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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10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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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탄 10용사는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조선인민군의 기관총 진지를 파괴하기 위해 81mm 박격포탄을 들고 특공 작전을 수행하다 전사한 국군 하사관 교육대원 10명을 일컫는다. 이들은 292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과정에서 적의 특화점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으나, 전원 사망했다. 이후 육탄 10용사의 희생은 국가적 추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기념 시설 건립과 훈장 추서, 이달의 호국 인물 선정 등으로 기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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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10용사
송악산 5·4 전투
군대 정보
이름육탄 10용사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육탄 10용사 부조상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육탄 10용사 부조상
국가대한민국
규모분대
소속육군
역할개성 송악산에서 조선인민군 육군의 특화점에 자폭 공격
지휘관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훈장을지무공훈장
본부하사관 교육대
장비박격포탄
전쟁 정보
분쟁송악산 5·4 전투
전체38선 충돌
날짜1949년 5월 4일
장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송악산
결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승리
교전국 1대한민국
교전국 2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1김석원 제1사단장 준장
최경록 제11연대장 대령
노재현 포병 제6대대장 대위
지휘관 2최현 38선 경비여단장
병력 1한국군 제1사단
병력 2조선인민군 38선 경비여단
피해 11000여명 사상
피해 2137명 전사
무기 114정 손실

2. 상세

(내용 없음)

2. 1. 이전 상황

송악산 5.4 전투가 있기 석 달 전, 『동아일보』(1949년 2월 22일)에 보도된 송악산의 전경, 유엔한국위원회 위원들과 기자들, 국군 제1사단 장병들이 긴장이 조성되던 38도선을 살피고 있다.


육탄 10용사 특공대원들은 국군 제1사단 제11보병연대 하사관 교육대의 피교육생들이었다. 당시 육군에는 별도의 하사관 양성기관이 없었고, 각 연대나 사단에서 자체적으로 하사관 교육대를 운영하며 소속 하사관 및 병사들에게 보병 전투 위주의 보수 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38도선을 경비하는 부대에게는 이러한 필수적인 교육 훈련조차 큰 부담이었는데, 이들에게 38도선은 이미 전쟁터나 다름없는 긴장 상태였기 때문이다.

제11연대는 당시 개성 일대의 38도선을 경비하고 있었다. 개성은 과거 고려의 수도였던 만큼 교통과 상업이 발달했으며, 지리적으로 서울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하지만 1949년 1월 5일, 경기도 수원에 주둔하던 제11연대가 미 제7사단 제32연대로부터 개성 일대 경비를 인수받았을 때, 방어 시설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급히 진지를 구축하며 방비를 강화했지만, 연대 병력만으로 연안에서 청단까지 이르는 84km의 넓은 정면을 방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에 연대의 진지 구축은 38도선상에 위치하며 개성 시가지를 내려다볼 수 있는 감제고지[3]송악산(488고지)과 그 동쪽 자락의 292고지에 집중되었다.

292고지(38도선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개성특별시에 위치해 있다.)


그러던 1949년 5월 3일, 수백 명 규모의 조선인민군이 292고지 남측 경사면, 즉 38도선 이남 100m 지점에 진지를 구축 중이던 한국군에게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는 이후 송악산 5·4 전투로 불리게 되는 대규모 군사 충돌의 시작이었으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38도선에서 발생한 군사 충돌 중 가장 큰 규모였다. 조선인민군의 기습을 받은 제11연대는 292고지를 지킬 여력이 부족했다. 연대 예하 3개 대대 중 제1대대는 문산에서 신병 교육 중이었고, 제3대대는 제5연대에 파견 근무 중이어서 오직 제2대대(대대장 김종훈 소령)만이 방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제2대대는 조선인민군의 공격으로 292고지뿐 아니라 그 남쪽의 유엔고지, 비둘기고지까지 연이어 빼앗겼다. 개성이 위협받자 연대장은 즉시 문산에서 교육 중이던 제1대대의 제3·4중대를 불러들여 제2대대에 증원하는 한편, 연안 방면으로 훈련을 나갔던 하사관 교육대(대장 김영직 대위)를 개성으로 복귀시켰다.

