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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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테틀(Shtetl)은 주로 19세기 러시아 제국, 폴란드 입헌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 등지에 흩어져 있던 동유럽 유대인 소도시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13세기부터 존재했던 슈테틀은 상대적으로 관용적인 시기와 빈곤과 고난의 시기를 겪었으며, 1840년대부터 경제적 변화, 반유대주의, 포그롬 등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20세기에는 혁명, 내전, 산업화, 홀로코스트로 인해 전통적인 슈테틀의 모습이 파괴되었으며, 일부는 현대에도 하시디즘 공동체 등에서 사용되기도 한다. 슈테틀은 이디시어를 사용하고 탈무드 학문에 기반한 독특한 문화를 가졌으며, 문학, 회화, 사진,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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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 집단거주지구 - 게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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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기원후 1세기경 갈릴리에서 활동한 유대인으로, 기독교의 중심 인물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며,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여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부활했다고 전해진다.
슈테틀 | |
---|---|
지리 정보 | |
일반 정보 | |
용어 | 유대인 마을 |
언어 | 이디시어 |
다른 용어 | 슈토트(shtot) (큰 슈테틀) 도르프(dorf) (작은 슈테틀) |
역사 | |
기원 | 12세기 ~ 20세기 초 |
위치 | 주로 동유럽 및 러시아 제국의 국경 지대 |
특징 | 유대인 자치 공동체 종교적, 사회적 중심지 독특한 문화 형성 (이디시 문화, 클레즈머 음악 등) |
쇠퇴 | 홀로코스트로 인한 파괴 도시화 및 이민 공산주의 정권의 탄압 |
문화 | |
사회 구조 | 케힐라(kehilla) (자치 공동체) 중심 랍비 (지도자) 다양한 직업 (장인, 상인, 학자 등) |
언어 | 이디시어 사용 |
종교 | 유대교 (주로 정통 유대교) |
음악 | 클레즈머 |
문화적 영향 | 유대인 문학 및 예술 현대 사회의 유대인 정체성 향수와 기억의 대상 |
관련 용어 | |
관련 용어 | 미아스테츠코(miasteczko) (폴란드어) 메스테치코(mestechko) (러시아어) |
2. 용어
슈테틀(שטעטלעך|shtetlekhyi)은 주로 러시아 제국 영내에 19세기에 설정된 유대인 정착촌(Pale of Settlement, 대략 오늘날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 폴란드 입헌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에 집중 분포했다. 렘베르크나 체르노비츠 같은 큰 도시들은 ''슈토트''(שטאָט|shtotyi, Stadt|슈타트de), 작은 마을은 ''도르프''(דאָרף|dorfyi)로 불렸다.[28]
은 요하난 페트롭스키-슈테른에 의해 "폴란드 귀족의 사유지인 동유럽 시장 도시로, 유대인이 주로 거주하지만 전적으로 유대인만 거주하지는 않는 곳"으로 정의된다. 1790년대부터 1915년까지 슈테틀은 또한 "러시아 관료주의의 지배를 받았다".[7]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 분할을 통해 폴란드 동부를 병합했고, 유대인 정착 지역의 유대인 정착이 허용된 지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요하난 페트롭스키-슈테른은 슈테틀을 "폴란드 귀족의 사유지인 동유럽 시장 도시로, 유대인이 주로 거주하지만 전적으로 유대인만 거주하지는 않는 곳"으로 정의했다. 1790년대부터 1915년까지 슈테틀은 또한 "러시아 관료주의의 지배를 받았다".[7] 러시아 제국이 폴란드 분할을 통해 폴란드 동부를 병합했고, 유대인 정착 지역의 유대인 정착이 허용된 지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3. 역사
슈테틀들(이디시어 복수형: שטעטלעך, ''shtetlekh'')은 주로 러시아 제국영내에 19세기에 설정된 Pale of Settlement(대략 오늘날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 폴란드 입헌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에 집중 분포했다. 렘베르크나 체르노비츠 같은 큰 도시들은 ''슈토트''(שטאָטyi, Stadtde), 작은 마을은 ''도르프''(דאָרףyi)로 불렸다.[28]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shtetls, 유대인 소도시)의 역사는 13세기 경에 시작되었다.[8] 이 역사를 통틀어, ''슈테틀''은 상대적인 관용과 번영의 시기를 겪었으며, 19세기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을 포함한 극심한 빈곤과 고난의 시기도 겪었다.
