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쇼와 연구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쇼와 연구회는 1933년 고토 류노스케가 설립한 시사 문제 간담회를 모태로, 고노에 후미마로의 수상 출마를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정책 연구 단체이다. 초기에는 다양한 분야의 연구회를 통해 정책을 연구했지만, 점차 조직을 확대하여 1936년에는 설립 취지서를 발표하고 상임 위원과 위원 체제를 갖추었다. 1937년 제1차 고노에 내각에 참여하여 정책 제안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중일 전쟁 발발 이후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대동아공영권 이론을 제공하는 등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0년 신체제 운동 추진과 함께 대정익찬회에 흡수되어 해산되었으며, 일부 지식인들은 쇼와 연구회의 활동이 파시즘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본의 싱크탱크 - 만철조사부
    만철조사부는 1907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내에 설립되어 철도 경영 및 만주 개발 조사를 수행하다가 러시아 및 만주 연구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만주국 경제 정책 입안과 관동군 정책 자문에 관여했으나, 만철 조사부 사건으로 기능이 약화되어 해체되었고, 종전 후 출신 인사들은 전후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일본의 싱크탱크 - 노장회
    노장회는 1920년대 일본에서 활동한 사회주의 단체이며, 사상적 갈등으로 분열되었고 사카이 도시히코 등이 주요 참여자이다.
  • 고노에 신체제운동 - 대정익찬회
    대정익찬회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쇼와 연구회의 권고를 바탕으로 1940년 10월 12일에 발족한 일본의 전시 체제 지원 단체로, 개혁주의 정당을 지향하며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지지하고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세뇌하는 데 기여하다 1945년에 해산되었다.
  • 고노에 신체제운동 - 기획원 사건
    기획원 사건은 1938년부터 1941년까지 일본 전시체제기획원에서 발생한 일련의 검거 사건으로, 게이힌 그룹, 판임관 그룹, 고등관 그룹 사건으로 나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다수의 기획원 관계자들이 체포되어 만철 조사부 사건으로 확대되었으며, 전시 경제 체제하의 사상 탄압 및 사회주의 운동 탄압의 성격을 지닌다.
  • 1933년 설립 - 뉴스위크
    뉴스위크는 1933년 창간된 미국의 주간 뉴스 잡지로, 워싱턴 포스트 컴퍼니에 인수되어 국제적으로 성장, 온라인 전환 후 인쇄판을 재개했으며, 여러 사건과 논란을 거치며 디지털 플랫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 1933년 설립 - 게슈타포
    게슈타포는 1933년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비밀경찰을 재편성하여 나치 독일의 비밀 국가 경찰로 설립되었으며, 하인리히 힘러의 SS 보안국 하부 기관으로 편입 후 반체제 인사 탄압, 정치적 반대파 감시, 유대인 대량 학살 등에 관여하며 나치 공포 정치의 핵심 기관으로 활동,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범죄 조직으로 규정되었다.
쇼와 연구회
개요
명칭쇼와 연구회
로마자 표기Shōwa Kenkyūkai
약칭쇼와회
설립 시기1933년
해산 시기1945년
성격일본의 싱크탱크
활동 시기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역사
설립 배경일본 쇼와 시대 초기, 사회 문제 해결 및 국가 정책 연구 필요성 증대
주요 활동국내외 정세 분석 및 정책 제안
전시 경제 체제 연구
대동아공영권 구상
해산 이유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GHQ에 의해 해산
조직 및 인물
주요 인물고노에 후미마로
미야자키 류스케
사카이 데쓰
다나카 도시오
연구 분야정치
경제
사회
외교
군사
이념 및 목표
기본 목표국가 혁신 및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정책 연구 및 제안
주요 이념국가주의
전체주의
계획 경제
평가
긍정적 평가전시 체제 구축 및 전후 일본 경제 부흥에 기여
부정적 평가군국주의 및 제국주의 옹호, 전쟁 범죄 책임 논란

2. 설립 배경 및 목적 (1933-1936)

1933년 고토 류노스케는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쇼와 공황으로 어려움을 겪는 농촌 구제를 호소하며 시사 문제 간담회를 제안했고, 이것이 쇼와 연구회의 모태가 되었다.[9] 고토는 1923년부터 일본청년관 초대 관장을 지낸 고노에와 친분이 있었고, 농촌 문제 해결을 위해 그의 협력을 요청했다.