당시 하사관 교육대 피교육생 160여 명은 전투 발발 전날, 졸업 전 마지막 행군 훈련을 위해 주둔지를 떠나 있었다.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하사관 교육대는 연대가 즉시 투입할 수 있는 유일한 예비 부대였다. 다음 날인 5월 4일 새벽[4] 6시, 연대는 빼앗긴 고지들을 탈환하기 위한 반격을 시작했다. 제2대대 제7중대와 제1대대 제3·4중대는 전선 정면에서, 하사관 교육대는 신관지서 후방에서 각각 공격에 나섰다. 연대 소속 포병중대와 영등포의 제6포병대대, 2개 대전차포중대까지 화력 지원에 나선 대규모 공격이었다.

특화점


그러나 오전 11시 30분경, 제2대대는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고지의 7부 능선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고지의 경사가 매우 가파른 데다, 조선인민군이 고지마다 중기관총을 설치한 특화점을 구축하여 강력한 화력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군의 특화점은 땅을 파고 직경 20cm 두께의 통나무를 이용해 3층 높이로 벽과 지붕을 쌓아 만들어, 수류탄은 물론 포격에도 쉽게 파괴되지 않는 견고한 방어 시설이었다.

2. 2. 전개



동아일보』(1949년 5월 21일)에 보도된 육탄 10용사의 전공 내용


송악산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제11연대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조선인민군의 특화점을 파괴하기 위해 하사관 교육대 병력으로 특공대를 조직하여 투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공대의 임무는 강력한 폭약을 직접 운반하여 적 특화점에 던져 파괴하는 것이었다.[5] 하지만 이는 아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던 적 기관총 진지에 매우 가까이 접근해야 하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사용될 폭약은 6.8kg 무게의 81밀리 박격포 중(重)고폭탄으로, 곡사포탄에 버금가는 강력한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위험 때문에 특공대 임무는 생환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의 어려움을 겪은 하사관 교육대원들은 전황 타개를 위해 특공대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고, 많은 이들이 자원했다.

연대가 특공대를 조직하기도 전에, 하사관 교육대 중화기소대 분대장 박창근(朴昌根) 하사가 먼저 희생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292고지 동북쪽 특화점을 향해 돌격하여 수류탄으로 이를 파괴하고 전사했다. 박창근 하사의 용감한 행동은 이후 이어질 육탄 공격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특공대로 자원한 대원들은 12시에 포병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비둘기고지로 향했다. 그러나 조선인민군이 각 특화점에서 기관총으로 맹렬히 사격하여 목표 지점 접근이 쉽지 않았다. 대원들은 중앙의 지휘자 서부덕 이등상사를 중심으로 각자 맡은 적 특화점 300m 지점까지 접근한 뒤 포복으로 이동했다. 14시 정각, 특공대를 엄호하던 포격이 멈추자 대원들은 박격포탄을 안고 특화점을 향해 돌진했다. 고지 아래에서 대기하던 하사관 교육대원들이 초조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고지 곳곳에서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와 파편이 치솟았다. 특공대원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조선인민군의 주요 특화점들이 파괴되었다.

특공대의 성공적인 공격으로 반나절 동안 멈춰 있던 송악산 탈환 작전의 돌파구가 열렸다. 특화점이 무력화되자 하사관 교육대 병력이 즉시 돌격하여 비둘기고지에 이어 292고지까지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조선인민군은 292고지를 되찾기 위해 즉시 반격했지만, 이미 기세가 오른 제11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그 무렵 신병 교육 중이던 제1대대의 나머지 병력도 개성으로 복귀하여 다음 날까지 이어진 292고지 방어전에 힘을 보탰다. 결국 조선인민군은 5월 6일을 끝으로 송악산 점령 시도를 포기했다.[6] 결과적으로 5월 4일 '육탄 10용사'의 용맹한 공격은 개성의 방어 태세를 다시 굳건히 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 3. 이후 상황

파주 통일공원의 육탄십용사 충용탑


을지무공훈장


앞서 전사한 박창근 하사를 제외한 나머지 특공대원들은 격렬한 육탄 공격으로 인해 끝내 유해조차 수습하지 못했다. 특공 대원 9명의 지휘관이었던 하사관 교육대장 김영직 대위와 제1소대장 김성훈 소위 역시 같은 날, 같은 고지에서 전사했다. 아군은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 10용사를 포함해 39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이범석은 송악산 전투 직후 담화를 통해 육탄 10용사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적색괴뢰의 비적은 약 2,000의 대부대를 가지고 38선 이남에 속한 송악산 고지로부터 안개를 이용해 일거 개성 시가를 습격하려고 할 때 만약 국군의 과감 민첩한 행동이 아니었다면 그 결과는 최소한 개성지구의 일대 혼란과 다수 양민의 피해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 그리하여 국내적으로는 국민의 생활 재산을 비적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했고, 국제적으로는 대한민국이 능히 자력 방위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렸다. 특히 우리 10용사는 명령에 의한 결사대가 아니오, 전술상 필요를 통감하고 자진해 살신성인한 것이니 그들의 충용한 행동이야말로 국군의 모범이며 조국 수호의 정화라고 할 것이오, 세계만방에 자랑하여 대한 남아의 기백을 선양해야 할 것이다.”[7]

