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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벌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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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벌도리는 《삼국유사》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와 돌산고허촌의 촌장이 되었으며, 박혁거세를 신라의 왕으로 옹립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나정에서 혁거세를 발견하여 양육한 소벌공으로 기록하고 있다. 진주 소씨 족보에서는 진한의 왕족으로, 신라 개국공신이며 문열왕으로 추존되었다고 전한다. 그의 후손들은 최씨와 소씨로 나뉘어 각각 최치원, 소경 등을 중시조로 하여 계보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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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벌도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직책사로국의 돌산고허촌장
군주혁거세 거서간
군주 칭호거서간
출생일미상(기원전 2세기? ~ 기원전 1세기?)
출생지미상
사망일미상
사망지미상
국적사로국
성별남성

2. 생애

소벌도리는 삼국유사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진주 소씨 족보의 기록에 따라 다른 생애를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하늘에서 내려와 돌산고허촌의 촌장이 되었으며,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여 신라 건국에 기여했다.[2] 삼국사기는 소벌공이 박혁거세를 양육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주 소씨 족보에는 소벌도리가 진한의 왕족으로, 사후 신라 개국공신에 녹훈되고 태종무열왕에 의해 왕으로 추존되어 문열왕으로 시호가 추서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1.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의 기록

일연의 《삼국유사》 기록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와 돌산고허촌의 촌장이 되었다고 한다.[2] 기원전 69년, 6부의 촌장들이 모여 덕(德)이 있는 자를 찾아 왕으로 삼고 수도를 정해 나라를 열 것을 결의하였는데, 나정(蘿井)에서 이상한 기운이 비치는 것을 보고 찾아가서 붉은 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박혁거세이며,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는 나정에서 알과 혁거세를 처음 발견하여 양육한 것이 소벌공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허촌은 신라 유리왕 때 사량부(沙梁部)로 개칭되고 최씨(崔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정씨(鄭氏)의 조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진주 소씨 족보는 소벌도리의 생애에 대해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진한의 왕족으로 자(字)는 당운(當雲)이다. 진한의 초대 군주 소백손의 4대손이며 돌산고허촌의 촌장을 지냈다고 한다. 사후 신라의 개국공신에 녹훈되었고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이 되었다. 516년(법흥왕 3년) 충선(忠宣)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뒷날 태종무열왕에 의해 왕으로 추존되어 문열왕(文烈王)이라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최씨와 소씨는 그를 시조로 하고, 각각 최치원, 최언위, 최준옹, 알천(소경) 등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대 수를 기세(起世)하고 있다.

장남 대벌리(大伐利)의 후손들은 최씨 성을 사용하였고, 다른 후손들은 원래의 성인 소씨(蘇) 성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2. 2. 진주 소씨 족보의 기록

진주 소씨 족보는 소벌도리의 생애에 대해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진한의 왕족으로 자(字)는 당운(當雲)이다. 진한의 초대 군주 소백손의 4대손이며 돌산고허촌의 촌장을 지냈다고 한다. 사후 신라의 개국공신에 녹훈되었고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이 되었다. 516년(법흥왕 3년) 충선(忠宣)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뒷날 태종무열왕에 의해 왕으로 추존되어 문열왕(文烈王)이라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최씨와 소씨는 그를 시조로 하고, 각각 최치원, 최언위, 최준옹, 알천(소경) 등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대 수를 기세(起世)하고 있다.

