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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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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초고왕은 백제의 제13대 왕으로, 비류왕의 넷째 아들이며 개로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대립했으며,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마한을 병합하고 가야 연맹을 속국으로 삼아 백제의 세력을 최대 규모로 키웠다. 대외적으로는 동진에 조공하고 왜와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고흥을 통해 최초로 문자를 사용하고 역사서 《서기》를 편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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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근초고왕
한자 표기近肖古王
로마자 표기Geunchogo-wang
다른 이름부여구(扶餘句)
부여초고(扶餘肖古)
부여속고(扶餘速古)
부여배고(扶餘背古)
부여조고(扶餘照古)
작위어라하(於羅瑕)
별호조고왕(照古王)
초고왕(肖古王)
속고왕(速古王)
부여구(扶餘句)
출생일생년 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375년 11월 (음력)
사망지미상
매장지석촌동 3호분
직업백제(百濟) 어라하(於羅瑕)
국적백제(百濟)
가문부여(扶餘)
왕조백제(百濟)
신분백제의 13대 어라하
칭호어라하(於羅瑕)
건길지(鞬吉支)
재위 기간346년 9월 ~ 375년 11월 (음력)
묘호없음
시호없음
법명없음
존호근초고왕 어라하(近肖古王 於羅瑕)
거주지백제(百濟)
연호미상
종교미상
소속백제(百濟)
가족 관계
부왕비류왕(比流王)
모후미상
형제자매2남 중 차남
배우자진씨(眞氏)
자녀근구수왕(近仇首王)
왕위 계승
전임자계왕(契王)
후임자근구수왕(近仇首王)
관련 이미지
석촌동 3호분;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
근초고왕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석촌동 3호분
기타
일본 고사기 기록고사기(古事記)에 백제 국주 조고왕(百濟國主照古王)으로 기록됨 http://www.seisaku.bz/kojiki/kojiki_13.html

2. 생애

백제의 제13대 왕으로, 백제의 최전성기를 연 군주로 평가받는다. 삼국사기의 기록과 달리,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서야 백제가 강력한 고대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그를 실질적인 백제의 건국 시조로 보기도 한다.[7][9][10] 백제 건국 신화는 기원전 18년을 건국 시점으로 제시하지만, 중국 사료에서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345년이며,[8] 372년 동진에 처음 조공하는 등[8]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국제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346년 9월, 선대 왕인 계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신라와는 우호적인 관계(나제동맹)를 유지하며 북쪽의 고구려와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369년에는 황해남도 백천군 지역(치양성)으로 남하한 고구려군을 기습하여 5천여 명을 사로잡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371년에는 태자(훗날의 근구수왕)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평양성을 공격하여 당시 고구려 왕이었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는 백제 역사상 가장 빛나는 군사적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

석촌동고분군 3호분.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으며,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유력하게 추정된다.


대외적으로는 372년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영낙랑군태수'라는 작호를 받아 국제적인 지위를 공인받았다. 같은 시기 에는 칠지도(七支刀, 369년 제작 추정)를 하사하는 등 활발한 교류를 통해 동진-백제-왜를 잇는 외교 관계를 구축하여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이러한 외교 노선은 다음 왕대에도 이어져 백제의 기본적인 외교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적으로는 박사 고흥을 등용하여 백제 최초의 역사서인 《서기》를 편찬하게 함으로써, 이전까지 문자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백제에 문자(한자) 기록 문화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375년 가을,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현 황해북도 신계군)을 함락시키자 군대를 보내 반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이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려 했으나, 그해 극심한 흉년으로 인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같은 해 11월, 재위 30년 만에 사망하였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석촌동고분군의 3호분이 근초고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2. 1. 즉위 과정과 왕권 강화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은 제11대 비류왕의 넷째 아들로,[2] 346년 선대 왕인 제12대 계왕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체격과 용모는 유난히 건장했고 지식도 깊었다고 전해진다. 근초고왕의 즉위는 백제 초기 왕위 계승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겨지는데, 제5대 초고왕의 후손인 그가 왕위에 오름으로써 제8대 고이왕의 후손들과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던 관행이 끝나고 초고왕계가 안정적으로 왕위를 잇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초고'라는 이름이 근초고왕의 이름에 반영된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2]

