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분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폴란드 분할은 18세기 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주변 강대국인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 세 차례(1772년, 1793년, 1795년)에 걸쳐 영토를 분할당하고 결국 국가가 소멸된 사건이다. 폴란드는 국력이 쇠퇴하고 주변 열강의 간섭이 심화된 가운데, 1772년 제1차 분할을 시작으로 1795년 제3차 분할을 통해 완전히 사라졌다. 이로 인해 폴란드는 123년간 독립을 잃고 주변국에 의해 지배받았으며,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체제를 거치며 다시 분할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을 회복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소련에 의해 다시 분할되는 아픔을 겪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폴란드 분할 - 타르고비차 연맹
타르고비차 연맹은 179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 보수 귀족들이 5월 3일 헌법에 반대하여 결성한 연맹으로,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러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며 폴란드 제2차 분할의 계기가 되었고, 일부 연맹 지도자들은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타르고비차인"은 오늘날 폴란드에서 배신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 러시아-폴란드 관계 - 카틴 학살
카틴 학살은 1940년 봄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에 의해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만 2천 명이 집단 학살된 사건으로,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소련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인들이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총살되어 카틴 숲 등에 매장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 소련의 책임이 공식 인정되어 역사적 책임과 화해에 대한 논의를 촉구하는 사건이다. - 러시아-폴란드 관계 - 타르고비차 연맹
타르고비차 연맹은 179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내 보수 귀족들이 5월 3일 헌법에 반대하여 결성한 연맹으로,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러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며 폴란드 제2차 분할의 계기가 되었고, 일부 연맹 지도자들은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타르고비차인"은 오늘날 폴란드에서 배신자를 지칭하는 단어로 쓰인다. - 프로이센 - 브란덴부르크주
브란덴부르크주는 독일 동부에 위치하여 베를린을 둘러싸고 있으며, 슬라브족 거주지에서 기원하여 독일 동방 식민 운동을 거쳐 게르만화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 내 변경백령으로 성장하여 호엔촐레른 가문의 지배를 거쳐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지, 독일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수행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독 시대를 거쳐 독일 재통일과 함께 재건립되어 현재는 서비스업과 고부가가치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 성장을 추구하고 베를린과의 합병은 부결되었다. - 프로이센 - 동프로이센
동프로이센은 발트해 연안에 위치했던 역사적 지역으로, 튜턴 기사단,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을 거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과 폴란드로 분할되었다.
폴란드 분할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국가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언어 | 폴란드어, 리투아니아어 |
분할 | |
분할 주체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주국 |
제1차 분할 | 1772년 |
제2차 분할 | 1793년 |
제3차 분할 | 1795년 |
분할 영토 | |
러시아 분할령 | 갈리치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일부 |
오스트리아 분할령 | 갈리치아, 폴란드 남부 |
프로이센 분할령 | 폴란드 서부 |
결과 | |
소멸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소멸 |
분할 국가 |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주국 |
이미지 | |
![]() | |
![]() | |
![]() |
2. 역사적 배경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이하 폴란드)은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동유럽의 강대국이었으나, 귀족 공화정의 한계와 주변국들의 간섭으로 점차 쇠퇴하였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는 유럽 유수의 강대국에서 러시아의 보호국[55]으로 전락했다. 이는 러시아 황제가 폴란드 국왕 자유 선거와 세임(의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다.
1730년, 폴란드의 이웃 국가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status quola 유지를 위한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이 동맹은 세 국가 모두 검은 독수리를 국가 상징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삼흑수리 동맹"으로 알려졌다. 폴란드는 프로이센 왕국에 대한 보호를 위해 러시아에 의존해야 했다.
7년 전쟁 (1756~1763)에서 폴란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러시아군이 서부 지역에 진입하는 것을 허용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폴란드 화폐를 위조하여 보복했다. 1767년 레프닌 세임에서 러시아는 liberum vetola를 포함한 과거의 악습을 보장하는 헌법을 강요했다. 또한, 종교적 자유와 공직을 차지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에 일부 폴란드인들은 반발했고, 러시아의 내정 간섭에 대한 분노로 1768년 바르 연맹 전쟁이 시작되었다. 폴란드군은 러시아군에 패배했고, 콜리이우슈치나 봉기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 봉기는 오스만 제국의 개입으로 이어졌으나, 결국 러시아군과 폴란드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1769년,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스피슈를, 1770년에는 노비 손치와 노비 타르그를 합병했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와 다뉴브 공국으로 진군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동유럽의 세력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하여 분할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772년 2월, 빈에서 분할 협정이 체결되었다. 8월 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군대가 합의된 지역을 점령했다. 1772년 8월 5일, 폴란드에 대한 점령 선언이 발표되었고, 1772년 9월 22일 분할 조약이 비준되었다.
세 분할 세력은 세임에게 그들의 행동을 승인할 것을 요구했다. 1773년 9월 18일, 분할 세임은 할양 조약에 서명하여 점령 지역에 대한 폴란드의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1772년, 장 자크 루소는 폴란드를 위한 새로운 헌법에 대한 권고안을 제시하도록 초청받았고, 그 결과 ''폴란드 정부에 대한 고찰''(1782)이 탄생했다.[12]
2. 1. 17세기 이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하 폴란드)는 야기에우워 왕조 (1386년-1572년) 단절 후 자유 선거를 통해 왕을 선출했으나, 외국의 간섭과 귀족 간의 잦은 다툼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17세기 중엽에는 대홍수 시대를 맞아 스웨덴에게 리보니아 북부를 할양해야 했다.[53] 또한 러시아-폴란드 전쟁에서 패배하여 좌안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 빼앗겼다.2. 2. 18세기: 몰락과 주변국의 간섭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는 대북방 전쟁에 휘말렸고, 스웨덴의 카를 12세에 의해 친스웨덴파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 괴뢰 정권은 러시아에 의해 무너졌고, 이후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면서 폴란드는 인근 열강들의 간섭도 받게 되었다.[53]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이하 폴란드)는 유럽 유수의 강대국에서 러시아의 보호국[55]으로 전락했다. 이는 러시아 황제가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폴란드 국왕 자유 선거와 세임(의회)에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767년에 열린 세임은 러시아 대사 니콜라이 렙닌에게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후에 렙닌 세임으로 불리게 된다.[56][57]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1763년경부터 친러파 귀족이자 옛 애인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스타니스와프 2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옹립하는 등 내정에 깊숙이 간섭하였다.
