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토 히로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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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토 히로유키는 1952년 후쿠시마현 출생으로, 일본의 우익 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우익 사상에 심취하여 우익 단체에 가입하고, 가두 선전, 집회, 블로그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국가사회주의자동맹을 결성하여 불법 체류 외국인 추방 운동을 벌이는 한편, 재일 한국인에게는 귀화를 지원하는 등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극우, 신보수, 행동하는 보수 등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화시켜 왔으며, 일본의 역사관, 원자력 정책, 외국인 정책 등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피력하며 논란을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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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 히로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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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씨명 | 세토 히로유키 |
후리가나 | 세토 히로유키 |
출생일 | 1952년 3월 3일 |
출생지 | 일본 후쿠시마현 |
직업 | 정치 활동가, 저널리스트, 과수원 경영자 |
소속 단체 | 일본제일당 민족사상연구회 일본우국회 세계전략연구소 외국인범죄추방운동 유신정당・신풍 |
출신 학교 | 후쿠시마현립후쿠시마농잠고등학교 원예과 |
웹사이트 | 세토 히로유키 블로그『일본이여 어디로』 |
2. 경력
1952년 3월 3일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영웅전을 읽었고, 중학생 때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관심을 가졌다.[3] 후쿠시마현립 후쿠시마 농잠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농사를 도왔지만, 능력 부족을 느껴 후계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이후 후쿠시마 시청에 임시직으로 입사하여 1971년 정직원으로 승격, 공무원이 되었다.
좌익계 노조의 영향이 강했던 직장에 반발, 자민당에 입당했다. 도쿄 히비야에서 대일본애국당 아카오 빈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개인적으로 우익 활동을 시작했다.[4] 1972년에는 성인식에서 좌익 데모대가 신성인 자위관을 태운 버스를 포위하고 식 참가를 방해하는 것을 목격했다.[5]
1974년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이토야마 에이타로의 선거 운동을 도왔고, 그 인연으로 민족사상연구회에 가입했다.[6] 1975년 파업권 파업에 항의, 동노 사무소에 난입하여 체포, 벌금형을 받았다. 시청에서는 구두 주의만 받고 징계는 없었다.[7]
1976년 민족사상연구회를 계승한 우익 단체 "우국청년동지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약 10년간 활동했다.[8] 1977년 야쿠자와 난투극을 벌여 상해죄로 체포되었다.[10] 수감 중 억울함을 호소하여 무죄를 받은 재일 조선인을 알게 되었고, 1978년 정경 도호쿠에 "야마모토 히로유키"라는 이름으로 르포를 발표, 저널리스트로서 첫 활동을 했다.[11]
같은 해 정론신문사 설립자 미타 카즈오를 사사, 후쿠시마에서 미니콤 잡지 발행을 시작, 센다이를 거쳐 도쿄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12] 1981년 경, 저널리스트 활동과 병행, 일본우국회로서 가두 선전 우익 활동을 재개, 통일전선 의용군을 결성했다.[13] 아사쿠라 쿄시의 취재를 받아 "긴자에 본거지를 둔 어떤 우익 결사의 수령"으로 『별책 보물섬 56 야쿠자라는 삶의 방식』에 게재되었다. 당시 세토의 일본우국회는 "원전 반대, 자본가 섬멸"을 외치며 활동했고, 긴자 사무실 앞에서 부랑자에게 술을 대접했다.[14] 또한, 한국을 방문하여 새마을 운동에 자원 봉사자로 참가했다.[15]