즉위 직후 근초고왕은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먼저 귀족 세력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정부에서 직접 지방관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자 했다.[1] 또한 왕비족으로 진씨(眞氏) 가문을 선택하여 후대 왕들에게 선례를 남겼고, 이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했다.[1] 347년에는 왕후의 친척인 진정(眞貞)을 재상으로 임명하였는데,[1] 그는 성품이 사납고 탐욕스러웠으며, 사소한 일에만 몰두하고 힘으로 일을 처리하려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371년 고구려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후,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수도를 기존의 수도에서 한산(현재의 서울 동남쪽 부근으로 추정)으로 옮겼다.[1] 이는 왕국의 중심지를 한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옮겨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을 마련하고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또한, 백제는 건국 초기에 문자 기록 시스템이 없어 역사를 남기지 못했으나,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등용하여 백제 최초의 공식 역사서인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문화적 기반을 다지고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2. 2. 영토 확장과 마한, 가야 복속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백제는 영토와 정치적 영향력을 최대로 확장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남쪽으로의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세력을 크게 넓혔다.

369년, 백제는 마한의 남은 세력을 완전히 병합하여 오늘날의 전라도 지역 전체를 장악하였다. 이는 오랫동안 백제의 성장을 제약했던 마한 세력을 극복하고 남부 지역의 패권을 확립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는 온조왕 대에 마한을 병합한 것으로 나오지만, 학계에서는 이것이 후대에 소급 적용된 기록이며 실제 마한 병합은 근초고왕 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10] 같은 해, 백제는 낙동강 서쪽 유역의 가야 여러 나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복속시켰다.

이 시기 백제는 북쪽의 고구려와도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369년 가을, 고구려고국원왕(사유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이끌고 치양(현재 황해도 배천군 추정)까지 남침했으나, 근초고왕은 태자(근구수왕)에게 군사를 주어 이를 신속히 공격하여 격퇴하고 5천여 명을 사로잡는 큰 전과를 올렸다. 371년에는 근초고왕과 태자가 이끄는 백제 정예군 3만이 고구려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남쪽의 마한, 가야 복속과 북쪽의 고구려 격퇴를 통해 백제는 황해를 아우르며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전역과 강원도황해도 일부 지역까지 지배하는 광대한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2. 3. 고구려와의 전쟁

369년 9월, 고구려 고국원왕이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치양성(황해도 배천군)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에게 군사를 주어 막게 하였고, 태자는 고구려군을 크게 무찔러 5천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백제인 사기(斯紀)가 고구려의 군사 정보를 제공하여 승리에 기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초고왕은 사로잡은 고구려군 포로들을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한강 남쪽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하며 군사력을 과시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깃발은 모두 노란색이었다.

371년,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백제군은 먼저 패수(예성강[23])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옛 대방(현 황해도)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어 기세를 몰아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구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 본기에 실린 개로왕북위(北魏) 표문에 따르면, 이때 태자 근구수가 고국원왕의 목을 베어 창에 꽂아 높이 매달았다고 한다. 평양성 전투의 승리로 백제는 황해도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375년 가을 7월, 고구려가 수곡성(황해북도 신계군)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근초고왕은 군사를 보내 이를 막으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왕은 다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에 보복하려 하였지만, 그해 가뭄이 심하여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2. 4. 외교 관계

근초고왕은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쳐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에 대응하여 동쪽의 신라와 동맹을 맺고(366년)[3], 남쪽으로는 가야의 탁순국과 교류하며(364년)[20] 영향력을 확대했다. 특히 366년에는 탁순국을 통해 의 야마토 왕권과 접촉을 시도하여 이듬해인 367년 공식적인 국교를 수립했다.[21][22] 이를 통해 백제는 칠지도를 보내고 왕인, 아직기와 같은 학자를 파견하여 선진 문물을 전파하는 등[5]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중국 대륙과는 345년 전진(前秦)과 관계를 맺었으며,[3] 이후 372년 남조의 동진과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진동장군 영낙랑태수' 작호를 받아[24] 국제 사회에서 백제의 지위를 공인받았다.