2. 3. 분할 이전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하 폴란드)는 야기에우워 왕조(1386년-1572년) 단절 후 선거왕제(자유왕선거)를 채택하였으나, 외국의 간섭과 귀족 간의 다툼이 빈번해지면서 국력이 쇠퇴하였다. 17세기 중엽에는 「대홍수 시대」(북방전쟁)를 맞이하여, 스웨덴 주도의 분할(미수)의 위협을 받았다(스웨덴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케다이네이 합의는 무산되었지만, 이미 스웨덴-폴란드 전쟁에서 분할되었던 리보니아 북부는 1660년의 올리바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Swedish Livonia|스웨덴령 리보니아영어로 할양되었다). 이와 별도로 러시아가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일으켜 헤트만 국가의 동쪽 절반을 분할하고, 1686년에 좌안 우크라이나는 영구 평화 조약 체결에 의해 러시아에 할양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는 대북방 전쟁에 휘말렸고, 스웨덴의 카를 12세에 의해 친스웨덴파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 꼭두각시 왕권이 러시아에 의해 무너지자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나아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면서 폴란드는 주변 열강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3. 제1차 폴란드 분할 (1772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는 대북방 전쟁에 휘말렸고 스웨덴의 칼 12세에 의해 친스웨덴파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괴뢰 정권은 러시아가 무너뜨렸다. 이후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면서 폴란드는 인근 열강들의 간섭도 받게 되었다.[53]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이하 폴란드)은 유럽 유수의 강대국에서 러시아의 보호국[55]으로 전락했다. 이는 러시아 황제가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폴란드 국왕 자유 선거와 세임(의회)에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767년에 열린 세임은 러시아 대사 니콜라이 렙닌에게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후에 렙닌 세임으로 불리게 된다.[56][57]
침묵의 세임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를 보호국으로 간주하고 있었지만,[56]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떨쳐내려는 바르 동맹에 의한 전쟁이 계속되었고 국토는 황폐해져 갔다.[58] 게다가 코리의 농민 반란과 우크라이나 코자키의 봉기도 겹쳐 폴란드의 국제적 지위는 약해지기만 했다. 더욱이 러시아의 조력으로 폴란드 국왕이 되었던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권력기반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강하게 지향하였다. 점차 러시아는 폴란드를 보호국으로 두는 방안에 무게를 두지 않게 되었다.[59]
주변 3국은 무정부 상태인 폴란드의 안정을 회복한다는 명목[59][60] 하에 국경을 넘어 폴란드 외곽을 점령했는데, 이는 명백히 영토적 야심에 따른 것이었다.[61]
제1차 폴란드 분할은 러시아의 성장에 대한 주변 국가의 세력 균형책이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압도한 러시아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노리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위협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에 개입해서 러시아와 싸우는 방안까지 검토했다.[58]
이에 두 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가 개입하여 영토 보상을 통한 해결을 제안했다. 즉, 합스부르크 제국은 슐레지엔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의 일부를 되찾으며 그 대가로 프로이센은 폴란드에서 바르미아, 나아가 독일계 주민이 많은 쿠를란트-젬갈렌 공국까지 얻어낸다는 것이다.[58]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어렵게 얻은 슐레지엔을 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평화적 해결 방안에는 관심을 보였다. 만약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프로이센도 러시아-프로이센 동맹에 따라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는 7년 전쟁으로 인해 재정적·군사적으로 피폐했던 당시 프로이센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러시아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도 오스만 제국이 약해져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58]
1770년과 1771년에 걸친 겨울, 프로이센 왕제 하인리히가 프로이센 대표로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고 있었다. 직전인 1769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15세기 루보브냐 조약에 따라 폴란드가 관리하던 스피슈 군의 13개 시를 병합했다. 그러므로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와 그 고문 이반 체르니쇼프는 하인리히에게 프로이센도 바르미아 등의 폴란드 영토를 얻어낼 것을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 프로이센, 러시아 세 나라가 폴란드 국경 지대를 일제히 병합할 것을 제의했다.[58]
그는 가장 세력이 약해진 합스부르크 제국이 가장 큰 몫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한 러시아에도 영토 확장의 화살을 오스만 제국에서 폴란드로 돌리도록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는 (원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문제와는 무관할)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를 획득한다면 그 대신 슐레지엔을 합스부르크 제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예상대로 프리드리히 2세는 거절했다.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는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한 1763년경부터 친러파 귀족이자 옛 애인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스타니스와프 2세)를 폴란드 국왕으로 옹립하는 등 내정에 간섭했다.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의 강대화를 경계하여 오스트리아의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에게 폴란드 분할을 제의했다. 폴란드에서 개혁 움직임이 나타나자 예카테리나 2세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제안에 응했고,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이 이루어졌다.
1772년 8월 5일,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3국은 폴란드 분할에 합의했다.[58] 러시아는 벨라루스 지방을, 프로이센은 대폴란드 북부 지방을, 오스트리아는 소폴란드와 갈리치아 지방을 차지했다.[58] 이로써 폴란드는 국토의 약 30%와 인구의 절반을 잃게 되었다.[10]
폴란드 의회(세임)는 주변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1773년 분할을 승인했다.[62]
국가 | 인구 (명) | 영토 |
---|---|---|
프로이센 | 580,000 | 36000km2 |
오스트리아 | 2,650,000 | 83000km2 |
러시아 제국 | 1,300,000 | 92000km2 |
분할 이후, 스타니스와프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에 반하여 폴란드 부흥을 위해 5월 3일 헌법을 제정(1791년)하고, 입헌군주제를 실현했다.
