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소정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소정덕은 남조 양나라의 인물로, 임천정혜왕 소굉의 아들이자 양 무제의 조카이다. 무제의 양자로 입적되어 황태자가 될 뻔했으나 소통의 출생으로 서풍현후로 봉해졌다. 이후 북위에 투항했다가 양나라로 돌아오는 등 불안정한 행보를 보였으며, 후경의 난 당시 후경과 내통하여 황제로 즉위했으나 곧 폐위되어 살해당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549년 사망 - 고징
    동위의 권신이자 북제의 추존 황제인 고징은 고환의 장남으로 아버지 사후 승상이 되어 권력을 장악했으나, 암살당한 후 아들 고양에 의해 북제 건국 후 문양황제로 추존되었다.
  • 549년 사망 - 양 무제
    양 무제 소연은 남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아 양나라를 건국하고 남조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말년에 불교에 심취하여 후경의 난을 초래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양 (남조)의 황제 - 소기
    소기는 양 무제의 아들로, 익주자사 재임 중 쓰촨성 지역을 발전시키고 후경의 난 이후 황제를 칭했으나, 이복형 양 원제 소역과의 갈등과 서위의 침공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 양 (남조)의 황제 - 양 원제
    양 원제는 남조 양나라의 황족으로, 형주 자사를 거쳐 후경의 난 이후 황위에 올랐으나, 서위의 침공으로 피살되었으며, 그의 치세는 외교적 실책과 미신 의존으로 국가를 쇠퇴하게 했다고 평가받는다.
  • 중국의 참주 - 한림아
    한림아는 유복통에 의해 소명왕으로 추대되어 황제로 옹립되었으나, 주원장에게 살해된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일원이다.
  • 중국의 참주 - 진우량
    진우량은 원나라 말기 홍건적의 난에 가담하여 서수휘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대한을 건국했으나 주원장과의 파양호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한 인물이다.
소정덕
기본 정보
칭호임하왕, 서풍후
이름소정덕
전체 이름소씨 정덕
재위 기간548년–549년 (자칭)
계승 순서양나라의 찬탈자
섭정양 무제
군주군주
사망일549년 8월 8일
연호정평 (正平; 548–549)
가문난릉 소씨
생애
아버지소굉
어머니알려지지 않음
통치
연호정평 (正平) : 548년 - 549년

2. 생애

임천정혜왕(臨川靖恵王) 소굉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숙부 무제 소연의 양자가 되어 초기 후계자로 여겨졌다.[1][2] 그러나 501년 무제의 친아들 소통이 태어나고 502년 황태자로 책봉되면서, 소정덕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 서풍후(西豊侯)에 봉해졌으며 이에 깊은 불만을 품었다.[1][2]

522년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위로 망명했다가[1][2] 523년 다시 양나라로 돌아와 무제의 용서를 받고 작위를 회복했다.[1][2] 이후에도 문제를 일으켜 525년 북벌 중 군사를 버리고 도주하여 관작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었다.[1][2] 532년에는 임하왕(臨賀王)으로 봉해졌다.[1][2]

548년 8월,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후경의 난), 황제 자리에 대한 야심으로 후경과 내통하여 수도 건강 함락을 도왔다.[1][2] 같은 해 11월 후경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연호를 정평(正平)으로 고쳤다.[1][2] 그러나 549년 3월 건강 내성이 함락되자 후경에게 폐위되어 시중(侍中), 대사마(大司馬)로 강등되었다.[1][2] 이후 후경을 제거하려다 밀서가 발각되어 549년 6월 교살당하는 최후를 맞았다.[1][2]

2. 1. 초기 생애와 양자 입적

임천정혜왕(臨川靖恵王) 소굉(蕭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무제 소연(蕭衍)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인 소정덕을 양자로 삼아 길렀고 후계자로 여겨졌다. 502년 무제가 양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되자, 소정덕은 자신이 황태자가 되기를 원했고 무제 역시 처음에는 그를 황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501년 9월에 무제의 친아들인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이 태어났고, 502년 11월 소통이 정식으로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소정덕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다. 그는 다시 원래 아버지인 소굉에게 돌려보내졌고, 대신 서풍현후(西豊県侯)에 봉해졌다. 소정덕은 이에 깊은 원망을 품고 만족하지 못했으며, 이때부터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

소정덕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거칠고 험악했으며, 예의를 가볍게 여기고 편협하며 흉포한 모습을 보였다. 수도인 건강에서 살인과 강도를 저지르기도 했다. 나중에 임하왕(臨賀王)에 봉해진 후에도 그의 난폭한 행동은 그치지 않았는데, 자신의 여동생인 장락공주와 사통한 뒤 불태워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의 장남 소견리 역시 아버지처럼 난폭하여,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시장에서 다섯 마리의 호랑이를 만나는 것이 임하왕 부자를 만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2. 2. 황태자 책봉 시도와 좌절

