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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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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일성은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출생하여 본명은 김성주이며, 1994년 사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항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내각 수상, 1972년 국가주석을 역임하며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했다.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정립하고 강력한 개인 숭배를 통해 권력을 강화했으며, 경제 정책 실패와 인권 탄압 등의 비판을 받았다. 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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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일성 공식 초상화
공식 초상화, 1966년
이름김일성
로마자 표기Gim Ilseong
출생 이름김성주
로마자 표기 (출생 이름)Gim Seongju
출생일1912년 4월 15일
출생지헤이조, 평안남도, 조선, 일본 제국
사망일1994년 7월 8일
사망지향산군, 평안북도, 북한
안장 장소금수산태양궁전, 평양
국적북한
배우자김정숙 (1941년 결혼, 1949년 사망)
김성애 (1952년 결혼)
자녀김정일
김만일
김경희
김평일
7명 (총)
부모김형직
강반석
친척김씨 일가
거주지평양
직업정치인
충성북한
소련
공산 중국
군대조선인민군 육군
붉은 군대
동북항일연군
복무 기간1941년–1945년
1948년–1994년
계급대원수
지휘'모두' (최고 사령관)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정당조선로동당
다른 정당북조선로동당 (1946년–1949년)
중국 공산당 (1931년–1946년)
서명
주요 직책
북한 최고 지도자직책 시작: 1948년 9월 9일
직책 종료: 1994년 7월 8일
선임자: 직책 신설
후임자: 김정일
대통령:
김두봉
최용건
'본인'
총리:
'본인'
김일
박성철
리종옥
강성산
리근모
연형묵
강성산
조선로동당 총비서직책 시작: 1966년 10월 12일
직책 종료: 1994년 7월 8일
선임자: 본인 (위원장)
후임자: 김정일
비서:
최용건
김일
박금철
리효순
김광협
석산
호봉학
김영주
박영국
김도만
리국진
김중린
양형섭
오진우
김동규
한익수
현무광
김정일
황장엽
김영남
김환
연형묵
윤기복
홍시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직책 시작: 1972년 12월 28일
직책 종료: 1994년 7월 8일
선임자: 직책 신설
후임자: 직책 폐지
최고 지도자: 본인
총리:
김일
박성철
리종옥
강성산
리근모
연형묵
강성산
부주석:
최용건
강량욱
김동규
김일
박성철
림춘추
리종옥
김병식
조선로동당 위원장직책 시작: 1949년 6월 24일
직책 종료: 1966년 10월 12일
선임자: 김두봉
후임자: 본인 (총비서)
부위원장:
허가이
박헌영
김일
박창옥
박정애
박금철
박영빈
최용건
정일룡
김창만
리효선
북한 내각 수상직책 시작: 1948년 9월 9일
직책 종료: 1972년 12월 28일
선임자: 직책 신설
후임자: 김일
대통령:
김두봉
최용건
제1 부수상: 김일
부수상:
박헌영
홍명희
김책
김일
정일룡
남일
박의완
정준택
김광협
김창만
리종옥
리주연
박성철
최용진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직책 시작: 1950년 7월 5일
직책 종료: 1991년 12월 24일
선임자: 최용건
후임자: 김정일
기타 직책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1982년–1994년
중앙인민위원회 국방위원회 위원장1972년–1992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장1970년–198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1992년–1993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위원장1947년–1948년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1946년–1949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1946년–1947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위원장1945년–1946년
중앙 기관 회원
1980–1994년조선로동당 제6차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1970–1980년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66–1994년조선로동당 비서
1966–1970년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
1961–1970년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장
1956–1961년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1948–1994년제1, 2, 3, 4, 5, 6, 7, 8, 9차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46–1956년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1946–1994년조선로동당 제1, 2, 3, 4, 5, 6차 중앙위원회 위원

2. 생애 초기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 근처 만경대구역(당시 남니)의 작은 마을 만경봉에서 태어났다.[9][10]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였다. 아버지 김형직과 어머니 강반석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김철주와 김영주 두 남동생이 있었다.[6] 전주 김씨인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는 1860년에 평양 만경대에 정착했다.[9]

김일성은 항일 유격대 활동에 참여한 1932년 무렵부터 "일성"이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133] 북한의 공식 전기에 따르면, 동지들이 그에게 "별로는 부족하고, 태양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일성"으로 불렀다고 한다.

김일성의 가족은 가난했으며, 장로교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 강돈욱개신교 목사였고,[12][13] 아버지 김형직은 선교 학교를 다녔으며 장로교회 장로였다.[12] 북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김일성의 가족은 반일 활동에 참여했고 1920년 만주로 피신했다.[10]

1919년,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김형직만주 지린성 푸쑹 현으로 이사했다. 여덟 살이었던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창바이현 바다오거우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다.[284]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279] 창덕학교는 외할아버지 강돈욱이 설립에 참여하고 교감교장을 맡았던 기독교 계통의 학교였다.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의 권고로 1923년 3월 만주에서 칠골 외가로 와서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외종조부 강량욱이 그의 담임 선생이었다.

1925년 초, 김일성은 아버지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칠골을 떠나 만주로 돌아갔다.[280]

2. 1. 출생과 가계

김일성의 생가


김일성의 생가2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


1912년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龍山面) 하리(下里) 칠골의 외가[274]에서 아버지 김형직(1894년 7월 10일~1926년)과 어머니 강반석(1892년~1932년)의 삼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276] 오늘날 그의 생가로 알려진 평양 만경대 고향집은 조부모가 살던 집이다.[277] 김일성의 전주 김씨 12대조 김계상이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하였으며,[274][278]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김형직은 할아버지 이래로 지주 리평택(李平澤) 집안의 묘지기였으며,[279] 일본 제국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소작농으로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1917년 조선국민회를 결성한 독립운동가였다고 주장한다.[280] 김형직에게는 동생 김형록김형권이 있는데, 김형권은 만주의 정의부 소속으로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을 하다 체포되어 옥사했다.

어머니 강반석장로교 신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279]은 교육자이자 칠골교회의 장로[281]였다.[282]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279] 그의 외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의 어머니 이름 '반석'은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사(예수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당신은 베드로 곧 반석이니 당신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습니다"라고 말한 고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외종조부 강량욱이 모두 장로교 목사였다. 아버지 김형직 또는 할아버지 김보현이 기둥이 되라는 뜻에서 이름을 '성주(成柱)'라[283] 지었다고 한다. 생가로 알려진 조부모가 살던 집은 만경대 고향집이라는 이름으로 보존, 관리되고 있다.

김일성(金日成)은 김형직강반석 사이에서 김성주(金成柱)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김일성에게는 김철주(金哲柱)와 김영주(金永柱)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6] 김철주는 일본군과의 싸움 중 사망했고, 김영주는 북한 정부에 참여했으며, 김일성의 후계자로 여겨지다가 후에 실각했다.[7][8]

1926년 화성군관학교 시절 김일성의 초상화. 그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사진이다.


전주 김씨(全州金氏) 출신인 김일성의 가족은 전주, 전북특별자치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1860년 그의 증조부 김응우(金應禹)는 평양 만경대 지역에 정착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 근처 만경대구역(당시 남니(南泥)라 불림)의 작은 마을 만경봉(萬景峰)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9][10] 1964년 김일성의 준공식적인 전기에는 그가 어머니의 고향인 청정(淸井)에서 태어나 만경봉에서 자랐다고 기록되어 있다.[11]

1927년 유문중학교 시절 김일성의 초상화. 그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사진이다.


김일성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항상 빈곤과 가까이 있었다. 그는 매우 활동적인 장로교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다고 말했다. 그의 외조부는 개신교 목사였고, 그의 아버지는 선교 학교에 다녔으며 장로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다.[12][13] 북한 정부의 공식적인 설명에 따르면, 김일성의 가족은 반일 활동에 참여했고 1920년 만주로 피신했다. 대부분의 한국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1910년 8월 29일에 시작된 일본의 한국 점령에 분개했다.[10] 일본의 한국 반대파에 대한 탄압은 가혹하여 1912년 한 해에만 5만 2천 명이 넘는 한국인이 체포 및 구금되었다.[10]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많은 한국 가족들이 한반도를 떠나 만주에 정착하게 되었다.[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부모, 특히 그의 어머니는 한반도를 휩쓸고 있던 반일 투쟁에서 역할을 했다.[10] 그들의 정확한 참여 여부, 그들의 목적이 선교적인 것이었는지, 민족주의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는 불분명하다.[15]

출생 이름은 '''김성주'''(金成柱, 김슨주, )이다. "성주"(ソンジュ)라는 한자음에 따라 "성주" 또는 "성주"로 표기한 자료도 있다. 활동가가 된 이후에는 "'''김일성'''"(金一星, 김일성, )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김일성"(조선어 발음은 "김일성"과 같은 김일성)으로 개명했다. "일성"은 본격적으로 항일 유격대 활동에 참여한 1932년 무렵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호(칭호)이다.[133]

북한의 공식 전기에 따르면, 처음 동지들이 그에게 기대를 담아 "일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별로는 부족하고, 태양이 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일성"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과거에는 "김일성"으로 일본어 음독으로 불렀지만, 1980년대 이후로는 한자 표기 그대로 "김일성"으로 조선어 읽기가 늘었다. 참고로 NHK는 "김일성"을 가타카나로 표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134]

2. 2. 어린 시절과 소학교

소년 시절 김일성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 근처 만경대구역(당시 남니)의 작은 마을 만경봉에서 태어났다.[9][10]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였다. 아버지 김형직(金亨稷)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김철주(金哲柱)와 김영주(金永柱)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6] 그의 가족은 전주 김씨로, 증조부 김응우(金應禹)가 1860년에 평양 만경대에 정착했다.[9]

김일성의 가족은 가난했으며, 장로교 집안이었다.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개신교 목사였고,[12][13] 아버지 김형직은 선교 학교를 다녔으며 장로교회 장로였다.[12] 북한의 공식 설명에 따르면, 김일성의 가족은 반일 활동에 참여했고 1920년 만주로 피신했다.[10]

1919년,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김형직은 만주 지린성 푸쑹 현으로 이사했다. 여덟 살이었던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창바이현 바다오거우에서 팔도구 소학교를 다녔다.[284]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김일성은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279]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였는데, 외할아버지 강돈욱도 설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한때 창덕학교의 교감교장을 맡기도 했다.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의 "혁명을 하자면 자기 나라를 알아야 한다"라는 권고로 1923년 3월 중국 바다오거우로부터 만경대까지 배움의 천리길을 걸어 칠골 외가로 와서 창덕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칠골 창덕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학교로 외할아버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외재종조부 강량욱 등도 교사로 있었다. 이 중 외종조부 강량욱은 그의 담임 선생이었다.

1925년 초, 김일성은 아버지가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칠골을 떠나 만주로 돌아갔다.[280]

3. 청년기와 항일운동 시기

김일성은 1931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 북부에서 여러 반일 게릴라 부대에서 활동했다. 1935년에는 동북항일연군에 가입하여 제2사단 제3분견대의 정치장교로 임명되었다.[15]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국 공산당은 비밀리에 친일 반공 단체인 민생단의 일원일 수 있다는 의심을 품고 숙청을 진행했다. 이때 김일성은 숙청 위원회의 용의자 파일을 소각하여 그의 지도력을 굳건히 했다.[24]

1935년, 김일성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6] 1937년에는 제6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27] 이 작전은 김일성의 군사적,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중국 게릴라들 사이에서 김일성에게 어느 정도 명성을 가져다주었다.[27]

일본은 김일성을 효과적인 한국 게릴라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겼으며,[28][29] 1940년에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특수 부대를 파견했다.[30] 결국 1940년 말, 김일성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으로 탈출했다.[15] 하바롭스크 근처 비아츠코예의 수용소에서 재훈련을 받은 후, 1942년 8월 제88독립보병여단에 배속되었다. 김일성은 소련 적군 소령[6]이 되었고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33]

1943년, 적군의 국제 군사 부대인 제88독립보병여단 대원들. 김일성은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다.