3. 1. 분할의 원인과 배경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는 대북방 전쟁에 휘말렸고 스웨덴의 칼 12세에 의해 친스웨덴파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괴뢰 정권은 러시아가 무너뜨렸다. 이후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면서 폴란드는 인근 열강들의 간섭도 받게 되었다.[53]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이하 폴란드)은 유럽 유수의 강대국에서 러시아의 보호국[55]으로 전락했다. 이는 러시아 황제가 적극적이고 효과적으로 폴란드 국왕 자유 선거와 세임(의회)에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767년에 열린 세임은 러시아 대사 니콜라이 렙닌에게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후에 렙닌 세임으로 불리게 된다.[56][57]
침묵의 세임 이후 러시아는 폴란드를 보호국으로 간주하고 있었지만,[56]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떨쳐내려는 바르 동맹에 의한 전쟁이 계속되었고 국토는 황폐해져 갔다.[58] 게다가 코리의 농민 반란과 우크라이나 코자키의 봉기도 겹쳐 폴란드의 국제적 지위는 약해지기만 했다. 더욱이 러시아의 조력으로 폴란드 국왕이 되었던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권력기반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강하게 지향하였다. 점차 러시아는 폴란드를 보호국으로 두는 방안에 무게를 두지 않게 되었다.[59]
주변 3국은 무정부 상태인 폴란드의 안정을 회복한다는 명목[59][60] 하에 국경을 넘어 폴란드 외곽을 점령했는데, 이는 명백히 영토적 야심에 따른 것이었다.[61]
제1차 폴란드 분할은 러시아의 성장에 대한 주변 국가의 세력 균형책이었다.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압도한 러시아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노리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위협이 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에 개입해서 러시아와 싸우는 방안까지 검토했다.[58]
이에 두 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프랑스가 개입하여 영토 보상을 통한 해결을 제안했다. 즉, 합스부르크 제국은 슐레지엔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빼앗긴 슐레지엔의 일부를 되찾으며 그 대가로 프로이센은 폴란드에서 바르미아, 나아가 독일계 주민이 많은 쿠를란트-젬갈렌 공국까지 얻어낸다는 것이다.[58]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2세는 어렵게 얻은 슐레지엔을 돌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평화적 해결 방안에는 관심을 보였다. 만약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제국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프로이센도 러시아-프로이센 동맹에 따라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는 7년 전쟁으로 인해 재정적·군사적으로 피폐했던 당시 프로이센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와 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러시아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도 오스만 제국이 약해져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58]
1770년과 1771년에 걸친 겨울, 프로이센 왕제 하인리히가 프로이센 대표로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고 있었다. 직전인 1769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은 15세기 루보브냐 조약에 따라 폴란드가 관리하던 스피슈 군의 13개 시를 병합했다. 그러므로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와 그 고문 이반 체르니쇼프는 하인리히에게 프로이센도 바르미아 등의 폴란드 영토를 얻어낼 것을 제안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 프로이센, 러시아 세 나라가 폴란드 국경 지대를 일제히 병합할 것을 제의했다.[58]
그는 가장 세력이 약해진 합스부르크 제국이 가장 큰 몫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한 러시아에도 영토 확장의 화살을 오스만 제국에서 폴란드로 돌리도록 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는 (원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문제와는 무관할) 프로이센이 폴란드 영토를 획득한다면 그 대신 슐레지엔을 합스부르크 제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예상대로 프리드리히 2세는 거절했다.
'''제1차 폴란드 분할'''(I Rozbiory Polskipl)은 1772년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는 아우구스트 3세가 사망한 1763년 경부터 친러파 귀족이자 전 애인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스타니스와프 2세)를 왕위에 올리는 등 폴란드의 내정에 간섭하여 폴란드 전체를 차지하고자 했다. 한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의 강대화를 경계하여 오스트리아의 신성 로마 황제 요제프 2세에게 폴란드 분할을 제의했다. 그런데 폴란드에서 부흥을 향한 개혁의 조짐이 나타났고, 이에 예카테리나 2세는 불안을 느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제안에 응하게 되었다.