마크 즈보로프스키와 엘리자베스 헤르초크(1962)에 따르면:[9]
(yeshiva, 유대교 고등 교육기관)와 마찬가지로 거리와 시장에서도 학습 전통의 특징적인 태도와 사고 습관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동유럽 유대인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탈무드의 전통에 부합하는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검토, 분석, 재분석하려는 경향, 의미 뒤의 의미와 함축적 의미 및 이차적 결과를 탐구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실질적인 결론과 행동의 기반으로 연역적 논리에 대한 의존성을 보였다. 삶에서, 토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더 깊고 이차적인 의미를 가지며, 이를 탐구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3. 1. 쇠퇴와 붕괴
19세기 동유럽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의 은유로 사용된 슈테틀 문화는 정통파 유대교를 따르는 경건한 공동체로, 외부의 영향이나 공격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변함없는 것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거의 모든 슈테틀 공동체를 파괴했다.[8]
1840년대부터 슈테틀의 쇠퇴가 시작되었다. 경제적 환경 변화(산업화와 무역의 대도시 이동), 잦은 화재, 과잉 인구가 그 요인이었다.[10] 러시아 제국 관리들과 폴란드 지주들의 반유대주의와 1880년대의 포그롬 또한 슈테틀 주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1880년대부터 1915년까지 최대 200만 명의 유대인이 동유럽을 떠났으며, 당시 유대인 인구의 약 3/4이 슈테틀에 살았다. 홀로코스트는 이러한 마을들을 완전히 절멸시켰다.[11] 슈테틀의 모든 유대인 인구가 인근 숲에서 몰살당하거나 나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12] 일부 슈테틀 주민들은 홀로코스트 전후에 이민을 가기도 하였으나, 동유럽의 아슈케나지 유대인 공동체로서의 슈테틀과 그 문화는 나치에 의해 거의 근절되었다.[11]
나치로부터 생존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미국과 이스라엘로 엑소더스를 하였고, 일부는 러시아의 대도시로 이주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러시아의 대도시에도 유대인들이 이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882년 차르 알렉산드르 3세가 도입한 5월 법률은 유대인이 인구 1만 명 미만의 농촌 지역과 마을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20세기에 혁명, 내전, 산업화, 그리고 홀로코스트는 전통적인 슈테틀의 존재를 파괴했다.
3. 2. 현대
19세기 동유럽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묘사하는 은유로 슈테틀 문화의 개념이 사용되었다. 슈테틀은 정통파 유대교를 따르는 경건한 공동체로, 외부의 영향이나 공격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변함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거의 모든 슈테틀 공동체를 파괴했다. 나치로부터 생존한 유대인들은 대부분 미국과 이스라엘로 엑소더스를 하였고, 일부는 러시아의 대도시로 이주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에는 러시아의 대도시에도 유대인들이 이주할 수 있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에 하시드 유대교 신자들은 키랴스 조엘과 뉴 스퀘어와 같은 미국에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했으며, 특히 마을 구조를 가진 지역을 지칭하기 위해 이디시어로 "슈테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13]
유럽에서는 벨기에의 앤트워프에 있는 정통 유대교 공동체가 약 12,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 로 널리 묘사된다.[14][15] 영국의 게이츠헤드 정통 유대교 공동체도 때때로 ''슈테틀''이라고 불린다.[16][17]
체코의 브르노는 유서 깊은 유대교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디시어 단어가 현재 소멸되어가는 한텍 슬랭의 일부이다. štetl|슈테틀cs이라는 단어는 브르노 자체를 지칭한다.
