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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빈 뉴호록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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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성빈 뉴호록씨는 청나라 건륭제의 후궁으로, 아이송아의 손녀이다. 1757년 란귀인으로 봉해졌으며, 란상재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란귀인으로 진봉되었다. 1776년 빈으로 진봉되었고, 1784년 순행 중 배에서 물에 빠져 사망했다. 묘는 동릉 유릉비원침에 묻혔으며, 1979년 도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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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빈 뉴호록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란귀인 → 란상재 → 란귀인 → 성빈
본관뉴호록 (鈕祜祿; 출생 시)
가문아이신 교로 (결혼 후)
부친무커덩
배우자건륭제
혼인1757년 ~ 1784년
사망일건륭 49년 4월 11일 (1784년 5월 29일)
매장지청동릉 유릉비원침
자녀없음
친인척순귀인
생애
입궁건륭제 후궁
책봉란귀인 (蘭貴人)
란상재 (蘭常在)
란귀인 (蘭貴人)
성빈 (誠嬪)
사망건륭 49년 (1784년) 4월 11일
시호없음

2. 생애

성빈 뉴호록씨의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고, 생일은 9월 29일이다. 성빈은 아이송아의 손녀였으나, 아이송아의 일가는 몰락하여 연장지방(烟瘴地方)으로 보내졌다. 건륭제 즉위 후에야 아이송아 일가는 신자고(포의)에서 사면되고 공작부로 돌아가 거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귀인 가문의 작위만 다시 아이송아 일가로 넣어주지 않을 정도로 그 세력이 쇠락했다.

건륭 22년(1757년) 6월 9일, 란(蘭)귀인으로 처음 봉해졌다. 건륭 33년 6월 8일, 란상재가 란귀인으로 진봉되었는데, 언제 란상재로 강등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건륭 41년 11월 18일, 빈으로 진봉되고, 금상재와 함께 진봉되었다. 건륭 42년 1월에 숭경황태후의 장례와 겹쳐 책봉례는 하지 못했다.

건륭 44년 2월 1일, 건륭제는 태감에게 상년전지를 내려 "순비가 명상재를 데리고 항상 영수궁에 머물게하였다."고 전했다. 10월에 성빈 책봉례를 행하여 종당고모 순비 뉴호록씨와 함께 책봉하였다.

건륭 49년 4월 11일, 순행하여 경성으로 돌아가던 길에, 성빈은 밤에 배 옆의 장막에서 바람을 쐬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 시신은 수습하여 입관하고, 수로를 통해 통주로 가서 정안장에 보내져 잠시 안장되었다. 건륭 49년 9월 2일 진시(辰時), 성빈의 금관과 무귀인, 영상재의 채관은 동릉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성빈은 같은 달 7일, 금관이 유릉비원침에 도착해 9월 8일 장지궁에 들어갔다.

청나라 말기 야사의 전설에 의하면, 건륭제가 강남 순행을 갈때, 효현황후가 물에 빠져 사망했는데, "효현황후가 스스로 물에 투신했다"라는 출처가 성빈의 불행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광원의 저서 《청황릉지궁친탐기》에 따르면, 1979년 10월, 용비의 무덤이 무너진 지 며칠 뒤, 성빈의 무덤도 무너져 큰 구멍이 뚫렸고, 용비의 무덤처럼 도굴당한 상태였다. 서광원 청동릉소장은 동굴 안의 오염수를 틈타 성빈의 무덤으로 들어가 보라고 지시했는데, 성빈의 관이 거꾸로 놓여있고, 덧널과 관 모두 도굴꾼이 뚫었으며, 질 나쁜 면화만 조금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후, 성빈의 무덤을 다시 닫아 봉쇄하였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성빈 뉴호록씨의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고, 생일은 9월 29일이다. 성빈은 아이송아의 손녀였으나, 아이송아의 일가는 몰락하여 연장지방(烟瘴地方)으로 보내졌다. 건륭제 즉위 후에야 아이송아 일가는 신자고(포의)에서 사면되고 공작부로 돌아가 거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순귀인 가문의 작위만 다시 아이송아 일가로 넣어주지 않을 정도로 그 세력이 쇠락했다.

건륭 22년(1757년) 6월 9일, 란(蘭)귀인으로 처음 봉해졌다. 건륭 33년 6월 8일, 란상재가 란귀인으로 진봉되었는데, 언제 란상재로 강등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건륭 41년 11월 18일, 빈으로 진봉되고, 금상재와 함께 진봉되었다. 건륭 42년 1월에 숭경황태후의 장례와 겹쳐 책봉례는 하지 못했다.

건륭 44년 2월 1일, 건륭제는 태감에게 상년전지를 내려 "순비가 명상재를 데리고 항상 영수궁에 머물게하였다."고 전했다. 10월에 성빈 책봉례를 행하여 종당고모 순비 뉴호록씨와 함께 책봉하였다.