결국 1772년 8월 5일, 제1차 폴란드 분할에 따라 러시아는 폴란드의 벨라루스 지방을 차지하였고, 프로이센은 대폴란드 북부 지방을 얻었으며, 오스트리아는 소폴란드와 서부 포딜리야, 갈리치아를 차지하였다. 폴란드는 1차 분할로 인하여 국토와 인구를 1/3가량 잃었다. 폴란드는 이웃 열강에 저항할만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고 세 나라의 군대는 빠르게 점령에 성공했기 때문에, 폴란드 국회는 1773년 분할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3. 2. 분할 과정과 결과
1772년 8월 5일,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3국은 폴란드 분할에 합의했다.[58] 러시아는 벨라루스 지방을, 프로이센은 대폴란드 북부 지방을, 오스트리아는 소폴란드와 갈리치아 지방을 차지했다.[58] 이로써 폴란드는 국토의 약 30%와 인구의 절반을 잃게 되었다.[10]폴란드 의회(세임)는 주변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1773년 분할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62]
국가 | 인구 (명) | 영토 |
---|---|---|
프로이센 | 580,000 | 36000km2 |
오스트리아 | 2,650,000 | 83000km2 |
러시아 제국 | 1,300,000 | 92000km2 |
4. 제2차 폴란드 분할 (1793년)
1791년 폴란드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국왕은 5월 3일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 개혁에 나섰으나, 이에 반대한 보수파는 왕국 중앙 정부의 축소와 귀족의 권력 유지를 노리며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하였다. 보수파는 예카테리나 2세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 왕국과 전쟁을 단행했다(폴란드-러시아 전쟁).[15]
폴란드-러시아 전쟁은 5월 3일 헌법 수호를 요구하는 개혁파와 러시아 제국, 이들을 불러들인 폴란드 보수파 마그나트(타르고비차 연맹) 연합군의 싸움이었다. 보수파는 과거 자신들이 누리던 황금의 자유를 러시아가 부활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프로이센에 버림받은 폴란드군(개혁파)은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대공과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등의 분전으로 수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갑자기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러시아에 항복하면서 이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러시아의 요구대로 타르고비차 연맹에 가입해 개혁을 포기했다.[13]
러시아군은 폴란드로 진격해오면서 전선이 길어졌다. 이런 상황은 폴란드에 유리했으나, 1792년 이길 가망이 없다는 조언을 들은 스타니스와프 2세와 개혁파는 타르고비차 연맹과 타협했다. 이로써 전쟁 비용은 축소되었으며 전쟁은 중단되었다.[15]
'''제2차 폴란드 분할'''은 그 직후, 1793년 1월 23일 프로이센이 러시아와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백러시아 지방과 서부 우크라이나 지방을 얻었고, 프로이센은 단치히, 토룬, 마조비아의 일부 지방을 얻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인해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서 2차 분할에 참여하지 못했다. [15]
1793년 1월 23일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조약을 맺어 폴란드의 여러 개혁을 포기시키고 그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이미 획득 예정지를 점령한 상태였고 이후 폴란드 서부를 침공한 프로이센군도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1793년 러시아군의 감시 아래, 흐로드나 세임이 열렸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마지막 세임이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가 의원들을 매수 또는 협박을 해서 완전히 장악했던 것으로 악명이 높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세임을 열어 폴란드인에게 승인을 얻음으로써 분할을 법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13]
러시아 제국은 250000km2, 프로이센 왕국은 58000km2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307000km2을 상실하여 국토 면적이 215000km2가 되었다.[13]
러시아가 획득한 영토는 키이우현, 브라츠와프현, 포딜리야현, 민스크현, 빌뉴스현 일부, 나바흐루다크현 일부, 브레스트-리토프스크현 일부, 볼히니아현 일부이다. 이는 7월 22일 흐로드나 세임에서 승인되었다. 러시아는 새 영토를 민스크현, 이자슬라우현로 개편하였다. 이자슬라우 주는 1795년 포딜리야현와 볼히니아현으로 나뉘었다.[13]
프로이센이 획득한 영토는 그단스크(단치히), 토룬, 그니에즈노 주, 포즈난현, 시에라츠현, 칼리시현, 프워츠크현, 브셰시치쿠야프스키현, 이노브로츠와프현, 도브신 지방, 크라쿠프현 일부, 라바현 일부, 마조프셰현 일부이다. 이는 흐로드나 세임에서 9월 23일 혹은 25일에 승인되었다(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프로이센은 새 영토를 남프로이센으로 재편했다.[13]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인구는 약 500만 명이 줄어 약 400만 명이 되었다.[13]
이제 폴란드는 괴뢰국이자 완충국이 되었고 폴란드군은 축소되어 러시아군이 각지에 주둔하게 되었다.[13]
4. 1. 개혁 시도와 좌절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폴란드의 부흥을 위해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1791년 5월 3일 헌법은 유럽 최초의 성문 헌법으로, 삼권분립, 세습 왕정, 농노제 폐지 등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19]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러시아와 폴란드 보수파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보수파 귀족들은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하여 예카테리나 2세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를 침공했다(폴란드-러시아 전쟁).[19]러시아군은 폴란드로 진격해오면서 전선이 길어졌는데, 이는 폴란드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792년 이길 가망이 없다는 조언을 들은 스타니스와프 2세와 개혁파는 타르고비차 연맹과 타협했고, 이로써 전쟁 비용은 축소되었으며 전쟁은 중단되었다.[19]
4. 2. 분할 과정과 결과
1791년 폴란드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국왕은 5월 3일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 개혁에 나섰으나, 이에 반대한 보수파는 왕국 중앙 정부의 축소와 귀족의 권력 유지를 노리며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하였다. 보수파는 예카테리나 2세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선전포고 없이 폴란드 왕국과 전쟁을 단행했다(폴란드-러시아 전쟁).[15]폴란드-러시아 전쟁은 5월 3일 헌법 수호를 요구하는 개혁파와 러시아 제국, 이들을 불러들인 폴란드 보수파 마그나트(타르고비차 연맹) 연합군의 싸움이었다. 보수파는 과거 자신들이 누리던 황금의 자유를 러시아가 부활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프로이센에 버림받은 폴란드군(개혁파)은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유제프 포니아토프스키 대공과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등의 분전으로 수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갑자기 폴란드 국왕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가 러시아에 항복하면서 이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러시아의 요구대로 타르고비차 연맹에 가입해 개혁을 포기했다.[13]
러시아군은 폴란드로 진격해오면서 전선이 길어졌다. 이런 상황은 폴란드에 유리했으나, 1792년 이길 가망이 없다는 조언을 들은 스타니스와프 2세와 개혁파는 타르고비차 연맹과 타협했다. 이로써 전쟁 비용은 축소되었으며 전쟁은 중단되었다.[15]