1983년 시즈오카시 시장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16] 같은 해, 세계전략연구소를 설립했다.[17] 1986년 무렵, 가두 선전차를 타는 활동을 그만두었다.[18]
1991년, 국가사회주의 일본노동자당 등과 함께 "국가사회주의자 동맹"을 설립하고, 불법 체류 외국인 추방 운동을 시작했다.[19] 한편, 재일 조선·한국인에 대해서는 귀화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도 했다.[20] 1994년 TBS 보도 프로그램 『스페이스 J』에서 이 운동이 다루어지면서 아리도 다이스케와 만나게 된다(1995년). 이후, 아리도는 세토를 사사하여 집필 및 정치 활동을 함께 한다.[21]
1994년 『환경경제신문』을 창간.[22] 1995년부터 행정통신사 발행 월간지 『정재계 저널』 편집장[23]을 맡아 직접 기사를 집필하기도 했다.[24] 이후 행정통신사 경영권을 획득하여 발행인도 겸임한다.[25] 당시 행정통신사에는 여러 블랙 저널리스트가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26]
1997년 경 웹사이트 "[https://web.archive.org/web/19970710012502/http://strategy.co.jp/ 세계 전략]"을 개설했다. 이는 우익 단체 중에서는 비교적 빠른 대응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https://web.archive.org/web/19991012044450/www.jpin.co.jp/strategy/discustext_frm.htm 디스커션 포럼](전자 게시판)도 함께 운영했다. 또한, 초창기 2채널을 비롯한 다수의 게시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28]
2001년 『교육 리포트』를 창간했다.[29] 2002년 주식회사 스포츠·아이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아리도 다이스케도 이사로 함께 취임했다. 이 회사는 2003년 파산했다.[30] 2003년 주식회사 케이반의 이사로 취임했다. 2004년 대표이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이사 및 대표이사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2006년 "국가사회주의자 동맹" 부대표 직함을 반납했다.[30] 2006년 유신정당·신풍 지지를 호소하는 '신풍련'을 결성했다.[31] 2007년 유신정당·신풍의 당원이 되었고,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비례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34] 세토는 자금력과 조직력 부족을 패인으로 꼽았다.[35]
2007년 주권 회복을 목표로 하는 모임 대표 니시무라 슈헤이와 '고노 담화 철회를 수상에게 요구하는 서명 활동'을 통해 알게 되었고,[36] 이후 빈번하게 함께 행동했다. 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와 교류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37] 선거 패배 후, 지원 조직 확립을 위해 건강식품 판매를 시도했으나, 비판이 잇따라 단념했다.[38], [39] 2007년 유신정당·신풍 부대표로 취임했다.[40]
2008년 아이누를 선주민족으로 인정하는 국회 결의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했다.[42] 같은 해 아사키 아키요 시의원의 추락사가 창가학회와 연관된 살인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2009년 자신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삭제되자 구글 일본 지사에 항의했다.[43] 같은 해 "저널리스트 일에 전념"하기 위해 신풍 부대표를 퇴임했다.[44] 2010년부터 농원 경영 준비를 시작했다.[45] 2010년 활동 전선 은퇴를 표명했다.[46]
2016년 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 전 대표 사쿠라이 마코토가 설립한 일본제일당 결당에 참가하여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47][48] 2018년 재특회 회원은 아니었다.[49] 2023년 일본제일당 최고 고문을 사임했다.[50]
2. 1. 초기 활동 (1970년대 ~ 1980년대)