김일성이 사용한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이전에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지도자였던 김경천이 사용했던 이름이라는 주장이 있다.[36] 그러나 역사학자 안드레이 랑코프는 이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했다.[15]

김일성의 항일 운동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존재한다. 김일성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했다는 주장부터 항일 게릴라의 주역이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다.[307]

3. 1. 중학교 재학 중

김일성은 1925년에 아버지의 병세로 만주로 건너가 푸쑹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3월에는 정의부(正義府)가 화전현(樺甸鎭)에 세운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들어갔으나,[286] 6월에 부친 김형직이 사망하자 그만두었다. 김일성 회고록에는 1926년 후반에 화성의숙을 다녔고, 그해 10월 17일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조직했다고 주장한다.

1927년, 김일성은 중국 지린성 지린으로 가서 중국인 학교인 지린성 육문중학교에 입학했다.[280] 부친 김형직과 삼촌 김형권정의부(正義府) 소속이었기 때문에 정의부에서는 김일성이 육문중학(毓文中學)을 다닐 때 장학금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288] 중학교 재학 중 김일성은 성적이 우수했으며, 1929년에는 루쉰(魯迅)의 제자인 샹위에(尙鉞, ?-1982)[289] 선생을 통해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공부했다.

북한 정부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은 1926년에 반제동맹을 창립했다.[16] 이후 1927년에 화성군관학교에 입학했으나, 학교의 훈련 방식이 구식이라고 판단하여 중퇴했다. 1930년까지 중국 길림성의 유문중학교에 다녔다.[17] 1930년, 김일성은 구세대 한국인들의 봉건적 전통을 거부하고 공산주의 이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7세의 김일성은 20명 미만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지하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조선공산청년회|Korean Communist Youth Association한국어의 최연소 회원이 되었다. 이 단체는 남만한인청년총동맹|South Manchurian Communist Youth Association한국어에 속한 허소(허소|許笑한국어)가 이끌었다. 1929년 결성 3주 후 경찰에 발각되어 김일성은 수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이로 인해 정규 교육이 중단되었다.[15][6]

3. 2. 공산주의 단체 조직 활동

1929년 5월 조선공산청년회(朝鮮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시작했다.[290] 이 단체는 허소|許笑한국어가 이끌었다.[15][6] 1929년 결성 3주 후 경찰에 발각되어 김일성은 수개월 동안 투옥되었다.[15][6] 이 사건으로 유원중학교에서 퇴학당했는데, 유원중학교 중퇴가 북한에서 인정하는 공식적인 김일성의 최종 학력이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는 1929년 가을부터 이듬해 5월까지 8개월간 길림의 감옥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292]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당시 김일성은 국민부 산하 청년조직 남만한인청년총동맹(南滿韓人靑年總同盟)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293] 그 후 이종락(李鍾洛, 1907~1940)의 도움으로 국민부에서 설립한 청년 지도자 양성기관인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의 남만주학원(南滿洲學院)에 다녔다는 증언이 있다.[291] 1930년 3월 남만한인청년총동맹과 다른 국민부 산하단체들이 통합하여 동성조선인농민총동맹(東省朝鮮人農民總同盟)을 조직하였는데, 이 동맹의 무송(撫松)·안도(安圖) 지방 담당 지부동맹조직위원(支部同盟組織委員)으로 김일성(金成柱)이 선출되었다는 것이 당시 기록으로 확인된다.[293] 국민부 산하 조직에 있었던 행적을 감추기 위해 감옥에 있었다고 꾸며댄 것으로 보인다.

1931년,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CCP)에 가입했다.[15][6] (조선공산당은 1925년에 창당되었지만,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이라는 이유로 1930년대 초 코민테른에서 제명되었다.)[15][6] 그는 중국 북부에서 여러 반일 게릴라 부대에 참여했다.[15][6] 김일성이 처음 참가한 항일 무장 단체는 남만주에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혁명군 중 이종록이 이끄는 좌파 계열의 일단이었다.[139] 1930년, 중국공산당에서 파견된 조선인 운동가 오성륜(전광)이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이종록 부대에 입당을 권유했지만, 이종록 측이 거절했기 때문에, 김일성도 이 시점에서는 입당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139] 김일성의 중국공산당 입당 시기는 1932년 또는 1933년이라는 두 가지 기록이 중국공산당 측 자료에 남아 있다.[140] 장위화|张蔚华중국어와 함께 1932년에 입당했다는 기록도 있다.[141]

3. 3. 항일 무장 투쟁

김일성은 1930년 8월 조선혁명군의 좌파 계열인 이종락이 이끌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에 대원으로 참여했다.[294]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까지 세금 징수원 노릇을 했고, 이때 최형우가 '일성(一星)'이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다.[296][297] 1931년 1월 이종락이 체포되면서[298]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해체되었다. 김일성은 1931년 3월 차광수 등이 재편성한 세화군 군정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299] 곧 체포되어[300] 길림성 정부로 이송되었다.[301]

의지할 곳을 잃은 김일성은 1932년 2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하고 무기를 탈취 당했다.[303] 이후 김일성은 조선혁명군 심용준 중대의 무기를 탈취하기도 했다.[304]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32년 4월 25일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가공의 군대일 뿐이다.[288] 김일성은 1932년 초여름 양세봉에게 용서를 구하고 대원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으나, 양세봉은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288][305]

1932년 말, 김일성은 안도현 유격대에 대원으로 합류했다는 증언이 있다.[306]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과 그 산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은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항일투쟁을 했더라도 조선독립운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김일성은 1934년 가을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만주 적화를 위한 조직이었고, 김일성은 중공당 만주성위와 코민테른 극동지부의 지휘를 받았다.

1931년,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 북부에서 여러 반일 게릴라 부대에 참여했다. 1935년,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에 가입했고, 제2사단 제3분견대의 정치장교로 임명되었다.[15]

김일성은 민생단 사건 당시 숙청 위원회의 용의자 파일을 소각하여 그의 지도력을 굳건히 했다.[24]

1935년 김일성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6] 1937년, 김일성은 제6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보천보 전투를 지휘했다.[27] 이 작전은 김일성의 군사적,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었다.[27]

일본은 김일성을 가장 효과적인 한국 게릴라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겼다.[28][29] 1940년, 일본은 김일성을 체포하기 위해 특수 부대를 파견했고, 김일성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으로 탈출했다.[15] 김일성은 비아츠코예의 수용소에서 재훈련을 받았고, 1942년 8월 제88독립보병여단에 배속되었다. 김일성은 소련 적군 소령[6]이 되었고 1945년까지 복무했다.[33]

3. 4. 김일성(김성주)의 항일 운동에 대한 논란

김일성(김성주)이 공산주의자가 된 후 항일 운동을 한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존재한다. 김일성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했다는 주장부터 항일 게릴라의 주역이었다는 주장까지 다양하며, 모두 어느 정도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307]

김일성이 처음 참가한 항일 무장 단체는 남만주에 있던 조선인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혁명군 중 이종락이 이끄는 좌파 계열이었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서 파견된 조선인 운동가 오성륜(전광)이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이종록 부대에 입당을 권유했지만, 이종록 측이 거절했기 때문에 김일성도 이 시점에서는 입당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139] 1930년 8월 김일성은 1개 중대를 이끌고 이탈하여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를 만들었고, 그 대원이 되었다.[294]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순전히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만주 또는 중국 적화를 위한 투쟁조직이었다.[295]

1930년 말부터 1931년 초까지 김일성은 회덕현 오가자에서 이종락 부대의 세금 징수원 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때 삼성학교 교원이었던 최형우가 그에게 일성(一星)이란 별호를 지어주었다고 한다.[296][297] 이종락이 1931년 1월 28일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되자[298]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는 해체된다. 1931년 3월 23일 최창걸(? ~ 1931.11), 차광수(1905 ~ 1932) 등 조선혁명군 사령부 잔존 세력이 세화군으로 재편성하고, 김일성(金成柱)은 세화군 군정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지만,[299] 불과 사흘 뒤인 3월 26일경 체포되어[300] 취조를 받다 5월에 길림성 정부로 이송된다.[301] 세화군은 5월 3일에 동방혁명군으로 개칭되었으나, 이후 내분이 일어나고, 최창걸도 1931년 11월 조선혁명군에 사살되어 소멸한다.[299][302]

의지할 곳을 잃은 그는 무송으로 돌아가 장울화(1913~1937) 등 또래들을 모아 불량배 짓을 하고 다녔다. 이로 인해 중국인들 사이에 조선인들에 대한 평판이 나빠질 것을 우려한 주민들이 조선혁명군 측에 제압을 요청하자 총사령 양세봉(1896~1934)은 1932년 2월 중순 고동뢰 소대장 이하 10명을 무송으로 파견한다. 무송에 당도한 일행이 피곤해서 잠든 사이에 사전 정보를 입수한 김일성 일당은 이들 10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무기를 훔쳐 도망친다.[303] 김일성은 또한 조선혁명군 심용준(1896~1949) 중대의 무기를 빼앗아 달아나기도 했다.[304]

북한에서는 그가 1932년 4월 25일 안도현에서 무장 유격대인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했는데, 이것이 조선 인민군의 모태라고 주장하나, 조선혁명군의 이름을 모방한 가공의 군대일 뿐이다. 김일성과 그의 상관이었던 이종락은 조선혁명군에 막대한 피해만 끼쳤다. 그는 1932년 초여름에 또래들 몇 명을 데리고 조선혁명군 양세봉 장군을 찾아와 고동뢰 소대장 일행을 살해한 데 대한 용서를 빌며 대원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한다. 양세봉은 용서는 했으나, 공산주의자가 된 그를 신임하지 않아 원하는 직책을 맡겨 주지 않았으므로 다시 떠나게 된다.[288][305] 그 후 그가 어디서 무얼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32년 7월 31일에 모친 강반석이 사망하므로 유격대 투신은 그 이후가 될 것이다.

김일성의 중국공산당 입당 시기는 1932년 또는 1933년이라는 두 가지 기록이 중국공산당 측 자료에 남아 있다.[140] 1932년 말에 그가 안도현 유격대를 찾아와 처음으로 대원이 되었다는 증언이 있다.[306] 이후 그는 중국인들이 주도하는 무장단체와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는데, 모두 중공당 만주성위와 소련의 코민테른의 지시 감독을 받았으므로 비록 일본 군경과 싸우는 항일투쟁을 했다고 하더라도 조선독립운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이다. 궁극적으로는 중국 공산당과 소련의 목적에 맞는 활동을 한 것이고, 일본군에 쫓겨 도망간 곳도 소련이며, 거기서는 항일투쟁이 아니라 소련의 목적에 따른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과 만주의 각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 개별적 혹은 연합으로 항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285] 1934년 3월 동만(당시 간도지방)의 항일유격대가 확대·발전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으로 재편성되자, 1934년 가을에 김일성은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으로 배속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3단 정치위원에 선임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이름이 바뀌자 그는 계속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으로 배속되어 활동했다. 동북인민혁명군이나 그 후신 동북항일연군은 기본적으로 만주 적화를 위한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무장조직이며, 거기에 중공당에 가입한 김일성 등 조선인들이 일부 끼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조선독립운동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중공당 만주성위는 중공당 중앙과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연락 두절상태였고, 실제로는 코민테른 극동지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았다.