이러한 다각적인 외교 활동을 바탕으로 백제는 중국 왕조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중국 요서 지방과 일본 규슈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주도하며 동아시아 해상 교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2. 4. 1. 신라와의 관계

366년, 고구려의 남진에 대응하여 동쪽의 신라와 동맹을 맺어 삼국 간의 세력 균형을 도모했다.[3] 같은 해 봄 3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전달하며 우호 관계를 다졌다. 368년 봄 3월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 좋은 말 두 필을 선물하며 신라와의 친선을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이후 373년에는 백제의 독산산성 성주가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도망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2. 4. 2. 중국과의 관계

근초고왕은 백제 왕으로는 처음으로 중국 역사서인 《진서》(晉書)에 이름이 기록된 인물이다.[24] 이는 당시 백제의 국력이 신장하여 중국에서도 주목하는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백제는 오호십육국 시대 중국의 여러 나라와 교류했다. 345년에는 전진(前秦)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3] 이후 남조의 동진과 본격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는데, 372년 음력 1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24] 같은 해 동진 효무제는 사신을 통해 근초고왕에게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진동장군 영낙랑태수중국어)라는 작호를 수여했다. 이는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으로 약화된 낙랑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동진으로부터 한반도 서부의 주요 세력으로 공인받았음을 의미한다. 다음 해인 373년 봄 2월에도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관계를 이어갔다.

한편, 백제는 당시 중국 요서(遼西) 지방에 진출하여 군현을 설치하고, 일본 규슈 지역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는 주장이 있다.[4] 중국 왕조의 혼란기를 이용하여 백제가 중국, 한반도, 일본을 잇는 삼각무역을 주도했다는 것이다.[4]

2. 4. 3. 왜와의 관계

근초고왕은 왜의 야마토 왕권과 국교를 수립하고 칠지도(七支刀)와 칠자경(七子鏡) 등을 선물하며 활발한 교류를 펼쳤다. 백제가 언제부터 야마토와 교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양국 관계가 본격화된 것은 분명하다.[20]

364년 근초고왕은 가야의 부족국가 중 하나인 탁순국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366년에는 신라와 동맹을 맺는 한편, 탁순국을 통해 야마토 왕권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당시 야마토는 탁순국에 사신 시마노스구데를 파견하였는데, 그는 백제가 왜와 통교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 니하야를 근초고왕에게 보냈다. 근초고왕은 니하야를 환대하며 오색 채견 1필, 각궁의 화살, 그리고 철정(鐵鋌) 40매를 선물로 주어 돌려보냈다. 이듬해인 367년에는 신라 사신 편에 구저(久氐), 미주류(彌州流), 막고(莫古)를 딸려 보내 왜에 도착시킴으로써 백제와 야마토 사이에 공식적인 국교가 수립되었다.[21][22]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이 철정 40매를 왜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왜가 가야와 백제로부터 철기를 수입했음을 짐작하게 한다.[25]