'''제2차 폴란드 분할'''(II Rozbiory Polskipl)은 그 직후, 1793년 1월 23일 프로이센이 러시아와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백러시아 지방과 서부 우크라이나 지방을 얻었고, 프로이센은 단치히, 토룬, 마조비아의 일부 지방을 얻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인해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서 2차 분할에 참여하지 못했다. [15]
1793년 1월 23일 프로이센은 러시아와 조약을 맺어 폴란드의 여러 개혁을 포기시키고 그 영토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러시아는 이미 획득 예정지를 점령한 상태였고 이후 폴란드 서부를 침공한 프로이센군도 거의 저항을 받지 않았다. 1793년 러시아군의 감시 아래, 흐로드나 세임이 열렸다. 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마지막 세임이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가 의원들을 매수 또는 협박을 해서 완전히 장악했던 것으로 악명이 높다.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세임을 열어 폴란드인에게 승인을 얻음으로써 분할을 법적으로 정당화한 것이다.[13]
러시아 제국은 250000km2, 프로이센 왕국은 58000km2의 영토를 획득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307000km2을 상실하여 국토 면적이 215000km2가 되었다.[13]
러시아가 획득한 영토는 키이우현, 브라츠와프현, 포딜리야현, 민스크현, 빌뉴스현 일부, 나바흐루다크현 일부, 브레스트-리토프스크현 일부, 볼히니아현 일부이다. 이는 7월 22일 흐로드나 세임에서 승인되었다. 러시아는 새 영토를 민스크현, 이자슬라우현로 개편하였다. 이자슬라우 주는 1795년 포딜리야현와 볼히니아현으로 나뉘었다.[13]
프로이센이 획득한 영토는 그단스크(단치히), 토룬, 그니에즈노 주, 포즈난현, 시에라츠현, 칼리시현, 프워츠크현, 브셰시치쿠야프스키현, 이노브로츠와프현, 도브신 지방, 크라쿠프현 일부, 라바현 일부, 마조프셰현 일부이다. 이는 흐로드나 세임에서 9월 23일 혹은 25일에 승인되었다(문헌에 따라 차이가 있다). 프로이센은 새 영토를 남프로이센으로 재편했다.[13]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인구는 약 500만 명이 줄어 약 400만 명이 되었다.[13]
이제 폴란드는 괴뢰국이자 완충국이 되었고 폴란드군은 축소되어 러시아군이 각지에 주둔하게 되었다.[13]
1794년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개혁파를 중심으로 한 의용군을 이끌어 러시아군과 싸웠으나 진압되었다(코슈추슈코 봉기).[15]
5. 제3차 폴란드 분할 (1795년)
1794년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를 중심으로 봉기가 일어났으나, 러시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1795년 10월 24일 '''제3차 폴란드 분할'''이 실시되었다.[78] 이 분할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완전히 멸망하여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제3차 분할에서 러시아는 쿠를란트와 리만 강 동부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얻었다. 프로이센은 바르샤바를 포함한 마조비아 전역과 리만 강 서부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차지했다. 오스트리아는 크라쿠프와 소폴란드 지방 전역을 합병하였다.
이로써 폴란드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3국에 의해 완전히 분할되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에 계속 참여하는 것보다 폴란드를 분할하여 점령하는 것을 선택했다.[78]
분할에 참여한 세 나라는 모든 역사 기록에서 폴란드라는 이름을 지우기로 합의했다. 백과사전 등에서도 폴란드 항목은 사라졌고, 공문서에는 마조프셰와 같은 지역명을 대신 사용했다. 이러한 억압 정책은 폴란드인들이 종주국에 대해 여러 차례 봉기하게 만들었다. 현대 폴란드에서도 제3차 분할은 역사 연구나 논설에서, 특히 폴란드-러시아 관계의 관점에서 자주 논의되는 주제이다. 러시아는 제3차 분할을 통해 가장 넓은 영토와 막대한 부를 얻어, 당시 유럽 최강국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폴란드의 주권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회복되었다.
5. 1. 코시치우슈코 봉기와 진압
1794년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개혁파를 중심으로 의용군을 이끌어 러시아군과 싸웠으나 진압되었다(코시치우슈코 봉기).[78]주변국에 의한 거듭된 굴욕과 억압으로 인해 폴란드인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결국 러시아·프로이센에 봉기하였다. 1794년 3월 24일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이끄는 폴란드군이 폴란드 전역에서 봉기를 호소하면서 코시치우슈코 봉기가 일어났고, 프로이센령 폴란드에서도 얀 동브로프스키 등이 비엘코폴스카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러시아군·폴란드군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뒀지만 결국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빠른 대처로 11월까지 진압되었다. 코시치우슈코는 마치에요비체 전투에서 낙마하여 잡히기 직전에 "(이것이) 폴란드의 끝"(라틴어: Finis Poloniae)이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5. 2. 분할 과정과 결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군주국)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를 세 차례에 걸쳐 분할했다.- 1772년 8월 5일
- 1793년 1월 23일
- 1795년 10월 24일
나폴레옹 전쟁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폴란드 왕국 지역을 바르샤바 공국으로 부활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은 나폴레옹의 패배로 끝났고 빈 회의 결과 폴란드는 다시 분할되었다. 분할에 참여한 국가는 각각 병합한 영토에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갖는 다음 세 국가를 만들었다.
세 국가 모두 폴란드 문화와 폴란드인의 권리를 존중하여 폴란드어의 자유로운 사용이 보장되었으나, 이 약속은 곧 파기되었고 영토는 다시 병합되었다.
타르고비차 연맹과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는 제2차 분할을 예상하지 못하고 러시아에 무릎을 꿇어 명성이 땅에 떨어졌다. 반면 개혁파는 폴란드 국내에서 강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1794년 3월, 개혁파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이끄는 코시치우슈코 봉기가 일어났으나, 이 반란은 11월에 진압되었다. 결국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이 실시되어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78]
코시치우슈코 봉기가 진압된 후 1795년 10월 24일 실시된 '''제3차 폴란드 분할'''에 따라 러시아는 쿠를란트와 리만 강 동부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프로이센은 바르샤바를 포함한 마조비아 전역과 리만 강 서부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오스트리아는 크라쿠프와 소폴란드 지방 전역을 합병하였다. 이로써 폴란드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3국에 의해 영토가 완전히 분할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제1차 대프랑스 동맹에 남는 것보다 폴란드를 분할하여 점령하는 것을 택하였다. 폴란드의 주권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면서 회복되었다.
분할에 참여한 삼국은 모든 역사적 기록에서 폴란드의 이름을 지우기로 합의했고, 백과사전 등에서도 폴란드 항목이 사라졌다. 공문서에서는 폴란드 대신 마조프셰와 같은 지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폴란드 억압 정책은 폴란드인의 종주국에 대한 수많은 봉기를 유발했다. 현대 폴란드에서도 제3차 분할은 역사 연구 분야나 일반 논설에서, 특히 폴란드-러시아 관계의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다. 러시아는 제3차 분할에서 가장 광대한 영토와 최대의 부를 얻어 당시 유럽의 최강국 중 하나가 되었다.