건륭 49년 4월 11일, 순행하여 경성으로 돌아가던 길에, 성빈은 밤에 배 옆의 장막에서 바람을 쐬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 시신은 수습하여 입관하고, 수로를 통해 통주로 가서 정안장에 보내져 잠시 안장되었다. 건륭 49년 9월 2일 진시(辰時), 성빈의 금관과 무귀인, 영상재의 채관은 동릉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성빈은 같은 달 7일, 금관이 유릉비원침에 도착해 9월 8일 장지궁에 들어갔다.

청나라 말기 야사의 전설에 의하면, 건륭제가 강남 순행을 갈때, 효현황후가 물에 빠져 사망했는데, "효현황후가 스스로 물에 투신했다"라는 출처가 성빈의 불행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광원의 저서 《청황릉지궁친탐기》에 따르면, 1979년 10월, 용비의 무덤이 무너진 지 며칠 뒤, 성빈의 무덤도 무너져 큰 구멍이 뚫렸고, 용비의 무덤처럼 도굴당한 상태였다. 서광원 청동릉소장은 동굴 안의 오염수를 틈타 성빈의 무덤으로 들어가 보라고 지시했는데, 성빈의 관이 거꾸로 놓여있고, 덧널과 관 모두 도굴꾼이 뚫었으며, 질 나쁜 면화만 조금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후, 성빈의 무덤을 다시 닫아 봉쇄하였다.

청씨는 만주족 정홍기 니오후루 씨족 출신이다. 아버지는 무극등(穆克登)이며, 이등 시위이자 니루의 지휘관()이었다.[1] 외조부는 아얼송아(阿尔松阿)로, 알링가의 아들이자 에빌룬의 손자이며, 이등공 작위(二等公)를 받았다.[2]

2. 2. 입궁과 후궁 생활

성빈 뉴호록씨는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생일은 9월 29일이다. 아이송아의 손녀로, 아이송아의 일가는 몰락하여 연장지방으로 보내졌다가 건륭제 즉위 후에야 신자고(포의)에서 사면되어 공작부로 돌아갔다. 그러나 순귀인 가문의 작위만 다시 아이송아 일가로 넣어주지 않을 정도로 그 세력이 쇠락했다.[3]

건륭 22년(1757년) 6월 9일에 란(蘭)귀인으로 처음 봉해졌다. 자금성 내 거처는 영수궁이었으며, 숙비의 감독 하에 생활했다.[3] 건륭 25년 1월 23일, 영수궁의 태감 조흥이 란귀인의 옷을 훔쳐 전당포에 저당잡히고 돈을 벌었다가 발각되어 흑룡강으로 유배를 가는 사건이 있었다.[4]

건륭 33년 6월 8일, 란상재가 란귀인으로 진봉되었으나, 언제 란상재로 강등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4] 건륭 41년 11월 18일, 빈으로 진봉되어 금상재와 함께 진봉되었다. 그러나 건륭 42년 1월에 숭경황태후의 장례와 겹쳐 책봉례는 하지 못했다.[5]

건륭 44년 2월 1일, 건륭제는 태감에게 상년전지를 내려 "순비가 명상재를 데리고 항상 영수궁에 머물게하였다."고 전했고, 10월에 성빈 책봉례를 행하여 종당고모 순비 뉴호록씨와 함께 책봉하였다.

건륭 49년 4월 11일, 순행하여 경성으로 돌아가던 길에, 성빈은 밤에 배 옆의 장막에서 바람을 쐬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6] 시신은 수습하여 입관하고, 수로를 통해 통주로 가서 정안장에 보내져 잠시 안장되었다. 같은 해 9월 2일 진시(辰時), 성빈의 금관과 무귀인, 영상재의 채관은 동릉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같은 달 7일, 금관이 유릉비원침에 도착해 9월 8일 장지궁에 들어갔다.

청나라 말기 야사의 전설에 의하면, 건륭제가 강남 순행을 갈때, 효현황후가 물에 빠져 사망했는데, "효현황후가 스스로 물에 투신했다"라는 출처가 성빈의 불행과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광원의 저서 《청황릉지궁친탐기》에 따르면, 1979년 10월 용비의 무덤이 무너진 지 며칠 뒤, 성빈의 무덤도 무너져 큰 구멍이 뚫렸고, 도굴당한 모습이 용비의 무덤과 똑같았다. 서광원 청동릉소장은 동굴안의 오염수를 틈타 성빈의 무덤으로 들어가보라고 지시했는데, 성빈의 관이 거꾸로 놓여있고, 덧널과 관 모두 도굴한 사람이 뚫어 도굴하고, 질 나쁜 면화만 조금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후, 성빈의 무덤을 다시 닫아 봉쇄하였다.

