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라누마 기이치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일본의 법조인, 정치인으로, 1867년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태어났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법무성에서 근무하며 정부 부패에 반대하고 공정한 법 집행으로 명성을 얻었다. 1911년 법무 차관, 1912년 검찰총장을 역임했으며, 1921년에는 대심원장이 되었다. 그는 보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신념을 가지고 민주주의, 사회주의 등 외래 사상을 경계했으며, 국본사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1939년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나, 독소 불가침 조약 체결 후 사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추밀원 의장으로 활동했으며,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1952년 가석방 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히라누마 기이치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존칭 | 종2위, 남작 |
출생일 | 1867년 9월 28일 |
출생지 | 쓰야마, 일본 |
사망일 | 1952년 8월 22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정당 | 무소속 |
자녀 | 히라누마 다케오 (양자) |
모교 | 도쿄 제국대학 |
서명 | image_file: HiranumaK kao.png |
경력 | |
내각총리대신 | 재임 시작: 1939년 1월 5일 재임 종료: 1939년 8월 30일 이전: 고노에 후미마로 이후: 아베 노부유키 |
추밀원 의장 | 재임 시작: 1945년 4월 9일 재임 종료: 1945년 12월 3일 이전: 스즈키 간타로 이후: 스즈키 간타로 |
추밀원 의장 | 재임 시작: 1936년 3월 13일 재임 종료: 1939년 1월 5일 이전: 이치키 키토쿠로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
내무대신 | 내각: 제2차 고노에 내각 재임 시작: 1940년 12월 21일 재임 종료: 1941년 7월 18일 |
무임소대신 | 내각: 제2차 고노에 내각 재임 시작: 1940년 12월 6일 재임 종료: 1940년 12월 21일 |
추밀원 부의장 | 재임 시작: 1926년 4월 12일 재임 종료: 1936년 3월 13일 |
기타 직책 | |
사법대신 | 내각: 제2차 야마모토 내각 재임 시작: 1923년 9월 6일 재임 종료: 1924년 1월 7일 |
귀족원 의원 | 재임 시작: 1924년 1월 9일 재임 종료: 1924년 2월 7일 |
대심원장 | 재임 시작: 1921년 10월 5일 재임 종료: 1923년 9월 5일 |
검찰총장 | 재임 시작: 1912년 12월 21일 재임 종료: 1921년 10월 5일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히라누마 신 |
형 | 히라누마 요시로 |
양자 (종손녀) | 히라누마 다케오 |
2. 초기 이력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1867년 오늘날의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서 영국법을 전공하고 1888년 졸업한 후 법무성에 들어갔다.
히라누마는 법무성에서 여러 요직을 거쳤다. 1905년에는 대심원 검사, 1906년에는 사법성 민형국장에 취임했다. 1907년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로 파견되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1년 법무부대신, 1912년 검사총장이 되었다.
그는 공정한 법집행으로 명망을 높였으며, 특히 1909년 25명의 전·현직 의원을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하기도 하였다. 1915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오우라 가네타케 내무대신을 뇌물수수 혐의로 사임시켰다.
히라누마는 급격한 서구화와 일본 문화 경시에 반발했다. 그는 유교를 바탕으로 일본 천황과 국가 간의 도덕적 유대, 즉 ''국체''를 중시하는 정치적 신념을 평생 굳혔다.
2. 1. 출생과 성장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1867년 10월 25일(9월 28일)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미마사카국 쓰야마번의 하급 사무라이 히라누마 스스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은 경제학자이자 와세다 대학 총장인 히라누마 요시로이다.히라누마는 무사도 정신이 투철한 가정에서 자랐다. 번의 한학자 사이토 탄도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사서, 효경, 시경을 익혔으며, 할머니로부터 당시선을 배웠다. 쓰야마 번은 막부 지지파였으나, 히라누마는 훗날 천황주의로 전향한다.[5]
1872년 상경하여 우다가와 코우사이에게 한학을 배웠고,[6] 1875년부터 미쓰쿠리 슈헤이의 산사학사에서 영어, 한문, 산술을 배웠다. 1877년 아버지 스스무가 사망하여 가계가 어려워졌다. 1878년 9월 도쿄 대학 예비문에 입학했다. 예비문 재학 중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 등의 영향으로 일본주의자, 천황주의자가 되었다. 메이지 16년 사건에도 관여했다.[7]
1884년 9월 도쿄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재학 중 제국대학 법과대학으로 개편). 가계를 위해 사법성 급비생이 되어 사법성 입리의 의무를 졌다.[8] 호즈미 노부시게의 강의(「법학통론」「로마법」「법리학」)에 감명받았고, "사법권의 존엄"을 지킬 것을 주의받았다.[9] 1888년 제국대학 법과대학 영법과를 수석 졸업했다.
