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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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유행은 1995년 옴진리교 간부 무라이 히데오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인물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북한 관련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야쿠자 조직과 연루되어 활동했으며, 사건 당시에는 우익 단체와 연관되어 있었다. 서유행은 범행 동기에 대해 일관되지 않은 진술을 했으며, 재판 과정에서 조직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출소 후 필리핀인 여성과 결혼했으며, 민족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책을 출간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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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행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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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서유행 |
다른 이름 | 다나카 히로유키 (田中 裕行) |
로마자 표기 | Seo Yu-haeng |
일본어 표기 | 조 히로유키 (徐裕行) |
출생일 | 1965년 5월 25일 |
출생지 | 일본 군마현 |
국적 | 조선적 → 대한민국 |
민족 | 조선민족 |
학력 | |
최종 학력 | 도쿄조선제4초중급학교 |
중퇴 | 도쿄도립아다치공업고등학교 |
경력 | |
소속 |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하네구미 신슈시에이칸 |
직업 | 기업인, 야쿠자 |
범죄 정보 | |
죄명 | 살인죄 |
형량 | 징역 12년 |
범죄 현황 | 출소 |
2. 생애
서유행은 군마현기류시[6] 또는 다카사키시[7]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쿄도아다치구에서 성장했다.[8][9][10] 1968년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변경했다.[11] 언론에서는 서유행을 재일 한국인 2세라고 보도했지만,[12][13] 서유행은 자신을 재일 한국인 3세라고 칭하고 있어[14]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도쿄 조선 제4 초중급학교[15]에서 4학년 때 아다치구의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했으며, 도쿄도립 아다치 공업고등학교를 1학년 때 중퇴했다.
그 후 해체업 보조, 인쇄 회사, 디자인 사무소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986년 광고 대리점 "아사"에 취직했다. 근무 태도를 인정받아 계열 기획 회사 "이벤트 다이얼"의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16] "이벤트 다이얼"은 8명의 사원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당시 붐이었던 인면어 리스 사업으로 주목받아 와이드쇼나 잡지 인터뷰에 출연했다.[17][18] 1991년 특별 영주 허가를 취득했다.
1992년 10월, 경영난으로 회사가 도산하며 총 2300만엔의 부채를 안게 되었다. 도산 후, 이바라키현쓰쿠바시 내 친구 집에 몸을 의탁하고, 그 형이 경영하는 고지 회수업 아르바이트를 했다. 1993년 도쿄로 돌아와 재취업했지만, 12월 중순에 무단 결근 후 연락이 끊겼다.[20]
1994년 6월경부터 미에현 이세시의 야마구치구미계 폭력단 하네구미에서 견습생으로 활동했다.[20] 세타가야구 카미소시가야에서 조선학교 시절 친구와 공동 생활을 하며 채권 추심, 택배, 헬스 업소 일 등을 했다.[20]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피해 지역 지원을 위해 고베시의 야마구치구미 본부로 향했다.[20]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서유행은 군마현기류시[6] 또는 다카사키시[7]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도쿄도아다치구에서 성장했다.[8][9][10] 1968년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변경했다.[11] 언론에서는 서유행을 재일 한국인 2세라고 보도했지만,[12][13] 서유행은 자신을 재일 한국인 3세라고 칭하고 있어[14] 자세한 내용은 불분명하다. 도쿄 조선 제4 초중급학교[15]에서 4학년 때 아다치구의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도쿄도립 아다치 공업고등학교를 1학년 때 중퇴했다.2. 2. 성인이 된 후