아제르바이잔의 크르즈미지 가사바는 이스라엘이나 미국 외에 유일하게 100% 유대인 공동체로 여겨지며, 로 묘사되어 왔다.[18][19]
4. 문화
문화는 동유럽 유대인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묘사한다. 숄렘 알레이켐과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와 같은 작가들의 문학 작품에서 슈테틀은 외부의 영향이나 공격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이고 변하지 않는 정통 유대교를 따르는 경건한 공동체로 묘사된다.
역사적 및 문학적 저술에는 슈테틀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파괴되기 전에 해체되었다는 믿음이 있다. 그러나 브랜다이스 대학교의 동유럽 유대인 문제 연구소의 조슈아 로젠버그는 이 문화적 붕괴가 결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슈테틀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유대인 전체의 삶이 "정치적, 경제적 위기, 사회적 불확실성 및 문화적 갈등의 영구적인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로젠버그는 "해체되는 슈테틀"의 이미지 및 기타 종류의 고정관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그것은 시온주의 운동의 "반-슈테틀" 선전이었다. 이디시어와 히브리어 문학은 어느 정도까지 전체 현실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은 "평균적인 유대인"보다는 관심을 끄는 요소에 주로 초점을 맞췄다. 또한 성공적인 미국에서는 슈테틀에 대한 기억이 고통뿐만 아니라 향수와 감상주의로 물들었다.[22]
4. 1. 언어와 교육
슈테틀의 유대인들은 외부인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디시어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탈무드 학문의 전통에 뿌리를 둔 독특한 수사학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9]사람은 유창함과 간결하고 암시적인 언어 모두로 유명했다. 시장뿐만 아니라 의 학자가 자신의 지적 동료와 대화할 때, 불완전한 문장, 암시, 제스처가 전체 단락을 대체할 수 있었다. 청자는 단어 하나 또는 심지어 소리를 바탕으로 전체 의미를 이해해야 했다. 이러한 대화는 길고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으며, 흥분한 토론자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처럼 문외한에게는 이해할 수 없을 수 있었다. 동일한 언어적 절약은 가정이나 사업 환경에서도 발견될 수 있었다.
슈테틀은 강한 공동체 의식을 제공했다. 슈테틀은 "그 핵심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 문화에 기초한 신앙 공동체"였다.[20] 유대인 교육은 슈테틀에서 가장 중요했다. 남성과 소년들은 에서 하루에 최대 10시간을 공부에 헌신할 수 있었다. 탈무드 연구는 여성에게 권장되지 않았고, 여성들은 가정의 필요한 일을 수행했다. 또한 슈테틀은 회당, 의례 목욕탕, 의례 음식 가공업체와 같은 공동 기관을 제공했다.
물질적인 것은 슈테틀에서 경멸되거나 극도로 칭찬받지 않았다. 배움과 교육은 공동체의 눈에 가치를 측정하는 궁극적인 척도였으며, 돈은 지위보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슈테틀은 전체 마을과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신발 제조, 야금 또는 옷 재단과 같은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공부는 가장 가치 있고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빵을 제공하지 않고 아내에게 돈을 의존하는 배운 사람들은 비난을 받지 않고 칭찬을 받았다.