2. 2. 학창 시절
1867년 10월 25일(게이오 3년 9월 28일) 쓰야마 성 아래 미나미신자(후의 오카야마현쓰야마시)에서 쓰야마 번의 사무라이였던 히라누마 스스무(1832년 - 1914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으로는 경제학자이자 와세다 대학 총장인 히라누마 요시로가 있다.번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무사도 정신이 투철한 고풍스러운 가정에서 자랐다. 번의 한학자 사이토 탄도의 밑에서 한학을 배우고, 사서, 효경, 시경을 익혔다. 또한, 할머니로부터 당시선을 배웠다. 쓰야마 번은 사쿠파였고, 기이치로 자신도 막부에 동정적이었지만[5], 후에 천황주의로 전향했다.
1872년에 상경하여 우다가와 코우사이에게 한학을 배우고[6], 1875년부터 동향 출신인 미쓰쿠리 슈헤이의 산사학사에서 영어, 한문, 산술을 배웠다. 1877년, 아버지 스스무가 사망하여 가계가 어려워졌다. 1878년 9월에 도쿄 대학 예비문에 입학했다. 대학 예비문 재학 중에 라이 산요의 『일본외사』 등의 영향으로 일본주의자, 천황주의자가 되었다. 또한, 메이지 16년 사건에 관여했다[7].
1884년 9월, 도쿄 대학법학부에 입학 (재학 중에 제국대학 법과대학으로 개편)하여 가계를 지원하기 위해 사법성의 급비생이 되어 사법성 입리의 의무를 지게 되었다[8]. 도쿄대 법과에서는 호즈미 노부시게의 강의 (「법학통론」「로마법」「법리학」)에 감명을 받아, 호즈미로부터 "사법권의 존엄"을 지킬 것을 가장 주의받았다[9]. 1888년, 제국대학 법과대학 영법과 수석 졸업하였다.
3. 법조 관료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하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888년 법무성에 들어갔다.
법무성에서 여러 요직을 거치며 공정한 법집행으로 명망을 높였다. 1909년에는 전·현직 의원 25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하기도 했다. 1911년 법무차관을 거쳐 1912년 검사총장이 되었다. 1915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내무대신 오우라 가네타케를 뇌물수수 혐의로 사임시켰다.
일본 정당정치의 부패와 부도덕에 단호한 태도를 보였으며,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1921년에는 일본 대법원장이 되었다.
3. 1. 사법성 근무
히라누마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1888년(메이지 21년)부터 사법성에 들어가 도쿄 고소원 검사로 임명된 이후 검사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05년(메이지 38년)에는 대심원 검사, 1906년(메이지 39년)에는 사법성 민형국장에 취임했다. 1907년(메이지 40년)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로 파견되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히라누마는 법무성 재직 기간 동안 정부 부패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인물로 명성을 얻었으며, 닛토 사건과 대역 사건 등 여러 건의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건들을 성공적으로 처리했다. 1909년에는 일본 제국 의회의 전현직 의원 25명을 일본 제당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도록 했다. 1911년에는 대역 사건의 수석 검사로서 고토쿠 슈스이 등에게 사형을 구형했다.[13]
1911년(메이지 44년)에는 형사국장, 1912년(다이쇼 원년)에는 검사총장으로 보임되어 약 10년 동안 그 직책을 맡았다. 이 기간 동안 지멘스 사건과 오우라 사건 등에서 실력을 발휘했으며, 1915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총리대신의 내무 대신 오우라 가네타케를 오우라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뇌물 혐의로 사임하도록 강요했다. 1917년(다이쇼 6년) 관영 야하타 제철소 사건에서는 직접 지휘를 맡았으며[2], 같은 해에는 법학 박사로서 『형사소송법 개정안의 요지』를 저술했다.
1921년(다이쇼 10년)에는 대심원장이 되었다.
3. 2. 검찰 권력 강화
히라누마는 검사로서 사법성에 들어가, 도쿄고소원 검사를 거쳐 검사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05년에는 대심원 검사, 1906년에는 사법성 민형국장에 취임했다. 1911년에는 형사국장, 1912년에는 검사총장으로 임명되어 약 10년간 재직했다.히라누마는 닛토 사건과 대역 사건 등을 처리하며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10년 고토쿠 사건 (대역 사건)에서는 검사로서 고토쿠 슈스이 등에게 사형을 구형했다.[13] 이 재판은 '암흑 재판'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당시 좌익 사상에 대한 위기감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14]
히라누마는 지멘스 사건과 오우라 사건 등에서 실력을 발휘했으며, 1917년 관영 야하타 제철소 사건에서는 직접 지휘를 맡았다.[2] 1913년에는 법상의 마쓰무로 사다시와 협력하여 229명의 판사·검사를 휴·퇴직시키고 443명에 달하는 이동을 발령했다. 이를 통해 검찰권의 독립과 절대적 우위가 실체화되었다.
