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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5·4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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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악산 5·4 전투는 1949년 5월 4일, 6.25 전쟁 발발 전에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군이 점령한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개성 시내를 감제할 수 있는 송악산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점령 지시가 있었고, 1949년 5월 3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에 국군이 패배한 후, 국군은 다음 날 특공대를 조직하여 자폭 공격을 감행, 송악산 고지를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육탄 10용사'의 희생이 있었으나, 이후 생존한 육탄 10용사들이 북한 방송에 출연했다는 증언과 함께 전투의 진실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2. 전투 이전 상황

1948년부터 38선 전역에서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이는 남북이 정식으로 국가를 수립한 1948년 후반부터 더욱 격화되었다. 개성도 이러한 충돌이 격화된 곳들 중 한 곳이었다.

개성시에 위치한 송악산은 38선 이북에 있었지만, 개성 시내는 38선 이남에 위치해 있었다. 즉, 북한군은 송악산 고지에 앉아서 개성 시내를 마음껏 감제할 수 있었고, 한국군 입장에서 송악산은 눈엣가시였다. 때문에 1948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송악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했고, 한국군은 38선을 대놓고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송악산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송악산으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진지를 구축했다.

1949년 5월 3일, 조선인민군은 여러 진지를 기습하였고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 제11연대는 즉시 반격했으나 패배했다. 고지에 조선인민군이 방어 시설로 구축한 토치카를 제압하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 1. 송악산의 전략적 중요성

개성시에 위치한 송악산은 38선 이북에 위치했지만, 개성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때문에 1948년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송악산을 점령하라고 지시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송악산의 군사적 중요성 때문에 송악산으로 올라가는 길목마다 진지를 구축했다.

2. 2. 1949년 5월 3일 전투

6.25 전쟁 발발 이전인 1948년부터 38선 전역에서 남북 간의 무력 충돌이 잦았으며, 1948년 후반부터는 더욱 격화되었다. 개성 역시 이러한 충돌이 빈번한 지역 중 하나였다.

개성시에 위치한 송악산은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북한군이 개성 시내를 감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승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송악산 점령을 지시할 정도로 송악산은 중요했고, 한국군은 38선을 넘어 송악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진지를 구축했다.

1949년 5월 3일,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의 진지를 기습 공격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즉각 반격했으나, 조선인민군이 고지에 구축한 토치카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고 패배했다.

3. 전투 전개

1949년 5월 4일, 대한민국 국군은 송악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반격을 시작했다.

5월 4일 낮 12시 박창근 보병하사가 먼저 수류탄을 들고 토치카에 접근하여 토치카 하나를 파괴했다.

한국 육군은 토치카를 파괴하려는 특공대를 조직했고 81mm 박격포 포탄과 수류탄을 연결하여 급조한 폭탄을 각자 들고 최대한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접근하여 토치카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즉, 자폭이었다. 화력 엄호 없이 보병들만 폭탄을 들고 돌진하여 토치카를 파괴하라는 건 사실상 자폭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사단 제11연대 하사관교육대 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가 제일 먼저 자원했다. 뒤이어 자원한 특별공격대 8명까지 합해 총 9명은 이 날 오후 14시 토치카로 접근하여 조선인민군 육군의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토치카에 돌격하여 자폭했다. 당시 한국 육군의 관측 기록으로는 4개의 폭연만이 발생하였으므로 토치카 4개만 파괴됐으리라 추정되지만, 국가보훈부 등의 소개를 보면 토치카 10개 파괴에 4개의 고지탈환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어쨌든 그들의 자폭 공격으로 조선인민군 육군 토치카 상당수가 무력화 됐기 때문에 한국 육군은 즉시 반격하여 송악산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육탄 10용사'의 희생이 있었다.

3. 1. 육탄 10용사의 희생

5월 4일 낮 12시 박창근 보병하사가 먼저 수류탄을 들고 토치카에 접근하여 토치카 하나를 파괴했다.