4. 2. 공동체 의식과 자선
슈테틀은 강한 공동체 의식을 제공했다. 슈테틀은 "그 핵심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 문화에 기초한 신앙 공동체"였다.[20] 유대인 교육은 슈테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다. 남성과 소년들은 예시바에서 하루에 최대 10시간을 공부했다. 여성에게는 탈무드 연구가 권장되지 않았고, 이들은 가정의 필요한 일을 수행했다. 또한 슈테틀은 회당, 의례 목욕탕, 의례 음식 가공업체와 같은 공동 기관을 제공했다.체다카(자선)는 오늘날까지 세속적, 종교적 유대 문화의 핵심 요소이다. 체다카는 가난하게 사는 유대인이 많았던 슈테틀 유대인에게 필수적이었다. 자선 행위는 학교와 고아원과 같은 사회 기관을 지원했다. 유대인들은 자선 행위를 선행(체세드)을 할 기회로 보았다.[20]
이러한 선행에 대한 접근 방식은 유대교의 종교적 견해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피르케이 아보트에서 시몬 하차디크의 "세 기둥"으로 요약된다:[21]
슈테틀에서 물질적인 것은 경멸되거나 극도로 칭찬받지 않았다. 배움과 교육은 공동체의 눈에 가치를 측정하는 궁극적인 척도였으며, 돈은 지위보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슈테틀은 전체 마을과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신발 제조, 야금 또는 옷 재단과 같은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공부는 가장 가치 있고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빵을 제공하지 않고 아내에게 돈을 의존하는 배운 예시바 사람들은 비난받지 않고 칭찬을 받았다.
4. 3. 가치관
슈테틀의 유대인들은 외부인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언어인 이디시어를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탈무드 학문의 전통에 뿌리를 둔 독특한 수사학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9]사람들은 유창하면서도 간결하고 암시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시장뿐만 아니라 에서도 학자들이 불완전한 문장, 암시, 몸짓으로도 완전한 의미를 전달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대화는 외부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가정이나 사업 환경에서도 동일한 언어적 절약이 발견될 수 있었다.[9]
슈테틀은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핵심에 깊이 뿌리내린 종교 문화에 기초한 신앙 공동체"였다.[20] 유대인 교육은 슈테틀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남성과 소년들은 에서 하루에 최대 10시간을 공부에 헌신했다. 여성에게는 탈무드 연구가 권장되지 않았고, 대신 가정의 필요한 일을 수행했다. 또한 슈테틀은 회당, 의례 목욕탕, 의례 음식 가공업체와 같은 공동 기관을 제공했다.
(자선)는 오늘날까지 세속적, 종교적 유대 문화의 핵심 요소이며, 가난하게 사는 유대인이 많았던 슈테틀 유대인에게 필수적이었다. 자선 행위는 학교와 고아원과 같은 사회 기관을 지원했다. 유대인들은 자선 행위를 선행()을 할 기회로 보았다.[20]
이러한 선행에 대한 접근 방식은 유대교의 종교적 견해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으며, 피르케이 아보트에서 시몬 하차디크의 "세 기둥"으로 요약된다. 즉, 토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 그리고 인간의 친절한 행위이다.[21]
물질적인 것은 슈테틀에서 경멸되거나 극도로 칭찬받지 않았다. 배움과 교육은 공동체의 눈에 가치를 측정하는 궁극적인 척도였으며, 돈은 지위보다 부차적인 것이었다. 슈테틀은 전체 마을과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신발 제조, 야금 또는 옷 재단과 같은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공부는 가장 가치 있고 어려운 일로 여겨졌다. 빵을 제공하지 않고 아내에게 돈을 의존하는 배운 사람들은 비난받지 않고 칭찬받았다.
