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수페르가의 비극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수페르가의 비극은 1949년 5월 4일, 이탈리아의 축구 클럽 AC 토리노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돌아오던 중 악천후로 인해 수페르가 대성당에 추락하여 탑승자 31명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이 사고로 AC 토리노는 세리에 A 5연패를 눈앞에 두고 주전 선수들을 잃었으며,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역시 전력에 큰 타격을 입었다. 사고 이후 이탈리아 사회는 큰 슬픔에 잠겼으며, 이탈리아 축구는 1950년 FIFA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탈락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수페르가 - 수페르가 성당
    이탈리아 토리노의 수페르가 언덕에 위치한 수페르가 성당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의뢰로 필리포 유바라가 설계하여 토리노 전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설된 바로크-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이며 사보이 왕가의 묘지로 사용되었으나, 1949년 토리노 FC 선수단 항공기 추락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수페르가의 비극
사고 개요
사고 종류통제 비행 충돌 (CFIT)
원인악천후로 인한 낮은 시정
발생 위치이탈리아 토리노 수페르가 언덕
좌표(좌표 정보 없음)
날짜1949년 5월 4일
항공편 정보
항공기 종류피아트 G.212 CP
등록 기호I-ELCE
운영사아비오 리네에 이탈리아네
출발지리스본
경유지바르셀로나
목적지토리노
탑승자 정보
승객27명
승무원4명
사망자31명 (전원)
생존자0명
기타 정보
다른 이름
피아트 G.212 I-ELCE 트라제디아 수페르가
사고 후 피아트 G.212 항공기의 잔해

2. 배경

1949년 5월 4일, AC 토리노 선수단을 태운 아비오 리네 이탈리아네(Avio Linee Italiane) 소속 피아트 G.212CP 항공기가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S.L. 벤피카와 친선 경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중 수페르가 언덕에 추락했다.[1] 이 사고로 선수 18명, 감독 및 클럽 관계자 5명, 승무원 등 탑승객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당시 AC 토리노는 "그란데 토리노 (Grande Torino)"라고 불리며, 세리에 A 5연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리그 우승이 확정된 AC 토리노의 리그 우승을 인정하였으나, AC 토리노는 정정당당하게 경기를 치르겠다는 의지로 유소년팀을 꾸려 남은 4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승점으로도 우승을 확정지었다. 상대 팀들도 이 사고에 조의를 표하며 유소년팀으로 경기에 임했다.

이 사고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주력 선수 대부분을 잃었고, 1950년 FIFA 월드컵에서 디펜딩 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 패해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1949년 5월 26일, 리버 플레이트와 세리에 A의 나머지 강팀에서 선수를 차출하여 "토리노 Simbolo"(심볼릭 토리노)를 결성, 이 사고의 피해자 가족들을 위문하기 위해 자선경기를 실시했고,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사고 기종과 동일 기종인 피아트 G.212


사우로 토마는 반월판 부상으로, 예비 골키퍼 레나토 간돌피는 다른 이유로 여행에 참가하지 않았다. 라디오 해설자 니콜로 카로시오, 루이지 줄리아노 (토리노 유소년 팀 주장), 비토리오 포초 등은 여러 가지 이유로, 토리노의 회장 페루초 노보는 독감으로 인해 여행에 동행하지 않았다.[1]

2. 1. 사고 당시 토리노 FC

당시 AC 토리노는 이탈리아 최고 리그인 세리에 A의 강호 클럽으로, 팬들에게 "Grande Torino"(위대한 토리노)라고 불렸다. 1948-49 시즌에는 에이스인 발렌티노 마촐라를 중심으로 리그 5연패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1]

사고로 토리노 선수단 전체(거의 모두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였다)가 사망했다.[1] 헝가리 난민 출신 감독 에르뇌 에그리 에르브슈타인, 잉글랜드인 수석 코치 레슬리 리브슬리를 포함한 구단 관계자들 또한 사고로 사망했다.[1] 수비수 사우로 토마는 부상당한 반월판 때문에, 예비 골키퍼 레나토 간돌피는 다른 이유로 여행에 참가하지 않았다.[1]

AC 토리노

2. 2. 사고기 정보

사고기는 아비오 리네 이탈리아네 소속의 3개 엔진을 가진 피아트 G.212CP 기종으로, 항공기 등록번호는 I-ELCE였다.[2]

3. 추락

1949년 5월 4일, 아비오 리네 이탈리아네 소속 항공기 등록번호 I-ELCE (피아트 G212CP)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발하여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경유, 토리노-에어이탈리아 공항으로 향했다. 항공기 지휘관은 메로니 중령이었다.[2]

14시 50분, I-ELCE는 토리노로 출발했다. 비행 경로는 카프 데 크레우스, 툴롱, 니스, 알벵가, 사보나를 지나도록 되어 있었다. 사보나 상공에서 비행기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피에몬테의 수도인 토리노로 향했으며, 30분 안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

그러나 토리노는 번개와 구름으로 인한 기상 악화로 접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비행기는 조종사의 시야에 의존해서 착륙을 시도해야 했다. 17시 03분, 착륙 준비를 위해 좌회전을 하여 수평 비행을 하던 중 수페르가 대성당 제방 뒷면에 충돌했다. 부분적으로 손상되지 않은 항공기의 유일한 부분은 미익이었다.[2]

17시 05분, 토리노-에어이탈리아 공항 관제탑은 I-ELCE를 호출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다. 탑승한 31명 전원이 사망했다.[2]

수페르가 대성당의 뒷벽. 대중적으로는 비행기가 손상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성당 확장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완료되지 않았다.