1935년 김일성은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26] 1937년 24세의 나이에 제6사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김일성 부대'로 알려진 수백 명의 병사들을 지휘했다. 1937년 6월 4일, 그는 200명의 게릴라를 이끌고 보천보를 기습, 현지 정부 사무소를 파괴하고 일본 경찰서와 우체국에 불을 질렀다.[27] 이 작전의 성공은 김일성의 군사적 지도력을 보여주었다.[27]

일본은 김일성을 가장 효과적이고 인기 있는 한국 게릴라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여겼다.[28][29] 1940년 2월, 일본은 그를 사냥하기 위해 '마에다 부대'를 파견했다.[30] 1940년 후반, 일본군의 추격을 받던 김일성과 그의 전투원들은 아무르 강을 건너 소련으로 탈출했다.[15] 김일성은 하바롭스크 근처 비아츠코예의 수용소로 보내져 소련은 한국 공산주의 게릴라를 재훈련시켰다. 1942년 8월, 김일성과 그의 군대는 소련 적군에 속한 제88독립보병여단으로 알려진 특수 부대에 배속되었다. 김일성은 소련 적군 소령[6]이 되었고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복무했다.[33]

몇몇 자료에 따르면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이전에 한국 독립운동의 주요 지도자였던 김경천이 사용했던 이름이라고 주장한다.[36] 그러나 역사학자 안드레이 랑코프는 이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낮다고 주장했다. 소련 연방에서의 활동 전후를 포함하여 김일성을 알고 있던 여러 목격자들이 있는데, 그의 상관인 저우 바오중도 그의 일기에서 '두 번째' 김일성에 대한 주장을 일축했다.[15]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관동군 일본군 장교들이 김일성을 저항 인물로 유명하다고 증언했다는 점을 지적했다.[28]

1990년대에 펴낸 조작 투성이인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와는 달리 김일성이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도주한 후인 1942년에 직접 지은 『항련 제1로군 약사(抗聯第一路軍略史)』를 보면 그들의 항일투쟁이란 것은 중국 공산당원으로서 만주 적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중국공산당사의 일부일 뿐이고, 조선인민혁명군도 나오지 않고 조선독립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자인하고 있다. 뿐더러 그들의 투쟁이 최종적으로 패배로 귀결되었다고 자백하고 있다.[313]

4. 광복 이후

일제강점기 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북조선공산당, 북조선로동당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남북조선 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9월 9일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아 6.25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한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중국인민지원군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1953년 7월 27일 휴전했다. 이후 휴전선 북쪽을 통치하게 되었다. 전후 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 복구를 시도했다.

1952년 허가이,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 중국김원봉 계열, 1961년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다. 1972년 사회주의헌법 제정 후 국가주석에 취임하여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1960년 이후 주체사상을 발표했다.[264]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을 아들 김정일에게 세습했다. 1994년 사망 후, 1998년 개정된 헌법에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위대한 수령", "어버이 수령님", "아버지 장군님"으로 호칭한다.

한국 전쟁, 전쟁 범죄, 한국 전쟁 장본인[273] 의혹,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논란이 있다.

4. 1. 해방 당시 김일성의 지도자로서의 자질과 준비 정도

김일성은 1937년 보천보 전투를 통해 일제에 타격을 주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 피해는 일본 민간인 2명 사망에 그쳤고 동북항일연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는 반론도 있다.[321][322]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보천보 습격으로 민간인 2명이 사망했고, 이후 일본 경찰 추격대와 충돌에서 동북항일연군 25명이 사망하고 30명이 부상당했다.[315] 북한과 일부 학자들은 보천보 전투가 독립군에 의한 영토 탈환 사건이었다고 주장하지만,[316] 이는 과장된 것이며 실제로는 1920~30년대 만주 무장단체들의 약탈 사건 중 하나일 뿐이었다는 비판이 있다.[317]

1937년 11월, 보천보 사건의 주역으로 알려진 동북항일연군 6사장 김일성은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323] 이후 1938년 11월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는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다.[323]

1940년, 김일성은 일제의 토벌을 피해 상관 위증민의 허락 없이 부하 몇 명을 이끌고 소만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도주했다.[325] 이후 소련군 제88국제여단에서 대위로 복무했다.[333]

1945년 해방 당시 김일성은 소련군 소좌 계급으로,[267]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조선공작단의 정치군사 책임자였다.[267] 그는 소련군의 지원을 받으며 귀국하여 북한 정권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4. 2. 광복과 귀국 (1945 ~ 1946)

일제강점기에 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했고,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북조선공산당, 북조선로동당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대리자로 활동하였다. 남북조선의 로동당 통합 이후에는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9월 9일에는 내각 총리가 되었다.

4. 3. 임시인민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위원장 시절 (1946 ~ 1947)

이현상(李鉉相, 1905 ~ 1953)은 1947년 여름 소련 유학을 간다면서 평양에 들렀다가, 북로당 중앙 간부 부장 이상조(李相朝, 1915 - 1996)김창만(金昌滿 1907~1966) 등과의 술자리에서 김일성과 박헌영 중 누가 더 지도자로 적합한가 논쟁을 벌였다.[336] 이때 이현상은 김일성이 외국의 이익을 위해 투쟁한 경력밖에 없으며, 본명이 김성주인데 언제부터 김일성이 됐는지 명확하지 않고 투쟁 경력도 불투명하다고 비판했다. 반면 박헌영은 국내에서 15년이나 일찍부터 투쟁했고, 조선 공산당과 조선공산청년동맹을 만들었으며 혹독한 일제 탄압에도 국내에서 투쟁해 온 경력이 있다고 옹호했다.[336]



이현상의 발언은 당시 북한 지도자 자리를 굳혀가던 김일성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으로, 남로당 계열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다. 남로당 간부가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알 수 없었다면, 일반 국민들은 더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박헌영조차도 소련군이 데려와 지도자로 내세운 김일성의 전력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 논쟁을 박헌영과 김일성이 알게 되자, 박헌영은 이현상을 견책하여 소련 유학을 취소시키고 서울로 보냈다. 김일성은 이상조를 간부 부장직에서 해임하고 상업관리국장으로 강등시켰다.[336] 이상조는 1989년 방한하여 자신과 김창만이 이현상과 사이가 껄끄러워 한직으로 좌천되었으며, 6.25 당시 상업성 상업관리국장의 한직에 있었기 때문에 남침 계획을 사전에 잘 알지 못했다고 하였다.[339]

4. 4. 남북협상 주도

1960년대에 김일성은 게릴라전을 통해 베트남통일하려는 호찌민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83] 미군과 한국 지도부에 대한 침투와 파괴 활동을 강화했고,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83] 북한군은 한국과 그 주변의 미군에 대해 훨씬 더 공격적인 태세를 취하여 비무장지대에서 미 육군 부대와 교전했다. 1968년 간첩선 USS ''푸에블로''의 승무원을 나포한 것도 이 캠페인의 일환이었다.[8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1972년 12월 27일에 공포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직책이 신설되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맡아온 내각 총리 직책을 내려놓고 1972년 북한 총선 이후 국가주석이 되었다. 국가주석 취임 후, 1972년 4월부터 1973년 3월까지 49개국과 국교를 맺었다. 1972년 5월부터 6월에는 남북 대표가 상대국 수도를 방문하여 조국통일 관련 회담을 가졌고,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화는 북한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1980년 10월, 제6차 조선노동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일민족·일국가·이제도·이정부” 하의 연방제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을 제안했다.

1991년 9월 17일, 한국과 함께 국제연합에 동시 가입했다.

1991년 12월 6일, 함경남도 흥남 마전 공관에서 문선명과 회담했다.[180][181][182][183][184][185] 김일성을 사탄의 대표로 비난하고 공산주의를 하나님의 적이라고 규정하며 타도에 힘써 온 인물과의 회담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문선명은 “나의 승공 사상은 공산주의를 죽이는 사상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는 사상, 즉 인류 구제의 사상”[187][188]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회담에서는 이산가족 상봉, 핵 사찰, 자유 진영 국가 투자, 군수산업을 제외한 경제 사업에 통일 그룹 참여, 남북 정상 회담, 금강산 개발 등에 대해 합의했다. 문선명으로부터 35억달러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1992년 1월 30일 북한 정부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 사찰 협정에 서명했지만,[189] 이듬해 3월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했고,[190][191][192][193] 1994년 4월 16일 김일성은 핵 개발을 부인했지만,[194][195][196][197][198][199][200] 1994년 6월 IAEA를 탈퇴하고 사찰을 거부하여 핵 개발 의혹이 커졌다.[201][202] 미국은 지미 카터를 특사로 파견했고, 카터와의 회담에서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남북 정상 회담 제안을 받아들였다.[203][204]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해방 이후, 소련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위해 김일성을 북한 지역의 지도자로 선정했다. 이는 북한 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이오시프 스탈린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해방 전 김일성은 소련군 88여단 소속으로,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이 부대는 만주에서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온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을 수용했다. 88여단은 극동전선군의 통제를 받았으나, 실제로는 국경 경비대 성격의 NKVD(KGB 전신) 산하 부대였다.[346] 김일성은 표면적으로 1대대 대대장이었지만, 동시에 NKVD 비밀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했다.[346] 그는 상관인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과[347]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Maksim Purkayev, 1894-1953) 대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소르킨 소장 밑에서 88여단 정보 업무를 담당했던 전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장 최원(崔元)은 이러한 비밀 역할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은 김일성이 별다른 학력이나 경력 없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이라고 증언했다.[348]

소르킨 소장은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Лаврентий Берия, 1899-1953)의 심복이었다. 그는 1941년 3월 초 극동군으로 부임하여 왕신림(王新林)이라는 중국식 암호명으로 만주 빨치산들의 소련군 수용 문제를 다루었고, 88여단의 창설, 운영, 해체까지 직접 관장했다.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에 자주 나오는 왕신림(王新林)이 바로 소르킨이다.[349] 김일성은 만주에서 소련으로 월경한 초기에 소르킨의 비밀 정보원으로 포섭되었고, 두 사람은 특별히 친했다고 한다. 만주침공을 위해 개편된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북한 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불러 면접 심사할 때, 면접관은 제2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과 극동군 총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Iosif Shikin, 1906 ~ 1973) 상장이었다.[350] 모스크바에서 NKVD와 극동군 사령부가 올린 보고서를 받아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스탈린에게 강력히 추천한 사람도 NKVD 수장 베리야로 알려져 있다.[351]

스탈린은 보고서를 검토한 후 1945년 9월 초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 시험을 본 후 그 자리에서 북한 지도자로 내정했다.[352][353] 당시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키고,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안내하도록 했다.[352] 스탈린은 위성국가의 지도자를 고를 때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소련의 말을 잘 들을 만한 사람을 골랐다. 국내에 상당한 조직과 지지 세력을 가진 박헌영 같은 인물이 배제되고, 5년간 소련군에 소속되어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 지지 세력이 전무하여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김일성이 선택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김일성이 북한 권력을 잡은 내막은 흔히 주장하는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 공로 때문이 아니라, 소련군 88여단에서 KGB 비밀 요원이 되어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련군 상관에게 밀고한 공로로 그들의 신임을 얻어 추천받았기 때문이다.

88여단 시절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한 KGB 장교는 북한 지도자 선발 과정에 대해 "당시 모스크바는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누구든지 좋았다. 두뇌는 소련 고문단이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후일 증언했다. 능력과 상관없이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만한 인물로 김일성이 선택된 것이다.[354]

이후 지도자 선택에서 밀린 박헌영 측의 집요한 이의 제기로 1946년 7월 초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355][356][357]

흔히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에 극동군 총사령부와 연해주군관구 및 북한을 점령한 25군의 군사평의회에 “북조선에 민주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비밀 지령문을 내려보낸 것이 남북 분단의 시발점이라고 하나[358], 9월 초에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내정한 때에 이미 북한을 분할 지배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남북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고, 김일성은 그 실행을 위해 선택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1971년 평양에서 김일성이 루마니아 대통령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를 만나는 모습. 북한 검열에 의해 김일성의 종양이 수정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1972년 12월 27일에 공포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직책을 신설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맡아온 내각 총리 직책을 내려놓고 1972년 북한 총선 이후 국가주석이 되었다.

5. 1. 인민공화국 내각 총리 시절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9월 9일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중국마오쩌둥을 설득해 승인을 받아 6.25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한국군유엔군의 반격에 밀려 중국인민지원군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하고 휴전선 북쪽을 지배하게 되었다.