1968년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변경되었다.[11] 도쿄도립 아다치 공업고등학교를 1학년 때 중퇴한 후, 해체업 보조, 인쇄 회사, 디자인 사무소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86년 광고 대리점 "아사"에 취직했다. 근무 태도를 인정받아 계열 기획 회사 "이벤트 다이얼"의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16] "이벤트 다이얼"은 8명의 사원이 근무하고 있었으며, 당시 붐이었던 인면어 리스 사업으로 주목받아 와이드쇼나 잡지 인터뷰에 출연했다.[17][18] 1991년 특별 영주 허가를 취득했다.[19]1992년 10월, 경영난으로 회사가 도산하며 총 2300만엔의 부채를 안게 되었다. 도산 후, 이바라키현쓰쿠바시 내 친구 집에 몸을 의탁하고, 그 형이 경영하는 고지 회수업 아르바이트를 했다. 1993년 도쿄로 돌아와 재취업했지만, 12월 중순에 무단 결근 후 연락이 끊겼다.[20]
2. 3. 야쿠자와의 관계
1994년 6월경부터 미에현 이세시의 야마구치구미계 폭력단 하네구미에서 견습생으로 활동했다.[20] 세타가야구 카미소시가야에서 조선학교 시절 친구와 공동 생활을 하며 채권 추심, 택배, 헬스 업소 일 등을 했다.[20]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 피해 지역 지원을 위해 고베시의 야마구치구미 본부로 향했다.[20]3. 무라이 히데오 살해 사건
1995년 4월 23일 오후 8시 36분, 옴진리교 미나미아오야마 총본부 앞에서 서유행은 무라이 히데오를 식칼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21] 왼쪽 팔과 가슴을 먼저 찌른 후, 오른쪽 옆구리를 찔러 칼날을 비트는 방식으로 치명상을 입혔다. 무라이는 현관 안으로 도망쳤지만, 출혈이 심해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하며 쓰러졌다. 서유행은 현장에 그대로 머물렀고, 경찰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아카사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무라이 히데오는 구급차로 도쿄도립 히로오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른쪽 옆구리에 깊이 13cm의 자상으로 인해 출혈성 쇼크로 인한 급성 순환 부전으로 다음 날인 4월 24일 오전 2시 33분에 사망했다.[21] 이 사건으로 무라이가 알고 있던 옴진리교 사건 관련 진술을 들을 수 없게 되어, 옴진리교 사건의 진상 규명이 더 어려워졌다.
서유행은 미에현 이세시 후나에 1초메의 우익 단체 "신슈시위관" 구성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신슈시위관"은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시라스 중개업으로 간판만 내걸고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대표 F.Z를 제외하고는 서유행과 면식이 없다는 진술이 나왔다.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의분에 사로잡혀 죽였다. 간부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고, 나쁜 놈이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진술했지만,[22] 이후 "하네구미의 젊은 두목 K.K의 지시에 의한 범행"이라고 진술을 바꾸었다.
3. 1. 사건 전의 행동
1994년 6월경부터 미에현 이세시 내의 야마구치구미계 폭력단 하네구미에서 견습생으로 활동했다. 11월부터는 세타가야구 카미소시가야에서 친구와 함께 살며 채권 추심 및 택배 헬스 업소 일을 했다. 1995년 1월 17일 한신·아와지 대지진 때는 피해 지역 지원을 위해 고베로 갔다.지하철 사린 사건 직후부터 옴진리교 관련 농담을 하기 시작했다. 4월 21일에는 가족과 만나 불고기를 먹었다. 4월 22일에는 식칼을 구입하고, 옴진리교 미나미아오야마 총본부로 향했다. 그 후 시부야에서 시간을 보냈다. 같은 날 밤, 하네구미 젊은 두목과 만나 롯폰기의 일본 요리점, 시부야구의 러브호텔에서 시간을 보냈다.
3. 2. 범행 및 체포
1995년 4월 23일 오전 11시경, 서유행은 옴진리교 미나미아오야마 총본부 빌딩 앞에서 무라이 히데오를 기다렸다. 당시 현장에는 언론 관계자들이 북적였고, 우에사토 후미히로를 만나려는 구경꾼들도 모여 있었다. 아카사카서 직원 6명은 교단을 시찰하고 있었다.[21]오후 8시 36분, 서유행은 옴진리교 미나미아오야마 총본부 앞에서 무라이 히데오를 식칼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처음에는 왼쪽 팔과 가슴을 찌르고, 마지막으로 오른쪽 옆구리를 찔러 칼날을 비트는 방식으로 치명상을 입혔다. 찔린 무라이는 현관 안으로 도망쳤지만, 출혈이 심해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하며 쓰러졌다. 서유행은 현장에 그대로 머물렀고, 근처에 있던 경찰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되어 아카사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무라이 히데오는 구급차에 의해 도쿄도립 히로오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오른쪽 옆구리에 입은 깊이 13cm의 자상으로 인해 출혈성 쇼크로 인한 급성 순환 부전으로 다음 날인 4월 24일 오전 2시 33분에 사망했다.[21] 무라이의 죽음으로 인해, 무라이가 알고 있던 옴진리교 사건에 관한 진술을 들을 수 없게 되었고, 일련의 옴진리교 사건의 진상 규명이 더 어려워졌다.