3. 1. 사고 원인

정확한 사고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악천후와 조종사의 판단 착오가 주요 원인으로 추정된다. 1949년 5월 4일 16시 55분, 토리노-에어이탈리아 공항은 조종사에게 구름이 거의 지면에 닿고, 소나기, 강한 남서풍, 매우 나쁜 수평 시정(40m) 등의 기상 상황을 전달했다.[2]

관제탑의 위치 요청에 조종사는 16시 59분에 "고도 2m. 피노 토리네세에 대한 QDM, 그 다음 수페르가 대성당에서 자를 겁니다."라고 응답했다. 피노 토리네세는 토리노 남동쪽에 위치하며, 요청 시 QDM (전파 지원으로 정면 접근 시 취해야 할 자기 코스)을 제공하는 방향 탐지기가 있었다.[2]

접근 시 비행기는 서쪽으로 약 약 14.48km 떨어진 에어이탈리아 활주로와 고도 305m에서 정렬되었고, 피노는 비행기 코에서 290°였다. 강한 측풍으로 인해 비행기가 우현으로 표류하여 강하 축에서 벗어나 수페르가 대성당 언덕과 정렬되었을 수 있다는 이론이 있다. 최근 조사에서는 고도계가 오작동하여 2000m에서 고정되었을 가능성도 제시되었으며, 이로 인해 조종사들은 더 높은 고도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2]

17시 03분, 비행기는 좌회전을 하여 수평 비행으로 돌아와 착륙 준비를 위해 정렬하던 중 수페르가 대성당의 제방 뒷면에 충돌했다. 조종사는 수페르가 언덕이 오른쪽에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눈앞에 나타났고, 속도 180km/h, 시정 40m의 상황에서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잔해에서는 착륙 회피 시도가 있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2]

4. 사망자 명단

이 사고로 탑승객 31명 전원이 사망했다. 수페르가 대성당에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비극 50주년을 기념하여 E. Eandi가 제작한 작품

4. 1. 선수단

선수나이국적포지션국가대표
발레리오 바치갈루포25이탈리아|이탈리아it골키퍼이탈리아|이탈리아it
알도 발라린27이탈리아|이탈리아it수비수이탈리아|이탈리아it
디노 발라린23이탈리아|이탈리아it수비수
에밀 봉조르니28프랑스|프랑스프랑스어공격수프랑스|프랑스프랑스어
에우제비오 카스틸리아노28이탈리아|이탈리아it미드필더이탈리아|이탈리아it
루벤스 파디니21이탈리아|이탈리아it미드필더
굴리엘모 가베토33이탈리아|이탈리아it공격수이탈리아|이탈리아it
루제로 그라바27이탈리아|이탈리아it공격수
주세페 그레자르30이탈리아|이탈리아it미드필더이탈리아|이탈리아it
에치오 로익29이탈리아|이탈리아it미드필더이탈리아|이탈리아it
비르질리오 마로소23이탈리아|이탈리아it수비수이탈리아|이탈리아it
다닐로 마르텔리24이탈리아|이탈리아it미드필더
발렌티노 마촐라30이탈리아|이탈리아it미드필더이탈리아|이탈리아it
로메오 멘티29이탈리아|이탈리아it공격수이탈리아|이탈리아it
피에로 오프레토22이탈리아|이탈리아it수비수
프랑코 오솔라27이탈리아|이탈리아it공격수이탈리아|이탈리아it U-20
마리오 리가몬티26이탈리아|이탈리아it미드필더이탈리아|이탈리아it
율리우스 슈베르트26헝가리|헝가리hu미드필더체코슬로바키아|체코슬로바키아cs


4. 2. 코칭 스태프

이름직책비고
에르뇌 에그리 에르브슈타인감독헝가리 출신
레슬리 리브슬리코치영국 출신
오타비오 코리나마사지 치료사

[1]

4. 3. 클럽 관계자

이름직책비고
아르날도 아그니세타단장
안드레아 보나유티여행 기획자토리노 FC의 경기일정 담당.[1]
이폴리토 시발레리여행 수행원[1]


