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대는 니시키오리 카즈키요, 우에쿠사 카츠히데, 히가시야마 노리유키로 구성된 일본의 남성 아이돌 그룹이다. 1985년 '가면무도회'로 데뷔하여,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애가 타네', 'FUNKY FLUSHIN''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했다. 1986년부터 2008년까지 매년 여름 뮤지컬 'PLAYZONE'을 공연했으며, 2020년 멤버들의 쟈니스 사무소 퇴소로 인해 사실상 활동을 중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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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대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그룹 정보
그룹명
소년대
원어명
少年隊
로마자 표기
Shōnentai
의미
소년 부대
국가
일본
장르
제이팝
활동 기간
1985년 – 2020년
레이블
관련 인물
2. 멤버
소년대는 '''니시키오리 카즈키요''', '''우에쿠사 가츠히데''', '''히가시야마 노리유키''' 3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다. 니시키오리 카즈키요는 그룹의 리더이자 최연장자이다.[11] 멤버 각 개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아래 하위 문서를 참조한다.
'''히가시야마 노리유키''': 1982년 봄, 마츠바라 토시히코와 교체되어 그룹에 합류했으며,[49] 현재 스마일업의 사장을 맡고 있다.[10]
2. 2. 이전 멤버
마츠바라 야스유키 (소속사 퇴사)
3. 역사
"소년대"라는 이름은 원래 쟈니즈 사무소의 연습생 자니즈 Jr.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13]1981년 니시키오리 카즈키요, 우에쿠사 카츠히데, 마츠바라 야스유키로 'B팀'이 결성되었고, 1982년 마츠바라 대신 히가시야마 노리유키가 합류하며 현재의 3인조가 되었다. 초기에는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의 백 댄서로 활동했으며,[23] 데뷔 전부터 '밤의 히트 스튜디오' 출연 및 하와이 음악제 수상 등으로 주목받았다.[17]
1985년12월 12일, 싱글 '가면무도회' 仮面舞踏会|카멘부토카이일본어로 데뷔,[50] "일본발, 세계행"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21] 아크로바틱 퍼포먼스로 큰 인기를 얻었다.[24] 이듬해 신인상을 휩쓸고 NHK 홍백가합전에 8년 연속 출연했으며,[17]1987년에는 브로마이드 연간 판매 1위를 기록했다.
1986년부터 시작된 뮤지컬 'PLAYZONE'은 2008년까지 23년간 이어지며 그룹의 상징적인 활동이 되었고,[3][24]1994년골든 애로상 연극상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90년대 이후 멤버들은 개인 활동에도 주력했으며, 1999년에는 첫 간판 TV 프로그램 '소년대 꿈'을 진행했다.
2000년대에도 활동을 이어갔으나, 2008년 'PLAYZONE'이 막을 내렸다. 2020년 말, 니시키오리와 우에쿠사가 쟈니즈 사무소를 퇴소하며 그룹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51][52] 히가시야마는 잔류했으나,[51]2023년 창업주 스캔들 이후 사무소(현 SMILE-UP.) 사장으로 취임하며 연예계를 은퇴,[53] 그룹의 향후 존속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2024년 10월, 우에쿠사는 방송에서 그룹이 해체된 것은 아니라고 언급했다.[57]
3. 1. 결성 이전 (1981년 이전)
소년대의 전신 그룹은 '''쟈니즈 소년대'''였다. 주로 콘도 마사히코나 히카루 잇페이의 백 댄서로 활동했다.
1981년 10월 6일 TV 도쿄에서 방영을 시작한 프로그램 『더 영 베스트 텐』에 맞춰 니시키오리 카즈키요, 우에쿠사 카츠히데, 마츠바라 타다시 3명으로 결성되었다. 결성 당시에는 '쟈니즈 소년대'라는 정식 명칭 없이 '''B팀'''으로 불렸다. 한편, 이들에 대응하는 '''A팀'''은 훗날의 시부야대였다.
