]
이로써 이 적석총의 기단부 모양은 내원외방형(內圓外方型)이라고 보게 되었다. 안쪽 원형 석축 바닥에서는 적석 토광묘 2기와 석관묘 3기가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적석 토광묘와 석관묘 위에 이 적석총이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20]
한편 일본 고분에는 상부가 평면 원형이고 하부가 평면 방향인 상원하방분(上圓下方墳)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평면 모양은 이 적석총의 기단 평면 모양과 흡사하다.[20]
4. 의의와 과제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가 한산성(한성)에 도읍을 두었던 시기의 왕족과 귀족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군으로, 백제 초기 고분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1]
1975년 5월 27일 "석촌동 백제 초기의 적석총"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사적 제24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7월 28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2]
고분군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기단식 적석총이 주를 이루며, 이는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했다는 문헌 기록과도 일치한다.[3] 또한, 중국 동진의 도자기가 출토되어 당시 백제와 중국 남조 간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하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 도시 개발 과정에서 고분군이 크게 훼손되어, 1917년 지도에 기록된 약 290기의 묘 중 현재는 8기만 남아있다.[1] 이는 앞으로 문화 유산 보존에 대한 과제를 제시한다.
4. 1.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가 한성(한산성)에 도읍을 정했던 시기의 왕족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백제 초기 고분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1917년 지도에는 약 290기의 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 도시 개발로 인해 대부분이 사라지고 현재는 8기만 남아있다.[1] 이는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문화 유산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고분군에서 발견된 기단식 적석총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백제 건국 세력이 고구려에서 남하했다는 문헌 기록과 일치한다.[3]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역사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특히 3호분은 한 변의 길이가 약 50미터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적석총으로, 백제 초기 국가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고분군에서는 중국 동진의 도자기가 출토되어, 당시 백제가 중국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3] 이는 백제가 해상 교역을 통해 국제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처럼 서울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초기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지만, 도시 개발로 인해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이는 문화 유산 보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5. 교통
6. 주변
참조
[1]
문서
現地説明板
[2]
웹사이트
서울 석촌동 고분군(서울 石村洞 古墳群)
http://www.cha.go.kr[...]
大韓民国文化財庁
[3]
서적
『概説韓国考古学』
同成社
2013
[4]
뉴스
"漢城百済の王陵か、ソウル石村洞で大型積み塚発見"
http://japanese.dong[...]
東亜日報
2016-11-30
[5]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2011-07-28
[6]
문서
현지 안내문1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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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경향신문 - 포클레인 삽날에 찍힌 백제공동묘지, 백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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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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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경향신문 - 석촌동은 '백제 리즈 시절' 증언…한성백제판 '대릉원' 연접분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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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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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서울역사편찬원 - 9권 서울의 발굴현장 pg.3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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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서울역사편찬원 - 9권 서울의 발굴현장 pg.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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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서울 석촌동 고분군 (서울 石村洞 古墳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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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서울석총동고분군(─石村洞古墳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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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망각을 되살리고 현대에 재현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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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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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백제 한성기 의례와 그 의미 -석촌동고분군 화장 유골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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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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