1952년 3월 3일 후쿠시마현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영웅전을 읽었고, 중학생 때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관심을 가졌다.[3] 후쿠시마현립 후쿠시마 농잠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집안 농사를 도왔지만, 능력 부족을 느껴 후계자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 이후 후쿠시마 시청에 임시직으로 입사하여 1971년 정직원으로 승격, 공무원이 되었다.좌익계 노조의 영향이 강했던 직장에 반발, 자민당에 입당했다. 도쿄 히비야에서 대일본애국당 아카오 빈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개인적으로 우익 활동을 시작했다.[4] 1972년에는 성인식에서 좌익 데모대가 신성인 자위관을 태운 버스를 포위하고 식 참가를 방해하는 것을 목격했다.[5]
1974년 제10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이토야마 에이타로의 선거 운동을 도왔고, 그 인연으로 민족사상연구회에 가입했다.[6] 1975년 파업권 파업에 항의, 동노 사무소에 난입하여 체포, 벌금형을 받았다. 시청에서는 구두 주의만 받고 징계는 없었다.[7]
1976년 민족사상연구회를 계승한 우익 단체 "우국청년동지회" 회장이 되었다. 이후 약 10년간 활동했다.[8] 1977년 야쿠자와 난투극을 벌여 상해죄로 체포되었다.[10] 수감 중 억울함을 호소하여 무죄를 받은 재일 조선인을 알게 되었고, 1978년 정경 도호쿠에 "야마모토 히로유키"라는 이름으로 르포를 발표, 저널리스트로서 첫 활동을 했다.[11]
같은 해 정론신문사 설립자 미타 카즈오를 사사, 후쿠시마에서 미니콤 잡지 발행을 시작, 센다이를 거쳐 도쿄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12] 1981년 경, 저널리스트 활동과 병행, 일본우국회로서 가두 선전 우익 활동을 재개, 통일전선 의용군을 결성했다.[13] 아사쿠라 쿄시의 취재를 받아 "긴자에 본거지를 둔 어떤 우익 결사의 수령"으로 『별책 보물섬 56 야쿠자라는 삶의 방식』에 게재되었다. 당시 세토의 일본우국회는 "원전 반대, 자본가 섬멸"을 외치며 활동했고, 긴자 사무실 앞에서 부랑자에게 술을 대접했다.[14] 또한, 한국을 방문하여 새마을 운동에 자원 봉사자로 참가했다.[15]
2. 2. 1990년대 ~ 2000년대 초반
1991년, 국가사회주의 일본노동자당 등과 함께 "국가사회주의자 동맹"을 설립하고, 불법 체류 외국인 추방 운동을 시작했다.[19] 한편, 재일 조선·한국인에 대해서는 귀화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도 했다.[20]1994년 9월 14일, TBS의 보도 프로그램 『스페이스 J』에서 이 운동이 다루어지면서 아리도 다이스케와 만나게 된다(1995년). 이후, 아리도는 세토를 사사하여 집필 및 정치 활동을 함께 한다.[21]
1994년 2월, 『환경경제신문』을 창간.[22] 1995년부터 행정통신사 발행 월간지 『정재계 저널』의 편집장[23]을 맡아 직접 기사를 집필하기도 했다.[24] 이후 행정통신사의 경영권을 획득하여 발행인도 겸임한다.[25] 당시 행정통신사에는 여러 블랙 저널리스트가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26]
1997년 경 웹사이트 "[https://web.archive.org/web/19970710012502/http://strategy.co.jp/ 세계 전략]"을 개설했다. 이는 우익 단체 중에서는 비교적 빠른 대응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https://web.archive.org/web/19991012044450/www.jpin.co.jp/strategy/discustext_frm.htm 디스커션 포럼](전자 게시판)도 함께 운영했다. 또한, 초창기 2채널을 비롯한 다수의 게시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세토는 2008년에 2000년 무렵의 2채널에 대해 "상대를 욕하기만 하는 지금과 달리 서로의 입장을 인정하며 토론하는 매너가 남아 있었다. 지금의 2채널에는 그런 모습이 없어 유감이다"라고 회고했다.[28]
2001년에는 『교육 리포트』를 창간했다.[29]
2002년 10월 10일, 도쿄도 지요다구 미사키초 2초메에 본점을 둔 주식회사 스포츠·아이의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아리도 다이스케도 이사로 함께 취임했다. 이 회사는 2003년 8월 13일 도쿄 지방 법원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다(상업 등기부 기준). 스포츠 아이 ESPN과는 무관한 회사이다.
2003년 8월 20일, 도쿄도 지요다구 소토칸다 2초메에 본점을 둔 주식회사 케이반의 이사로 취임했다. 2004년 2월 23일 대표이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5월 31일 이사 및 대표이사직에서 모두 물러났다(상업 등기부 기준).