4. 4. 기자

이름직책비고
레나토 카살보레저널리스트투토스포르트 창립자
루이지 카발레로기자라 스탐파 소속
레나토 토사티기자가제타 델 포폴로 소속


4. 5. 승무원

이름직책
피에를루이지 메로니기장
체사레 비안카르디부기장
첼레스티노 디잉카기술자
안토니오 팡라치무선 통신사


5. 사고 여파

제2차 세계 대전으로 1944년에 중단되기 전 마지막으로 세리에에서 우승했던 전설적인 토리노팀 선수들의 생명을 앗아간 이 사고는 이탈리아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1] 사고 당시 토리노는 세리에 A 최강팀으로 이미 리그 우승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이 사고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주력 선수 대부분을 잃었고, 1950년 FIFA 월드컵에서 디펜딩 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

1949년 5월 26일, 아르헨티나의 강호 리버 플레이트와 세리에 A의 나머지 강팀에서 선수들을 차출하여 "토리노 Simbolo"(심볼릭 토리노)를 결성, 이 사고의 피해자 가족들을 위문하기 위해 자선경기를 개최했다. 이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1]

사고로 30세에 세상을 떠난 AC 토리노의 에이스 발렌티노 마촐라의 아들 산드로 마촐라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인테르에 입단, 1960~70년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가 되었다.[3]

5. 1. 이탈리아 축구계에 미친 영향

AC 토리노는 사고 이후 리그 잔여 경기를 유소년 팀으로 치렀고, 상대 팀들도 "Grande Torino"에 경의를 표하며 유소년 팀으로 경기에 임했다.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AC 토리노를 1948-49 시즌 세리에 A 우승팀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AC 토리노는 사고의 충격을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오랜 기간 동안 부진을 겪었다. 1959-60 시즌에는 세리에 B로 강등되기도 했으며, 다음 우승까지 27년이 걸렸다.[3]

이 사고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축 선수들을 잃은 이탈리아 축구계는 큰 손실을 입었다. 사고 다음 해에 열린 1950년 FIFA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은 팀 재건에 실패하여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선수들의 비통한 기억 때문에 브라질까지 배를 타고 이동한 것도 팀 부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3]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매년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토리노 근처 그루글리아스코의 박물관에는 비행기 잔해와 선수들의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1]

5. 2. 이탈리아 사회에 미친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는 사회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적 영웅이었던 "그란데 토리노" 선수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탈리아 사회 전체에 큰 슬픔과 충격을 안겨주었다.[1]

이 사고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주력 선수 대부분을 잃었고, 1950년 FIFA 월드컵에서 디펜딩 챔피언임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 패하여 조별 리그에서 탈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1] 사고의 충격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이탈리아 대표팀은 브라질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1]

장례식 날에는 50만 명의 사람들이 토리노 거리에 나와 선수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1] 이탈리아 축구계는 큰 슬픔에 잠겼고, 희생자 전원을 추모하는 국장이 거행되었다.[1]

AC 토리노는 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 주전팀 전체를 잃었지만, 유스팀으로 남은 경기를 치렀고, 상대 팀들도 이에 경의를 표하며 유스팀으로 경기에 임했다.[1] 결국 AC 토리노는 1948-49 시즌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지만,[1] 이후 클럽 재건에 어려움을 겪으며 1959-60 시즌에는 세리에 B로 강등되기도 했다.[1] 다음 우승까지 무려 27년이 걸렸다.[1]

사고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리버 플레이트와 세리에 A의 다른 강팀에서 선수들을 차출하여 "토리노 Simbolo"(심볼릭 토리노)를 결성, 자선 경기를 개최하여 피해자 가족들을 위문하기도 했다.[1]

5. 3. 추모 및 기념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50만 명의 사람들이 토리노 거리로 나와 선수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했다.[1]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묘비는 수페르가 대성당에 설치되었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묘비


토리노 근처 그루글리아스코의 "무세오 델 그란데 토리노 에 델라 레겐다 그라나타"(Museo del Grande Torino e della Leggenda Granata) 박물관에는 비행기 잔해를 포함한 사고 관련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사고 50주년인 2008년 5월 4일에 개관하였다.[1] 18명의 선수 중 8명(코치 2명과 언론인 레나토 카살보레 포함)은 토리노의 ''치미테로 모누멘탈레''(Cimitero Monumentale)에 묻혔다.[1]

5. 4. 생존자

사우로 토마는 반월판 부상으로, 예비 골키퍼 레나토 간돌피는 세 번째 골키퍼 디노 발라린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원정에 참가하지 못했다.[1] 라디오 해설자 니콜로 카로시오, 루이지 줄리아노 (토리노 유소년 팀 주장), 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비토리오 포초 등도 여러 이유로 탑승하지 않았다. 토리노의 회장 페루초 노보 역시 독감으로 인해 동행하지 않았다.[1]

참조

[1] 웹사이트 The plane crash that killed Serie A's champions and their English coach https://www.bbc.com/[...] BBC Sport 2019-01-08
[2] Youtube "Leonardo": possibili cause della sciagura di Superga: l'ipotesi dell'altimetro guasto https://www.youtube.[...]
[3] 서적 1990, l'anno dei Mondiali di.e.di. 1990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