1921년 히라누마가 대심원장이 되면서 검찰총장의 지위가 사법 대신, 대심원장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1922년 개정된 형사 소송법에는 기소편의주의가 도입되어 검찰관의 권한이 대폭 확대되었다.[15] 1923년에는 법조회 회장으로서 판례에 준하는 '법조회 결의' 발표를 시작했다. 같은 해 관동 대지진 직후 치안유지법의 전신이 되는 칙령이 내려졌다. 히라누마 - 스즈키 기사부로 - 고야마 마쓰키치 라인이 사상검사 계열의 초석으로 묘사되기도 한다.[16]
히라누마는 매우 보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정치 자세를 가졌으며,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는 물론 나치즘, 파시즘, 공산주의와 같은 외래 사상을 위험시했다.
3. 3. 법조회 활동
히라누마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사법성에 들어가 도쿄고소원 검사로 임명된 후 검사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05년에는 대심원 검사, 1906년에는 사법성 민형국장에 취임했다. 1907년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로 파견되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기간 동안 닛토 사건과 대역 사건 등을 처리하여 이름을 알렸다.1909년, 히라누마는 일본 제국 의회의 전현직 의원 25명을 일본 제당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도록 했다. 1911년에는 대역 사건의 수석 검사로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메이지 천황을 암살하려던 음모를 수사했다. 이 사건으로 고토쿠 슈스이와 일본 페미니즘의 칸노 스가를 포함한 12명이 처형되었다.
1911년, 히라누마는 법무 차관으로, 1912년에는 검찰총장으로 승진했다. 약 10년 동안 검찰총장 직책을 맡아 지멘스 사건과 오우라 사건 등에서 실력을 발휘했다. 1915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총리대신의 내무 대신 오우라 가네타케를 오우라 사건에서 뇌물 혐의로 사임하도록 강요했다.
1917년, 관영 야하타 제철소 사건에서는 직접 지휘를 맡았으며,[2] 같은 해 법학 박사로서 『형사소송법 개정안의 요지』를 저술했다.
1921년, 히라누마는 최고재판소의 최고 재판관이 되었다. 대심원장이 된 1921년에는, 재판소 구성법 개정으로 검찰총장의 지위가 사법 대신, 대심원장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1922년 개정된 형사 소송법에는 기소편의주의가 도입되어 검찰관의 권한은 대폭 확대되었다.[15]
1923년에는 법조회 회장으로서 동회의 회보 『법조 기사』를 개제하여 『법조회 잡지』를 창간하고, 판례에 준하는 '법조회 결의'의 발표를 시작했다.
4. 우익 법조인, 정치가
히라누마는 1867년 9월 28일, 현재의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에서 미마사카국 쓰야마번의 낮은 계급 사무라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장 과정과 초기 교육은 ''무사도''와 중국 고전 연구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1888년 도쿄 제국 대학에서 영국법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법무성에 들어가, 도쿄 고등법원 원장, 최고재판소 검사 및 민형사국 국장을 역임했다. 1909년에는 일본 제국 의회의 전현직 의원 25명을 뇌물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도록 했다.
1911년 대역 사건의 수석 검사였으며,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메이지 천황을 암살하려던 이 음모사건에서, 고토쿠 슈스이와 일본 페미니즘의 칸노 스가를 포함한 12명의 사형을 이끌었다.
1911년 법무 차관, 1912년 검찰총장으로 승진했다. 1915년에는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총리대신의 내무 대신 오우라 가네타케를 오우라 사건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뇌물 혐의로 사임하도록 강요했다. 1921년에는 최고 재판소의 최고 재판관이 되었다.
히라누마는 일본 정당 내 부패와 부도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사회주의와 자유 민주주의와 같이 외국의 위협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경계했다. 히라누마가 법무성 내에서 승진하면서 그는 스즈키 기사부로와 시오노 스에히코를 포함한 그의 후배들 사이에서 상당한 추종자를 얻었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이후 구성된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제2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24년 1월, 토라노몬 사건으로 인해 내각과 함께 사임했다.