5. 슈테틀 목록
슈테틀(שטעטלעךyi)은 주로 러시아 제국 영내에 19세기에 설정된 Pale of Settlement(대략 오늘날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 폴란드 입헌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에 집중 분포했다. 렘베르크나 체르노비츠 같은 큰 도시들은 ''슈토트''(שטאָטyi, Stadtde), 작은 마을은 ''도르프''(דאָרףyi)로 불렸다.[28]
- 리투아니아
- * 유르바르카스
- 헝가리
- * 무카체베
- * 샤토르알야우이헤이 (사트마르파의 중심지)
그 외, 다수의 유대교 인구를 보유한 대도시 (이곳에도 구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도시가 다수 포함)
- 민스크
- 마힐료우
- 빈 (개혁파 시나고그가 있음)
- 부다페슈트 (별명 유다페슈트 ''Judapest''. 개혁파 시나고그가 있음)
- 그로스바르다인
- 렘베르크 (현리비우, "갈리치아의 예루살렘")
- 빌뉴스 (학문의 중심. "리투아니아의 예루살렘")
- 오데사
- 키시너우
- 이아시
- 안트베르펜 ("서쪽의 예루살렘")
5. 1. 벨라루스
러시아 제국이 19세기에 설정한 Pale of Settlement(대략 오늘날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에는 슈테틀(שטעטלעךyi)이 집중 분포했다.[28]벨라루스의 주요 슈테틀은 다음과 같다:
5. 2. 폴란드

슈테틀은 러시아 제국이 19세기에 설정한 유대인 정착촌(Pale of Settlement, 오늘날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 폴란드 입헌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에 주로 분포했다.[28] 폴란드 내 주요 도시 대부분에 슈테틀이 있었다.
지역 | 슈테틀 이름 |
---|---|
동갈리치아 (현재 우크라이나) | 베르즈, 브로디, 드루호비치, 초르트키우 , 졸로치우, , , , , |
볼리니아 | |
우크라이나 | , 브라츠라프 (브레슬로프파의 중심지), 우만 |
부코비나 | , :en:Ruzhyn (UTS) (), :en:Sadhora |
이상의 지역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방이었다.
5. 3. 우크라이나 (동갈리치아)
슈테틀은 러시아 제국이 19세기에 설정한 유대인 정착촌(Pale of Settlement, 오늘날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 폴란드 입헌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에 집중 분포했다.[28]동갈리치아(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의 슈테틀은 다음과 같다:
지역 | 주요 슈테틀 |
---|---|
갈리치아 | 베르즈, 브로디, 드루호비치, 초르트키우 (초르토쿠프), 졸로치우 |
볼리니아 | |
우크라이나 | 브라츠라프 (브레슬로프파의 중심지), 우만 |
부코비나 | , :en:Ruzhyn (UTS), :en:Sadhora |
이 지역들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다.
5. 4. 우크라이나 (볼히니아)
동갈리치아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지방이었다.
- 갈리치아
- 베르즈
- 브로디
- 드루호비치
- 초르트키우 (초르토쿠프)
- 졸로치우
- 볼리니아
- 베르디치우
- 우크라이나
- 메지비지
- 브라츠라프 (브레슬로프파의 중심지)
- 우만
- 부코비나
- 비주니차
- :en:Ruzhyn (UTS) (사다구라파)
- :en:Sadhora
5. 5. 우크라이나 (기타)
슈테틀은 러시아 제국이 19세기에 설정한 유대인 정착촌(Pale of Settlement, 오늘날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 폴란드 입헌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에 집중 분포했다.[28]동갈리치아(현재 우크라이나)와 볼리니아 지역의 주요 슈테틀은 다음과 같다:
갈리치아 | 볼리니아 | 우크라이나 | 부코비나 |
---|---|---|---|
이 지역들은 과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다.
5. 6. 부코비나
שטעטלעךyi (슈테틀레흐)는 주로 러시아 제국 영내에 19세기에 설정된 Pale of Settlement (대략 오늘날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대), 폴란드 입헌왕국, 갈리치아, 루마니아에 집중 분포했다.[28]5. 7. 헝가리
- 헝가리
- *
- * ()
5. 8. 라트비아
5. 9. 리투아니아
유르바르카스6. 예술에서의 묘사
예술 분야에서 슈테틀은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었다. 회화, 사진, 문학, 영화 등이 슈테틀을 표현하는 주요 매체였다.
마르크 샤갈, 하임 골드버그, 차임 수틴, 마네-카츠 등 동유럽 출신 유대인 예술가들은 클레즈머, 결혼식, 시장 등 슈테틀의 일상과 문화를 그림으로 담아냈다.