전후 천리마 운동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복구를 시도하였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하고, 1953년에는 박헌영, 리승엽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중국인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조선에 대한 애착이 약했고, 중국에 반쯤 동화된 인물이었다.[359] 해방 후 귀국한 김일성과 88여단 조선인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이야기했으며,[359]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도 중국식인 진지첸으로 불릴 정도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했다.[271]

김일성은 해방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도현장 정도를 시켜주기를 원했으며,[360] 일본 패망 후에도 만주에서 행세하길 원한 중국인이었다. 그의 항일투쟁은 중국을 위한 것이었을 뿐, 조선 독립과는 관계가 없었다.[360] 소련으로 도망간 후에는 소련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으며, 조선 독립에는 관심이 없고 소련군 내에서 출세하기를 간절히 원했다.[361][362] 일본 패배 직후에도 소련군에서 복무하며 장군이 되는 것을 확고한 미래상으로 그렸다.[363] 그러나 88여단 해체와 소련군 출세의 어려움 속에서 북조선 지도자로 발탁되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다.

해방 후 평양에 온 김일성은 중국말은 능숙했지만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364][365] 1945년 10월 14일 평양 시민 앞에 처음 등장했을 때, 노 장군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젊은 김일성을 보고 가짜라고 실망했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366] KGB 장교였던 레오니드 바신은 김일성의 연설문 작성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367]

1945년 10월 14일 평양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된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소련군 진지첸 대위(Капитан Цзин Жи Чен, Captain Jing Zhichen)"가 "항일영웅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나선 모습.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민중대회'에서 김일성이 행한 첫 연설의 요지


왼쪽


김일성은 학력, 경력, 국내 사정, 조선말 등 여러 면에서 지도자로서 부족했지만, 스탈린에 의해 발탁되어 평양으로 왔다. 자신의 빨치산 부대를 일본과의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레베데프는 거절했다.[368]

국내 지지세력이 전무했던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평양의 소련군정은 여러 정치공작을 진행하고 정치 교육을 시켰다.[369] 소련군정 정치장교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나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Leonid Vassin, 1915~2006)은 당시 평양이 조만식의 판이었다고 증언한다.[370][371] 소련군은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조만식을 제거하며 꼭두각시 지도자로 만들었다.[372]

그리고리 메클레르는 "그가 권좌를 향한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우리의 조언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고,[369] 레오니드 바신은 "우리는 지도자 김일성을 무에서 만들어 내었다."고 증언했다.[371]

김일성 가짜설과 항일투쟁 경력의 과장, 조작 논란은 김일성이 소련군의 도움으로 무리하게 지도자가 된 때문이며, 이후 북한이 개혁개방을 못하는 이유도 역사의 진실을 인민들이 알면 체제 유지가 힘들기 때문이다.

5. 1. 1. 사회주의 정부 수립

해방 후, 소련은 한국 영토의 공산화를 위해 김일성을 지도자로 선정했다. 이는 국민의 뜻과는 무관한 스탈린의 결정이었다. 해방 전 김일성은 소련군 88여단 소속이었다. 88여단은 만주에서 일본군의 토벌에 쫓겨 소련으로 넘어온 동북항일연군 빨치산들을 수용한 부대로,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두고 극동전선군의 통제를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경 경비대 성격의 NKVD(KGB 전신) 산하 부대였다.[346] 김일성은 표면적으로 1대대 대대장이었지만, 동시에 NKVD 비밀 정보원으로 활동하며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했다.[346] 그는 상관인 극동전선군 정찰국장 나움 소르킨 (Naum Semyonovich Sorkin, 1899-1980) 소장과[347]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Maksim Purkayev, 1894-1953) 대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소르킨 소장 밑에서 88여단 정보 업무를 담당했던 전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국장 최원(崔元)은 이러한 비밀 역할로 상관들의 신임을 얻은 김일성이 별다른 학력이나 경력 없이 북한 지도자로 발탁된 배경이라고 증언했다.[348]

소르킨 소장은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Лаврентий Берия, 1899-1953)의 심복이었다. 그는 1941년 3월 초 극동군으로 부임하여 왕신림(王新林)이라는 중국식 암호명으로 만주 빨치산들의 소련군 수용 문제를 다루었고, 88여단의 창설, 운영, 해체까지 직접 관장했다. 주보중(周保中)의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에 자주 나오는 왕신림(王新林)이 바로 소르킨이다.[349] 김일성은 만주에서 소련으로 월경한 초기에 소르킨의 비밀 정보원으로 포섭되었고, 두 사람은 특별히 친했다고 한다. 만주침공을 위해 개편된 극동군 총사령부에서 북한 지도자 후보로 김일성을 불러 면접 심사할 때, 면접관은 제2 극동전선군 사령관 막심 푸르카예프 대장과 극동군 총사령부 군사위원 이오시프 쉬킨(Iosif Shikin, 1906 ~ 1973) 상장이었다.[350] 모스크바에서 NKVD와 극동군 사령부가 올린 보고서를 받아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스탈린에게 강력히 추천한 사람도 NKVD 수장 베리야로 알려져 있다.[351]

스탈린은 보고서를 검토한 후 1945년 9월 초 88여단의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면접 시험을 본 후 그 자리에서 북한 지도자로 내정했다.[352][353] 당시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하바로프스크 군용 비행장에 수송기를 대기시키고, KGB 극동본부 요원 2명에게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안내하도록 했다.[352] 스탈린은 위성국가의 지도자를 고를 때 토착 공산주의자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소련의 말을 잘 들을 만한 사람을 골랐다. 국내에 상당한 조직과 지지 세력을 가진 박헌영 같은 인물이 배제되고, 5년간 소련군에 소속되어 교육과 훈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내 지지 세력이 전무하여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김일성이 선택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김일성이 북한 권력을 잡은 내막은 흔히 주장하는 만주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 공로 때문이 아니라, 소련군 88여단에서 KGB 비밀 요원이 되어 동료 빨치산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소련군 상관에게 밀고한 공로로 그들의 신임을 얻어 추천받았기 때문이다.

88여단 시절 김일성의 상관이었던 한 KGB 장교는 북한 지도자 선발 과정에 대해 "당시 모스크바는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누구든지 좋았다. 두뇌는 소련 고문단이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후일 증언했다. 능력과 상관없이 소련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할 만한 인물로 김일성이 선택된 것이다.[354]

이후 지도자 선택에서 밀린 박헌영 측의 집요한 이의 제기로 1946년 7월 초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다시 지도자 면접 시험을 보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박헌영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355][356][357]

흔히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에 극동군 총사령부와 연해주군관구 및 북한을 점령한 25군의 군사평의회에 “북조선에 민주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비밀 지령문을 내려보낸 것이 남북 분단의 시발점이라고 하나[358], 9월 초에 김일성을 북한 지도자로 내정한 때에 이미 북한을 분할 지배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남북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고, 김일성은 그 실행을 위해 선택된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은 1972년 12월 27일에 공포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직책을 신설했다. 김일성은 1948년부터 맡아온 내각 총리 직책을 내려놓고 1972년 북한 총선 이후 국가주석이 되었다.

5. 1. 2. 한국전쟁 발발

해방 직후 김일성은 일국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학력이나 경력이 턱없이 부족했고, 조선의 국내 사정에도 어두웠으며, 조선말도 심하게 더듬거렸다.[364][365][366] 스탈린에 의해 지도자로 발탁된 김일성은 경력을 꾸미고자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에게 자신의 빨치산 부대도 일본과의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레베데프는 역사를 바꿀 수 없다며 거절했다.[368]

대중들은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알지 못했고, 국내 지지세력도 전무했다. 이런 그를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평양의 소련군정 인사들은 여러 정치공작을 진행하며 정치 교육을 시켰다.[369] 소련군정의 정치장교 그리고리 메클레르나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은 1945년 8월 말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했을 당시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고 증언한다.[370][371]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소련군은 무명의 소련군 진지첸 대위(김일성)를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고, 항일 공적도 없는 그를 전설적인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게 했다.[372] 김일성은 소련이 무력과 정치공작을 동원하여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던 조만식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만들어낸 꼭두각시 지도자였을 뿐이다.

그리고리 메클레르는 "그가 권좌를 향한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우리의 조언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고,[369] 레오니드 바신은 "우리는 지도자 김일성을 무에서 만들어 내었다."고 증언했다.[371]

김일성 가짜설이 나오고, 항일투쟁 경력의 과장과 조작이 이루어져 논란이 빚어진 것도 해방 당시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미비하고 인민의 지지도 전무했던 인물이 소련군의 도움으로 무리하게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이 개혁개방을 못하는 이유도 인민들이 역사의 진실을 알면 체제를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평양에서는 8월 17일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하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구성되었다. 소련군 진주 후 군정을 실시하면서 이들의 요구로 8월 27일 건준측과 공산측 위원 각 16명 씩으로 된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위원장은 조만식이 유임되었으며, 부위원장으로는 건준측의 오윤선 외에 공산측의 현준혁이 선출되었다.[373][374]

북한 각지에서는 해방 직후부터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잡다한 조직이 설립되고 있었으나, 소련군 진주 후 공산주의자들 주도로 각 도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고, 9월 8일에는 소련군 주도로 "북조선5도인민위원회"가 만들어졌다. 10월 8~10일에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개최되고, 11월 19일에는 '(북조선) 5도행정국'이 출범하였다.[374][375][376]

김일성 등 소련군 88여단 소속 조선인 항일유격대원들은 1945년 9월 19일 원산항을 통해 귀국, 22일 평양에 도착했다.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의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후 평양에서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벌였으며 곧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가 맡은 첫 직책은 평양지구위수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377] 북한 각 지역의 위수사령관은 소련군이 맡고, 부사령관은 김일성과 함께 귀국한 88여단 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378]

소련 군정에 의해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7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해방축하집회'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김일성이 니콜라이 레베데프 소장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의 소개로 '김일성 장군'으로 평양 시민들에게 소개되면서 공개적인 정치활동이 시작되었다.

1920년 무렵부터 퍼져 있던 전설적인 김일성 장군에 대해 어릴 때부터 들어왔던 시민들은 고령의 노 장군을 생각하고 모였지만, 젊은 청년이 김일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자, 나이가 맞지 않으므로 군중들 사이에 김일성의 실체를 의심하여 가짜라는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단상으로 몰려들어 항의하는 군중들을 몽둥이를 휘둘러 쫓는 등 소란도 있었으나 큰 충돌은 없었다. 당시 총소리도 들렸다는 증언도 있다. 소련군은 가짜라는 소문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집회가 끝난 당일 신문기자 등 여러 사람들을 만경대 마을로 데려가 김일성이 귀국 후 처음으로 조부모와 친척들을 만나는 장면을 연출해 보여주기도 했다.[379][380]

이 집회는 스탈린이 지도자로 선정한 김일성을 대중 앞에 좋은 모습으로 선보이기 위해 처음부터 소련군이 철저히 기획한 것이었다. 정치학자 이정식은 "북한의 권력 경쟁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고 했다.[381] 이후 소련군이 김일성 지도자 만들기에 걸림돌이 되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조만식 등을 제거해 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1945년 10월 8일과 9일에 김일성은 38도선 개성에서 박헌영과 회담하여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설치를 협의하였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에도 당본부를 설치한다는 그의 주장에 박헌영은 당의 중앙은 한 곳이어야 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박헌영은 그의 주장을 끝내 동의해주지 않았고 분국 형식으로 당을 조직하게 됐다.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중앙조직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창건 목적을 발표하였다.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초대 책임비서에는 김용범이 선출되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소련의 홍보 지원 등에 힘입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내에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1945년 11월 5일 서울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조직되자 축사를 보냈고, 11월 6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명예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2월 17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3차 확대집행위에서 김일성은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2월 18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제2대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5. 1. 3. 전쟁 시 김일성의 결단과 소련의 지원

김일성은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중국인들과 어울려 성장했으며, 조선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중국에 반쯤 동화된 인물이었다. 항일연군 시절 빨치산 활동도 조선 독립에 대한 열망보다는 당시 만주의 분위기에 휩쓸린 것으로 보인다.[359] 해방 후 귀국한 김일성과 88여단 조선인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도 중국어로 이야기했으며,[359] 소련군에서 그의 이름도 중국식인 진지첸으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했다.[271]

김일성은 해방이 되면 중국 공산당이 안도현장 정도를 시켜주길 원했으며,[360] 일본 패망 후에도 만주에서 행세하길 원한 중국인이었다. 그의 항일투쟁은 중국을 위한 것이었을 뿐, 조선 독립과는 관계가 없었다는 증거이다.[360] 소련으로 도망간 후에는 소련 군인으로 출세하기를 원했으며, 조선 독립에는 관심이 없고 소련군 내에서 출세하기를 간절히 원했다.[361][362] 일본 패배 직후에도 소련군에서 복무하며 장군이 되는 것을 확고한 미래상으로 그렸다.[363] 그러나 88여단 해체와 소련군 출세의 어려움 속에서 북조선 지도자로 발탁되는 뜻밖의 행운을 얻었다.