2. 3. 죽음과 사후

성빈 뉴호록씨는 건륭 49년 4월 11일, 순행에서 경성으로 돌아오던 길에 밤에 배 옆의 장막에서 바람을 쐬다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6] 시신은 수습되어 입관되었고, 수로를 통해 통주로 가서 정안장에 보내져 잠시 안장되었다. 야사에는 효현순황후가 스스로 물에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성빈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륭 49년 9월 2일 진시(辰時), 성빈의 금관과 무귀인, 영상재의 채관은 동릉 유릉비원침에 묻혔다. 성빈은 같은 달 7일, 금관이 유릉비원침에 도착해 9월 8일 장지궁에 들어갔다.

1979년 10월, 용비의 무덤이 무너진 지 며칠 뒤, 성빈의 무덤도 무너져 큰 구멍이 뚫렸는데, 용비의 무덤과 마찬가지로 도굴당한 상태였다. 서광원 청동릉소장은 동굴 안의 오염수를 틈타 성빈의 무덤으로 들어가보았는데, 성빈의 관이 거꾸로 놓여있고, 덧널과 관 모두 도굴꾼이 뚫어 도굴하고 질 나쁜 면화만 조금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후 성빈의 무덤은 다시 닫아 봉쇄하였다.

3. 가족 관계

성빈의 5대조는 액역도이며, 그의 딸은 홍타이지의 원비 뉴호록씨였다. 고조부는 알필륭으로, 누르하치의 넷째 딸 화석공주 목고십 사이에서 태어났다. 알필륭은 강희제효소인황후와 온희귀비 뉴호록씨를 낳았다. 증조부는 아령아이며, 그의 생모는 3등시위 장동량의 증조고모 파아랍씨이다. 아령아는 강희제 황17남 과의친왕 윤례의 적복진을 낳았다.

조부 아이송아는 정실 호부상서 카이인포의 딸 이르건기오로씨, 측실 일등공 해금의 딸 서목록씨, 측실 정람기 종실 봉은장군 파금태의 딸을 두었다. 아이송아는 2등공, 영시위내대신, 형부상서 등을 지냈으나, 옹정 2년 아버지보다 더 교활하고 간통했다는 이유로 성경으로 파견되어 증조묘소를 지키게 되었다. 옹정 4년 5월 처형당했으나, 건륭 원년에 이르러서야 처자가 만주양황기로 복귀했다. 아이송아는 양홍기 한산종실 종수의 처, 정홍기 종실 부도통 도륭액의 아들 3등시위 오아경아의 처를 낳았다.

아버지는 무크덴으로, 정실 참령 파이태의 딸 오라목한길모트씨를 두었다. 무크덴은 강희 52년 8월 29일 사시(巳時)에 태어나 건륭 2년 당숙 눌친이 얻은 운기위를 습격하여 깃발을 따라 걸었다. 건륭 5년 3등시위에 선발, 시위장수로 선발, 구좌령을 받았으며, 2등시위까지 올랐다. 건륭 32년 4월 6일 축시에 급사했다.

동생으로는 상보와 서보가 있다. 상보는 소습훈구좌령, 3등시위, 건청문 시위를 지냈으며, 건륭 46년 4월 2등시위, 건륭 49년 7월 건륭제가 황마저를 하사받았다. 서보는 건륭 40년 진사, 한림원서길사, 한림원시독학사, 내각학사 겸 예부시랑직 등을 지냈다.

사촌자매는 정람기 종실 한산 사병아와 혼인했다. 조카는 양람기 종실 보국공 특통액의 아들 삼품 종실 영창아이다.

성빈은 만주족 정홍기 니오후루 씨족 출신이다.[1] 아버지는 무극등(穆克登)이며, 이등 시위이자 니루의 지휘관(Zuǒ lǐng/左领중국어)을 지냈다.[1] 외조부는 아얼송아(阿尔松阿)로, 알링가의 아들이자 에빌룬의 손자이며, 이등공 작위(二等公)를 받았다.[2]

4. 등장 매체

5. 품계

건륭제의 재위 기간 중 니오후루씨는 1757년 육품 란 귀인(蘭貴人)에 책봉되었다. 1758년에는 칠품 란 상재(蘭常在)로 강등되었다가, 1768년 다시 육품 란 귀인(蘭貴人)으로 책봉되었다. 1777년 오품 칭 빈(誠嬪)에 책봉되었다.

참조

[1] 서적 《皇朝文獻通考》/ "The chronicles of imperial dynasty"
[2] 서적 "A historical dictionary of Qing dynasty" Palace Museum Library
[3] 서적 "历史档案"/"Historical archives" 历史档案杂志社
[4] 서적 《添碳檔》
[5] 서적 《清實錄乾隆朝實錄》/ "The chronicles of Qianlong era"
[6] 서적 清皇陵地宮亲探记: 图文本/"Imperial tombs of Qing dynasty. Illustrated edition" Forbidden city Publi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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