알테르 카치즈네는 1920~1930년대 폴란드 유대인의 삶을, 로만 비쉬니악은 1935~1939년 동유럽의 전통적인 유대인 생활을 사진으로 기록했다.[1][2]
숄레옴 알레이헴의 소설 속 카스릴레브케와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의 배경인 아나테프카는 허구의 슈테틀이다. 요제프 로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동쪽 변두리의 슈테틀, 특히 그의 고향 브로디를 배경으로 작품을 썼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소설 또한 슈테틀을 배경으로 한다.
디부크(1937), 피서(1968), 지붕 위의 바이올린(1971), 옌틀(1983), 삶의 기차(1998), 아메리칸 피클(2020) 등의 영화는 슈테틀을 배경으로 하거나 소재로 활용했다.
6. 1. 문학
숄레옴 알레이헴의 많은 이야기 배경이 되는 카스릴레브케와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숄레옴 알레이헴의 다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함)의 배경인 아나테프카는 주목할 만한 허구적인 이다. 데보라 배런은 1910년, 민스크 근처의 그녀의 슈테틀이 포그롬으로 파괴된 후 오스만 팔레스타인으로 알리야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후에도 오랫동안 생활에 대해 계속 글을 썼다.[23]요제프 로트의 많은 책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쪽 변두리에 있는 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특히 그의 고향인 브로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많은 단편 소설과 소설은 을 배경으로 한다. 싱어의 어머니는 폴란드 남동부에 있는 도시인 빌고라이의 랍비의 딸이었다. 어린 시절 싱어는 가족과 함께 빌고라이에서 일정 기간을 살았고, 작은 마을에서의 삶이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썼다.
조나단 사프란 포어의 2002년 소설 ''모든 것은 밝혀졌다''는 우크라이나 트라침브로드(트로첸브로드)를 배경으로 한 허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피비 길먼이 쓰고 그림을 그린 1992년 어린이 책 ''없는 것에서 나온 것''은 허구의 을 배경으로 한 전통적인 유대교 민간 설화를 각색한 것이다.
1996년에는 ''프론트라인'' 프로그램 ""이 방송되었으며, 폴란드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었다.[23]
해리 터틀도브의 2011년 단편 소설 "슈테틀 데이즈"[24]는 알레이헴, 로트 등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전형적인 에서 시작하지만, 곧 장르를 전복하는 반전을 드러낸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수상 경력에 빛나는 2014년 소설 야곱의 책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전역의 많은 공동체를 특징으로 한다.[25]
6. 2. 회화
동유럽의 많은 유대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경력의 상당 부분을 묘사에 바쳤다. 마르크 샤갈, 하임 골드버그, 차임 수틴, 마네-카츠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의 기여는 클레즈머, 결혼식, 시장, 그리고 문화의 종교적 측면 등 문학에서 묘사되는 삶을 색채로 영구적으로 기록하는 데 있다.6. 3. 사진
알테르 카치즈네 (1885–1941)는 유대계 작가(이디시어 산문 및 시)이자 사진작가로, 1920년대와 1930년대 폴란드의 유대인 생활을 사진으로 기록했다.[1] 로만 비쉬니악 (1897–1990)은 러시아 출신으로 나중에 미국으로 귀화한 유대계 생물학자이자 사진작가로,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동유럽의 전통적인 유대인 생활을 촬영했다.[2]6. 4. 영화
- 디부크(1937)
- 피서(1968)
- 지붕 위의 바이올린(1971)
- 옌틀(1983)
- 삶의 기차(1998)
- 아메리칸 피클(2020)
- 슈틀(2023) – 이디시어와 우크라이나어 드라마로,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슈테틀의 삶을 묘사한다.[27] 이 영화를 위해 키이우 외곽에 슈테틀이 건설되었으며,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세트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살아남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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