해방 후 평양에 온 김일성은 중국말은 능숙했지만 조선말은 심하게 더듬거렸다.[364][365] 1945년 10월 14일 평양 시민 앞에 처음 등장했을 때, 노 장군을 기대했던 시민들은 젊은 김일성을 보고 가짜라고 실망했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366] KGB 장교였던 레오니드 바신은 김일성의 연설문 작성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회고했다.[367]

김일성은 학력, 경력, 국내 사정, 조선말 등 여러 면에서 지도자로서 부족했지만, 스탈린에 의해 발탁되어 평양으로 왔다. 자신의 빨치산 부대를 일본과의 해방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레베데프는 거절했다.[368]

국내 지지세력이 전무했던 김일성을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평양의 소련군정은 여러 정치공작을 진행하고 정치 교육을 시켰다.[369] 소련군정 정치장교 그리고리 메클레르(Grigory Mekler, 1909~2006)나 KGB 장교 레오니드 바신(Leonid Vassin, 1915~2006)은 당시 평양이 조만식의 판이었다고 증언한다.[370][371] 소련군은 김일성을 항일영웅으로 부각시키고, 조만식을 제거하며 꼭두각시 지도자로 만들었다.[372]

그리고리 메클레르는 "그가 권좌를 향한 첫발을 내디딜 무렵에는 우리의 조언을 듣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고,[369] 레오니드 바신은 "우리는 지도자 김일성을 무에서 만들어 내었다."고 증언했다.[371]

김일성 가짜설과 항일투쟁 경력의 과장, 조작 논란은 김일성이 소련군의 도움으로 무리하게 지도자가 된 때문이며, 이후 북한이 개혁개방을 못하는 이유도 역사의 진실을 인민들이 알면 체제 유지가 힘들기 때문이다.

5. 2. 전전 정적 숙청 작업

소련 군정의 지도를 받아 1946년 2월 8일 북조선 5도행정국을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로 바꾸고 위원장이 된 김일성은,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383]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양욱이 각각 선출되었다. 이로서 김일성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로 당을 장악한 동시에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행정부를 장악하게 된다.[383]

김일성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적 숙청 작업을 진행했다. 주요 숙청 대상은 다음과 같다.

연도숙청 대상비고
1952년허가이
1953년박헌영, 리승엽국내파 공산주의
1956년최창익, 윤공흠8월 종파 사건, 연안파
1958년김원봉 계열중국
1961년김두봉 일파



이러한 숙청 작업을 통해 김일성은 권력을 공고히 하고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5. 3. 전후 복구 시기와 전후 정적 숙청 작업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중국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아 6.25 전쟁을 일으켰다.[273]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한국군유엔군의 반격에 밀려 중국인민지원군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1953년 7월 27일 휴전선을 확정하고 그 이북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전쟁 이후 김일성은 천리마 운동을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복구에 힘썼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정적 숙청 작업도 병행되었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했고, 1953년에는 박헌영, 리승엽 등 남한 출신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264] 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통해 연안파인 최창익, 윤공흠을 제거했으며, 1958년에는 중국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다.

5. 4. 주체사상 확립

1960년대 초반부터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정착시키며 중화인민공화국소련에 대해 자주 노선을 선언하였다.[264] 한국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 시설을 복원하기 위해 1957년 천리마 운동을 시작하였고, 남포항을 현대적인 시설로 정비하였다. 또한 통제경제를 도입하고, 제1세계 및 제3세계 국가들과 폭넓은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민 계몽을 통한 문맹 퇴치 운동을 실시하고, 평양직할시를 공식 수도로 지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1966년 10월 조선로동당 당중앙위원회 제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로 선출되었다.

6. 국가주석 추대 이후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은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중국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아 6.25 전쟁을 일으켰다.[273]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한국군유엔군의 반격으로 중국인민지원군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1953년 7월 27일 휴전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은 직접적인 대규모 군사 지원 대신 공군 조종사와 교관 등 간접적인 지원을 했다.[422] 마오쩌둥의 군사 지원 약속은 한국 전쟁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나타났다. 김일성은 소련중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빠른 시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거라 판단했으나, 미군과 UN군의 참전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50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철수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고, 김일성은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밀렸으나, 중공군의 원조로 12월 6일 평양을 탈환했다.

한국 전쟁 기념화


전후 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복구를 시도했다. 1952년에는 허가이를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다시 국가주석에 선출되었다.[264]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에게 세습되었다. 1994년 7월 8일 사망했으며, 1998년에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6. 1. 헌법개정과 주석 취임 (1970 ~ 1972)

1972년 김일성은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고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어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264] 1960년대 이후 주체사상을 발표했고,[264]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에게 세습되었다.

같은 해 7월 4일, 남북은 통일을 외세의 개입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무력 행사가 아닌 평화적인 방법을 사용한다는 내용의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대화는 북한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6. 1. 1. 주석 취임 초기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일성 장군'에 대한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많은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 장군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의병투쟁 시절부터 1920년대까지 활동했으며,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해 백마를 타고 백두산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254] 2016년 10월에는 김일성으로 여겨졌던 '''김현충'''이 구 일본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임을 보여주는 졸업생 명부가 발견되어 공개되기도 했다.[255] 김현충은 항일 운동 당시 김광서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일성이 처음 북한 주민들 앞에 나타났을 때, 사람들은 "너무 젊다", "조선어가 서툴다"며 의아해했다.[256] 당시 남한을 신탁통치하던 미군은 1948년 8월 1일 작성한 자료에서 김성주(김일성의 본명)가 항일 투사로 이름을 날린 "김일성"의 이름을 사칭하고 있다고 주장했다.[257] 김성주가 전설을 이용해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점은, 『김일성과 만주 항일전쟁』에서 김일성 가짜설을 부정했던 와다 하루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김일성 가짜설은 김일성이 전설을 표절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전설의 모델이 실존했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전설의 모델에 대한 탐색과 김일성의 유격대 활동의 실체는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

이명영이 『김일성은 네 명이었다』에서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김일성 장군으로 불린 인물은 네 명이었다. 그중 의병 시절부터 백두산에서 활약했다는 동명이인 김일성과, 육사 출신으로 백마를 타고 활약했다는 김경천은 출생 연도가 1888년으로 같고, 출신지도 모두 함경남도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두 사람 모두 1920년대 후반 이후의 행적이 알려지지 않아 수수께끼에 싸여 있었다. 이러한 점들을 근거로, 사사키 하루타카(佐々木春隆)는 두 사람이 혼동되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제기했다.[258]

보천보 사건 이후, 동북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의 정체에 대한 여러 소문이 퍼졌다. 그를 27세의 평양 근교 출신, 36세, 육사 졸업생 등으로 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했다. 또한, 보천보 공격 가담자의 체포 당시 진술이 사전 정보와 모순된다는 점에서, 보천보 공격을 지휘한 동북항일연군 제6사장 김일성과, 이후 소련 군정 하에서 유력 지도자로 등장한 김일성은 다른 인물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59] 이에 대한 와다 하루키 등의 반론도 있다.[260]

김일성은 처음에 성주(聖柱)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나, 나중에 성주(成柱)로 개명했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순천(順川)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압록강 북쪽에서 "순천의원"이라는 한약방을 운영했고, 아편 밀매 등으로 한때 부유했으나 1926년 6월 5일 공산주의자 조선인에게 암살당했다고 한다. 이후 김일성의 어머니는 중국인 경찰대 대장의 첩이 되었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계열 마적의 일원이 되어 일성(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소련군에 의해 북한에 들어올 때 전설 속 영웅 김일성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진짜 김일성은 1937년 9월 일만 경찰대와 교전하여 사살되었다고 한다.[261]

원래 항일유격대였던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김일성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전에 증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항일 유격대로 이름을 날렸던 김일성은 1900년대 초에 활동한 인물이며, 현재의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에는 이미 성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262]

6. 1. 2. 대한민국과의 통일 교섭

1948년 1월 김구,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제의하였고, 김일성은 이를 수락했다.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은 수행원들을 동반하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방문하였다. 최고지도자연석회의를 주관하고 김두봉과 함께 김구, 김규식과 4김회담을 하였다. 김규식은 회의에 불참하려고 5개 조항의 조건을 제시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모두 수락한다고 즉시 답변을 보냈다. 5월 김구와 김규식은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갔다. 김구, 김규식 등을 만나,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고 4김회담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여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김규식


박헌영과 이야기하고 있는 김일성


김일성이 김구, 김규식에게 남한에서 먼저 정부를 수립하더라도 정부 수립은 하지 않겠음을 다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48년 2월 이미 인민군을 창건하여 사실상 정부수립 의사를 굳힌 뒤였다. 이후 1948년 9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김구, 김규식에게 2차 남북협상과 최고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박헌영, 홍명희 등과 별도로 2차 최고지도자회의를 개최했다.

1994년에 소련군정의 군사정치위원이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스티코프와 레베데프등 소련군정 핵심인사들이 주도한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396]

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측 인사 226명 중 홍명희등 70여 명이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평양에 잔류했다는 사실은 연석회의 참석자의 약 3분의 1이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북한의 의도를 대변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한 자들이었음을 시사한다.[397] 방북한 김구와 김규식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1949년 3월 박헌영소련을 방문, 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3월 5일, 스탈린과 회담하여,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400]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8월 12일, 스티코프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조선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조선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401]

1972년 5월부터 6월에 걸쳐 남북의 각 대표가 서로 상대국의 수도를 방문하여 조국통일 관련 회담을 가졌다. 같은 해 7월 4일에 통일은 외세의 개입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고, 무력 행사가 아닌 평화적인 방법을 취하는 등을 「남북공동성명」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대화는 북한 측에 의해 일방적으로 중단되었다.

1980년 10월, 제6차 조선노동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일민족·일국가·이제도·이정부” 하의 연방제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설을 한국 측에 제안했다.

1991년 9월 17일에는 한국과 함께 국제연합에 동시 가입했다.

1991년 12월 6일, 함경남도 흥남의 마전 공관에서 한국 정부의 허가 없이 같은 해 11월 30일부터 중국 정부가 주선[180]한 베이징 수도국제공항 경유로 긴급 방북했던 통일교(통일협회,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교주 문선명과 회담했다.[181][182][183][184][185] 김일성을 사탄의 대표로 비난하고 공산주의를 하나님의 적이라고 규정하며 타도에 힘써 온 인물이기 때문에 세계를 놀라게 했다(하지만 당시 통일교는 한국 대통령 노태우의 북방외교에 호응하여 중국 등 공산권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고, 북한과의 접촉도 그 인맥에서 시작되었다[186]). 문선명은 이 방북에 대해 소련 동유럽에 대한 “신주의” “두뇌 날개 사상”의 전파나 중국에서의 판다 자동차 사업을 예로 들어 “나의 승공 사상은 공산주의를 죽이는 사상이 아니라 그들을 살리는 사상, 즉 인류 구제의 사상”[187][188]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회담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에 노력하고, 핵 사찰을 받고, 자유 진영 국가로부터 투자를 받고, 군수산업을 제외한 경제 사업에 통일 그룹이 참여하고, 남북 정상 회담을 하고, 금강산 개발 등에 대해 합의했다. 문선명으로부터 35억달러의 지원을 약속받아 경제적 궁지를 구제받았다.