2. 3. 2000년대 후반 ~ 현재
2006년 11월, 유신정당·신풍 지지를 호소하는 '신풍련'을 블로거들과 함께 결성했다.[31] 2007년 4월 3일 유신정당·신풍의 당원이 된 것을 밝히고, 5월 21일에는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동당 공인으로 비례구에 출마할 것을 표명했다. 7월 29일 참의원 선거에서 신풍의 비례 후보 3명 중 가장 많은 득표를 했으나 낙선했다.[34] 세토는 "변명이 허락되지 않을 정도의 참패"라고 결과에 대해 자금력과 조직력 부족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35]2007년 6월, 주권 회복을 목표로 하는 모임 대표 니시무라 슈헤이와 '고노 담화 철회를 수상에게 요구하는 서명 활동'을 통해 알게 되었고,[36] 참의원 선거 이후에는 빈번하게 함께 행동했다. 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와 교류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37]
2007년 참의원 선거 패배 후, 지원 조직 확립의 필요성을 느껴 창가학회와 여성당 등을 본보기로 건강식품 판매 조직·판로에서 지원자 획득을 목표로 했다.[38] 그러나 소개한 상품에 대한 비판이 잇따라 판매를 단념했다.[39]
2007년 12월, 유신정당·신풍 부대표로 취임했다.[40]
2008년 6월 6일, 아이누를 선주민족으로 인정하도록 정부에 촉구하는 국회 결의가 가결되자 "아이누 민족은 동화 정책에 의해 소멸했다", "과거 차별을 현재에서 단죄하는 것은 편향", "자칭 아이누는 이권 때문"이라는 의견에 찬동했다.[42]
2008년 7월 이후, 아사키 아키요 히가시무라야마 시의원의 추락사가 창가학회와 연관된 살인이라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2009년 2월, 세토와 니시무라 슈헤이 등이 중국인, 한국인, 창가학회원에 대한 비난을 담은 가두 선전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삭제되자 구글 일본 지사에 항의했다.[43]
2009년 6월, "저널리스트 일에 전념하는 것"을 이유로 신풍 부대표를 퇴임했다.[44] 2010년 1월부터 후쿠시마현 자택을 생활 근거지로 삼고 농원 경영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45]
2010년 12월, 활동하는 단체끼리 반목·대립을 반복하고 있는 것을 이유로 활동 전선에서 은퇴를 표명했다.[46]
2016년 9월, 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 전 대표 사쿠라이 마코토가 설립한 일본제일당 결당에 참가하여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47][48] 2018년 2월 4일 시점에서 재특회 회원은 아니었다.[49]
2023년 2월 1일, 일본제일당 최고 고문을 사임했다.[50]
3. 사상 및 주장
세토 히로유키는 우익·보수파 주류와 자신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말하는 운동』에서 『행동하는 운동』으로의 신보수주의"를 주장했다.[51] 그는 다음 세 가지 행동 지침을 제시했다.[51]
# 외국인 이민 제도 저지 및 일본의 국체 수호
# 밑바닥 사회로부터의 착취 체제 변혁
# 의회제 민주주의로부터의 탈피
이러한 주장은 자민당이나 산케이 신문과 같은 일반적인 보수파의 주장과 공통점이 많다.
세토는 가두 선전과 같은 집단적인 항의 행동 외에도 인터넷 활용에 앞장섰다. 2005년 6월 개설한 블로그 "극우 평론"[https://web.archive.org/web/20051113012302/http://blog.livedoor.jp/the_radical_right/](極右評論)은 초기에는 해외의 국가 사회주의·이민 배척 운동 동향 소개가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우익 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007년 8월에는 "일본은 어디로"로 블로그명을 변경했다.