4. 1. 국본사 결성과 활동
히라누마는 일본 정당 정치의 부패와 부도덕을 강하게 비판했고,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와 같이 천황 중심 체제를 위협하는 사상에도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1921년, 히라누마는 아라키 사다오 육군 장군과 함께 국가주의 단체인 고쿠혼샤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같은 해 10월 대심원장에 임명되었다.제2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법무대신으로 재임하면서, 사상경찰을 설립하여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 체제 위협 사상에 대처했다. 1923년 말 호랑이 문 사건 발생으로 국본사에는 육해군 장관, 고급 사법 관료, 추밀원, 귀족원 등의 유력자들이 참여하여, 히라누마는 보수·우파 세력의 중심인물로서 정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924년 추밀 고문관에 임명되었고, 1926년에는 추밀원 부의장에 취임함과 동시에 화족의 남작 작위를 받았다. 히라누마가 1936년 추밀원 의장에 취임하면서 국본사는 해산했다.
4. 2. 추밀원 활동
히라누마는 1924년 귀족원 의장이 된 후 추밀원에도 임명되었다.[2] 1926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히라누마는 추밀원에서 10여 년간 재임하며 정계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제2차 와카쓰키 내각과 하마구치 내각의 경제 개혁에 강하게 반대했다.[2]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히라누마는 일본 제국 육군을 강력히 지지했고, 만주국 수립을 도왔다. 국제 연맹이 이를 문제 삼자 일본의 국제 연맹 탈퇴를 주도했다.[2] 1934년에는 데이진 사건 수사를 지휘하여 사이토 내각을 사임하게 만들었다.[2] 1936년에는 추밀원 의장에 임명되었다.[2]
히라누마는 추밀원 재직 중에도 법무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히라누마와 그의 측근들은 공산주의와 '국체'에 대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치안유지법 채택을 주도했다.[2]
1930년대에 히라누마는 총리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겐로 사이온지 긴모치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사이온지는 의회 정부 지지자로서 정당 내각을 훼손한 히라누마를 싫어했고, 파시즘과 가깝다고 여겨지는 고쿠혼샤의 영향력을 경계했다.[2]
1945년 4월, 히라누마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의 뒤를 이어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2] 포츠담 선언 수락을 둘러싼 어전 회의에서 히라누마는 육군 측의 4개 조건안에 반대하고 평화 조건은 국체 옹호에만 한정할 것을 주장했다.
4. 3. 내각 총리 취임과 사임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1939년 1월 5일부터 1939년 8월 30일까지 일본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그의 내각은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소련에 대항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 휩싸였다. 히라누마는 반공 협정은 원했지만, 군사 동맹이 미국 및 영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1939년 8월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자, 히라누마 내각은 외교 정책 문제와 노몬한 사건 당시 몽골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대패한 것을 이유로 사임했다. 히라누마는 "유럽의 천지는 복잡괴기한 신정세를 낳았다"라는 성명을 남기고 총사퇴했다.
4. 4. 내무 대신 재임과 신체제 운동 비판
히라누마는 제2차 고노에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다시 입각하여 국가 신도를 강력히 장려하였다. 그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의 강경 외교와 3국 동맹을 강하게 반대하였다.[25]1940년 7월 고노에 후미마로가 다시 총리로 임명된 이후, 히라누마는 그가 추진한 신체제 운동에 대한 보수적 반동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히라누마는 대정익찬회를 비판하였고, 아리마 요리야스, 하시모토 긴고로, 나카노 세이고와 같은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급진파가 새로운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다.[26]
고노에 자신도 신체제 운동이 너무 급진적으로 변했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히라누마는 1940년 12월 내각에 내무대신으로 입각했다. 히라누마는 대정익찬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노력했고, 1941년 1월 제국 의회에서 대정익찬회가 정치를 하지 않고 단지 국가를 지원하는 공공 단체로서의 역할만 할 것이라고 밝혔다. 3월에는 대정익찬회의 지도부가 교체되었고, 4월에는 대정익찬회가 내무성의 감독과 통제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내무대신으로서 그는 국가 신도의 강력한 옹호자였다. 히라누마는 "우리는 고대 의식을 자세히 연구하고 행정 업무와 국가의 일반적인 삶에 그 적용을 고려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히라누마는 마쓰오카 요스케 외무대신의 정치 및 외교적 행위와 1940년 9월 일본 제국,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사이에 체결된 삼국 동맹 조약에 강하게 반대했다. 1941년 7월, 마쓰오카를 제거하기 위해 내각 개편이 이루어졌으며, 이는 부분적으로 히라누마의 책략에 따른 것이었다.
고노에 후미마로의 신체제 운동에 관해서는 황도파 군인과 함께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는 관념 우익의 총수였던 히라누마가, 신체제 운동을 나치 독일의 모방으로 간주하여 반발했기 때문이다. 히라누마는 나치를 사회주의 사상의 일종으로 경멸했다.