임천정혜왕 소굉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당시 자녀가 없던 숙부 무제 소연에게 입양되어 양아들이 되었다.[1][2] 무제는 처음에 소정덕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다.[2] 그러나 소정덕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거칠고 험악했으며, 예의를 모르고 편협하며 흉폭한 성격이었다.[1][2]

502년, 무제가 양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소정덕은 자신이 황태자가 될 것을 기대했다. 무제 역시 처음에는 소정덕을 황태자로 삼으려 했었다.[1] 하지만 이미 501년 9월에 무제의 친아들인 소명태자 소통이 태어났고,[1][2] 502년 11월에는 소통이 정식으로 황태자에 책봉되면서 소정덕은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게 되었다.[2]

이에 무제는 소정덕을 다시 본래 아버지인 소굉에게 돌려보냈고, 대신 서풍후(西豊侯)로 봉했다.[1][2] 이 결정에 소정덕은 크게 실망하고 원한을 품었으며, 이후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다.[1][2]

2. 3. 북위 투항과 귀환

522년 음력 12월(보통 3년)에 황문시랑(黃門侍郞)과 경거장군(輕車將軍)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위로 도망가서, 자신이 폐위된 황태자이며 화를 피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에 북위의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소보인(蕭寶寅)은 표문을 올려 "어찌 백부가 천자이고 아버지가 양주자사(揚州刺史)인데 가까운 친척을 버리고 멀리 다른 나라로 도망쳤겠는가? 그를 죽이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소정덕은 북위에서 매우 박한 대우를 받았다.

결국 소정덕은 한 아이를 죽여 자신의 아들이라 속이고, 멀리 장사를 지낸다는 핑계를 대어 북위의 의심을 피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523년(보통 4년)에 다시 북위에서 도망쳐 양나라로 돌아왔다. 무제는 소정덕을 꾸짖으면서도 그의 죄를 용서하고 원래의 봉작인 서풍후(西豊侯) 작위를 회복시켜 주었으며, 정로장군(征虜将軍)의 호를 내렸다.

2. 4. 방탕한 생활과 유배, 복권

소정덕은 북위에서 돌아온 뒤에도 반성하는 기색 없이, 망명객들을 모아 밤중에 길가에서 약탈을 일삼는 등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525년에는 경거장군(輕車將軍)의 자격으로 예장왕 소종을 따라 북벌에 참여했으나, 전투 중에 군사를 버리고 도망치는 무책임한 행동을 반복했다. 무제는 소정덕의 거듭되는 죄를 엄중히 물어 그의 모든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고 임해(臨海)로 유배를 보냈다. 하지만 소정덕이 유배지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무제는 다시 사면령을 내려 그를 용서해주었다.

532년에 무제는 소정덕의 작위를 높여 임하왕(臨賀王)으로 봉했다. 그러나 임하왕이 된 후에도 그의 난행은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인 장락공주와 사통하다 그녀를 불태워 죽이는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으며, 아들 소견리와 함께 온갖 악행을 일삼아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시장에서 다섯 마리의 호랑이를 만나는 것이 임하왕 부자를 만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2. 5. 후경의 난과 황제 즉위

532년에 임하왕(臨賀王)으로 봉해진 소정덕은 주이(朱异)와 친하게 지냈다. 무제가 소명태자의 여러 아들을 왕으로 책봉하자, 주이는 소정덕에게 그가 원래 황태자가 되었어야 하지만 소명태자의 탄생으로 그 자리를 잃었다고 말하며 그의 불만을 자극했다.

548년 8월, 과거 동위의 무장이었으나 양나라에 투항했던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건강의 방어 책임은 소정덕에게 맡겨졌으나, 황제 자리에 대한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후경의 반란 계획에 동조하기로 했다. 후경이 장강 북쪽 기슭의 횡강(橫江)에 이르자, 소정덕은 갈대 운반을 핑계로 배를 동원하여 후경의 군대가 강 남쪽의 채석(采石)으로 건너도록 도왔다. 건강의 조정은 소정덕의 배신을 알지 못한 채 그에게 주작항(朱雀航) 방어를 명령했지만, 후경의 군대가 도착하자 소정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여 반란군을 선양문(宣陽門)으로 안내했다.

건강의 외성이 함락된 후, 같은 해 11월 후경은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했다. 소정덕은 외성에 있는 의현당(儀賢堂)에서 즉위하여 연호를 정평(正平)으로 고쳤다. 그는 아들인 임하세자 소견리(蕭見理)를 황태자로 삼고, 자신의 딸을 후경에게 시집보냈으며, 후경을 승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549년 3월, 건강의 내성마저 함락되자 후경은 소정덕이 더 이상 쓸모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시중·대사마로 강등시켰다. 연호 또한 다시 태청(太淸)으로 되돌려졌다.