취조 과정에서 서유행은 미에현 이세시 후나에 1초메의 우익 단체인 "신슈시위관"의 구성원이라고 주장했지만, "신슈시위관"은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시라스 중개업으로 간판만 내걸고 있었다. 수사 과정에서 대표 F.Z를 제외하고는 서유행과 면식이 없다는 진술이 나왔다.
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의분에 사로잡혀 죽였다. 간부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고, 나쁜 놈이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진술했지만,[22] 이후 "하네구미의 젊은 두목 K.K의 지시에 의한 범행"이라고 진술을 바꾸었다.
3. 3. 재판
경찰 조사에서 서유행은 미에현 이세시 후나에 1초메의 우익 단체 "신슈시위관"의 구성원을 자칭했지만, "신슈시위관"은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고, 그 실태는 시라스 중개업으로 간판을 내걸고 있을 뿐이었다. 수사에서 대표 F·Z를 제외하고는 서유행과 면식이 없다고 진술했다. 4월 28일에는 "신슈시위관" 구성원 Y·M이 다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었다.[22]범행 동기에 대해서는 "의분에 사로잡혀 죽였다. 간부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을 보고, 나쁜 놈이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혼자서 한 일인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 않습니까"라고 했지만,[22] 그 후 "하네구미의 젊은 두목 K·K의 지시에 의한 범행"이라고 진술했다. 5월 11일에는 젊은 두목 K·K도 공범으로 체포되었다. 하네구미는 그 후 해산했다.[23]
4. 석방 이후
필리핀인 여성과 결혼했다. 전 일수회 대표 스즈키 쿠니오, 21세기 서원 대표 니나가와 마사히로, 연합 적군 전 활동가 우에가키 야스히로, 작가 야마히라 시게키와 친분을 맺었다.
2013년 5월에는 우에사토 후미히로와 대담집 "끝나지 않는 옴"을 출간했다.[26] "서유행의 블로그"를 개설하여 요트 크루저를 구입하고,[27] 팔 레이스에 참가하거나 해외여행을 하는 등 사생활을 공개했지만, 2015년 4월 이후 갱신이 중단되었다.[28]
5. 의혹과 논란
서유행은 범행 직후 "의분에 휩싸여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사람을 찌르는 행위가 무서웠다"고 진술하는 등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50] 출소 후에는 "지하철 사린 사건 영상을 본 충격으로 의분에 휩싸였다",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주장하며 이전과 다른 주장을 펼쳤다.[51]
범행 전날 서유행이 시부야의 러브호텔에 여성과 함께 투숙한 사실과 사건 당일 편의점에서 30대 여성과 대화했다는 목격담이 있으나, 이 여성들의 정체와 사건과의 연관성은 밝혀지지 않았다.