6. 분할의 결과와 영향
폴란드 분할은 18세기 말 유럽의 국제 질서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는 세 차례에 걸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영토를 분할했다.
- 1772년 8월 5일
- 1793년 1월 23일
- 1795년 10월 24일
1791년 폴란드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국왕은 5월 3일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군주제 개혁에 나섰으나, 이에 반대한 보수파가 타르고비차 연맹을 결성하였다. 보수파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러시아 전쟁을 일으켰다.
1793년 1월 23일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제2차 폴란드 분할'''을 단행하였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백러시아 지방과 서부 우크라이나 지방을, 프로이센은 단치히, 토룬, 마조비아의 일부 지방을 획득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혁명에 휘말려 2차 분할에 참여하지 못했다. 1794년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는 코시치우슈코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이 분할은 강대국들의 팽창주의와 세력 균형 논리가 약소국의 주권과 생존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분할에 참여한 국가들은 폴란드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자국의 국력을 강화하고,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편하려 했다.
6. 1.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소멸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이하 폴란드)은 야기에우워 왕조(1386년~1572년)가 단절된 이후 자유 국왕 선거를 시행했으나, 외국의 간섭과 귀족 간의 잦은 다툼으로 국력이 약해졌다. 17세기 중엽에는 대홍수로 인해 스웨덴에게 분할 위협을 받았고,[53] 러시아가 일으킨 러시아-폴란드 전쟁으로 카자크 수장국의 동쪽 절반을 분할당했다. 1686년 좌안 우크라이나는 영원 평화 조약 체결로 러시아에 넘어갔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는 대북방 전쟁에 휘말렸고, 스웨덴의 칼 12세에 의해 친스웨덴파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스타니스와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 괴뢰 정권은 러시아가 무너뜨렸다. 이후 폴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게다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면서 폴란드는 인근 열강들의 간섭도 받게 되었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유럽 유수의 강대국에서 러시아의 보호국[55]으로 전락했다. 러시아 황제는 폴란드 국왕 자유 선거와 세임(의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는데, 1767년에 열린 세임은 러시아 대사 니콜라이 렙닌에게 완전히 장악당해 렙닌 세임으로 불린다.[56][57]
브와디스와프 4세 (1632~1648) 통치 시대에, 모든 귀족(폴란드 귀족)의 정치적 평등을 전제로 한 의회 절차 정책인 liberum vetola가 발전했다. 이는 모든 조치에 만장일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다.[10] 의회 의원 한 명이라도 어떤 조치가 자신의 선거구(보통 자신의 영지)에 해롭다고 생각하면, 그 조치가 이미 승인된 후에도 그 조치를 무효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조치를 취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liberum vetola는 또한 외국 외교관들이 귀족들에게 뇌물을 주어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10] 따라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분할 이전 마지막 시기(18세기 중반)에는 이미 혼란 상태에 있었고 완전한 주권 국가가 아니었으며, 거의 속국[5]과 같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폴란드 국왕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랑스 등 강대국들 사이의 외교적 책략으로 효과적으로 선출되었다.[4] 이는 특히 러시아 여황제 예카테리나 2세의 연인이었던 마지막 연합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냐토프스키에게 특히 해당된다.
1730년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폴란드어: Rzeczpospolita)의 이웃 국가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status quola를 유지하기 위한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구체적으로는 연합의 법률이 변경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동맹은 나중에 폴란드에서 "삼흑수리 동맹" (또는 독일어: Löwenwoldede)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세 국가 모두 검은 독수리를 국가 상징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폴란드의 상징인 흰 독수리와는 대조적이다). 연합은 서부와 동부 지역을 통합하기 위해 북서부 지역을 요구한 부상하는 프로이센 왕국에 대한 보호를 위해 러시아에 의존해야 했다. 이로 인해 연합은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에서만 발트해 연안을 가지게 될 것이다.[10] 예카테리나는 오스트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외교를 이용해야 했다.


폴란드 분할에 참여한 삼국은 모든 역사적 배경에서 폴란드의 이름을 지우기로 합의했고 백과사전 등에서도 폴란드 항목이 사라졌다. 공문서에서 언급할 때는 폴란드 대신에 마조프셰와 같은 지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폴란드 억압 정책은 폴란드인의 종주국에 대한 수많은 봉기를 유발했다. 현대 폴란드에서도 제3차 분할에 대한 역사 연구 분야나 일반 논설의 장에서, 특히 폴란드-러시아 관계의 관점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6. 2. 폴란드인들의 저항과 민족 운동
폴란드 분할 이후 폴란드인들은 독립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지원했는데, 이를 폴란드 대이주라고 한다. 이들은 옛 폴란드 땅에서 봉기를 일으키거나 나폴레옹 1세 군대에 합류하여 폴란드 부활을 위해 노력했다.[53]폴란드의 시인과 예술가들은 조국의 자유를 염원하며 폴란드 낭만주의 운동을 펼쳤다. 이 운동은 폴란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 열망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53]
1794년 3월 24일,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가 이끄는 폴란드군은 폴란드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켰고(코시치우슈코 봉기), 프로이센령 폴란드에서도 얀 동브로프스키 등이 비엘코폴스카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은 러시아군과 폴란드군에 맞서 몇 차례 승리했지만, 결국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의해 진압되었다.[53] 코시치우슈코는 마치에요비체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기 직전 "(이것이) 폴란드의 끝"이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53]
1807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프랑스의 위성국인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지만, 1815년 빈 회의에서 해체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괴뢰국인 폴란드 입헌 왕국이 세워졌으나, 이마저도 11월 봉기 실패 후 해체되면서 폴란드인들은 더욱 억압받게 되었다.[53] 러시아는 폴란드를 공식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폴란드는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주권 국가로 인정받을 때까지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53]
6. 3.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폴란드 분할은 강대국들의 팽창주의와 세력 균형 논리가 약소국의 주권과 생존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분할에 참여한 국가들은 폴란드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자국의 국력을 강화하고, 유럽 내 세력 균형을 재편하려 했다.1730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폴란드)의 이웃 국가인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비밀 협정을 체결하여 폴란드의 법률이 변경되지 않도록 했다. 이 동맹은 세 국가 모두 검은 독수리를 국가 상징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삼흑수리 동맹"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폴란드는 프로이센 왕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에 의존해야 했고, 이로 인해 발트해 연안 영토를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로 제한받게 되었다.[10]
7년 전쟁(1756~1763)에서 폴란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프랑스, 오스트리아, 러시아 동맹에 우호적이었고 러시아군이 자국 영토를 통과하도록 허용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폴란드 화폐를 위조하여 폴란드 경제에 타격을 입혔다. 러시아는 니콜라이 레프닌 대사를 통해 1767년 레프닌 세임에서 폴란드에 새 헌법을 강요했는데, 이 헌법은 liberum vetola를 포함한 과거의 악습을 보장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5][6][8]
이에 반발한 일부 폴란드인들은 바르 연맹을 결성하여 러시아에 대항했으나, 러시아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이 개입하고,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폴란드 영토 일부를 합병하는 등 국제 정세가 복잡해졌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와 다뉴브 공국으로 진군하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동유럽의 세력 균형 유지를 위해 폴란드 분할을 계획하게 되었다.