세토는 매스컴이 외부 세력의 영향으로 반일적인 여론 조작을 한다고 주장하며, 이에 맞서 인터넷을 통해 진실을 깨달은 시민들이 넷 우익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을 "인터넷으로 보기만 하고, 그것을 믿어버리는 인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인터넷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그의 자세에 대한 지지가 댓글란에 모였다. 세토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 확산과 지지 확대에 큰 기대를 걸고, 넷 우익에 대한 매스컴의 편향 보도를 비판하며, 인터넷 규제에 반대하고 익명성의 자유 보장을 주장했다.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세토는 2ch를 "우국의 전장"이라 칭하며, 아동 포르노법 개정 논의에서 애니메이션·만화·게임 소프트에 대한 적용 확대 (준 아동 포르노 문제)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세토는 2007년 5월 "인터넷에서 테러 사건을 긍정하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할 뿐"이라며 "일체의 테러리즘을 인정하지 않고, 그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세력과도 결별한다"고 선언했다.[77] 그러나 2010년에는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을 현창하며 견해를 바꾸기도 했다.[80]
아베 내각에 대해서는 "올바른 역사 인식"과 "올바른 역사 교육" 재건에 기대를 가졌지만, 아베 신조의 방중, 방한 등에 실망하여 유신 정당·신풍에서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다.[84]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패배가 확실시되면서부터 민주당에 대한 비판을 강화했고,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 정권 성립을 망국의 위기로 간주했다.[85] 민주당 정권 성립 후에는 오자와 이치로를 "망국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농본주의자를 자처하며 농촌 재생을 표방했지만, 민주당의 농업인 호별 소득 보상 제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2010년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일어나라 일본을 응원했고,[86] 행복의 과학·행복실현당을 호의적으로 다루었다.[87] 지방 선거에서는 2007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이시하라 신타로[88], 2008년 오사카부 지사 선거에서 하시모토 도루[89], 2009년 지바현 지사 선거에서 모리타 켄사쿠를 지지했다.[90]
원자력 이용에 찬성하며, "모든 원자력 발전소의 재가동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91] 원자력 철폐 운동을 좌익 주도로 보고, 원자력 발전소 반대 시위를 정부에 대한 "압력"이라고 표현한다.[92]
세토는 방사성 낙진 중 90Sr 데이터만을 언급하며,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보다 1960년대에 더 많이 낙진했기 때문에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영향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91] 그는 풀브산이 세슘 제염에 효과가 있다는 실험을 게재하고, 풀브산이 함유된 샴푸와 바디 소프를 판매하고 있다.[94]
세토는 일본 국회에 80명 이상의 조선반도 출신 귀화 정치인이 있다고 주장하며, 출생 시 국적을 밝히지 않고 외국인 지방 참정권 부여를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의 출신을 문제 삼았다.[95] 그는 '코리안 재패니즈 조사 위원회'를 설립하여 모든 정치인에게 출신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95]
3. 1. 주요 사상
- 천황을 국가의 본질로 보는 사관과 그것에 근거한 애국 칭양[52]
- 중일 전쟁·대미영 전쟁 정당화[52]
- 난징 대학살·종군 위안부 등 일본의 전쟁 범죄 부인[53]
-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지지: 쇼와 천황이 야스쿠니 신사의 A급 전범 합사에 대한 불쾌감을 말했다고 전해지는 "토미타 메모"(2006년 7월 보도) 조작 의심[54]
- 반공주의, 반중국, 반러시아, 반북한: 중국 공산당의 "신패권주의" 저지를 위해 미일 안보 조약에 근거한 미일 동맹 강화와 핵무장 포함 일본 방위력 강화 주장[55]
- 영주 외국인에게 지방 참정권을 부여하는 법안 반대[58]
- 닛쿄소가 일본 교육 정책을 은연중에 지배하고 편향된 교육을 주도한다고 주장[59]
- 재일 한국·조선인에 대해 초기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이후 특별 영주자 제도 폐지 주장[33]
- 특별 영주 제도 폐지 이유: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밖에 할 수 없다. 한반도로 장래 돌아갈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일본으로 귀화하게 하여 일본인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귀화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특별 영주가 아닌, 일반 영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63]
3. 2. '극우'에서 '행동하는 보수'로
세토 히로유키는 자신의 입장을 "극우"에서 "우익", "신보수", "보수" 등으로 변화시켜왔다. 2005~2006년경에는 "극우"를 자처하며 "우익" 및 "보수파"와 차이를 강조했다.[64] 그는 "보수"의 "반공"은 소극적이지만, "극우"의 "멸공"은 적극적으로 공산주의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다.[65]2007년 참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넷 우익"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역이용하여 "넷 우익의 대표로서 선거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66] 선거 후에는 "행동하는 신보수 운동"을 표방하다가, 이후 "행동하는 보수"를 자칭하게 되었다.[67] 2010년에는 "행동하는 사회 운동"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지만,[68] 곧 "행동하는 보수의 기수"로 돌아왔다.