육탄 10용사의 희생은 전사자에 대한 추모의 중요성이 사회적으로 널리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1949년 5월 28일 창덕궁 돈화문 앞에서는 이들의 장례식이 사단장(師團葬)으로 엄수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서울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이들을 소재로 한 연극이 상연되었다. 이는 국민들의 관심과 위로를 모으는 전몰자 추모 행사의 전형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국회에서도 1949년 6월 6일 제3회 제13차 본회의를 통해 이들에 대한 감사 결의안을 통과시켜 감사와 추모의 뜻을 표했다. 육탄 10용사에게는 1949년 6월 28일자로 추서 진급이 이루어져 서부덕 이등상사는 소위로, 나머지 9명은 일등상사로 특진되었다. 또한 1950년 12월 31일 이들 전원에게 을지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8]

이들을 기념하는 현충 시설로는 1955년에 세워진 국립서울현충원 내의 ‘육탄 10용사 현충비’와 1980년에 세워진 파주읍 통일공원 내의 ‘육탄 10용사 충용탑’ 등이 있다. 또한 당시 하사관 교육대의 역할을 계승한 육군부사관학교는 2001년에 ‘육탄 10용사상’을 제정하여 매년 5월 전투 직위에 근무하는 모범적인 부사관에게 수여하고 있다.

3. 군가

육탄 10용사를 기리는 이영순 작사, 박시춘 작곡의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1&v=HpUXElF_Pj4&feature=emb_logo 육탄 10용사]' 군가가 있다.

1절

비둘기 고지에는 초목도 운다

적탄이 비 오던 날 아군의 용전

들었나 포연 속에 적군의 얼굴

서상사[9]는 원합니다 특별공격을

부대장을 울려주던 애원의 소리

장하다 우리용사 아~ 십용사

2절

유엔 고지에는 적구도 운다

토치카 파괴하던 십삼시 이십분

붉고 검은 얼굴위에 방긋 웃었소

내 한 젊은 장한다짐 최후의 부탁

지축을 흔드는 폭발의 소리

장하다 우리용사 아~ 십용사

4. 이달의 호국 인물 선정

육탄 10용사는 다음과 같이 전쟁기념관에서 선정하는 이달의 호국 인물로 선정되었다.

5. 논란

당시 13연대장이었던 김익렬 대령이 1964년 5월 4일 전 국방부장관인 박병권 장군의 자택에서 했던 증언에 따르면 육탄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짊어진 채 모조리 적의 포로가 되었다고 하였다.

참조

[1] 서적 개전의 순간 전쟁기념관 2021
[2] 문서 당시 용사들의 계급은 일등병(일병)과 이등병(이병), 두개의 계급밖에 없었다.
[3] 문서 높은곳에 위치하여 적의 활동을 두루 살필 수 있는 고지
[4] 문서 날이 채 밝지 않을 때
[5] 문서 ") 당시 사용된 폭약은 81밀리 박격포용 고폭탄에 별도의 폭약을 기폭장치로 장착한 급조폭탄이었는데, 송악 산 전투 당일 제1사단 시설 장교였던 박후준 소위가 고안해 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1: 해방과 건군』, 1967, 521쪽)."
[6] 서적 Report of Operations 3 May 1949 to 6 May 1949 Susaek, Korea 1949-10-08
[7] 뉴스 십용사의 장렬한 전투 경과 육탄으로 진지 분쇄 동아일보 1949-05-21
[8] 문서 ) 우리나라의 무공훈장은 1950년 10월 18일 제정된 「무공훈장령」(대통령령 제385호)을 통해 처음으로 명 문화되었으며, 이에 따른 최초의 무공훈장 수여는 같은 해 12월 31일에 이루어졌다. 다만, 제정 당시 무공 훈장의 명칭은 ‘일·이·삼·사등 무공훈장’이었으며, 1951년 9월 ‘태극·을지·충무·화랑 무공훈장’으로 명칭이 개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문에서는 수여 시기와 상관없이 현행 명칭을 따랐다
[9] 문서 서부덕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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