1933년 8월 1일, 고토는 시사 문제 간담회를 주최하는 고토 사무소를 창설하고, 로야마 마사미치와 함께 조직 강령을 만들었다. 12월 27일, 이 모임을 "쇼와 연구회"로 명명하고, "현행 헌법 범위 내 국내 개혁", "기존 정당 배격", "파시즘 반대" 등을 기본 방침으로 정했다.[9]

1936년 고노에가 총리 후보로 부상하면서 쇼와 연구회는 정식 단체로 결성되었고, 11월에 설립 취지서를 발표했다. 사업 요강에는 "외교, 국방, 경제, 사회, 교육, 행정 등 각 분야의 쇄신 방책을 조사 연구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었다.[2] 상임 위원 아래 여러 부회를 설치하고, 각 부회마다 전문 위원회나 연구회를 조직하여 각계 인사가 참여했다. 연구 결과는 고노에 내각에 보고되었고,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었다.

쇼와 연구회는 동아공동체론과 신체제 운동 촉진 등을 주장하며, 고노에의 "동아 신질서" 선언과 대정익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히라누마 기이치로국수주의 세력으로부터 "공산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9]

2. 1. 만주사변과 국내 정치 혼란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일본 국내에서는 10월 사건과 같은 쿠데타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듬해 1932년에는 혈맹단 사건 및 5.15 사건이 발생하여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9]

2. 2. 고토 류노스케의 구미 시찰

1932년, 고토 류노스케는 대일본연합청년단의 대표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 기념제에 참석하고, 소련 등 유럽 각국을 순방했다.[12] 체코 프라하에서 토마시 마사리크 대통령을 만났고, 독일 베를린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대중 연설을 들었다. 모스크바에서는 레닌 묘 위에 있는 스탈린을 보았다.[12]

이후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방문했고, 제네바에서는 만주국 문제로 국제 연맹에서 일본이 42 대 1로 완패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을 목격했다.[13]

그 뒤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감명을 받고 1933년 5월에 귀국했다.[13][14] 귀국 후, 고토는 국내 정세가 크게 변하고 고노에 후미마로의 수상 출마 요청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대일본연합청년단을 사임하고 격변하는 내외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 연구 단체를 설립할 결심을 굳혔다.[14]

2. 3. 초기 활동 (1933-1935)

1933년 10월, 고토 류노스케는 고노에 후미마로와 상의하여 시사 문제 간담회를 주최하는 개인 사무소인 고토 사무소를 아오야마에 창설하고, 간사로 로야마 마사미치 (蠟山政道)를 초빙하였다.[2] 이들은 국방, 외교, 교육, 재정, 사회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연구회를 개최했다.[9]

날짜연구회주요 참석자
10월 9일국방 외교의 회 제1회이시카와 신고(해군), 스즈키 데이이치(육군), 아시다 히토시(정계) 등
10월 19일교육 연구회고토 후미오(농림대신) 등, 매주 1회 개최 결정
10월 20일대중 정당 정책 설명회사회대중당 아소 히사시 등
10월 20일재정 문제의 회
11월 4일제1회 농림 계획 위원회매주 1회 개최
11월 7일사회 경제의 회
11월 10일행정 문제 연구회며칠 후 요미우리 신문에 고노에의 국책 연구 기관이라는 기사가 실려, 고노에는 정치적 야심으로 비춰지는 것을 꺼려 특별한 회합 외에는 출석하지 않게 됨
11월 25일금융 문제 연구회
11월 22일시사 문제 간담 발기인회



1933년 12월 27일, 시사 문제 간담회를 가산회관에서 개최하고 회의 이름을 '''쇼와 연구회'''로 변경했다.[9] 이 회의에서는 현행 헌법의 범위 내에서 국내 개혁, 기존 정당 배격, 파시즘 반대 등을 기본 방침으로 내걸었다.[9]

초기에는 고노에를 중심으로 한 정치, 경제, 사회에 관한 사적인 스터디 모임의 성격이 강했으며, 조직이라고 부를 만한 형태는 아니었다.[9] 그러나 1935년 3월 5일, 국책 연구소 창립에 대한 협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기본 방침을 정했다.

1. 현행 헌법의 범위 내에서 국내 개혁을 한다.

2. 기성 정당을 배격한다.