세토는 행동 지침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했다.[51]
# 외국인 이민 제도 저지 및 일본의 국체 수호
# 밑바닥 사회로부터의 착취 체제 변혁
# 의회제 민주주의로부터의 탈피
그는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운동』에서 『행동하는 운동』으로의 신보수주의"라고 요약했다.[51]
세토는 인터넷을 활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확산시키고 지지 세력을 결집하는 데 힘썼다. 2005년 6월 개설한 블로그 "극우 평론"은 2007년 8월 "일본은 어디로"로 개칭되어 우익 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매스컴의 편향 보도에 맞서고 넷 우익을 결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터넷 규제에 반대하며 익명성의 자유 보장을 옹호했다.
3. 3. 테러 및 폭력 활동에 대한 입장
세토 히로유키는 초기에는 니시혼간지 사건이나 가토 고이치 자택 방화 사건 등 테러 및 파괴 활동을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후 소카 학회 도쿠시마 문화회관 폭발 사건 등을 계기로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하였다.3. 4. 정치인 및 정당과의 관계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51] 자민당 외에 민주당, 일어나라 일본, 행복실현당 등 여러 정당에 소속된 정치인들과 교류했다. 이시하라 신타로, 하시모토 도루, 모리타 켄사쿠 등을 지방 선거에서 지지했다.[61]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자력 발전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사고의 영향은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55]
일본 국회에 80명 이상의 조선반도 출신 귀화 정치인이 있다고 주장하며, 외국인 지방 참정권 부여를 추진하는 국회의원들의 출신을 문제 삼았다.[95] '코리안 재패니즈 조사 위원회'를 설립하여 모든 정치인에게 출신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95]
4. 주요 활동 및 비판
세토 히로유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극우"에서 "우익", "신보수", "보수"로 변화시켜 왔다. 2005년경에는 "극우"를 자처하며 "멸공"을 주장했지만,[64][65] 2007년 참의원 선거 출마 시에는 "넷 우익"이라는 낙인에 도전하며 "넷 우익의 대표"를 자처했다.[66] 그 후에는 "행동하는 신보수 운동", "행동하는 보수"를 표방했다.[67] 2010년에는 "행동하는 사회 운동"을 사용하겠다고 선언했지만,[68] 곧 "행동하는 보수의 기수"로 돌아왔다.