1994년 6월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를 특사로 북한에 파견한다. 카터와의 회담에서 김일성은 한국 대통령 김영삼과의 남북 정상 회담 개최 제안을 받아들였다.[203][204]

6. 2. 권력 기반 강화 (1972 ~ 1980)

1972년 김일성은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고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공식적인 국가원수가 되어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264] 그해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60년 이후 주체사상을 발표했다.[264]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

6. 3. 1980년 ~ 1988년

김일성은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내각 수상에 선출되었고, 부수상 박헌영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였다.[398][399] 국가강령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강령'을 발표하였는데, 이 강령은 남녀평등과 선거권 실시, 무상교육 및 무상의료제도 실시, 친일파·지주 청산과 토지개혁 실시, 자원의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주장하고 있다.

1949년 3월 박헌영소련을 방문, 소련 최고인민회의를 참관하고 돌아왔다. 3월 5일, 스탈린과 회담하여, 김일성은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공과 무력통일에 관해 소련 지도부의 의견을 문의하였다. 스탈린은 조선인민군이 대한민국 군사력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된다고 답변하고 대한민국에 미군이 아직 주둔하고 있음(소련군은 1948년 12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철수)과 미-소간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를 상기시켰다. 또한 스탈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공세적 군사활동은 대한민국의 북진 침략을 물리치는 경우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400] 1949년 남북 조선로동당을 합당하여 조선로동당을 결성하여 당 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49년 6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들의 합동전원회의를 소집하고, 회의에서 조선로동당 위원장으로 선거되었다. 8월 12일, 스티코프 북조선 주재 소련대사를 면담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대한민국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적 통일안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북조선은 대남공격을 준비할 수밖에 없으며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대규모 민중봉기가 분명히 뒤따를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만약 대남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인민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많은 친북 ‘민족인사’들을 투옥시켰지만 북조선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의 봉기를 조직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401]

한국 전쟁 무렵


1949년 대한민국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김일성은 고심 끝에 무력통일 계획을 세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이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지시문이 김일성에게 전달되었다.(1949년 9월 24일)[411]

1950년 1월 17일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에서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스티코프에게 남침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하여 스탈린과의 면담을 희망한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이 대화에서 김일성은 국공 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다음에는 대한민국(남조선)을 해방시킬 차례라고 강조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강이 세워진 우수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김일성은 이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의 선제공격에 대한 반격만을 승인한 1949년 3월의 스탈린의 결정에 불만을 토로했다.[412][413][414] 1월 30일, 스탈린이 서명한 전보를 평양으로 타전했다. 전문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불만은 이해가 되나 '큰일'에 관해 치밀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접견해 이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으며 그를 지원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415] 3월 20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와의 면담에서 4월 초에 자신과 박헌영이 스탈린과 만나고자 한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김일성은 이번 방문을 46년의 방문처럼 비공식(비밀)으로 할 것을 제의하였다. 김일성은 남북한 통일의 방법, 북한 경제개발의 전망, 기타 공산당내 문제에 관해 스탈린과 협의하기를 원하였다.[416] 4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 김일성 간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국제환경이 유리하게 변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북한이 통일과업을 개시하는 데 동의하였다. 다만,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중국과 북조선에 의해 공동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만일 중국쪽의 의견이 부정적이면 새로운 협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결정을 연기하기로 합의하였다.[417]

5월 12일, 스티코프가 김일성 및 박헌영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일성은 마오쩌둥과의 면담계획을 밝혔다. “소련에서 돌아온 후 이두연 주베이징대사로부터 마오쩌둥과의 면담 결과를 보고받았다. 마오는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마오와 면담하기 위해 5월 13일 베이징으로 출발할 것이다. 마오는 내가 대남 군사행동을 곧 시작할 생각이라면 비공식으로 만나겠다고 한다. 마오에게 북한으로 이양되는 중국군 소속의 조선인 사단을 위해 중국이 노획한 일본 및 미국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다. 50년 6월께로 예정하고 있는 남침계획을 구체적으로 수립하라는 지시를 북한군 총참모장에게 시달했다. 작전이 6월에 개시될 것이나 그때까지 준비가 완료될지 자신이 없다.”[418] 5월 13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베이징에 도착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하고 스탈린이 모스크바 회담 때 ‘현 국제환경은 과거와는 다르므로 북한이 행동을 개시할 수 있으나 최종결정은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뤄야한다’고 했음을 설명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보낸 특별전문에서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고 했다.[419] 5월 15일, 모스크바의 메시지를 받은 뒤 마오는 김일성 · 박헌영과 구체적으로 의견을 교환하였다. 김일성은 북조선이 ‘군사력 증강-평화통일 대남제의-대한민국쪽의 평화통일 제의 거부 뒤 전투행위 개시’의 3단계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마오가 이 계획에 찬성을 표명하고 일본군의 개입 가능성을 물은 데 대해 김일성은 일본군이 참전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으로 보나 미국이 2만~3만명의 일본군을 파견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참전이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오는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돕겠다고 했다. 소련은 미국쪽과 38선 분할에 관한 합의가 있기 때문에 전투행위에 참가하기가 불편하지만 중국은 이런 의무가 없으므로 북한을 도와줄 수 있다고 했다. 북한이 현 시점에서 작전 개시를 결정함으로써 이 작전이 양국간 공동의 과제가 되었으므로 이에 동의하고 필요한 협력을 제공하겠다고 했다.[420] 5월 29일, 김일성은 스티코프에게 4월 모스크바 회담시 합의된 무기와 기술이 이미 대부분 북조선에 도착했음을 통보하였다. 이 통보에서, 또한, 김일성은 새로 창설된 사단들이 6월말까지 준비 완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북한군 참모장이 바실리예프 장군과 함께 마련한 남침공격 계획을 북한지도부가 승인하였고, 군조직 문제는 6월 1일까지 끝내기로 했다. 북조선 군은 6월까지 완전한 전투준비 태세를 갖추게 된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은 6월말 이후는 북한군의 전투준비에 관한 정보가 남쪽에 입수될 수 있으며 7월에는 장마가 시작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6월 8~10일께 집결지역으로의 병력이동을 시작할 것이이라고 보고되었으며, 김일성과 면담 뒤 스티코프는 바실리예프 장군 및 포스트니코프 장군과 의견을 교환했다. 그들은 7월에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 가장 시의적절하나 일기관계로 6월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421] 이와 같이, 김일성은 스탈린을 상대로 끈질기게 남침을 허락해달라고 48회나 요구했고 스탈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로 계속 거절했다.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김일성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결국 남침을 허락하고 만다.[413][422] 이 때 스탈린은 김일성을 북한의 통제관으로 옹립한 것을 후회했다.

1950년 3월에는 박헌영 당시 조선공산당 총비서와 허가이 조선노동당 책임비서와 함께 소련으로 물자 원조와 무기 공급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했으며,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전쟁 발발에서 김일성의 주동적인 책임은 고르바초프의 방한을 계기로 공개된 구 소련의 외교문서를 통해 증명되었으며, 국제학계의 정설로 인정되고 있다.[423]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 동안의 한국 전쟁 시기 교전 일방인 조선인민군의 최고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이끌었다.

6. 4. 남측 인사들과의 교섭 (1988 ~ 1990)

1948년 1월 김구,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제의하였고, 김일성은 이를 수락했다.[396] 4월 김구, 김규식은 수행원들을 동반하고 38선을 넘어 평양에 방문하였다. 김일성은 최고지도자연석회의를 주관하고 김두봉과 함께 김구, 김규식과 4김회담을 하였다. 김규식은 회의에 불참하려고 5개 조항의 조건을 제시했지만 김일성은 이를 모두 수락한다고 즉시 답변을 보냈다. 5월 김구와 김규식은 38선을 넘어 남으로 내려갔다. 김일성은 평양직할시 쑥섬(강나도)에서 남북연석회의를 열었고 4김회담을 주도하였으나, 서로의 주장이 상이하여 결국 회의는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김일성이 김구, 김규식에게 남한에서 먼저 정부를 수립하더라도 정부 수립은 하지 않겠음을 다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1948년 2월 이미 인민군을 창건하여 사실상 정부수립 의사를 굳힌 뒤였다. 이후 1948년 9월 황해남도 해주에서 김구, 김규식에게 2차 남북협상과 최고지도자회의를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후 박헌영, 홍명희 등과 별도로 2차 최고지도자회의를 개최했다.

1994년에 소련군정의 군사정치위원이었던 니콜라이 레베데프 (Nikolai Lebedev, 1901 – 1992) 소장이 남긴 "레베데프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1948년의 남북정치협상은 스티코프와 레베데프 등 소련군정 핵심인사들이 주도한 치밀한 정치공작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연석회의에 참석한 남측 인사 226명 중 홍명희 등 70여 명이 서울로 귀환하지 않고 평양에 잔류했다는 사실은 연석회의 참석자의 약 3분의 1이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북한의 의도를 대변하여 남북협상을 주장한 자들이었음을 시사한다.[397] 방북한 김구와 김규식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6. 5. 말기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때 반일인민유격대에 가입했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북조선공산당, 북조선로동당에서 소련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남북조선 로동당 통합 이후 조선로동당의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9월 9일 내각 총리가 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중국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아 6.25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군을 지휘했으나 한국군유엔군의 반격으로 중국인민지원군소련군의 도움을 받아 1953년 7월 27일 휴전했다. 전후 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복구를 시도했다.

1952년 허가이 숙청,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했다. 1972년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고 국가주석직을 신설하여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했다.

1960년 이후 주체사상을 발표했다.[264] 1972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이 세습했다. 1994년 7월 8일 사망했으며, 1998년에 개정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서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공개된 문서와 흐루쇼프 전 소련 서기장의 증언에 따르면, 소련은 직접적인 대규모 군사 지원 대신 공군 조종사와 교관 등 간접적인 지원을 했다.[422] 마오쩌둥의 군사 지원 약속은 한국 전쟁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세로 나타났다. 김일성은 소련중국의 지원을 약속받고 빠른 시간 내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거라 판단했으나, 미군과 UN군의 참전으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50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철수하여 한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고, 김일성은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밀렸으나, 중공군의 원조로 12월 6일 평양을 탈환했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로, 전라북도 전주 출신이다.[131][132] 만주에서 항일 파르티잔 활동에 부대 지휘관으로 참가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조선반도 북부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사망할 때까지 최고 지도자 지위에 있었으며, 1948년부터 1972년까지 국무총리, 197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주석을 역임했다. 사후 1998년 헌법에서 “영원한 주석”으로 칭송되었고, 주석 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조선로동당 당수( 1949년부터 1966년까지는 중앙위원회 위원장, 1966년 이후는 중앙위원회 총비서) 지위에 당 창당 이래 줄곧 있었다. 유해는 엠벌밍을 거쳐 평양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되어 있다.

김일성은 한국 전쟁[273], 전쟁 범죄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논란을 받고 있다.

6. 5. 1. 국가주석 5선 (1990 ~ 1994)

1990년 5월 김일성은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다시 국가주석에 선출되었다.[264] 1993년 국방위원회 위원장직은 아들 김정일에게 세습되었다.

6. 5. 2. 개혁 개방 정책

1980년대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경제 위기가 점차 오고 있었는데, 이때 김일성은 경제 개혁 조치와 경제 개방 조치를 부분적으로 실행하였다. 이때 3가지의 경제 개혁 조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6. 6. 사망

1994년 초 김일성은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기도 했고, 심근경색 및 목 뒤의 물혹이 심해져서 입원하기도 했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은 1994년 초로 예정되었으나 김일성의 병세로 무기한 연기되었다. 1994년 6월 평양에서 제39대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방문을 받고, 핵 문제와 관련한 북미협상을 진행하였다.[454]

지미 카터와 면담할 때 김일성은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였고, 지미 카터는 김일성의 제안을 김영삼에게 전했는데, 김영삼도 김일성의 제안을 수용하였다.[455]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가운데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에 평양 집무실에서 82세의 나이로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456]

공식 사망 장소는 평양 주석 집무실이지만, 묘향산 향산초대소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은 김일성이 요양을 하려 향산초대소에 머물다가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그의 아들 김정일이 향산초대소를 가지 않는다는 소문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남북정상회담 성사 직전의 상황과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김정일에 의한 암살 내지는 사망 방관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아직도 그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이야기와 함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른 이야기에서는 대남정책 문제로 아들인 김정일과 갈등이 빚어져 그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457] 그는 오전 6시부터 저녁 10시까지 16시간 이상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타고난 체력과 정신력으로 장시간 정무를 강행하였으나, 70대 이후부터는 체력의 한계를 느껴 감기, 당뇨, 목 뒤의 물혹, 피부병 등의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말년에는 간혹 졸도하기도 했다.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 등 주요 언론들은 7월 9일 정오 특별방송을 통해 “심장혈관과 동맥경화증으로 치료를 받아오던 중 겹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이 발생 했고 심장쇼크가 합병되었으며 모든 치료를 다했으나 심장쇼크가 악화돼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나운서들은 김일성의 사망 당시 울먹이는 목소리로 "김일성 수령님께서 뜻하지 않게 서거하신 것은 우리 당과 혁명의 최대의 손실이며 온 민족의 가장 큰 슬픔"이라 표현하였다.