한국 육군은 토치카를 파괴하려는 특공대를 조직했고 81mm 박격포 포탄과 수류탄을 연결하여 급조한 폭탄을 각자 들고 최대한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접근하여 토치카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즉, 자폭이었다. 화력 엄호 없이 보병들만 폭탄을 들고 돌진하여 토치카를 파괴하라는 건 사실상 자폭 명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사단 제11연대 하사관교육대 분대장 서부덕 이등상사가 제일 먼저 자원했다. 뒤이어 자원한 특별공격대 8명까지 합해 총 9명은 이 날 오후 14시 토치카로 접근하여 조선인민군 육군의 빗발치는 포화를 뚫고 토치카에 돌격하여 자폭했다. 당시 한국 육군의 관측 기록으로는 4개의 폭연만이 발생하였으므로 토치카 4개만 파괴됐으리라 추정되지만, 국가보훈부 등의 소개를 보면 토치카 10개 파괴에 4개의 고지탈환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어쨌든 그들의 자폭 공격으로 조선인민군 육군 토치카 상당수가 무력화 됐기 때문에 한국 육군은 즉시 반격하여 송악산 고지를 탈환할 수 있었다.

3. 2. 전투 결과

대한민국 국군은 5월 4일 오후 2시, 9명의 특공대가 조선인민군 육군의 토치카에 자폭 공격을 감행하여 다수의 토치카를 파괴한 후 즉시 반격하여 송악산 고지를 탈환했다. 당시 한국 육군의 관측 기록으로는 4개의 폭연만이 확인되었으나, 국가보훈처 등에서는 토치카 10개 파괴와 4개의 고지 탈환으로 명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서부덕 이등상사를 비롯한 특공대원들의 희생이 있었다.

4. 전투 이후

육탄 10용사는 1950년 12월 30일에 을지무공훈장을 추서받았고 서부덕 이등상사는 중위로, 나머지 9명은 일등상사로 특진했다. 전후에도 국군에서 육해공군 안 가리고 정훈·정신 교육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존재가 되었다. 이 군인들이 소속된 제11연대의 부대명은 아예 '육탄부대'가 되었다.

이 군인들을 다루는 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가 제작되기도 했다고 알려졌지만...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제목에서 보듯 1950년 낙동강전선이 배경이며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화이다. 육탄 10용사를 기리는 군가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매년 이 군인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도 열리며, 이 군인들의 출신지에는 충혼탑이 세워지기도 했다. 지금도 1사단 예하 부대 상당수는 부대 입구에 육탄 10용사 관련 문구를 써 넣는다. 병점역동탄신도시 일대를 잇는 도로 중 하나는 이름부터 '10용사로'다. 물론 이것은 도로가 지나가는 반송동에 있는 육탄 10용사기념공원에서 따온 것인데, 용사 중 한 명인 김종해가 동탄면 출신이기도 하다. 정작 이들이 자폭하여 공격한 송악산 일대는 휴전 후 북한령으로 넘어가면서 현재는 미수복 지역이다.

매년 5월 4일마다 파주 통일 공원에서 육탄 10용사 추도식이 열린다.

4. 1. 육탄 10용사에 대한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육탄 10용사'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고,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추모 사업을 진행했다. '육탄 10용사'는 국군의 정훈 교육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이들이 소속된 제11연대는 '육탄부대'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매년 5월 4일에는 파주 통일 공원에서 '육탄 10용사' 추도식이 열리고 있다. 송악산 전투에서 81mm 박격포탄을 안고 적 토치카로 뛰어들어 전사한 10명의 국군 중 하나인 이희복의 동상이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한얼공원에 세워졌다. 또한 2001년부터 육탄 10용사 상이 제정되어 시상되고 있다.

4. 2. 기념 사업

2001년부터 '육탄 10용사 상'이 제정되어 시상되고 있다. 송악산 전투에서 전사한 10명의 국군 중 한 명인 이희복의 동상이 경기도 군포시 금정동 한얼공원에 세워졌다.