내무대신에 취임한 히라누마는 재계로부터 비판을 받았던 경제 신체제 요강을 무력화시키고, 신체제 추진파로부터 협력적이라고 칭찬받았던 야노 겐조 도야마현 지사를 휴직 처분한 것을 시작으로 내무성의 인사를 일신했다. 또한 이 원안을 작성한 기획원의 관료들을 공산주의 운동 및 인민전선 운동과 관련된 자로 체포를 지시하고 (기획원 사건), 그 여파로 기시 노부스케 상공 차관을 사임으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히라누마는 나치형 통제 경제를 목표로 하는 관료 그룹을 차례로 추방했다. 또한 히라누마는 대정익찬회를 공사 결사 (치안경찰법 하에서, 정치와 관계없는 공공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로 규정하여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아리마 요리야스 등을 사임시켜 신체제 추진 세력을 더욱 후퇴시켰다.
5.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쇼와 천황의 비공식 자문역인 주신(重臣)으로 활동했다. 1945년 4월 다시 추밀원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일본 항복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 1952년에 가석방되었으나, 가석방 직후 사망하였다. 그의 묘는 도쿄 외곽의 다마 묘지에 있다.
5. 1. 중신 활동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히로히토 천황의 비공식 선임 고문인 '주신'(重臣)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2] 1940년 11월, 마지막 생존 메이지 시대의 ''겐로'' 고문인 사이온지 긴모치 공이 사망하면서, 히라누마는 '주신'을 새로운 '겐로' 고문단의 핵심으로 여겼다.[2] 이 새로운 그룹에는 전 총리인 요나이 미쓰마사, 아베 노부유키, 고노에 후미마로 등이 포함되었다.[2]전쟁 말기인 1945년 4월, 히라누마는 다시 추밀원 의장에 임명되었다.[2] 그러나 일본의 항복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 1952년에 석방되었고, 석방 직후 사망하였다.[2]
전시 하에서 히라누마는 중신으로서 오카다 게이스케, 고노에 후미마로, 와카쓰키 레이지로 등과 함께 도조 내각 타도에 활약했다.[25] 내무성, 검찰, 우익 세력 등에 큰 영향력을 가진 히라누마의 존재는 평화파 중신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의 저택에서 반 도조파 중신들의 비밀 회합이 열리기도 했다.[25]
포츠담 선언 수락을 둘러싼 어전 회의에서는 육군 측의 4개 조건안에 반대하여 평화 조건은 국체 옹호에만 한정할 것을 주장했다.[25] 히로시마 원폭 투하 및 소련 참전 직후,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는 어전 회의에서 히라누마는 애매한 표현으로 수락 쪽에 한 표를 던졌다.[27] 그러나 도고 시게노리 외상이 수락안에서 천황의 취급을 변경하여 연합국으로부터 최초의 수락안을 거절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27]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쇼와 천황 독백록』에서 쇼와 천황에게 "결국,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라고 해야 한다"라고 혹평받았다.[27] 종전 결정에 반발하는 세력에 의해 자택이 방화되기도 했다.[27]
5. 2. A급 전범 재판과 사망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2] 1952년에 가석방되었으나, 가석방 직후 사망하였다.[2] 그의 묘는 도쿄 외곽의 다마 묘지에 있다.6. 평가와 영향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서양의 법학과 사법 행정 제도를 일본에 도입하는 데 기여했지만, 개인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파시즘 등 서양 사상을 경계하고 동양 사상과 도덕을 중시했다. 그는 막부 말기 쓰야마 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학생 시절에는 국학(國學)과 한학(漢學)을 공부해 한적(漢籍)에 대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31]
히라누마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신체제 운동에 대해 황도파 군인들과 함께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관념 우익의 총수였던 히라누마는 신체제 운동을 나치 독일의 모방으로 간주하여 반발했다. 그는 나치를 사회주의 사상의 일종으로 경멸했다.[25][26]
1940년 제2차 고노에 내각에서 히라누마는 무임소 국무상으로 입각한 후, 신체제 추진파를 각료에서 추방하고 황도파 군인의 거물인 야나가와 헤이스케를 사법상, 자신을 내상으로 임명했다. 이는 고노에가 관념 우익에 굴복하고 신체제 운동에서 후퇴했음을 의미한다.
내상 취임 후, 히라누마는 재계의 비판을 받던 경제 신체제 요강을 무력화하고, 신체제 추진파로부터 협력적이라고 칭찬받았던 야노 겐조 도야마현 지사를 휴직 처분했다. 또한 내무성 인사를 일신하고, 기획원 관료들을 공산주의 및 인민전선 운동 관련자로 체포하도록 지시했다. (기획원 사건) 그 여파로 기시 노부스케 상공 차관이 사임했다. 히라누마는 나치형 통제 경제를 목표로 하는 관료 그룹을 차례로 추방하고, 대정익찬회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여 신체제 추진 세력을 더욱 후퇴시켰다.