2. 6. 배신과 죽음

548년 10월, 후경이 반란을 일으켜 양나라의 수도 건강으로 진격했다. 당시 건강 수비를 맡고 있던 소정덕은 황제 자리에 대한 야심 때문에 이미 후경과 내통하고 있었다. 후경이 장강 북안에 이르자 소정덕은 갈대를 운반한다는 명목으로 배를 동원하여 후경의 군대가 남안으로 건너는 것을 도왔다. 건강 조정은 소정덕의 배신을 알지 못한 채 그에게 주작항 수비를 맡겼으나, 후경이 도착하자 소정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여 반란군을 선양문으로 안내했다.

같은 해 11월, 건강의 외성이 함락되자 후경은 약속대로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했고, 소정덕은 의현당에서 즉위했다. 연호를 정평(正平)으로 고치고, 아들 소견리(蕭見理)를 황태자로, 후경을 승상으로 삼았으며 자신의 딸을 후경에게 시집보냈다.

549년 3월, 건강의 내성마저 함락되었다. 소정덕은 사전에 후경과 함께 무제와 황태자 소강을 제거하기로 약속했으나, 내성이 함락된 후 칼을 들고 궁문으로 들어가려던 소정덕을 후경의 군사들이 막아섰다. 후경은 더 이상 소정덕을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연호도 다시 태청으로 되돌렸으며, 소정덕의 지위는 시중, 대사마로 격하되었다. 이후 소정덕은 무제를 만났지만, 눈물을 흘리는 그에게 무제는 "울어봐야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냉담하게 대했다.

자신의 처지에 격분하고 후경에게 협력한 것을 후회한 소정덕은 파양왕(鄱陽王) 소범(蕭範)에게 몰래 편지를 보내 군사를 이끌고 와 후경을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 밀서는 549년 6월 후경에게 발각되었고, 후경은 즉시 소정덕을 영복성에서 교살하였다.

3. 연호

소정덕은 '''정평'''(正平|zhèng píngzho)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그 기간은 548년부터 549년까지이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설명
아버지소굉임천 경회왕(臨川靖恵王). 양 무제의 동생.[4][5]
양아버지소연(蕭衍)양의 초대 황제. 초기에 아들이 없어 조카인 소정덕을 양자로 삼았으나, 501년 친아들 소통이 태어나자 502년 소정덕을 다시 동생 소굉에게 돌려보냈다.
후궁장락공주소정덕의 여동생. 원래 남편은 사희(謝禧)였으나 소정덕과 사통하였다. 소정덕이 불태워 죽였다고 위장한 후 유부인(柳夫人)으로 이름을 바꾸고 함께 살며 아들 둘을 낳았다.[6]
아들소견리(蕭見理)548년 소정덕이 황제를 참칭하며 황태자로 책봉했으나, 같은 해 전투 중 사망했다.
아들미상장락공주(유부인) 소생 아들 2명.
미상후경의 아내가 되었다.


5. 평가

소정덕은 본래 양 무제의 양자로 입적되어 황태자가 될 뻔했으나, 무제의 친아들 소통이 태어나면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나자 이에 깊은 원한을 품었다. 젊어서부터 성품이 거칠고 포악했으며, 황태자 자리를 되찾으려는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불만을 쌓아갔다. 그는 북위로 망명하여 스스로 폐위된 황태자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나,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자 다시 양나라로 돌아왔다. 돌아온 후에도 반성하는 기미 없이 망명자들을 모아 약탈을 일삼고, 북벌에 참여했다가 군사를 버리고 도망치는 등 문제 행동을 이어갔다.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과 사통하다 불태워 죽이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질러 당시 사람들로부터 "시장에서 다섯 마리의 호랑이를 만나는 것이 임하왕 부자를 만나는 것보다 낫다"는 악평을 들을 정도였다.

결국 소정덕의 끝없는 권력욕은 후경의 난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최악의 형태로 드러났다. 후경은 황제 자리에 대한 소정덕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포섭했다. 수도 건강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소정덕은 후경과 내통하여 반란군이 손쉽게 장강을 건너 건강으로 진격하도록 도왔고, 성문을 열어주어 수도 함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후경은 그 대가로 소정덕을 황제로 추대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건강 내성이 함락된 후, 후경은 더 이상 소정덕을 이용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그를 폐위시키고 시중, 대사마로 격하시켰다. 이에 격분한 소정덕은 후경을 제거하려 파양왕 소범에게 밀서를 보냈으나 사전에 발각되었고, 결국 후경에게 교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소정덕은 개인적인 야심과 권력욕 때문에 국가를 배신하고 외세를 끌어들여 양나라의 혼란을 자초했으며, 수많은 백성을 고통에 빠뜨린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행동은 결국 스스로 파멸을 맞이했다.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2] 서적 Nan Shi
[3] 서적 Zizhi Tongjian
[4] 서적 Liang Shu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Nan Shi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