3. 파시즘에 반대한다.

3. 조직 구성 및 활동 (1936-1940)

1936년 고노에 후미마로총리 후보로 부상하면서 쇼와 연구회는 정식 단체로 결성되었고, 같은 해 11월에 설립 취지서를 발표했다.[2] 그 사업 요강에는 "비상 시국을 원만하게 수습하고, 우리나라의 역량 충실과 발전을 기하기 위해 외교, 국방, 경제, 사회, 교육, 행정 등 각 분야에 걸쳐 쇄신의 방책을 조사 연구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었다.[2]

쇼와 연구회는 동아공동체론과 신체제 운동을 촉진했으며, 이는 이후 고노에의 '동아 신질서' 선언과 대정익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중일 전쟁에서 예상되는 승리 이후 일본의 미래 정체에 대한 논의가 1937년 이후 토론을 지배했다.[3] 쇼와 연구회는 범아시아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일본이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했고, 이들의 주장은 고노에의 동아시아 신질서 고노에 선언 (1938년 11월)에 영향을 미쳤으며, 대동아 공영권의 이론적 기초의 일부를 형성했다.[4]

정치적으로 쇼와 연구회는 자유 민주주의가 구식이라고 결정했으며, 일본 제국 의회는 직업에 기반한 회원 자격을 갖춘 조합주의 국가 의회로 대체되어야 하고, 이는 국가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지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5]

1940년 11월, 쇼와 연구회는 고노에의 신체제 운동과 대정익찬회에 흡수되며 해산되었다. 그러나 신체제 운동 등에 대해서도 회원 간 의견 차이가 있었고, 히라누마 기이치로국수주의 정치인·관료·우익으로부터 "아카" (빨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3. 1. 조직 구조

쇼와 연구회는 상임 위원 및 위원 아래에 정치, 경제, 세계, 문화 등 전문 분야별 부회(최대 10개)를 설치하고, 각 부회마다 전문 위원회와 연구회를 조직하여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했다.[27][28][29] 미키 기요시, 야베 사다하루, 류 신타로가 상임 위원으로 참여했고,[29] 우쓰노미야 도쿠마, 다이라 사다조, 오니시 사이, 오자키 호츠미, 사와무라 가츠토, 마스다 도요히코, 시미즈 이쿠타로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여 새로운 회원을 늘려나갔다.

1938년(쇼와 13년) 1월에는 전문 연구회를 늘리고 각 부문을 더욱 전문화하며 젊은 층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연도가 지남에 따라 연구회의 수는 증가했으며, 1938년(쇼와 13년)의 연구회 조직은 다음과 같다.

번호연구회명하위 조직
1세계 정책 연구회
2정치 부문정치 동향 연구회
정치 기구 연구회
3경제 부문경제 정세 연구회
증세 연구회
재정 금융 연구회
예산 편성에 관한 연구회
무역 연구 연구회
농업 단체 통제 연구회
농업 정책 연구회
노동 문제 연구회
동아 블록 연구회
4세계 부문지나 문제 연구회
외교 문제 연구회
5문화 부문문화 연구회
교육 문제 연구회



쇼와 연구회는 전문성이 높아지고 분야별 인원도 증가함에 따라, 상호 교류를 위해 1934년 6월 7일부터 7일회를 개최했다. 또한, 1938년 4월에는 쇼와 동인회를 설립하여 중앙 조직을 목표로 했다. 전국적인 지방 조직을 결성하기 위해 1934년 봄부터 장년단 결성 준비를 진행, 8월에는 장년단 기성 동맹을 발족시켰다. 장년단 운동은 신당 결성이 목표였지만, 농업 재편성과 농촌 문제 개선을 꾸준히 추진하는 방침을 정했다. 이 외에도 동아 클럽, 쇼와 숙, 시국 간담회, 국민 운동 연구회 등 관련 단체가 다수 발족했다.

3. 1. 1. 정치 부문

1937년 3월, 제1차 고노에 내각 성립 전에 정치 기구 개혁 연구회의 제1회 회합이 개최되었다.[35] 위원으로는 가라사와 토시키, 사사 히로오, 마츠이 하루오, 나카무라 케이노신, 로야마 마사미치 등이 참여했다. 이후 회합을 거듭하면서, 가메이 간이치로, 고노 미쓰루, 기무라 마사요시, 세키구치 야스시, 하세가와 뇨제칸, 하야시모토 키요노스케, 후나다카, 마에다 다몬 등이 위원으로 참가했다.