7. 넓은 의미의 폴란드 분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의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영토 분할은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폴란드 왕국 지역을 바르샤바 공국으로 부활시켰으나, 나폴레옹 전쟁은 그의 패배로 끝났다. 빈 회의 결과 폴란드는 다시 분할되었고, 분할에 참여한 국가들은 각각 병합한 영토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갖는 포즈난 대공국(프로이센 왕국령), 크라쿠프 자유시 (오스트리아 제국령), 폴란드 입헌왕국 (러시아 제국령)을 만들었다.
이 세 국가들은 모두 폴란드 문화와 폴란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폴란드어의 자유로운 사용을 보장했지만, 이내 약속은 파기되었고 영토는 다시 병합되었다.
7. 1. 제4차 폴란드 분할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빈 회의의 결과로 바르샤바 공국이 해체되면서 1815년에 이루어진 폴란드 분할이다.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 입헌왕국을 수립하여 자국의 영향력 아래 두었다. 이 왕국은 러시아의 동군연합 형태로,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이름뿐인 국가였다. 11월 봉기가 실패하면서 폴란드 입헌왕국은 해체되었고, 폴란드인들에게는 여러 억압이 가해졌다. 러시아는 폴란드를 공식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7. 2. 제5차 폴란드 분할 (1939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나치 독일과 소련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고 폴란드 침공을 실시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을 분할 점령하였다. (독일-소련 경계 우호 조약 참조)8. 분할 이후 폴란드의 독립 회복
제3차 분할 이후 123년 동안 폴란드는 독립 국가로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폴란드인이 유럽 각지로 망명하여 '폴란드인 대이주'를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 땅에서 봉기를 일으키거나 나폴레옹 1세의 군대에 합류하여 폴란드 부활을 시도했다. 폴란드의 시인과 예술가들은 조국의 자유를 염원하며 폴란드 낭만주의 운동을 펼쳤다. 1807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프랑스의 위성국인 바르샤바 공국이 성립되었으나, 1815년 빈 회의에서 폐지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의 괴뢰국인 폴란드 입헌왕국이 성립되었지만, 이 역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이름뿐인 국가였다. 11월 봉기 실패 후, 폴란드 입헌왕국은 해체되고 폴란드인들은 억압받았다. 러시아는 폴란드를 공식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폴란드인의 주권 국가 설립이 인정되면서 폴란드는 재독립을 이루었다. 1919년 폴란드는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무력으로 억압하고(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소련 전쟁에 개입하였다(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전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맺은 강화 조약(폴란드-소비에트 리가 평화 조약)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가 분할되었다.[1]
8. 1.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독립
제3차 분할 이후 123년 동안 폴란드는 독립 국가로서 존재하지 않았다. 폴란드의 정치인, 지식인, 혁명가들은 유럽 전역으로 망명하여, 이른바 '폴란드인 대이주'를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 땅에서 봉기하거나 나폴레옹 1세의 군대에 합류하여 폴란드 부활을 시도했다. 폴란드의 시인과 예술가들은 조국의 자유를 염원하며 폴란드 낭만주의 운동을 펼쳤다. 1807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프랑스의 위성국인 바르샤바 공국이 성립되었으나, 1815년 빈 회의에서 폐지되었다. 이후 러시아의 괴뢰국인 폴란드 입헌왕국이 성립되었지만, 이 역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이름뿐인 국가였다. 11월 봉기 실패 후, 폴란드 입헌왕국은 해체되고 폴란드인들은 억압받았다. 러시아는 폴란드를 공식적으로 러시아 제국의 일부로 편입시켰다.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러시아 제국이 붕괴하고 베르사유 조약에서 폴란드인의 주권 국가 설립이 인정되면서 폴란드는 재독립을 이루었다. 1919년 폴란드는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을 무력으로 억압하고(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소련 전쟁에 개입하였다(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전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과 맺은 강화 조약(폴란드-소비에트 리가 평화 조약)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가 분할되었다.[1]
8. 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폴란드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폴란드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이 섹션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참조
[1]
서적
A History of Eastern Europe: Crisis and Change
Routledge
[2]
서적
Region, State and Identity in Central and Eastern Europe
Routledge
[3]
서적
Out of the Shtetl: Making Jews Modern in the Polish Borderlands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4]
서적
The political History of Poland
https://archive.org/[...]