사후 1998년에 개정된 헌법에서는 “영원한 주석”으로 칭송되었고, 주석 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유해는 엠벌밍을 거쳐 평양시내 금수산태양궁전(구 국가주석궁전)에 안치되어 있다.

7. 사후

1994년 7월 8일부터 7월 17일까지 애도 기간이 있었고, 7월 19일 국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458] 김일성 사망 다음 날인 9일 방송을 통해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이 김일성 동상에 호상(護喪)을 선다는 소식이 보도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각 도, 시, 군에서 간부들과 대학생들, 보위부와 안전부까지 동원되어 김일성 동상 호상 사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459]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당국은 처음에 ‘10일장’을 결정했으나, 3일을 연장해 결국 7월 20일에야 장례가 치러졌다. 각급 조직별로, 가족별로 생화를 준비해 김일성 동상을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동상이 없는 시골에서는 김일성 연구실에 있는 초상 앞에서라도 애도를 표시했다.[459]

1994년 7월 20일 김정일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된 김일성의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평양 시내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의사당에 안치하도록 조치했다. 이날 아침 평양 시민들은 김일성의 영구차를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 영구차가 지날 때마다 길가에 늘어선 군중들은 꿇어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수령님, 수령님’하면서 통곡했다. 지방 주민들도 조직적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TV 시청을 통한 장례식에 참여하였다.[459]

1998년에 개정된 헌법에서는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으로 칭송했고, 주석 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유해는 엠벌밍을 거쳐 평양 시내 금수산태양궁전(구 국가주석궁전)에 안치되어 있다.

8. 논란과 의혹

김일성은 1960년 4월 21일 이승만의 후계자로 장택상을 예상했지만, 장택상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의심했다.[433] 그는 이승만의 후계자들에 대해 전망하면서 미국이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433]

국제부장 박용국을 시켜 주한미군만 철수하면 평화통일이 가능할 것이라며 설득하게 했다. 1960년 여름 연방제통일론을 발표했으나 장면 내각에 의해 거부당했다.[433] 5.16 군사 정변 이후 1963년 비밀리에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에게 밀사 황태성을 보냈으나 중앙정보부에 의해 살해되었고, 1968년 두 번째 밀사로 부총리 박성철을 내려보냈다.[434]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두 번째 밀사에 대한 응답으로 1971년부터 이산가족 명부확인과 이산가족 상봉을 시작했으며, 이후락을 평양에 파견하여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434]

한편,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은 대한민국에서 무장 게릴라 봉기를 일으키라고 강요했지만,(1965년 3월) 김일성은 "남조선에는 해안이 많고, 산이 벌거벗었으며, 교통이 비교적 발달해 있는 데다 미군까지 주둔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434] 대신 "시간을 들여서 대중 속에 '비공연(非公然) 조직'을 만들어 대중운동을 전개해야한다. 이러한 투쟁이 아니고서는 소모일뿐, 승리는 어렵다"는 의견이었다.[434]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작원을 대한민국으로 파견했다. 1·21 사태 당시 조선인민군 일부는 휴전선 근방에서 검거되었지만 일부는 서울까지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긴장한 박정희대한민국 국군의 의무복무 기간을 6개월 연장시켰고, 향토 예비군을 강화하였다.[434]

김일성은 한국 전쟁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435] 1968년 11월 과학원 개발팀과의 담화에서 통일 실패 요인을 미국군으로 간주하고 있었다.[435] 1968년에는 자신의 생일인 4월 15일을 북한의 최대 명절로 지정하는 등, 우상화 작업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436]

김일성은 6.25 전쟁과 전쟁 범죄의 장본인이며,[273]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 1946년 '위대한 우리나라의 태양'으로 칭송받았으며,[473] 1947년에는 조기천이 쓴 약 3천여 행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이 북조선 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받고 각급 학교 교재로 채택되어, 김일성을 우리 민족의 양심이자 의지, 신념이며 희망이자 샛별로 묘사했다.[474][475][476]

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264] 1960년대까지 대한민국보다 두 배 이상 경제력을 유지한 것은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477] 1970년대 이후로는 소련의 지원이 어려워졌다.

1950년대 중·소 분쟁 이후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자 '미국 제국주의, 소련 수정주의, 중국 교조주의, 일본 군국주의에 포위되었다'고 주장하며 '자립 경제 노선'을 더욱 강조했다. 여기에 국민 총생산의 20~30%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며 '4대 군사 노선'을 강조했다.

1970년대, 주체사상을 명기한 《사회주의헌법》을 발표한다. 주체사상은 사상 변화를 추동할 여지를 극도로 좁혀 민주화 운동과 시민 의식을 크게 저하시키고, 생산력 저하 문제를 심화시켰다. '사상 사업'을 강조해 국유화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시장, 개인 영농이나 상공업의 자율성을 전면 부정했다.[478][479]

공업에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 값이 폭등하고,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하여 산림을 파괴해 식량 생산 자급률이 떨어지는 등 농업의 쇠퇴를 야기했다. 경제 개발에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력투구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미국의 경제 제재와 함께 거의 국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최용건 정부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내각 수상 신분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우상화를 할 수 없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는 그럭저럭 국가를 지탱하는 수준은 되었으나, 1972년 김일성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자 김일성에게는 자신을 유일하게 저지할 수 있었던 최용건이 사라진 탓에 국가 개발 비중을 줄이고 본인 우상화 비중을 늘려갔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력은 하향세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들은 김일성이 사망할 무렵 최악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외국의 무상 식량 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만든 '외세 의존적 지도자'로 비판받았다.[481]

8. 1. 김일성 진위 논쟁

김일성의 이력에 대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다른 나라의 역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는데,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으로서는 그의 이력에 대한 신화화가 주체사상의 수령론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운동가들 중에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여럿이며, 김성주가 최초가 아니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김일성 가짜설은 많은 의문이 되고 있다.

미 군정은 김일성의 본명이 김성주이며,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으로 명성을 얻은 '김일성' 행세를 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성주가 1929∼1930년 만주와 조선 국경에서 활동하던 실제 김일성의 유격부대에 합류했으며, 실제 김일성이 55∼60세에 숨지자 명령 때문인지 자발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을 '유명한 전사(戰士.김일성)'로 가장했다고 기술되어 있다.[461]

오영진(吳泳鎭)의 《하나의 증언》, 이명영(李明英)의 《진위 김일성 열전》, 허동찬의 《김일성 평전》, 임은의 《북조선왕조성립비사》 등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나타난다. 이들에 따르면, 해방 직후 집회 현장에 나타난 김성주가 너무 젊어서 평양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며, 김일성 가짜설의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또한 숙청당한 박금철의 증언과 남로당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해방 당시 국민들이 귀국을 기다리던 유명한 전설적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한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 1면 기사. 이날은 평양에 온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대중 앞에 처음 나선 날이지만 서울의 신문은 전혀 다른 김일성 장군에 대해 보도하고 있다. 이날 평양 집회에 모인 사람들이 기대했던 김일성 장군도 이 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므로 김성주는 데뷔 첫날부터 가짜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북의 김일성이 가짜라는 설을 유포한 사람들은 친일파나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 또는 한민당과 같은 우익단체의 간부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분단 상황에서 이북의 김일성이 식민지 시기의 말기에 민족적 항일 영웅으로 존경받은 김일성이라면 지극히 곤란한 위치에 처할 만한 사람들이었다.[489] 한홍구에 의하면 특히 가짜 김일성 설의 고전적 문헌인 이북의 <김일성 위조사>나 오영진의 <하나의 증언>이 한국전쟁 시기에 제작, 배포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489]

한홍구는 '가짜 김일성 설'의 유포에 기여한 사람이 박정희라고 보았다. 그는 "'가짜 김일성 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50년대에 이미 널리 퍼졌지만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전파되었다. 이승만의 경우 반민특위를 물리적으로 와해시키고 수많은 친일파를 등용하여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삼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승만 본인을 친일파로 보지는 않았다.[489]"고 말했다. 이어 한홍구는 "그러나 5·16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서 관동군 중위로 복무했던 박정희로서는 분단 상황에서 이북과의 정통성 경쟁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489]"고 덧붙였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이제는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평하였다.[489] ‘가짜 김일성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책에 《만주국군》이란 것이 있다. 이 책에는 1937년 11월 김일성의 목을 베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같은 책을 조금 더 넘겨보면 죽은 줄 알았던 김일성이 다시 나타나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전에 목을 벤 사람은 김씨 성을 가진 유격대 지도자일 뿐, 김일성은 건재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홍구는 이를 두고 학문적인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기 짝이 없는 가짜설[489]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연구자들은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겨울의 만주에서 전개된 항일 유격전쟁은 백마를 탄 노장군이 나오는 세계는 아니었다[489]고 반박하였다.

반면 김성주가 항일운동을 한 김일성이 맞다고 주장하는 서대숙(徐大肅) 등은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 직후 현상금이 1만 엔으로 오른 일(항일 단체의 위원장급의 현상금이 3천 엔이었다.), 그밖에 항일 활동으로 소련으로부터 적기(赤旗) 훈장을 받은 일 등을 근거로 부정한다. 그만한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처우를 받았다고 보며, 소련 정부가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 김성주에게 훈장을 줄 정도면 그것은 소련도 인정할 만큼 그의 활동이 대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3차 조선공산당 대표였던 김철수(金綴洙)는 김일성이 가짜였다면 독촉(獨促) 회의 당시 내각 구성을 숙의하는 과정에서 그토록 어린 김일성을 군사위원장으로 천거할 수 있었겠느냐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반문했다.