정치 기구 개혁 연구회는 평론회, 학회, 정당, 재계의 유식자로부터 정치 기구 개혁의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듣고, 위원들이 시안을 작성하여 개혁안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이 절실한 과제로 삼은 것은 대신·장관 분리제, 소수 각료제, 내각 직속의 총무국·기획국·정보국 신설 확충이었다. 이러한 개혁안은 같은 해 6월에 발족한 제1차 고노에 내각에 가자미 아키라 내각 서기관장으로부터 제안되었다.

1938년 7월에는 「귀족원 개혁 시안」, 8월에는 「내각 제도 개혁 요항」을 발표했다. 1940년 6월에는 「정치 기구 개신 대강」을 발표했다.

3. 1. 2. 경제 부문

1936년(쇼와 11년) 다카하시 가메키치가 쇼와 연구회에 참가하여 쇼와 연구회 독자적인 국가 경제 동원 계획을 고안한다.[36]

1937년(쇼와 12년) 다카하시를 중심으로 '민간 경제 중추 기관 시안'을 책정하여 발표한다.[36]

1938년, 쇼와 연구회의 경제 부회에 가사 신타로가 참가하게 되었다.[36] 가사의 합류로 경제 부회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연구를 진행하게 되었다. 다카하시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국채 의존 문제나 세수 문제를 중심으로 한 재정 문제를 담당했다.[36] 반면 가사가 속한 그룹에서는 일본 자본주의를 근본부터 재편성하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36]

1938년(쇼와 13년) 2월에 '임시 경제 조정청안 요강'을 발표한다.[36] 같은 해 12월에 '동아 블록 경제 연구 각서'를 배포했다.[36]

1939년(쇼와 14년) 7월에 '동아 경제 블록의 특성과 그 세계사적 의의'를 발표했다.[36]

1939년(쇼와 14년) 8월에 아리사와 히로미를 중심으로 집필한 '일본 경제 재편성 시안'을 공표하여[36] 재계에 충격을 주고 반대에 부딪힌다. 또한, 가사가 아리사와 재편성 시안에 대한 의견을 듣고 연구회를 열어 정리하여, 가사 신타로가 아리사와 시안과는 다른 형태의 '일본의 재편성'[37]을 1939년(쇼와 14년) 12월에 주오코론사에서 발간했다. 지식인층으로부터는 환영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보수적 재계와 이들과 관계된 우익으로부터는 '빨갱이'라고 맹렬한 반발을 받았다.[36]

3. 1. 3. 세계 부문

지나(중국) 문제 연구회는 전쟁 회피를 목표로 했지만, 민족 통일에 대한 다양한 의견으로 인해 일원화에 어려움을 겪었다.[39]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자키 호츠미 등 젊은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지나 문제 연구회를 조직하고, 상급 위원회에 의견을 제출하여 쇼와 연구회의 의견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를 통해 상급 위원회에서의 의견 일원화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42] 위원으로는 오자키 호츠미, 오자와 마사모토[42], 고토 사다하루[43], 소하라 토오루[44], 타나카 카나에, 나카무라 츠네조[45], 히구치 히로시, 호리에 유이치, 야마가미 마사요시[46], 오야마 이와오, 사카이 사부로 등이 참여했다.

3. 1. 4. 문화 부문

미키 기요시[27]는 『중앙공론』 1937년(쇼와 12년) 1월호에 「일본의 현실」이라는 중일 전쟁의 문화사적 의의에 관한 평론을 썼다. 이에 영향을 받은 회원들은 문화 연구회를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미키 기요시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29] 위원으로는 가다 데쓰지, 미에다 히로토, 시미즈 이쿠타로, 나카지마 겐조, 스기이 준이치, 후쿠이 야스토시, 후나야마 신이치 등이 참여했고, 이후 사사 히로오, 가사 노부타로, 야베 사다하루가 수시로 가입했다. 이들은 철학, 정치학, 사상, 역사, 사회학, 자연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었다.[47]

1938년 여름에는 현대 경제 동향과 사상 상황에 대한 강의를 개최했다. 가사 노부타로는 "경제 재편성", 가다 데쓰지는 "일본주의", 미키 기요시는 "유교의 특질과 정의"에 대해 해설했다.