히라누마는 미국 주일 대사 조지프 그루 등과 면회하여 악화된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목표로 했다. 당시 히라누마의 행동 목적은 중앙 정계에서 '친독일 색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1941년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히라누마는 내각 참의 겸 무임소 국무대신이 되어 자신의 심복인 다나베 하루미치를 내무대신에 앉혔다. 그는 대미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하는 제3차 고노에 내각의 실력자로 여겨졌으나, 8월 14일 우익 단체 근왕참궐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전시 중에는 중신으로서 오카다 게이스케, 고노에 후미마로, 와카쓰키 레이지로 등과 함께 도조 내각 타도에 활약했다. 내무성, 검찰, 우익 세력 등에 큰 영향력을 가진 히라누마의 존재는 평화파 중신들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의 저택에서 반 도조파 중신들의 비밀 회합이 열리기도 했다.
1945년 4월, 수상이 된 스즈키 간타로의 뒤를 이어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히라누마는 전시 중 평화파와 협력하는가 하면 항복 반대를 주장하기도 하고, 천황에게 상주할 때 명확한 주장을 보이지 않는 등 일관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및 소련 참전 직후,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는 어전 회의에서 히라누마는 애매한 표현으로 수락 쪽에 한 표를 던졌다. 그러나 도고 시게노리 외상의 수락안에 이의를 제기하여 연합국으로부터 최초 수락안을 거절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27]
이러한 애매한 태도는 『쇼와 천황 독백록』에서 쇼와 천황에게 "결국,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혹평받았다. 종전 직전에는 강경파에게 두 번이나 목숨을 위협받았고, 자택이 방화되기도 했다. (궁성 사건)
히라누마의 발언:
- "외교는 건국의 황모(皇謨)에 따라 도의를 기초로 세계 평화와 문화에 기여하는 것을 제1의로 하며, 이 방침 하에 대유럽 정책을 고려하여 여러 차례 이를 궐하에 주상해 왔다." (1939년 8월 28일)
- "아무래도 일본인은 서양 물을 따르는 경향이 있다. 특히 지위에 있는 사람 - 정치인이라고 불리는 사람, 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한때 민주주의 설이나 국제주의 설에 심취했다. 요새는 미국과 영국 숭배를 그만두고 독일 숭배가 되어 나치에 빠져 있다. 그리고 저런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국체에 반한다." "이것은 국가사회주의로, 소련의 적과 그렇게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 국체에 반하는 점은 거의 마찬가지이며, 모두 해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1942년 5월 19일)
- "일본은 군주국이라고 한다. 군주국이라면 서양에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 일본은 만세일계라고 한다. 그런 것이라면 에티오피아가 일본보다 오래되지 않았느냐고 반박한다. 군주는 통치권을 갖는다든가, 만세일계라든가, 그런 형식적인 것으로는 국체가 분명해지지 않는다. 어디에 만세일계가 있는지, 황실과 국민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일본에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자연스러우므로 누구나 알 수 있다. 일본의 국체도 그 방면에서 논해야 한다." (1942년 5월 19일)
- "사회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언동을 하는 자가 있다면, 법규가 명령하는 바에 따라 기회를 봐서 처치를 하고, 극력 그 방지를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진 후 응급 조치로 발포된 긴급 칙령 중에는 민사 또는 형사에 관한 것이 적지 않다. 이들 칙령은 단지 지진 지역의 재판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재판소에서도 적용되어야 할 경우가 있으므로, 각자 칙령 발포의 사정에 비추어, 그 성지의 있는 바를 체인하고 부하를 지도하여 그 적용을 잘못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법상 훈시』, 1923년).
- "천지의 황도는 곧 만물로 하여금 그 바를 얻게 하는 것에 귀착한다." "동아의 신질서 건설 또한 이 근본 정신을 기초로 그 위에 공작이 진행되어야 한다." "황실을 보필하는 만민 보필의 정신으로 모든 노력을 이에 기울여야 한다." "소기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는 한, 사변은 종결되지 않는다." (『제74회 제국 의회 시정 방침 연설』, 1939년)
7. 연보
- 1867년
- * 9월 28일(양력 10월 25일): 쓰야마 번 히라누마 가문에서 태어남.
- 1888년
- * 7월 10일: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수석 졸업.
- * 12월 4일: 사법성 참사관 시보.
- 1890년
- * 8월 20일: 판사 시보·시바구 치안 재판소 근무.
- * 10월 22일: 교바시구 재판소 판사.
- * 12월 25일: 도쿄 지방 재판소판사.
- 1892년
- * 11월 19일: 지바 지방 재판소 부장.
- 1893년
- * 12월 15일: 요코하마 지방 재판소 부장.
- 1895년
- * 9월 12일: 도쿄 고소원 판사.
- 1898년
- * 7월 1일: 도쿄 고소원 부장.