1982년 4월 17일에 개봉한 히카루 잇페이 주연 영화 『가슴 설레는 방과 후』에 출연했으며, 이때 스즈키 토시오도 멤버로 참여했다. 같은 해 봄, 마츠바라 타다시가 탈퇴하고 히가시야마 노리유키가 새롭게 합류했다.
3. 2. 결성 및 초기 활동 (1981년 ~ 1985년)
"소년대"라는 이름은 원래 그룹 멤버 3명을 포함하여 당시 20~30명 정도였던 자니즈 Jr.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었다.[13]1981년10월 6일, TV 도쿄의 음악 프로그램 '더 영 베스트 텐' 시작에 맞춰, 니시키오리 카즈키요, 우에쿠사 카츠히데, 마츠바라 야스유키 3명으로 구성된 그룹 'B팀'이 결성되었다. 이 'B팀'은 후에 '쟈니즈 소년대'로 불리게 된다.
1982년 봄, 마츠바라가 드라마 '3년 B반 긴파치 선생' 출연으로 인해 그룹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탈퇴했고, 고등학교 수험을 마친 히가시야마 노리유키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현재의 3인조(니시키오리, 우에쿠사, 히가시야마)가 완성되었다.[23] 마츠바라의 탈퇴 이유에 대해, 훗날 쟈니 키타가와 성추행 문제가 불거지면서 실제로는 히가시야마와의 불화 때문이었다는 본인의 고백이 있었다. 그룹명은 '쟈니즈 소년대'에서 '쟈니즈'를 제외한 '소년대'로 최종 확정되었다.[13] 초기에는 미국 데뷔도 검토되었으나, '소년대'의 일본어 발음이 영어 '쇼 타임(Show time)'과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룹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3]
결성 초기 소년대는 주로 타하라 토시히코, 콘도 마사히코의 백 댄서로 활동하며 여러 가요 프로그램과 콘서트 무대에 섰다.[23] 특히 타하라 토시히코의 전담 백 댄서 그룹 "쟈PA니즈" 해산 이후에는 타하라의 백 댄서 역할도 맡았다.
멤버들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다. 니시키오리는 뛰어난 춤 실력으로 쟈니 키타가와로부터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으며,[14] 훗날 SMAP의 나카이 마사히로 역시 그의 춤 실력을 극찬했다.[15] 히가시야마는 마이클 잭슨의 영상을 보며 매일 연습에 매진하는 성실한 노력파였고,[22] 니시키오리와는 춤 스타일은 달랐지만 음악적 감성이 잘 맞았다고 한다.[14] 우에쿠사는 상대적으로 춤 실력이 부족했지만, 다른 멤버들을 따라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16]
1982년6월, 소년대는 정식 레코드 데뷔 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표적인 가요 프로그램이었던 후지 TV의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 단독으로 출연하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후 데뷔 전까지 약 10회 가량 해당 프로그램에 단독 아티스트로 출연하며 인지도를 쌓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하와이 음악제에 참가하여 금상과 안무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입증했다.[17]
1983년에는 멤버 전원이 출연한 TV 드라마 '불타는 마음의 방과 후'(후지 TV)가 방영되었고,[17]1984년4월 2일에는 우편 저금 홀에서 첫 단독 콘서트를 개최, 하루 5회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17] 같은 해 5월에는 첫 비디오 작품 '소년대'를 발매했으며, 수록곡 'あなたに今、Good-by|아나타니 이마, Good-by일본어'로 여러 음악 방송에 출연했다.[17] 또한, 미국 브로드웨이 극장에서 뮤지컬을 관람하고 현지 댄스 레슨을 받는 등 실력 향상에 힘썼으며,[17][23]마이클 셈벨로의 프로듀싱 하에 영어 곡 녹음을 진행하며 미국 데뷔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일본 활동에 집중하게 되면서 무산되었다.[22][18]
1984년 연말, 리더 니시키오리는 쟈니즈 사무소의 연말 파티에서 후지시마 메리 야스코에게 직접 데뷔를 요청했다.[19] 6개월 후 데뷔가 결정되었고, 멤버들은 후지시마로부터 예절 등 연예계 활동의 기본 소양에 대한 엄격한 지도를 받았다.[19]
이러한 과정을 거쳐 소년대는 1985년12월 12일, 싱글 '가면무도회' 仮面舞踏会|카멘부토카이일본어를 발표하며 정식으로 데뷔했다.[50] 데뷔 당시 캐치프레이즈는 "일본발, 세계행"이었다.