5. 허위 전공 논란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이른바 '육탄 10용사' 중 몇몇이 북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며, 이는 조작된 무용담이라고 전쟁사 기술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1]

김익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격전 중이던 일선 부대로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해 공병소대장 박 소위에게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 도중 조선인민군과 불의에 조우하여 부하들을 수습 지휘하지 못하고 혼자 탈출하였고,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짊어진 채 모조리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정보주임 장교는 계통을 따라 사단 G-2에 보고하였고,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대노하여 당장 박 소위를 총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제11연대장 최경록은 박 소위를 구하기 위해 10명의 대원들이 자폭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당시 연대장이었던 최경록 중령과 공병소대장인 박 소위는 일본 학병 동기로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최경록은 박 소위를 총살에서 구출하기 위해 사단장에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11연대장의 정식 보고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다. 사단장은 상부에 건의하여 대대적인 장례식 행사 준비를 하였고, 당시 사단장 김석원과 감정 대립이 악화되었던 채병덕 참모총장은 하루 전 불승인하였으나 이종찬, 이용문 대령 등이 '육탄 10용사는 국군의 전통과 사기 진작에도 좋으니 행사를 하자'고 권고하여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6.25 전쟁 당시 평양에서 '육탄 10용사'가 환영받는 사진을 보고 김익렬은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김익렬은 북한군의 포로가 된 육탄 10용사가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김익렬 본인이 6.25 전쟁에서 평양에 입성했을 때 육탄 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랐다면서, 이는 순전히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의 조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고,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익렬의 증언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된 '6.25 전쟁 참전자 증언록'에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증언의 신빙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김익렬은 제주 4.3 사건의 진상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 인물로, "4.3의 진실"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사후 공개를 부탁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고 밝혔다.

김익렬은 송악산 전투를 지근거리에서 주시하며 내부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는 객관적 위치에 있었다. 1964년 5월 4일, 그는 전 국방부장관 박병권의 자택에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와 대담을 가졌는데, 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지만원 등 일부 인사들은 김익렬의 증언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육탄 10용사'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지만원은 자신의 웹사이트와 뉴스타운 기사를 통해 김익렬의 증언이 거짓이며, 2011년에 삭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익렬의 제주 4.3 사건 회고록 역시 창작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증언록은 녹음이나 수기 원고와 같은 기본 자료 없이 포함될 가능성이 없다. 큰 논란이 되기 때문에 김익렬이 제주 4.3 사건 회고록처럼 차후 공개를 당부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국방부가 증언록 기본 자료와 북한 방송 녹음 자료 등을 통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육탄 10용사' 사건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역사적 정의를 실현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과제이다.[1]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10명의 전사자 중에 몇몇이 북한 방송에 출현하기도 하였던 조작된 무용담이라고 전쟁사 기술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1] 더불어민주당은 국방부가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진상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한다.

5. 1. 김익렬의 증언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10명의 전사자 중에 몇몇이 북한 방송에 출현하기도 하였던 조작된 무용담이라고 전쟁사 기술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1]

김익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격전 중이던 일선 부대로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해 공병소대장 박 소위에게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 도중 조선인민군과 불의에 조우하여 부하들을 수습 지휘하지 못하고 혼자 탈출하였고,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짊어진 채 모조리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정보주임 장교는 계통을 따라 사단 G-2에 보고하였고,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대노하여 당장 박 소위를 총살하라고 명령하였다.