서유행은 우익을 자칭했지만, 도쿄조선제4초중급학교에서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교육을 받았고, 20대 초반 조선총련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어 그의 정치적 신조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30] 또한, 서유행이 거주했던 집 관리인의 언니가 북한 공작원 신광수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33][34]
동일본 대지진 직후, 서유행은 야마구치구미계 폭력단 고토구미 조장 고토 타다마사가 주최하는 부흥 지원 단체의 부대표를 맡았다.[36] 옴진리교 사건 당시 교단과 폭력단의 연관성이 제기되었고, 무라이 사살 사건도 폭력단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민족파 관계자들은 서유행의 단독 범행을 주장하며 그를 옹호했다.[22] 스즈키 쿠니오는 서유행의 범행 동기를 "순수하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라고 옹호했다.[40][41] 서유행은 노무라 슈스케를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으며,[8] 아리타 요시후가 노무라 슈스케를 "폭력단의 간부"라고 부르자 항의하기도 했다.[46]
5. 1. 범행 동기 및 배후
서유행은 범행 직후 '''"의분에 휩싸여 살해했다"'''고 주장했으나, 이후 '''"사람을 찌르는 행위가 무서웠다"'''고 진술하는 등 일관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50] 출소 후에는 '''"지하철 사린 사건 영상을 본 충격으로 의분에 휩싸였다"''',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주장하며 이전과 다른 주장을 펼쳤다.[51]범행 전날인 4월 22일, 서유행은 시부야의 러브호텔에 여성과 함께 투숙했다는 정보가 있다. 이 여성의 정체에 대해 주간지마다 다르게 보도했는데, 『FRIDAY SPECIAL』은 여성이 유흥업소 종사자였으며 서유행은 그녀의 단골이었다고 보도했다. 반면, 「주간 포스트」는 20세 전후의 아르바이트 호스티스라고 보도했다. 당시 서유행은 숙박 이유에 대해 "혼자 있으면 외로워서"라고 진술했지만, 후년에는 "옴진리교 아오야마 본부와 가깝기 때문"이라고만 답했을 뿐, 여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사건 당일 낮, 서유행은 편의점에 들렀는데, 이때 아르바이트 점원은 "서유행이 안경을 쓴 30대 여성과 대화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닛칸스포츠』는 편의점에 설치된 방범 카메라가 고장난 상태였다고 보도했다. 『주간겐다이』는 이 여성을 옴진리교 여성 신자로 소개했지만, 취조에서는 양측의 진술이 '길을 물었다'는 것으로 일치했기 때문에 더 이상 추궁하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사건 당시 언론인 야마지 토오루는 옴진리교 첩보성을 자칭하는 인물로부터 취재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29] 그는 사건 발생 직전까지 아오야마 총본부에서 대기했으며, 뒤쪽 문을 여는 듯한 소리가 들린 직후 사건이 발생했다고 증언했다.[29]
5. 2. 북한과의 관계
서유행은 우익을 자칭했지만, 소년 시절 도쿄조선제4초중급학교에서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사상 교육을 받았다.[30]천황 숭배를 주장하는 우익 사상과 반일을 표방하는 북한의 사상은 서로 상반되기 때문에, 서유행의 정치적 신조는 부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서유행은 20대 초반 조선총련 아다치구 지부에서 정치 활동을 했다는 것을 인정했으며,[30] 1995년 11월 10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지문 날인 거부 운동에 참여했음을 자백했다.[31] 주체사상연구회 지부 책임자였다는 문헌도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불명이다.
서유행은 사건 직전까지 세타가야구 가미소시가야 3초메의 세든 집에서 살았는데, 이 집 관리인 여성의 언니가 북한 공작원 신광수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이 수사 결과 밝혀졌다.[33][34]
서유행은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 협의회를 방문했으나, 관계자로부터 "테러리스트와 손을 잡을 수 없다"며 거절당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테츠야와 전 공안조사청 본청 조사 제2부 부장 스게누마 미츠히로는 서유행이 조선총련 관계자이며 신광수와 접점이 있다는 점에서 북한 배후설에 주목하고 있다.[35]
5. 3. 고토구미와의 관계
동일본 대지진 직후, 서유행은 야마구치구미계 폭력단 고토구미 조장 고토 타다마사가 주최하는 부흥 지원 단체 "G-rise 일본"의 부대표를 맡아 현지로 향했다.[36]옴진리교 사건 당시, 교단과 폭력단의 부동산 거래 및 각성제 거래가 주목받았으며, 무라이 사살 사건 역시 폭력단과 관련되어 일어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1995년 6월 17일에 열린 제132회 국회 예산위원회 제33호에서 니시키오리 쥰은 후지노미야시의 옴 시설이 고토구미 관계 기업으로부터 빌린 건물이었다고 지적했다. 코야마 킨시치는 시즈오카현 후지노미야시의 토지 구입을 주선한 사람이 무라이 히데오였다고 증언했다.[37] 1992년에는 옴진리교단 본부가 있던 카미쿠이시키 촌에서 고토구미계 부동산 회사 "M 플래닝" 회장 등 총 6명이 국토 이용 계획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다.[38] 이러한 지적에 대해 고토 타다마사는 "그 녀석들(옴진리교)도 토지가 필요해서 내 지인의 부동산 업자에게 왔던 것 같아. '농지를 팔아달라'고 말이지. 옴진리교와의 '관계'라고 해봐야 그 정도다."라고 증언했다.[39]
5. 4. 민족파와의 관계
사건 직후부터 민족파 관계자들은 "사건은 서유행의 단독 범행이며, 서유행은 언론에 세뇌된 피해자"라고 주장했다.[22]스즈키 쿠니오는 서유행의 범행 동기에 대해 "순수하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옹호했다.[40][41] 그러나 서유행이 "두목의 지시에 의한 범행"을 자백하면서 고바야시 요시노리로부터 모순된다는 비판을 받았다.[42]
서유행은 존경하는 인물로 노무라 슈스케를 꼽았다.[8] 2014년 2월 5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리타 요시후가 노무라 슈스케를 "폭력단의 간부"라고 부르자, 서유행은 니나가와 마사히로와 함께 항의했다.[46] 이는 노무라 슈스케가 고토 타다마사의 맹우이자 스즈키 쿠니오와 니나가와 마사히로의 은사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6. 저서
終わらないオウム|오와라나이 오무일본어 (우에사토 후미히로(上里文洋), 스즈키 구니오(鈴木邦男) 공저,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総一朗) 해설, 록사이샤(緑彩社) 201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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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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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CULT LEADER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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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 court clears mob boss of ordering Murai h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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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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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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オウム真理教事件の闇=なぜ北朝鮮の名が囁かれ続けるのか?「徐と北朝鮮を深追いすると声明の保証はできない」(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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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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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予言の果てに 故村井氏、化学少年がサリンへ 『未知』にとりつかれた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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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オウム真理教村井幹部刺殺犯の「在日、そしてわが祖国」- 在日韓国人3世 徐裕行インタビュー (p134~)