3. 3. 레코드 데뷔 및 전성기 (1985년 ~ 1990년대)
1985년 12월 12일, 그룹은 ''가면 무도회''로 레코드 데뷔를 했다.[20] 데뷔 당시 캐치프레이즈는 "일본발, 세계행"이었다.[21] ''가면 무도회'' 음반은 히가시야마, 니시키오리, 우에쿠사가 각각 중앙에 위치한 세 종류의 재킷으로 발매되어 판매량 증가에 기여했다.[22]
이듬해인 1986년에는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받았으며,[23] 같은 해 NHK 홍백가합전에 처음 출연한 이후 8년 연속 출연했다.[17] 제37회 홍백가합전에서는 가야마 유조가 백팀 주장을 맡아 소년대를 ''가면 라이더''로 잘못 소개하는 일도 있었다.[23]
데뷔 당시 세 멤버 모두 백 플립과 백 텀블링이 가능했고, 마이크를 던지고 받는 등 고난도 아크로바틱 퍼포먼스로 주목받았다.[24] 당시 일본 아이돌에게는 가창력이나 댄스 실력보다는 젊음이 주요 상품이었지만, 소년대는 노래, 춤, 아크로바틱 모두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17] 데뷔 후 뉴욕으로 건너가 안무가 마이클 피터스와 일주일간 작업했고, 세 번째 싱글 ''Diamond Eyes''의 안무는 피터스가 맡았다.[25][26]
데뷔곡 이후 ''Dekamelon Densetsu'', ''Diamond Eyes'', ''Ballad no youni Nemure'', ''Stripe Blue'', ''Kimidakeni'', ''ABC'', ''Jirettaine'', ''Maittane Konya''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주간 오리콘 차트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17] 당시 일본 버블 경제의 영향으로 미국라스베이거스나 현지 중고차 판매소 앞에서 생방송 무대를 가지는 등 이례적인 규모의 활동을 하기도 했다.[26]
1987년에는 연간 브로마이드(아이돌 사진 상품) 판매 1위를 기록했다.[24] 1988년에는 히가시야마처럼 담백하고 깔끔한 외모를 뜻하는 '간장 얼굴'(쇼유가오)[27]과 니시키오리처럼 입체적이고 진한 이목구비를 뜻하는 '소스 얼굴'(소스가오)[27]이라는 신조어가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여 그 해 현대 용어의 기본 지식 선정 유캔 신어·유행어 대상에서 대중상을 받았다.[28]
무대 위에서는 재치 있는 입담으로 관객을 즐겁게 했다.[24] 트렌드 평론가 우시쿠보 메구미는 과묵하고 왕자님 같은 히가시야마, 다소 엉뚱하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의 우에쿠사, 그리고 리더이자 츳코미(상식인 포지션) 역할을 하며 재주 많은 니시키오리(점차 그룹의 '개그 담당'으로 불림) 세 사람의 캐릭터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24][29]
그룹의 대표 활동 중 하나인 뮤지컬 ''Playzone''은 데뷔 다음 해인 1986년에 시작되어 2008년까지 23년간 매년 여름 상연되었다. 총 공연 횟수는 957회, 누적 관객 수는 138만 명 이상에 달했다.[3][24] ''Playzone''을 위해 마이클 피터스와 트래비스 페인 같은 유명 안무가들의 지도를 받으며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였다.[30] 1994년에는 이 뮤지컬로 제31회 골든 애로상 연극상 그랑프리를 받았다. 1995년부터는 니시키오리가 연출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32] 2009년부터는 후배 그룹인 Kis-My-Ft2 등이 주연을 이어받았다.[23][31]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멤버들은 개인 활동도 활발히 했다. 히가시야마는 시대극부터 코미디까지 폭넓은 연기력을 보여주었고,[33] 니시키오리는 ''Playzone'' 경험을 살려 배우 및 무대 연출가로 활동했다.[34] 우에쿠사는 인기 드라마 ''세상은 무서워''[35] 시리즈와 ''하구레 형사 쥰조하''[36]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23] 이 시기 주요 활동으로는 영화 ''19 Nineteen''(1987) 출연, 라디오 프로그램 '점핑 자니즈 쇼넨타이', '라이브 온! 쇼넨타이' 등 진행, 그리고 1999년 첫 간판 TV 프로그램인 '쇼넨타임' 시작 등이 있다.
