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척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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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 척성군은 송나라의 군주로, 즉위 과정에 대한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사기》는 그가 전 임금 송 벽공의 아들이며, 벽공 사후 즉위했다고 기록하지만, 《죽서기년》과 《한비자》 등은 척성간, 황희, 자한 등이 권력을 찬탈하여 그가 즉위했음을 시사한다. 척성군은 양나라와 조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입지를 다졌으나, 기원전 329년 동생 송 강왕에게 축출되어 제나라로 도망쳤다.
《사기》에서는 척성군이 전 임금 송 벽공(후환공, 환후) 벽병의 아들이며, 벽공 사후 뒤를 이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
《전국책》에 따르면, 양나라(위나라) 왕이 조나라 서울 한단을 공격하면서 송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송나라 임금(척성군)은 사자를 보내 양나라의 청을 거부하면 양나라에게 멸망당할 것이 두렵고, 따르자니 조나라가 약해지고 양나라가 강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조나라와 짜고 조나라 변경 성읍을 포위하여 양왕을 만족시키고 조나라에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제안했고, 조나라 왕은 이를 따랐다.[9] 양나라는 양혜왕 17년(기원전 353년)에 한단을 공격했으므로, 이는 척성군 때의 일로 보인다.[10]
2. 군위 계승에 대한 상반된 기록
《사기색은》은 왕소의 말을 인용하여 《죽서기년》의 기록을 소개하는데, 척성간(척성간/剔成肝중국어)이 임금 벽을 쫓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3] 《한비자》에서는 대환(戴歡)과 황희(皇喜)가 총애를 다투다가 마침내 황희가 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빼앗았다고 하며,[4] 또 사성(司城)[5] 자한(子罕)이 송군을 대신하여 형벌을 행하다가 마침내 임금을 침해하였다고 한다.[6] 《고본죽서기년집증》은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척성은 사성의 음이 변한 것이고, 한(罕)과 간(肝)은 통가자이므로 "사성자한"과 "황희"가 곧 "척성군"이라고 해석한다.[7]
《죽서기년》에 따르면 송 환후는 양 혜왕 14년(기원전 356년)에 양나라에 입조했으므로, 《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이때까지 임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척성군의 찬탈은 기원전 355년 이후일 것이나,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8] 송나라의 황씨(皇氏)는 송 대공의 자손이므로 대씨(戴氏)라고도 하고, 이후 송나라 공실 사람들이 대씨(戴氏)를 칭하므로, 이를 두고 "대씨가 자씨를 대신했다" 고 한다.
2. 1. 《사기》의 군위 계승설
《사기》에서는 척성군이 전 임금 송 벽공(후환공, 환후) 벽병의 아들이며, 벽공 사후 뒤를 이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2]
2. 2. 군위 찬탈설
《사기색은》은 왕소의 말을 인용하여 《죽서기년》의 기록을 소개하는데, 척성간(剔成肝)이 임금 벽을 쫓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3] 《한비자》에서는 대환(戴歡)과 황희(皇喜)가 총애를 다투다가 마침내 황희가 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빼앗았다고 하며,[4] 또 사성(司城)[5] 자한(子罕)이 송군을 대신하여 형벌을 행하다가 마침내 임금을 침해하였다고 한다.[6] 《고본죽서기년집증》은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하여 척성은 사성의 음이 변한 것이고, 한(罕)과 간(肝)은 통가자이므로 "사성자한"과 "황희"가 곧 "척성군"이라고 해석한다.[7]
《죽서기년》에 따르면 송 환후는 양 혜왕 14년(기원전 356년)에 양나라에 입조했으므로, 《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이때까지 임금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척성군의 찬탈은 기원전 355년 이후일 것이나,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8] 송나라의 황씨(皇氏)는 송 대공의 자손이므로 대씨(戴氏)라고도 하고, 이후 송나라 공실 사람들이 대씨(戴氏)를 칭하므로, 이를 두고 "대씨가 자씨를 대신했다" 고 한다.