JAP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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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オウムの闇はニッポンの闇』別冊宝島(476) 隣のオウム真理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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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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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井刺殺」犯人の周辺に存在した不可解な背後関係 迷宮入り!―昭和・平成未解決事件のタブー (宝島社文庫)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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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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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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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週刊文春
2000-12-14
[25]
서적
「徐裕行刑務所生活12年を語る」 刑務所のタブー 別冊宝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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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終わらないオウム (上祐史浩、徐裕行、鈴木邦男、田原総一朗と共著)
鹿砦社
20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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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週刊新潮2012年1月19日号「夢の島ヨットハーバーに通うオウム村井刺殺の徐裕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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謎に包まれた村井秀夫氏刺殺事件から16年 実行犯が初めて語った真相(p27) 週刊金曜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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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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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を貶めた戦後重大事件の裏側」 2013.6.26 ベストセラー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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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北北東に進路をとれ! いち速く被災地に乗り込んだ「G-RISE日本 憚りながら支援者後援」(p129)
月刊日本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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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警視庁取調官 落としの金七 事件簿』
産経新聞出版
201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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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読売新聞
1992-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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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憚りながら
宝島社
201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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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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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北海道新聞
199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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ゴーマニズム宣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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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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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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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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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隣のオウム真理教 オウムの暗闇はニッポンの暗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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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ttps://ameblo.jp/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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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オウム真理教事件の闇=なぜ北朝鮮の名が囁かれ続けるのか?「徐と北朝鮮を深追いすると声明の保証はできない」
SAPIO
1995-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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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FYI YAKUZA: From rackets to real estate, yakuza multifaceted
http://search.japant[...]
Japan Times
200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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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JAPANESE CULT LEADER DIES
https://web.archive.[...]
Time
2007-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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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errorism, 1992-1995: A Chronology of Events and a Selectively Annotated Bibliography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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