2005년에는 선배 가수인 콘도 마사히코의 데뷔 25주년 기념 디너 쇼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2007년 여름, 22년째를 맞이한 뮤지컬 PLAYZONE은 통산 상연 횟수 900회를 기록했다. 그러나 같은 해 공연인 「PLAYZONE2007 Change2Chance」는 공연자 중 한 명이었던 아카사카 아키라가 각성제 소지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DVD 발매가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2008년, 23년간 소년대가 주연을 맡아온 뮤지컬 PLAYZONE은 막을 내렸다. 다음 해부터는 소속사인 쟈니즈의 후배 아이돌 그룹들이 주연을 맡게 되었다.
4. PLAYZONE
1986년, 소년대가 주연을 맡은 뮤지컬 PLAYZONE이 처음으로 막을 올렸다.[80] 이는 이후 23년간 이어지는 소년대의 대표적인 활동이 되었다. 1994년에는 이 뮤지컬 시리즈로 제31회 골든 애로상 연극상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다.
2007년 여름 공연인 'PLAYZONE 2007 Change2Chance'는 통산 상연 900회를 맞이했으나,[81] 공연자 중 한 명이었던 아카사카 아키라가 불미스러운 사건(각성제 소지)으로 체포되면서 DVD 발매가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2008년 'PLAYZONE 2008 Change 1986-2008〜SHOW TIME Hit Series〜'를 마지막으로 23년간 계속된 소년대 주연의 PLAYZONE은 막을 내렸고, 다음 해부터는 쟈니즈의 후배들이 주연을 맡게 되었다.
PLAYZONE 2008 Change 1986-2008〜SHOW TIME Hit Series〜
아오야마 극장, 우메다 예술 극장 메인 홀
=== 관련 영상물 발매 ===
PLAYZONE 공연은 매년 비디오로 발매되었으며, 2001년 작품부터는 DVD가 동시에 발매되었다. 1997년11월 22일에는 이전 11개 작품(1986년~1996년)이 쟈니스 엔터테인먼트에서 VHS로 재발매되었는데, 이때 'RHYTHM'(1996)을 제외한 작품에는 멤버들의 코멘트 영상이 추가되었고 엔딩 크레딧 영상이 본편 다이제스트로 대체되었다.
2020년12월 12일에는 '소년대 35th Anniversary PLAYZONE BOX 1986-2008'이 발매되어, 2000년까지의 작품들이 처음으로 DVD화되었고, 발매가 중지되었던 'PLAYZONE 2007 Change 2 Chance'를 포함한 전 작품이 수록되었다. 다만, 각 작품의 개별 DVD 발매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년대'라는 이름은 원래 그룹 멤버 3명을 포함하여 당시 20~30명 정도였던 자니즈 주니어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1981년10월 6일TV 도쿄에서 시작된 프로그램 '더 영 베스트 텐'에 맞춰 니시키오리 카즈키요, 우에쿠사 카츠히데, 마츠바라 야스유키 3명으로 'B팀'이 결성되었고, 이 팀이 나중에 '쟈니즈 소년대'가 되었다. 1982년에 마츠바라 대신 히가시야마 노리유키가 합류하여 현재의 멤버 구성이 완성되었다.