Polish Book Importing Company
[5]
서적
The Emergence of the Eastern Powers, 1756–1775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서적
A Short History of Austria-Hungary and Poland
http://historicaltex[...]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07-08-03
[7]
서적
The Story of My Life
https://books.google[...]
Penguin Classics
[8]
서적
The Russian Empire, 1801–1917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9]
서적
Poland-Lithuania's Last King and English Culture: Stanisław August Poniatowski, 1732–1798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0]
백과사전
Partitions of Poland
https://www.britanni[...]
2011-06-08
[11]
서적
The French Revolution
Nelson Cengage
[12]
서적
Rousseau: 'The Social Contract' and Other Later Political Writing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02-08
[13]
백과사전
Alexander Bezborodko
https://www.britanni[...]
2024-04-17
[14]
서적
A Concise History of Poland: Jerzy Lukowski and Hubert Zawadzki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01-08
[15]
서적
A Concise History of Poland: Jerzy Lukowski and Hubert Zawadzki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01-08
[16]
서적
The Price of Freedom: A History of East Central Europe from the Middle Ages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Group
2013-01-08
[17]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The Origins to 1795
Oxford University Press
[18]
서적
Realiści z wyobraźnią
Uniwersytet Marii Curie-Skłodowskiej
[19]
서적
Central Europe: Enemies, Neighbors, Friends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20]
서적
The Price of Freedom: A History of East Central Europe from the Middle Ages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Routledge
[21]
서적
A Man of Honour: Adam Czartoryski as a Statesman of Russia and Poland, 1795–1831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2]
서적
Liberal Nationalism in Central Europ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3]
서적
Europe in 1848: Revolution and Reform
https://books.google[...]
Berghahn
[24]
서적
Poland's Caribbean Tragedy: A Study of Polish Legions in the Haitian War of Independence 1802–1803
East European Monographs/Columbia University Press
[25]
학술지
Polish Projects of Napoleon Bonaparte
http://www.napoleon-[...]
[26]
웹사이트
Gods, Heroes, & Legends
http://www.globalpro[...]
[27]
서적
A Study of Crisi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28]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1795 to the Present
Oxford University Press
[29]
학술지
Inventing Polonia: Notions of Polish American Identity, 1870–1990
[30]
서적
Polish Americans
Transaction
[31]
웹사이트
The Army of Grand Duchy of Warsaw
http://web2.airmail.[...]
[32]
웹사이트
The Constitution of May 3, 1791
http://info-poland.b[...]
University of Buffalo
[33]
서적
The Transformation of European Politics 1763–1848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34]
서적
The Making of Modern Europe, 1648–1780
https://books.google[...]
Routledge
[35]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in Two Volume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36]
서적
History of the Downfall of Poland
Moscow
1863
[37]
웹사이트
Записка о древней и новой России в ее политическом и гражданском отношениях
http://rys-arhipelag[...]
2023-11-00
[38]
논문
Old Russia, the Soviet Union and Eastern Europe
[39]
논문
The Russo-Polish Historical Confrontation
http://www.ruf.rice.[...]
[40]
서적
Commentaries Upon International Law
https://archive.org/[...]
T. & J. W. Johnson
[41]
서적
The Right of Conquest: The Acquisition of Territory by Force in International Law and Practice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42]
서적
Europe: A Histor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43]
웹사이트
Poland The First Partition
http://original.brit[...]
2023-11-00
[44]
서적
Poland. History, Culture and Society. Selected Readings
https://www.worldcat[...]
University of Łódź
2015
[45]
서적
History Takes Place: Istanbul. Dynamics of Urban Change
https://books.google[...]
Jovis
2016
[46]
서적
Poland: A Modern History
I. B. Tauris
[47]
웹사이트
History of Polish-Iranian relations
https://tehran.mfa.g[...]
2019-11-12
[48]
서적
A History of Modern Germany: 1648–1840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2-02-16
[49]
논문
May 3, 1791, and the Polish constitutional tradition
1992
[50]
논문
Zbiegostwo ludności Rosji w granice Rzeczypospolitej
http://www.promemori[...]
2004-10-00
[51]
논문
Przywary niewolników pańszczyźnianych w XVIII-wiecznej Rzeczypospolitej w relacji Huberta Vautrina
http://bazekon.icm.e[...]
2011
[52]
웹사이트
L'Inno nazionale
http://www.quirinale[...]
Quirinale.it
2013-11-17
[53]
일반
[54]
서적
Frederick the Great: King of Prussia
https://archive.org/[...]
Random House
[55]
일반
[56]
서적
https://www.worldcat[...]
[57]
서적
https://www.worldcat[...]
[58]
웹인용
https://www.britanni[...]
2023-01-28
[59]
웹인용
https://www.britanni[...]
2023-01-28
[60]
일반
[61]
서적
https://www.worldcat[...]
[62]
서적
http://archive.org/d[...]
[63]
서적
https://www.worldcat[...]
[64]
서적
https://www.worldcat[...]
[65]
서적
https://www.worldcat[...]
[66]
일반
[67]
서적
https://www.worldcat[...]
[68]
서적
Duch Rzeczypospolitej
Wydawn. Nauk. PWN
2001
[69]
일반
[70]
서적
https://www.worldcat[...]
[71]
서적
Iron kingdom : the rise and downfall of Prussia, 1600-1947
https://www.worldcat[...]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72]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Volume 1: The Origins to 1795
https://books.google[...]
OUP Oxford
2005-02-24
[73]
서적
The right of conquest : the acquisition of territory by force in international law and practice
https://www.worldcat[...]
Clarendon Press
1996
[74]
서적
Изменение административно-территориального деления за последние 300 лет
[75]
서적
История областного управления в России от Петра I до Екатерины II, том II
Издательство Академии наук СССР
1941
[76]
서적
A concise history of Poland
https://www.worldca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1
[77]
서적
Historia Encyklopedia Szkolna
Wydawnictwa Szkolne i Pedagogiczne
1993
[78]
서적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5
[79]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The Origins to 1795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