연구회는 토의 결과를 미키 기요시가 정리하고 전원이 토의한 후, 1939년(쇼와 14년) 1월에 '신일본의 사상 원리'라는 팸플릿을 발표했다.[48] 이 팸플릿은 상하이에서도 중국어로 번역되어 발표되었다. 이후 문화 연구회는 '신일본의 사상 원리'의 속편에 해당하는 '신일본의 사상 원리 속편 -협동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1939년(쇼와 14년) 9월에 발표했다. 또한 경제 재편성 연구회와 가사 노부타로의 협력 하에 '협동주의의 경제 윤리'를 정리하여 1939년(쇼와 15년) 9월에 발표했다. 문화 연구회는 발족 후 2년여 만에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3. 2. 주요 활동 내용

1937년 제1차 고노에 내각이 성립되자, 쇼와 연구회 관계자들이 내각에 참여하여 정책 제안에 영향력을 행사했다.[35] 이들은 대신·장관 분리제, 소수 각료제, 내각 직속 총무국·기획국·정보국 신설 등을 제안했으며,[35] 이는 가자미 아키라 내각 서기관장을 통해 제1차 고노에 내각에 전달되었다.[35]

제2차 중일 전쟁 발발 후, 쇼와 연구회는 중국 문제 연구에 집중했다. 1936년 10월 조선, 만주, 북중국을 시찰했고, 같은 해 12월 중일 전쟁 수습 제2차 안을 정부에 건의했다. 1936년 6월에는 지나 문제 위원회가 설치되었으며,[66] 초기 위원은 아오키 카즈오, 오니시 히토시, 소고 신지, 사카니시 리하치로, 츠다 시즈에, 아부라타니 쿄이치,[40] 오쿠라 기미모치, 가자미 아키라, 고토 류노스케, 타키 마사오 등이었다.[66]

쇼와 연구회는 동아공동체론과 신체제 운동을 촉진했으며, 이는 이후 고노에의 '동아 신질서' 선언과 대정익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0년 11월, 쇼와 연구회는 고노에의 신체제 운동과 대정익찬회에 흡수되며 해산되었다.

4. 대정익찬회로의 흡수 및 해산 (1940)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의 신체제 운동과 함께 '''쇼와 연구회'''는 대정익찬회에 자발적으로 흡수되었다.[8] 그러나 대정익찬회는 당초 쇼와 연구회의 구상과는 달리, 군부와 관료의 전쟁 수행 도구로 변질되었다. 쇼와 연구회 출신 참가자들은 대정익찬회에서 주도권을 잃고, 1941년 전원 사표를 제출했다. 1940년 11월, 쇼와 연구회는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5. 쇼와 연구회에 대한 평가

쇼와 연구회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을 모아 정책 연구를 했지만, 결국 군부의 영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일본의 팽창주의를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4] 특히 대동아 공영권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했다는 비판을 받는다.[4]

다케우치 히로시는 "쇼와 연구회에 모인 지식인들 앞에는 군부 등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군부와 타협을 시도하거나, 군부의 의향을 앞질러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라고 평가했다.[47]

도야마 시게키, 이마이 세이이치, 후지와라 아키라는 쇼와 연구회에 대해 "고토 류노스케, 아리마, 가자미 등의 쇼와 연구회(그 외, 미와 히사오, 로야마 마사미치, 미키 기요시, 갓사 신타로, 사사 히로오 등도 있었다) 등 어느 정도 군부에 비판적인 일파는, 대중 조직을 기반으로 국민의 통합을 꾀하고 강력한 정치 지도력을 만들고, 이것에 의해 군부나 관료의 독재를 견제하는 동시에, 만주 사변 이래의 고민이었던 정치와 군사의 분열을 구하려고 했다"라고 평가했다.[48]

미키 기요시자유주의와 파시즘을 지양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이념을 파악하는 것을 일본의 세계사적 사명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협동주의 사회상'을 제시하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했지만,[47] 쇼와 연구회는 결국 일본 군국주의에 휩쓸리고 말았다.[48]

우치다 히로시는 미키 기요시의 자본주의 비판, 중국 근대화론, 제국주의 비판, 추상적 보편주의 비판, 타자론은 일관되게 연동하여 '협동주의 사회상'으로 집약된다고 평가하며, 미키 기요시가 그러한 비전을 동아 협동체론에 그렸다고 설명했다.[48]