김일성의 10촌으로 1994년 탈북한 강명도는 종편 채널A 방송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김일성은 김일성 장군의 이름과 업적을 가로챈 가짜라고 주장했다. 근거로 김일성이 해방 후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자기 가족도 김성주가 김일성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462]

북한 김일성이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친 가짜라는 것은 근래에 발굴된 해방 직후부터 평양에 김일성이 등장하기 전 2개월간 김일성 이름이 나오는 기록들을 근거로 한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부터 서울과 전국 도처에 "동진공화국(東震共和國)이 수립되며, 대통령 이승만, 총리대신 김구, 육군대신 김일성(金日成), 외무대신 여운형, 기타 미정" 등의 내용이 든 출처 불명의 벽보와 비라가 나돌았다.[463][464][465] 9월 6일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 전국인민위원(全國人民委員) 55명 명단에도 이승만, 김구와 함께 김일성도 들어 있다.[466] 또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0월호에 발표된 대통령과 각료 적임자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군무부장 적임자로 김일성이 최다 득표(309표 32%)를 하기도 했다.[467]

북한 김일성이 아직 소련군 88여단에 있거나, 평양에 왔더라도 아직 남한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은 시기에 이승만, 김구와 나란히 거명되던 이 김일성은 풍문으로 떠돌던 전설적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인 것을 당시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정관해(鄭觀海)의 관란재일기(觀瀾齋日記)에는 동진공화국 외무대신이 김일성이라는 소문을 기록하면서 "김일성군은 말 타고 하루 500리를 달릴 수 있으며, 그 정예하기가 비할 데 없다고 한다.[金日成軍, 一日能驅五百里, 其精銳無比云]"라 했다.[464]

민중일보 1945년 10월 14일자는 해외의 독립운동 지사를 소개하는 연재기사에 이승만, 김구에 이어 5번째로 김일성을 소개하면서, 을지문덕, 이순신에 비견되는 유명한 장군이며, 일본군 장교 교육과정(일본 육사)을 이수했으나 독립운동에 나섰고, 그 부하가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조선 총독을 저격한 일도 있다고 하였다.[468] 실제로 압록강 일대를 순시하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저격한 사건이 1924년 5월 19일에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한 일이지만,[469] 일반에서는 김일성 장군이 한 일로 소문이 나돌았다.[470] 당시는 1921년의 갑산군 함정포(含井浦) 사건 등 국경 근처에서 일어나는 어지간한 사건은 으레 김일성 장군의 소행으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470] 이 기사는 김일성 장군의 이름은 1937년 보천보 사건 때부터가 아니라 1920년대 초에도 이미 유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평양에 온 33세의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을 자칭했을 때 사람들이 나이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보고 가짜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공개적으로 귀국하여 곧바로 활동을 시작한 이승만, 김구와 달리 김성주가 9월 19일 원산항으로 비밀리에 입북하여 한 달 가까이 잠행하며 민심을 살피다 10월 14일에야 공개 석상에 등장한 것도 본인이나 소련군정이 그가 국내에서 사실상 무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이며, 대중 앞에 지도자로 나서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소련군정은 조선인들이 유명한 항일 영웅 김일성 장군의 귀국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사실상 무명인사였던 김성주를 북한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를 항일 영웅으로 부각시키는 방편으로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방안을 생각해 내었고, 소련군정을 총지휘하던 스티코프도 이 아이디어를 극구 칭찬했다고 소련군정 정치 사령관이었던 레베데프 소장이 후일 증언했다.[372]

북한 김일성은 만주 빨치산 시절 1938년 이후와 소련군에서 한자로 金日成이란 이름을 쓴 것이 확인되나, 러시아어로는 김일성 아닌 중국 발음 진지첸(Цзин Жи Чен, 또는 Цзин Жичэн, Jing Zhichen)으로 적었다.[270][271] 해방 후 원산항으로 입북할 당시에는 자신을 본명 김성주로 소개했고[312], 또 평양에 온 초기에는 김영환(金英煥)이란 가명으로 행세했으므로,[272] 국내 사정을 파악한 뒤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본명 대신 김일성 이름을 쓰기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소련군 문서에는 1945년 10월 2일부터 그의 이름을 이전의 진지첸에서 김일성(Ким Ир Сен, Kim Ir-sen)으로 바꾸어 적기 시작했다.[471] 이러한 사실들로부터 많은 월남민들이 증언한 대로 북한 김일성은 누구인지 불분명한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명성을 훔쳤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김일성 가짜설이 진실이라면, 진짜 김일성 장군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풍문의 내용이 구구하여 실존 인물 한 사람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일본 육사를 졸업했다거나, 백마를 타고 다녔다는 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일본 육사 기병과를 졸업한 김경천(金擎天) 장군이 전설의 원형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1946년경 편집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헌실기약초(固軒實記畧抄)』에는 그가 김일성의 이름으로 지은 박상진(朴尙鎭, 1884~1921) 의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가 나온다.[472]

8. 2. 미화 논란

김일성은 6.25 전쟁과 전쟁 범죄의 장본인이며,[273]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 1968년에는 자신의 생일인 4월 15일을 북한의 최대 명절로 지정하는 등, 우상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436]

1946년 김일성은 '위대한 우리나라의 태양'으로 칭송받았으며,[473] 1947년에는 조기천이 쓴 약 3천여 행의 장편 서사시 '백두산'이 북조선 예술축전에서 1등상을 받고 각급 학교 교재로 채택되어, 김일성을 우리 민족의 양심이자 의지, 신념이며 희망이자 샛별로 묘사했다.[474][475][476]

8. 3. 경제정책 실패

김일성은 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를 복구하려는 시도를 하였다.[264] 그러나 1960년대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보다 두 배 이상 경제력을 유지한 것은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 중화인민공화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477] 1970년대 이후로는 소련의 지원이 어려워졌다.

국제 환경의 변화도 경제 건설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김일성은 1950년대 중·소 분쟁 이후 1960년대 대한민국에서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자 '미국 제국주의, 소련 수정주의, 중국 교조주의, 일본 군국주의에 포위되었다'고 주장하며 '자립 경제 노선'을 더욱 강조했다. 여기에 국민 총생산의 20~30%에 이르는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며 '4대 군사 노선'을 강조했다.

1970년대, 김일성은 주체사상을 명기한 《사회주의헌법》을 발표한다. 주체사상은 사상 변화를 추동할 여지를 극도로 좁혀 민주화 운동과 시민 의식을 크게 저하시키고, 생산력 저하 문제를 심화시켰다. 이 시기 김일성은 '사상 사업'을 강조해 국유화 중심으로 운영하였고, 시장, 개인 영농이나 상공업의 자율성을 전면 부정했다.[478][479]

김일성은 공업에 치중한 나머지 농산물 값이 폭등하고, 계단식 논밭을 무리하게 개간하여 산림을 파괴해 식량 생산 자급률이 떨어지는 등 농업의 쇠퇴를 야기했다. 게다가 경제 개발에는 점점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력투구했기 때문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1970년대 후반부터 기울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미국의 경제 제재와 함께 거의 국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최용건 정부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내각 수상 신분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우상화를 할 수 없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는 그럭저럭 국가를 지탱하는 수준은 되었으나, 1972년 김일성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자 김일성에게는 자신을 유일하게 저지할 수 있었던 최용건이 사라진 탓에 국가 개발 비중을 줄이고 본인 우상화 비중을 늘려갔으며, 이때를 기점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력은 하향세로 돌아섰다.

이러한 정책들은 김일성이 사망할 무렵 최악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외국의 무상 식량 지원 없이는 버틸 수 없게 만든 '외세 의존적 지도자'로 비판받았다.[481]

9. 평가와 비판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반일인민유격대에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950년 6.25 전쟁을 일으켰으며, 종전 후 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 복구를 시도했다.[264] 그러나 한국 전쟁[273], 전쟁 범죄,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논란이 있다.

1953년 박헌영, 리승엽 등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고, 1956년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을, 1958년에는 중국김원봉 계열을, 1961년에는 김두봉 일파를 숙청하는 등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1972년에는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하고 국가주석직을 신설했다.

닉슨 독트린 이후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1972년 이후락과 비밀회담을 가졌고,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1968년 김신조 일당의 1·21 사건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대단히 미안한 사건이다. 그때 나도 몰랐다. 우리 내부의 좌경 맹동분자들이 한 짓이다."라고 주장했다.[437]6.25 전쟁에 대해서는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437]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이후 대한민국 측에서 제의한 주기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승인하기도 했다. 1972년 여름 부산과 강원도 영월에서 수해가 발생하자 김일성은 특별히 구호물자를 보내왔고, 박정희 정권은 이를 받았다.

9. 1. 긍정적 평가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7년 보천보 전투에서 승리했고, 동북인민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홍구는 '이제는 '가짜 김일성 설'의 망령을 떨쳐버리고, 어떻게 김일성이 실제보다 부풀려져 영웅으로 부상했으며, 우리 민족해방운동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는 무엇인지 자리매김해야 할 때'라고 주장하였다.[489]

소련의 지원을 받아 6.25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재건에 노력했고, 초토화된 북한 산업 기반을 빠르게 재건하였다. 특히 흥남비료공장은 예전보다 더 큰 규모로 재건되었다.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산업화 정책은 소련 스탈린의 산업화 정책과 유사하게 중공업을 중요시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제철소, 조선소, 화학 공장을 위주로 중공업을 발전시켰다. 1960년대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기초 과학 분야와 최신 산업 기술을 단순히 전수받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술로 체화하는 과정에 들어섰다. 대한민국의 경우 1970년대에야 과학 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19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첨단 과학 기술 개발에 뛰어든 것을 생각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이러한 행보는 상당히 빠른 것이다. 이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성장으로 1973년까지는 남한보다 1인당 GNP가 높았고, 1970년대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생활 수준, 소득분배, 사회보장에서 대한민국보다 우위에 있었다.

9. 2. 부정적 평가

김일성은 일제강점기 반일인민유격대 활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6.25 전쟁을 일으켰고, 종전 후 천리마 운동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 복구를 시도했다.[264] 그러나 한국 전쟁[273], 전쟁 범죄, 반정부 인사 및 정적 숙청, 인권 탄압 등에 대한 논란이 있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받아 집권하였으며, 주민들은 국가 체제나 지도자 선택권을 가지지 못했다. 각종 선거도 100% 찬성으로 추인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보천보 전투를 지나치게 미화하고 과대포장하여 독립운동인양 거짓으로 홍보했다는 비판도 있다.

모택동이 금지시킨 인민재판을 자행했으며, 북한을 3가지 계층(핵심, 동요, 적대)으로 분류하는 신분제 사회로 만들었다. 겉으로는 공산주의를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을 통해 국가를 김씨 일가의 사유물로 만들었다. 김일성 본인은 이러한 행동을 주체사상이라 선전했다.[491]

김일성은 박헌영과 더불어 한국 전쟁의 최고 주범으로 꼽힌다.[490] 조만식 등 민족계열 인사들을 처형하고, 연안파, 소련파 등 다른 공산, 사회주의 계파 사람들도 숙청했다. 주민들의 언론, 결사, 거주 이전의 자유 등을 박탈하고, 정치지도원을 활용하여 주변 사람들을 감시했다.

경제적으로는 공업에 치중하여 농산물 가격 폭등, 무리한 계단식 논밭 개간으로 인한 산림 파괴, 식량생산 자급률 저하 등 농업 쇠퇴를 야기했다. 또한, 자신의 우상화에만 전력투구하여 1970년대 후반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는 기울기 시작했다. 최용건 정부 당시에는 김일성이 내각 수상 신분이라 우상화를 할 수 없어 경제가 그럭저럭 지탱되었으나, 1972년 김일성 정부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국가개발 비중이 줄고 우상화 비중이 늘어나 국력이 하향세로 돌아섰다.

10. 가족 관계

김일성의 선조는 전라북도 전주 출신으로, 본관전주 김씨이다.[131][132] 김일성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1세2세3세4세5세6세7세8세9세10세11세12세13세14세15세16세17세(미확인)21세22세23세24세25세26세27세28세29세30세31세32세
태서기손여진귀후인서정성정략중진[492]니산[493]기형영생(미확인)보준○○○○계상[494]차형민수송령응우[495]보현형직김일성



김일성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출생사망
아버지김형직 (金亨稷)1894년1926년
어머니강반석 (康盤石)1892년1932년
배우자김정숙 (金正淑)1917년1949년
배우자김성애 (金聖愛)1924년2014년
동생김철주 (金哲柱)1916년1935년
동생김영주 (金英柱)1920년2021년
아들김정일 (金正日)1941년2011년
며느리성혜림 (成蕙琳)1937년2002년
며느리고용희 (高容姬)1952년2004년
김경희 (金敬姬)1946년-
사위장성택 (張成澤)1946년2013년
아들김평일 (金平日)1954년-
손자김정은 (金正恩)1984년-
손자며느리리설주 (李雪主)1989년-
손자김정남 (金正男)1971년2017년
손자김정철 (金正哲)1981년-
손녀김여정 (金與正)1988년-
증손녀김주애 (金主愛)2013년-
증손자김정주2010년-
증손자김한솔 (金漢率)1995년-


11. 저서


  • 《김일성 선집》 (1953년) - 상·하권
  • 《김일성저작집》 (1962년) - 전 3권
  • 《진보적민주주의에 대하여》
  • 《김일성저작선집》(1971년)
  • 세기와 더불어》(1994년) - 전8권
  • 《김일성전집》(2012년) - 전 10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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