또한 근초고왕은 372년 무렵 학자 아직기왕인에 파견하여 유교한자 등 백제의 선진 문물을 전파했다.[5] 《일본서기》에 따르면 왜왕은 이들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특히 왕인은 황태자 우지노와키이라츠코에게 논어 등 유교 경전을 가르쳤다고 한다.[6] 백제와 왜의 우호적인 관계를 상징하는 유물인 칠지도가 왜왕에게 보내진 것도 이 시기의 일로 여겨진다.[5] 칠지도의 제작 연대는 369년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본 측 기록인 《고사기》에는 응신천황 치세에 백제 왕 조고왕(照古王, 근초고왕으로 비정됨)이 말 두 필과 함께 『논어』, 『천자문』을 왜왕에게 바치고, 아지기시(阿知吉師)와 와니기시(和邇吉師)를 사신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서는 아직기와 왕인의 파견 시기를 아신왕(아화왕) 시대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또한 『천자문』은 3세기 말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등 문헌 비판적 관점에서, 왕인이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3][14][15][16] 아직기와 왕인의 실존 여부 자체도 불확실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백제와 왜의 고대 관계를 둘러싼 역사 해석에서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3. 서기 편찬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에게 명하여 백제 최초의 공식 역사서인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였다. 백제는 이전까지 문자로 된 기록이 없었으나, 고흥을 얻어 비로소 문자(한자) 기록을 시작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단순히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 체제를 정비하며 백제의 국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는 백제 역사 기록의 중요한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4. 평가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평가받는다. 근초고왕의 통치 아래 백제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했으며, 활발한 외교 활동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369년에는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치양성(현재의 황해남도 백천군 일대)을 기습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였고, 371년에는 태자(훗날의 근구수왕)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이러한 군사적 성공은 백제가 남쪽의 마한 세력을 완전히 통합하고[10] 북쪽으로 영토를 크게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외교적으로도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372년 동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진동장군 영낙랑군태수라는 직위를 받으며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했다.[8] 또한 에는 칠지도를 보내는 등 우호 관계를 맺어 동진-백제-왜로 이어지는 외교 축을 형성하여 고구려를 견제했다. 이러한 외교 전략은 다음 왕인 근구수왕 대에도 이어져 백제의 기본적인 외교 노선이 되었다.

내정 면에서는 박사 고흥을 등용하여 백제 역사상 처음으로 역사서 편찬을 시도하는 등 문자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이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중앙 집권적인 통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근초고왕 이전의 백제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중국 역사서에 백제가 4세기 중반에 처음 등장한다는 점[8],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뢰성 문제 등을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근초고왕이 실질적으로 백제를 강력한 국가로 발전시킨 첫 군주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7][9] 이기동과 같은 학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온조왕 시기의 마한 병합 기사가 실제로는 근초고왕 대의 사실을 앞당겨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0] 또한 『삼국사기』 편찬 과정에서 초고왕과 근초고왕, 구수왕근구수왕의 기록이 혼동되거나 중복되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 시기 백제와 왜가 연합하여 가야 지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기록의 해석과 신뢰성을 둘러싸고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역사 왜곡 논란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해당 기록은 일본 중심적인 시각에서 서술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자세한 내용은 #임나일본부설 논란 참조)

4. 1. 임나일본부설 논란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 시기 백제가 함께 가야를 정복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정벌의 주체가 누구인지, 기록 자체의 신뢰성은 어느 정도인지에 대한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26]

일본서기 진구 황후(神功皇后) 49년(서기 369년) 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49년(369) 봄 3월에 아라다노와케(荒田別), 가고노와케(鹿兒別)를 장군으로 삼았다. 구저들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탁순국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 때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겠습니다. 다시 사백(沙白),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 증원을 청합시다." 그리해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詭)【이 두 사람은 그 성씨를 알 수가 없다. 다만 목라근자만은 백제의 장군이다.】에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백, 개로와 함께 보냈다. 모두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비자발(比自○), 남가라(南加羅), 훼국(喙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을 돌아 고해진(高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枕彌多禮)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그 왕인 초고와 왕자 귀수가 또한 군사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비리(比利), 벽중(壁中), 포미(布彌), 지반(支半), 고사(古四)의 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26]

이 기록을 두고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스에마쓰 야스카즈일본어) 같은 일본 제국 시기의 식민사학자들은 위의 《일본서기》 기록이 사실이라고 믿었으며, 이에 백제에 가야 정벌을 명하였고 그 땅에 임나일본부라는 관청을 두어 100년 가까이 직접통치를 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서기》에서도 특히 황국사관에 물들어 있다고 평가받는 진구 황후조 기사에서, 어렵게 정복한 땅을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남의 나라(백제)에 선뜻 주어버렸다는 비현실적인 기록에 대해 한국 학계에서는 신빙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해왔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임나일본부설은 일본 내에서도 거의 폐기된 학설이다.