- 1899년
- * 4월 17일: 도쿄 고소원 검사.
- * 4월: 게이오기주쿠 대학법학부정치과 교수(채권 담당, 1907년까지 재임).
- 1903년
- * 10월 14일: 사법성 참사관 겸 검사.
- 1905년
- * 11월 6일: 대심원 검사.
- 1906년
- * 1월 8일: 사법성 민형국 국장 겸 검사.
- 1907년
- * 3월 25일: 영국, 독일, 프랑스 파견(1908년 2월 14일 귀국).
- * 6월 13일: 법학 박사.
- 1909년
- * 7월 1일: 대심원 검사국차석 검사 겸 민형국장.
- 1911년
- * 4월 15일: 사법성 형사국장.
- * 9월 6일: 제2차 사이온지 내각에서 사법 차관에 취임.
- 1912년
- * 12월 21일: 검사총장에 취임.
- 1921년
- * 10월 5일: 대심원장에 취임.
- 1922년
- * 3월: 니혼 대학 학장에 취임(- 1923년 11월).
- 1923년
- * 9월 6일: 제2차 야마모토 내각에서 사법 대신에 취임.
- * 11월: 니혼 대학 총장에 취임(- 1933년 3월).
- * 수양단 단장에 취임(- 1936년).
- 1924년
- * 1월 9일: 귀족원 의원.
- * 1월 25일: 금계간 시후[33]
- * 2월 2일: 추밀 고문관.
- * 국본사 창립.
- 1926년
- * 4월 12일: 추밀원 부의장에 취임.
- * 4월 23일: 의정관에 취임.
- * 10월 28일: 남작 수작.
- 1936년
- * 3월 13일: 추밀원 의장에 취임(- 1939년 1월 5일).
- * 4월 6일: 의정관에 재임명.
- 1939년
- * 1월 5일: 내각총리대신에 취임.
- * 8월 30일: 내각총리대신을 사임.
- 1940년
- * 12월 6일: 제2차 고노에 내각의 국무 대신에 취임.
- * 12월 21일: 제2차 고노에 내각의 내무 대신에 취임(- 1941년 7월 28일).
- 1945년
- * 4월 9일: 추밀원 의장에 재임명(- 12월 3일)
- * 12월 2일: 연합국 최고사령관 총사령부로부터 A급 전범으로 지정됨.
- 1946년
- * 4월 29일: 스 가모 구치소 입소.
- 1948년
- * 11월 12일: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무기 징역 판결.
- 1952년
- * 6월 14일: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에 입원.
- * 8월 22일: 사망. 묘소는 오카야마현 쓰야마시의 안국사와 도쿄의 다마 영원.
8. 가족 관계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평생 독신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20대 시절 육군성 법관 부장 등을 맡았던 오카모토 류토쿠의 딸과 결혼했다가 단기간에 이혼하고 재혼하지 않았다.[34]
조부 오리우에몬 야스노부는 명필가였으며, 쓰야마번의 유필을 맡았다. 아버지 신은 번주(유학자)인 누마 오리우에몬 야스노부의 아들로 글과 서예에 능했고, 폐번치현까지는 구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노리의 교육 담당을 맡았다. 기이치로는 그 차남이며, 여동생도 있다. 할머니 치즈는 자장가로 손자들에게 당시를 불렀다고 한다.
중의원 의원을 역임한 히라누마 다케오는 기이치로의 양자이다. 하지만, 기이치로의 형이자 와세다 대학교 총장(총장이 아님)을 역임한 경제사학자 히라누마 요시로의 증손이며, 혈연상으로는 기이치로의 증질손이다. 다케오의 아버지는 다이쿄 석유에서 근무한 나카가와 교시로이다. 교시로는 이시카와현가나자와시 출신의 내무 관료 나카가와 유지로의 넷째 아들이었다. 또한, 다케오의 어머니는 요시로의 손녀 세쓰코(도쿄 재판에서 히라누마의 대리로서 증언대에 선다)이다. 즉, 다케오는 히라누마 가문과는 외가 쪽으로 연결된다. 처음에는 다케오만 양자로 삼을 예정이었지만, 결국 교시로 일가를 양자로 삼아 히라누마 성을 사용하게 했다.
다케오의 아내 마사코는 정의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증손이다. 따라서 기이치로는 도쿠가와 가문과 친척 관계에 있다. 사이온지 긴모치, 고노에 후미마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호소카와 모리히로 4명을 제외하면, 도쿠가와 가문과 직접적으로 친척 관계에 있는 내각총리대신 경험자는 기이치로뿐이며, 메이지 이전의 권력자(정의대장군)와 이후의 권력자(내각총리대신)가 연결되는 드문 예이다.