멤버 세 명 모두 백턴과 백텀블링이 가능하다. 특히 히가시야마와 니시키오리는 데뷔곡 '가면 무도회' 마지막 부분에서 왼손에 마이크를 든 채로 백텀블링을 선보이기도 했다.[61]
음악 제작 과정에서는 멤버 3명이 곡 선정부터 편곡까지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곡을 제공하는 작가진과 만나 의견을 조율하고 발표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62]
그룹이 처음으로 출연한 광고는 메이지 제과의 초콜릿 광고였다. 이때 광고한 상품의 포장지 색깔(하이 밀크 초콜릿-빨강, 블랙 초콜릿-검정, 밀크 초콜릿 딜럭스-노랑)에 따라 각 멤버의 이미지 컬러가 정해졌다. 니시키오리는 빨강, 히가시야마는 검정, 우에쿠사는 노랑이다.
일본 데뷔 당시 미국 데뷔 계획이 발표되었고, 실제로 미국 데뷔를 위한 레코딩까지 마쳤으나[63], 이후 별다른 진전 없이 무산되었다. 현재는 쟈니스 사무소(후의 STARTO ENTERTAINMENT) 등이 제작에 관여하지 않은 서적 등에서도 이 사실이 잘 언급되지 않는다.
1985년8월 11일, 오사카 신가부키자에서 열린 콘도 마사히코 주연 연극 '모리의 이시마츠'를 응원하기 위해, 소년대 멤버들은 쟈니 키타가와 대표와 함께 다음 날인 8월 12일일본항공 123편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쟈니 키타가와가 첫날 기자회견 참석 요청을 받으면서 일정을 앞당겨 오사카로 이동했고, 소년대는 해당 항공편 예약을 취소하고 도쿄에 남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일본항공 123편 추락 사고를 피할 수 있었다.[64]
2008년 뮤지컬 'PLAYZONE' 공연을 마지막으로 그룹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후 2020년 12월 31일 니시키오리와 우에쿠사가 쟈니스 사무소를 퇴소할 때까지, 팬클럽 데뷔 30주년 기념 회보, 35주년 베스트 앨범 발매 및 한정판 인터뷰, 팬클럽 마지막 회보 발행 외에는 그룹 활동이 거의 없었다. 이에 대해 히가시야마는 "12년이나 활동하지 않은 것은 팬 여러분께 정말 죄송하게 생각한다", "세 멤버 각자의 의견이 있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이 달라졌다"고 언급했다.[65]
쟈니스 사무소 측이 '소년대'라는 그룹명을 남기겠다고 발표한 것에 대해, 니시키오리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오해가 없도록 사실을 말하고 싶다. 한때 쟈니 씨가 '쟈니스 Jr.'라는 명칭을 쓰지 않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연습생들을 부르는 호칭이 '소년대'였다. '쟈니스 소년대'는 특정 그룹이 아니라 연습생 아이들 전체를 의미했다. 그래서 우리 의지, 특히 내 의지로는 '그 이름은 이제 그만둬 달라'고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했다"고 설명했다.[66]
쟈니 키타가와는 소년대를 "최고의 걸작 그룹"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우에쿠사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우리가 최고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데뷔시킨 그룹이라는 점에서는 우리가 맞다고 생각한다. 노래, 춤뿐만 아니라 영어 회화 레슨, 보컬 레슨, 국내외 유명 강사에게 배우는 춤 레슨 등 엔터테인먼트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게 해주셨다. 미국 쇼도 많이 보고 미국 문화를 직접 느낄 기회도 많았다. 합숙소 시절에는 미국에 사는 쟈니 키타가와의 형이 현지 영상을 많이 보내줘서, 마이클 잭슨이나 잭슨 5, 오즈먼드 브라더스 등의 춤 동작을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때부터 따라 해보기도 했다. 예를 들어 포 리브스의 '불독' 간주 부분에 그런 동작을 넣어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장 많은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것을 보여주셨기에, 거기에 다가가려고 계속 노력해 온 결과가 지금의 우리다"라고 말했다.[62] 또한 히가시야마는 역대 쟈니스 소속 연예인 중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 TOP3로 "1위 니시키오리, 2위 본인(히가시야마), 3위 우에쿠사"를 꼽은 적이 있다.[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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