《일본서기》 진구 황후조의 기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는데, 그중 천관우가 제시한 '백제군사령부설'이 주목받았다. 이 설은 《일본서기》 기록의 정벌 주체를 에서 백제로 바꾸어 해석하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일본부는 원래 백제의 명령을 받는 군사 기관이었으나, 《일본서기》 편찬 과정에서 마치 왜의 통제를 받는 것처럼 주체가 왜곡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백제군사령부설 역시 임나일본부의 관리들이 백제인이 아닌 인이었다는 점, 기록상 백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 등에서 비판을 받았다. 단순히 정벌의 주체를 바꾸는 해석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27][28]

마지막으로 '가야 정벌' 자체가 진구 황후의 업적을 미화하기 위해 조작된 허구라는 주장도 있다. 《일본서기》 초기 기록의 신뢰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제기된 학설이다. 이 주장의 근거 중 하나는 《일본서기》 응신 천황 25년(414년) 기사에 인용된 《백제기(百濟記)》 기록이다. 여기에는 백제 장수 목라근자(木羅斤資)의 아들인 목만치(木滿致)가 "아버지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 부인을 얻어 낳은 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약 '신라를 칠 때'를 일본서기 진구 황후 조의 369년 사건과 동일시한다면, 목만치백제고구려의 침공으로 한성을 함락당하고 웅진으로 천도하던 시기(서기 475년)에 문주왕을 호종했는데, 이는 369년으로부터 106년 후가 된다. 이는 목만치의 나이나 부자 관계에 모순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일본서기》 진구 황후조의 가야 정벌 관련 기록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5. 가계


  • 아버지: 비류왕
  • 어머니: 진씨(眞氏) 왕후
  • 왕후: 진씨(眞氏) 왕후
  • * 아들: 부여구수(扶餘須, ? ~ 384) - 백제 제14대 왕 근구수왕
  • * 아들: 부여근
  • * 딸: 부여진

6. 대중 문화 속 근초고왕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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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백제의중앙과지방 (Central area and regions of Baekje) Juryuseong 2005
[3] 웹사이트 What Was the Baekje Kingdom? http://asianhistory.[...] 2014-08-31
[4] 서적 A Brief History of Korea Ewha Womans University
[5] 서적 A History of Writing in Japan
[6] 서적 The History and Cultural Heritage of Chinese Calligraphy
[7] 논문 古代の日朝関係と日本書紀 https://hdl.handle.n[...] 京都大学 2001
[8] 뉴스 韓国・日本の歴史教科書の古代史記述 http://www.jkcf.or.j[...] 日韓歴史共同研究 2010-03
[9] 서적 The Early History of Korea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69-01-01
[10] 학술지 百濟의 成長과 馬韓倂合 1990
[11] 일반
[12] 일반
[13] 서적 対外関係史辞典 吉川弘文館 2009-01-01
[14] 서적 日本的自然観の研究 変容と終焉 八坂書房 2006-07-01
[15] 서적 日本思想と神仏習合 春秋社 1996-01-01
[16] 뉴스 4世紀の日韓関係 http://www.jkcf.or.j[...] 日韓歴史共同研究 2005-06
[17] 일반
[18] 서적인용 고사기 http://www.seisaku.b[...] 712
[19] 웹사이트 삼국사기 https://terms.naver.[...]
[20] 일반
[21] 일반
[22] 서적인용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증보판) 웅진닷컴 2004
[23] 일반
[24] 일반
[25] 서적 백제사자료석주집 일본편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8
[26] 일반
[27] 강연 植民史觀 비판 -南韓經營論과 黨派性論을 중심으로- 홍익대 1997-10
[28] 강연 植民史觀 비판 -南韓經營論과 黨派性論을 중심으로- 홍익대 199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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