5. 1. 전후 평가 (대한민국 관점)

대한민국에서는 쇼와 연구회를 일본 제국주의 침략 논리를 뒷받침한 극우 단체로 평가한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쇼와 연구회를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며, 이들의 역사 인식을 강하게 비판한다.[74]

마일스 플레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교수)는 쇼와 연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ロヤマーナ 갓사, 미키와 같은 쇼와 연구회의 지도자들은 전시기에 일어난 사건의 단순한 희생자도 아니었고, 저항자도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그들 지식인들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기 때문에, 개혁 전략을 실행하기에 좋은 선택으로 국가를 향했다. 개혁의 필요성과 필요한 변화의 형태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 때문에, 그들은 일본의 의회 제도와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버려야 했다. 그들 지식인들은 경제의 국가 통제를 강화하고, 아시아의 맹주가 된다는 일본인의 사명감을 긍정했다. 되돌아보면, 쇼와 전시기는 어두운 시대였지만, 그들에게는 빛나는 새로운 사회라는 희망을 주는 시대였다.|마일스 플레처 지식인과 파시즘 고노에 신체제와 쇼와 연구회 274쪽 4행째~11행째에서 인용일본어[74]

참조

[1] 서적 Japan Rising: The Resurgence of Japanese Power And Purpose
[2] 서적 The Making of Modern Japan
[3] 서적 The Dark Valley: A Panorama of the 1930s
[4] 서적 Yanihara Tadao and Japanese Colonial Policy: Redeeming Empire
[5] 서적 The Origins Of Nonliberal Capitalism
[6] 서적 Militarismus des Zivilen
[7] 서적 Militarismus des Zivilen
[8] 서적 Militarismus des Zivilen
[9] 웹사이트 昭和研究会について (1)ー社会福祉学理論形成過程の分析視点のひとつとしてー https://hirogaku-u.r[...] 弘前学院大学 2004
[10] 인용
[11] 인용
[12] 인용
[13] 인용
[14] 인용
[15] 인용
[16] 인용
[17] 인용
[18] 인용
[19] 인용
[20] 인용
[21] 인용
[22] 인용
[23] 인용
[24] 인용
[25] 인용
[26] 인용
[27] 인용
[28] 인용
[29] 인용
[30] 인용
[31] 인용
[32] 인용
[33] 인용
[34] 인용
[35] 인용
[36]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37] 웹사이트 「日本経済の再編成」と笠信太郎 http://kyosei.hus.os[...] 大阪大学 2001
[38]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39]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40]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41]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42]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43]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44]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45]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46] 서적 昭和研究会 ある知識人集団の軌跡
[47] 웹사이트 三木清の「協同主義の経済倫理」への一考察 http://kyosei.hus.os[...] 大阪大学
[48] 웹사이트 「日本経済の再編成」と笠信太郎 http://kyosei.hus.os[...] 大阪大学 2001
[49]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50]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51]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52] 서적 戦後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53] 서적 知識人とファシズム 近衛新体制と昭和研究会
[54]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55] 서적 知識人とファシズム 近衛新体制と昭和研究会
[56]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57] 서적 知識人とファシズム 近衛新体制と昭和研究会
[58]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59]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60]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61]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62]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63] 서적 戦時労働政策の思想:昭和研究会労働問題研究会を中心に
[64]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65]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66]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67]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68]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69]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70] 서적 戦争終結の叫びも悲劇に終わった知識人の集団 昭和研究会
[71] 서적 新体制は世界の新情勢に即応しつつ、我が国際環境の難関突破を目指し、国家総力の一大飛躍を遂げる体制を整備するため、新しい国民組織を推進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主張する 昭和研究会
[72] 서적 国研会は後藤隆之助等によって、昭和研究会の実践団体として国民再組織運動に挺身してきたが、大政翼賛会発足とともにその使命を終わり、発展的解消を決定した 昭和研究会
[73] 서적 農業生産力の飛躍的発展のため、日満支の相互依存を強化し、統制経済の一環として新しい生産性を生み出さねばならないと主張する 昭和研究会
[74] 웹사이트 W. Miles Fletcher https://history.unc.[...] The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 2024-08-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