세토는 인터넷 활용에 적극적이었다. 2005년 개설한 블로그 "극우 평론"은[1] 우익 활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고, 2007년 "일본은 어디로"로 개칭했다.[1] 그는 매스컴이 반일적인 여론 조작을 한다고 비판하며, 넷 우익이 인터넷을 통해 진실을 깨닫고 결집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터넷 규제에 반대하며 익명성의 자유 보장을 옹호했다.[1]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2ch를 "우국의 전장"이라고 칭하며 아동 포르노 규제에 반대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쇼와 유신의 지사"로 칭찬하고,[81] 아베 내각에 "올바른 역사 인식" 재건에 기대를 걸었지만, 아베 신조의 방중, 방한에 실망했다.[84] 2009년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 정권 성립을 망국의 위기로 보고 오자와 이치로를 "망국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85] 2010년 제2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일어나라 일본을 응원하고,[86] 행복의 과학·행복실현당을 호의적으로 다루었다.[87] 지방 선거에서는 이시하라 신타로,[88] 하시모토 도루,[89] 모리타 켄사쿠를 지지했다.[90]
원자력 이용에 찬성하며,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을 주장한다.[91] 원자력 발전소 반대 시위를 좌익 주도로 보고 정부에 대한 "압력"이라고 비판한다.[92]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영향은 전혀 없다고 주장하며,[91] 풀브산이 세슘 제염에 효과가 있다는 실험을 게재하고 관련 상품을 판매한다.[94]
4. 1. '저널리스트'로서의 자세
세토는 기업과 정치인들의 비리와 의혹을 꾸준히 제기하는 저널리스트를 자처하며[96], 기존 언론[96]의 편향 보도를 비판한다.[96] 그는 정치권과 기업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저널리스트 활동과 우익 활동을 병행하며 스스로를 "행동하는 저널리스트"라고 칭한다.[96] 또한, 블로그를 통해 "경찰 고위층의 극비 명령"을 실시간으로 폭로한 적도 있다고 주장한다.[97]하지만 세토의 주장은 대부분 언론 보도를 유일한 정보원으로 하며, 자신의 주장을 덧붙이는 방식이다.[98] 그는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서점에서 판매되는 잡지에 날조 기사를 게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98]
이에 대해 풍속 칼럼니스트 마츠자와 구이치와 하시모토 교쿠센 등은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99]
- 유리한 사실만을 취사선택하여 미리 정해진 결론에 짜맞춘다.
- 비판을 받으면 배후설이나 음모론으로 회피한다.
- 조사 능력과 정보 분석 능력이 부족하다.
- 사실상 조사를 전혀 하지 않는다.
세토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자칭 저널리스트라고 쓰는 사람이 많은데, 과거 요미우리 신문 등은 훌륭하게 인정받았으며 자칭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반박했다.[100] 이는 『요미우리 연감 별책·요미우리 인명록』(요미우리 신문사)의 1990~1995년 판에 "보도 평론 출판" 분야에 "세계 전략 연구소 대표·세토 히로유키"로 게재된 것을 가리킨다.[101]
4. 2. 창가학회·공명당 비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이의를 제기한 것(야스쿠니 신사 문제)과[102] 공명당의 지지 모체인 창가학회의 이케다 다이사쿠 명예회장 독재 체제를 비판하며,[103] 창가학회를 반천황제적인 컬트로 간주하여 창가학회·공명당의 배제를 주장했다.[104] 일본국 헌법 제20조의 개정 필요성을 지적하고,[105] 종교 법인에 대한 우대 세제를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6]2006년 말에는 "이케다 다이사쿠가 재일 조선인이다"라는 설을 자주 언급했다.[107] 2008년 7월, "아사키 아키요 암살 사건의 재규명", "창가학회에 의한 집단 스토커[108]의 실태 해명"이라는 두 가지 비판 활동을 선언했다.[109]
2008년 11월, 니시무라 슈헤이 자택 2층 베란다에 이틀 밤 연속으로 똥과 같은 물체가 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니시무라는 다음 날 아침 물체를 발견하고 세토에게 연락했고, 세토는 즉시 지바현가시와시의 니시무라 자택으로 가서 경찰에 신고하고 물체 분석을 포함한 수사를 요청했다. 세토는 물체에 인분과 같은 악취가 없고 감의 씨앗이 함유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튜브 등을 사용해 만든 정교한 가짜 똥이며 인분이나 동물의 똥이 아니라고 추정했다. 세토는 "비열한 협박", "조직적인 위협 행위"라며 분개하며 "창가학회에 의한 협박의 가능성이 강하다"고 주장하고, 물체를 검사 기관에 가져가 조사한 후 형사 고발할 것을 표명했다.[110] 또한, 세토는 사건의 실재를 보여주기 위해 블로그에 물체 사진을 게재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111]
4. 3. 기타 활동
주요 활동은 블로그와 가두 선전·집회·항의 행동, 블로그를 통한 물품 판매이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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