3. 즉위 후
기원전 329년(척성군 41년, 혹은 28년 미만), 척성군은 무도하다는 이유로 아우 언의 습격을 받아 싸우다가 져서 제나라로 달아났고, 언이 송나라 임금이 되었다.[2]
3. 1. 양나라, 조나라와의 관계
《전국책》에 따르면, 양나라(위나라) 왕이 조나라 서울 한단을 공격하면서 송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송나라 임금(척성군)은 사자를 보내 양나라의 청을 거부하면 양나라에게 멸망당할 것이 두렵고, 따르자니 조나라가 약해지고 양나라가 강해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조나라와 짜고 조나라 변경 성읍을 포위하여 양왕을 만족시키고 조나라에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제안했고, 조나라 왕은 이를 따랐다.[9] 양나라는 양혜왕 17년(기원전 353년)에 한단을 공격했으므로, 이는 척성군 때의 일로 보인다.[10]
3. 2. 송 강왕에게 축출됨
전국책에 따르면, 양나라(위나라) 왕이 조나라 서울 한단을 공격하면서 송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송나라 임금은 양나라의 청을 거부하면 양나라에게 멸망당할 것이 두렵고, 따르자니 조나라가 약해지고 양나라가 강해지는 것이 두려워 조나라와 짜고 조나라 변경 성읍을 포위하여 양왕을 만족시키고 조나라에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을 제안했고, 조나라 왕은 이를 따랐다.[9] 양나라는 양혜왕 17년(기원전 353년)에 한단을 공격했으므로, 이는 척성군 때의 일로 보인다.[10]
기원전 329년(척성군 41년, 혹은 28년 미만), 척성군은 무도하다는 이유로 아우 언의 습격을 받아 싸우다가 져서 제나라로 달아났고, 언이 송나라 임금이 되었다.[2]
4. 추가 정보
4. 1. 대씨(戴氏)와 자씨(子氏)
4. 2. 《죽서기년》과 《사기》 기록의 차이
《죽서기년》에 따르면 송 환후는 양 혜왕 14년(기원전 356년)에 양나라에 입조했으므로, 《사기》의 기록과는 달리 이때까지 임금 노릇을 하고 있었다.[8] 그러므로 척성군의 찬탈은 기원전 355년 이후일 것이나,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8]사마정의 《사기색은》에서 왕소의 의견을 인용했는데, 그 왕소의 말에서는 "《죽서기년》에서는 척성간(剔成肝)이 임금 벽을 쫓아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고 한다(현재의 고본죽서기년에도 이 문장이 있는데, 이는 상실된 고본죽서기년을 죽서기년을 인용한 서적들을 통해 복원하는 과정에서 사기색은에 간접적으로 인용된 죽서기년의 문장을 가져온 것이다).[3] 《한비자》에서는 대환(戴歡)과 황희(皇喜)가 총애를 다투다가 마침내 황희가 임금을 죽이고 정권을 빼앗았다고 한다.[4] 또 사성[5] 자한(子罕)이 송군을 대신하여 형벌을 행하니 마침내 임금을 침해하였다고 한다.[6] 《고본죽서기년집증》에서는 이러한 송나라 임금을 침해하고 정권을 빼앗았다는 기록을 인용하고, 또 척성(剔成)은 사성(司城)의 음이 바뀐 것이고 한(罕)과 간(肝)은 통가자이므로 "사성자한"과 "황희"가 곧 "척성군"이라 했다.[7] 송나라의 황씨(皇氏)는 송 대공의 자손이므로 대씨(戴氏)라고도 하고, 이후 송나라 공실 사람들이 대씨(戴氏)를 칭하므로, 이를 두고 "대씨가 자씨를 대신했다" 고 한다.
참조
[1]
문서
척성은 휘가 아니라 즉위 전 역임한 관직일 수도 있다. 자세한 설명은 본문에 있다.
[2]
문헌
사기 권38 송미자세가제8
[3]
문헌
고본죽서기년 위기 67
[4]
문헌
한비자 제31 내저설 하 육미 참의
[5]
문서
송나라의 관직으로, 주나라 관제에 따른 사공(司空)을 송무공을 피휘하여 고친 것이다.
[6]
문헌
상게서, 제7 이병
[7]
문헌
고본죽서기년집증
[8]
서적
战国史料编年辑証
上海人民出版社
2001-11
[9]
문헌
전국책 권32 송위
[10]
서적
战国史料编年辑証
上海人民出版社
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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