히라누마 가는 에도 시대에 쓰야마 번사로서 번주 마쓰다이라 가를 섬긴 무사 가문이었다. 히라누마 가에 관해 『일본 현금 인명 사전』(1900년)에 따르면, "…그 선조는 상세하지 않으나, 8대 조 오리우에몬 노부요시는 슨푸[35] 요리키였으며, 궁술에 능했고 교호 연간[36]에 쓰야마 번의 사적에 올랐다"고 한다. 기이치로의 7대 전에 슨푸에서 쓰야마로 옮겨왔다. 히라누마 가는 대대로 양자가 가독을 상속했지만, 기이치로의 아버지 스스무가 처음으로 적자였다.
참조
[1]
웹사이트
平沼騏一郎 | 近代日本人の肖像
http://ndl.go.jp/por[...]
[2]
뉴스
九州の大疑獄事件 : 九管、製鉄所、鉱務署の贈収賄
神戸大学経営研究所『新聞記事文庫』
1917-03-10
[3]
웹사이트
【昭和の首相】平沼赳夫氏が「平沼騏一郎」を語る 大切にしたのは「国体」「右翼の総帥」は右翼や軍部ににらまれた(4/7ページ)
https://www.sankei.c[...]
2014-09-04
[4]
서적
ユリウス・ビンダー(1870 - 1939年) — 帝国とナチスの間の法哲学者
https://www.ritsumei[...]
[5]
서적
萩原2021
[6]
서적
平沼騏一郎回顧録
[7]
웹사이트
平沼 騏一郎
http://www.libnet.pr[...]
岡山県立図書館
2016-05-10
[8]
서적
萩原2021
[9]
서적
萩原2021
[10]
서적
萩原2021
[11]
서적
現今日本名家列伝
https://dl.ndl.go.jp[...]
日本力行会出版部
1903
[12]
문서
司法省民刑局長兼検事平沼騏一郎外一名欧米各国ヘ被差遣ノ件
国立公文書館
[13]
웹사이트
幸徳事件
http://members2.jcom[...]
[14]
서적
いわゆるA級戦犯
幻冬舎
2006-06
[15]
문서
憲法の番人であった枢密院の議長は空席であった
[16]
서적
思想検事
岩波新書
2000-09
[17]
문서
宇垣一成
[18]
서적
1932年の大日本帝国
草思社
2020
[19]
문서
朝鮮総督の時期に子爵となっていた
[20]
웹사이트
津山瓦版 - 知新館(旧平沼騏一郎別邸)
http://www.e-tsuyama[...]
[21]
잡지
巣鴨日記
文藝春秋
1952-08
[22]
웹사이트
有田=クレーギー会談(ありたクレーギーかいだん)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2-25
[23]
문서
総辞職時の発言
[24]
서적
事変はどう片付くか
実業之日本社
1939-07
[25]
웹사이트
公事結社(コウジケッシャ)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DIGITALIO
2024-10-15
[26]
웹사이트
平沼騏一郎(ヒラヌマキイチロウ)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DIGITALIO
2024-10-15
[27]
문서
枢密院は条約の批准権を持っていたため、条約の一種と見なされたポツダム宣言受諾は平沼の同意がなければ正式決定できなかった
[28]
뉴스
梨本宮・平沼・平田ら五十九人に逮捕命令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94
[29]
뉴스
平沼騏一郎氏
朝日新聞
1952-08-22
[30]
뉴스
平沼元首相死去
読売新聞
1952-08-23
[31]
논문
日本における総理大臣の身長と好ましさの関係
川村学園女子大学研究紀要
2021
[32]
뉴스
横綱は三井高公、映画では入江たか子
毎日コミュニケーションズ
1994
[33]
간행물
官報
1924-01-29
[34]
서적
平沼騏一郎
中央公論新社
2021-08-25
[35]
문서
駿府は今の静岡市
[36]
문서
享保
[37]
간행물
法廷証第107号: [平沼騏一郎關スル人事局履歴書]
[3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1-12-24
[3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2-12-26
[4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5-11-27
[4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8-09-21
[4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0-11-12
[4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2-12-18
[4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7-12-28
[45]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3-01-31
[4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5-31
[4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1-06-11
[4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8-02-22
[4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34-12-29
[5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1-12-28
[5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3-06-27
[5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4-12-28
[5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7-03-31
[5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4-04-14
[55]
간행물
辞令
官報
1916-12-13
[5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16-01-20
[5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7-04-20
[5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28-04-23
[59]
간행물
辞令二
官報
1931-12-28
[60]
간행물
辞令二
官報
1941-10-23
[61]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38-07-13
[62]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38-11-04
[63]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40-01-09
[64]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40-09-11
[65]
아카이브
谷正之外二十五名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