제11연대장 최경록은 박 소위를 구하기 위해 10명의 대원들이 자폭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당시 연대장이었던 최경록 중령과 공병소대장인 박 소위는 일본 학병 동기로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최경록은 박 소위를 총살에서 구출하기 위해 사단장에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11연대장의 정식 보고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다. 사단장은 상부에 건의하여 대대적인 장례식 행사 준비를 하였고, 당시 사단장 김석원과 감정 대립이 악화되었던 채병덕 참모총장은 하루 전 불승인하였으나 이종찬, 이용문 대령 등이 '육탄 10용사는 국군의 전통과 사기 진작에도 좋으니 행사를 하자'고 권고하여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6.25 전쟁 당시 평양에서 '육탄 10용사'가 환영받는 사진을 보고 김익렬은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김익렬은 북한군의 포로가 된 육탄 10용사가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김익렬 본인이 6.25 전쟁에서 평양에 입성했을 때 육탄 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랐다면서, 이는 순전히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의 조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고,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 1. 1. 사건 개요

김익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격전 중이던 일선 부대로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해 공병소대장 박 소위에게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 도중 조선인민군과 불의에 조우하여 부하들을 수습 지휘하지 못하고 혼자 탈출하였고,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짊어진 채 모조리 조선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 정보주임 장교는 계통을 따라 사단 G-2에 보고하였고,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대노하여 당장 박 소위를 총살하라고 명령하였다.

5. 1. 2. 허위 조작 보고

제11연대장 최경록은 박 소위를 구하기 위해 10명의 대원들이 자폭했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당시 연대장이었던 최경록 중령과 공병소대장인 박 소위는 일본 학병 동기로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최경록은 박 소위를 총살에서 구출하기 위해 사단장에게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5. 1. 3. 대통령에게 보고된 성대한 장례식

사단장 김석원 장군은 11연대장의 정식 보고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겐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다. 사단장은 상부에 건의하여 대대적인 장례식 행사 준비를 하였고, 당시 사단장 김석원과 감정 대립이 악화되었던 채병덕 참모총장은 하루 전 불승인하였으나 이종찬, 이용문 대령 등이 '육탄 10용사는 국군의 전통과 사기 진작에도 좋으니 행사를 하자'고 권고하여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히 거행되었다.

5. 1. 4. 평양에서의 진실

6.25 전쟁 당시 평양에서 '육탄 10용사'가 환영받는 사진을 보고 김익렬은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김익렬은 북한군의 포로가 된 육탄 10용사가 평양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고, 살아 있다는 방송을 하고 가족들에게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김익렬 본인이 6.25 전쟁에서 평양에 입성했을 때 육탄 10용사가 꽃다발을 받고 있는 사진을 보고 놀랐다면서, 이는 순전히 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의 조작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였고, '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5. 2. 증언의 신빙성 논란

김익렬의 증언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된 '6.25 전쟁 참전자 증언록'에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증언의 신빙성을 둘러싼 논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김익렬은 제주 4.3 사건의 진상에 접근할 수 있는 핵심 인물로, "4.3의 진실"이라는 회고록을 집필하고 사후 공개를 부탁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침묵을 지키기에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나의 양심의 가책이 너무 컸다"고 밝혔다.

김익렬은 송악산 전투를 지근거리에서 주시하며 내부 사정을 소상히 알 수 있는 객관적 위치에 있었다. 1964년 5월 4일, 그는 전 국방부장관 박병권의 자택에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와 대담을 가졌는데, 이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지만원 등 일부 인사들은 김익렬의 증언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육탄 10용사'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지만원은 자신의 웹사이트와 뉴스타운 기사를 통해 김익렬의 증언이 거짓이며, 2011년에 삭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익렬의 제주 4.3 사건 회고록 역시 창작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국방부에서 발간한 증언록은 녹음이나 수기 원고와 같은 기본 자료 없이 포함될 가능성이 없다. 큰 논란이 되기 때문에 김익렬이 제주 4.3 사건 회고록처럼 차후 공개를 당부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국방부가 증언록 기본 자료와 북한 방송 녹음 자료 등을 통해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5. 3. 진실 규명의 필요성

'육탄 10용사' 사건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으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역사적 정의를 실현하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필수적인 과제이다.[1] 박경석 예비역 준장은 10명의 전사자 중에 몇몇이 북한 방송에 출현하기도 하였던 조작된 무용담이라고 전쟁사 기술 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1] 더불어민주당은 국방부가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진상 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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