장남 대벌리(大伐利)의 후손들은 최씨 성을 사용하였고 다른 후손들은 원래의 성인 소씨(蘇) 성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2. 3. 최씨 및 소씨와의 관계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와 돌산고허촌의 촌장이 되었다고 한다.[2] 기원전 69년 6부의 촌장들이 모여 덕(德)이 있는 자를 찾아 왕으로 삼고 수도를 정해 나라를 열 것을 결의하였는데, 나정(蘿井)에서 이상한 기운이 비치는 것을 보고 찾아가서 붉은 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박혁거세이며,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는 나정에서 알과 혁거세를 처음 발견하여 양육한 것이 소벌공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허촌은 신라 유리왕 때 사량부(沙梁部)로 개칭되고 최씨(崔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정씨(鄭氏)의 조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진주 소씨 족보는 소벌도리의 생애에 대해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진한의 왕족으로 자(字)는 당운(當雲)이다. 진한의 초대 군주 소백손의 4대손이며 돌산고허촌의 촌장을 지냈다고 한다. 516년(법흥왕 3년) 충선(忠宣)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뒷날 태종무열왕에 의해 왕으로 추존되어 문열왕(文烈王)이라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최씨와 소씨는 그를 시조로 하고, 각각 최치원, 최언위, 최준옹, 알천(소경) 등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대 수를 기세(起世)하고 있다.

장남 대벌리(大伐利)의 후손들은 최씨 성을 사용하였고 다른 후손들은 원래의 성인 소씨(蘇) 성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3. 가계

소벌도리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1]

관계이름
부인미상
아들최대벌리 (최씨로 개명)
손자최소벌리
아들소해리
손자소부류
손자소정동
아들소계양


4. 기타

진주 소씨 족보에 따르면 소벌도리의 25세손 최치원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었고, 24세손 소경은 진주 소씨의 선조가 되었다.[4] 최준옹도 소벌도리의 25세손이다.[4]

4. 1. 최씨와 소씨의 시조

진주 소씨 족보의 기록에 따르면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가 되었고[2][3], 소경은 진주 소씨의 선조가 되었다.[4] 신라 말, 고려 초에 살았던 최준옹도 소벌도리의 25세손이다.[4]

4. 2. 소벌도리에 대한 상반된 기록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와 돌산고허촌의 촌장이 되었다고 한다.[2] 기원전 69년 6부 촌장들이 모여 덕(德)이 있는 자를 찾아 왕으로 삼고 수도를 정해 나라를 열 것을 결의하였는데, 나정(蘿井)에서 이상한 기운이 비치는 것을 보고 찾아가서 붉은 알을 얻었다고 한다. 그 알에서 나온 아이가 박혁거세이며, 기원전 57년에 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하였다. 삼국사기는 나정에서 알과 혁거세를 처음 발견하여 양육한 것이 소벌공이라 기록하고 있다. 고허촌은 신라 유리왕 때 사량부(沙梁部)로 개칭되고 최씨(崔氏)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정씨(鄭氏)의 조상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편 진주 소씨 족보는 소벌도리의 생애에 대해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족보에 따르면 소벌도리는 진한의 왕족으로 자(字)는 당운(當雲)이다. 진한의 초대 군주 소백손의 4대손이며 돌산고허촌의 촌장을 지냈다고 한다. 사후 신라의 개국공신에 녹훈되었고 사량부 대인(沙梁部大人)이 되었다. 516년(법흥왕 3년) 충선(忠宣)의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뒷날 태종무열왕에 의해 왕으로 추존되어 문열왕(文烈王)이라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이후 최씨와 소씨는 그를 시조로 하고, 각각 최치원, 최언위, 최준옹, 알천(소경) 등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세대 수를 기세(起世)하고 있다.

장남 대벌리(大伐利)의 후손들은 최씨 성을 사용하였고, 다른 후손들은 원래의 성인 소씨(蘇) 성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소벌도리(蘇伐都利)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정보시스템 '소벌도리' http://people.aks.ac[...]
[2] 뉴스 덕천리 유적과 돌산 고허촌과 소벌도리 https://news.naver.c[...] 네이버 뉴스
[3] 뉴스 [대한민국통맥풍수] <57·끝>경주 최부잣집과 자기 풍수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4] 웹인용 족보나라 - 대한민국 대표 족보 사이트 종친회 https://web.archive.[...] 200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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