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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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슈테틴 조약은 1570년 7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중재로 스웨덴과 덴마크 간에 체결된 평화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덴마크는 스웨덴에 대한 모든 권리 주장을 포기하고, 스웨덴은 노르웨이, 스코네, 할란드, 블레킹에, 고틀란드섬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했다. 스웨덴은 덴마크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엘브스보리 성을 반환받았으며, 뤼베크에도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슈테틴 조약은 덴마크가 북유럽에서 잠시 동안 지배적인 강국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칼마르 동맹 재건에는 실패했고, 스웨덴에 불리한 조건으로 인해 이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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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틴 조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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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제목 | 슈테틴의 화약 |
다른 이름 | 독일어: Frieden von Stettin 스웨덴어: Freden i Stettin 덴마크어: Freden i Stettin |
서명 | 1570년 12월 13일 |
서명 장소 | 슈테틴 |
관련 사건 | 북방 7년 전쟁 |
조약 내용 | |
유형 | 평화 조약 |
체결국 | 스웨덴 덴마크 뤼베크 |
2. 배경
칼마르 연합은 1523년에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로 분열되었다. 덴마크의 프레데릭 2세는 자신의 통치 하에 연합을 재건하려 했다. 프레데릭 2세는 자신의 문장에 연합의 세 왕관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강조했으며, 1563년 스웨덴을 침공하여 북방 7년 전쟁이 시작되었다.[1] 덴마크군은 육상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고 엘보르그를 점령했지만, 스웨덴군은 해전과 리보니아에서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 리보니아는 이전에 세속화되었고, 주변 강대국들의 영토 분쟁 대상이 되었다.[4]
1570년 7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중재를 목표로 슈테틴(1945년 이후 슈체친)에서 평화 회의를 시작했다.[5] 중재에는 여러 외교관들이 참여했다. 회의를 주최한 포메라니아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 (포메라니아-슈테틴)가 황제 막시밀리안이 보낸 대표단의 수장으로 활동했고, 덴마크 궁정에 파견된 프랑스 특사 찰스 댄시는 회의 준비에 깊이 관여했으며 중재자 중 한 명이었다. 바르미아 주교 마틴 크로머와 다른 이들은 폴란드 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가 보냈으며,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참석했다. 덴마크는 페데르 빌레, 외르겐 로젠크란츠, 헨리크 란차우, 닐스 카스, 요아킴 헹케가 대표했고, 스웨덴은 예란 게라, 벵트 귈타, 에리크 귈렌셰르나 등이 대표했다.[6]
3. 조약 체결 과정
4. 주요 내용
4. 1. 덴마크-스웨덴 관계
덴마크 국왕은 스웨덴에 대한 모든 종주권 주장을 포기하였다.[1] 스웨덴 국왕은 노르웨이, 스코네, 할란드, 블레킹에 등에 대한 영토 주장을 포기하였다.[1] 이 조약으로 덴마크의 스웨덴에 대한 종주권 주장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칼마르 동맹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1]
4. 2. 뤼베크 관련 내용
스웨덴은 뤼베크에 75000USD를 지불해야 했다.[8] 그러나 뤼베크는 스웨덴으로부터 배상금을 지불받지 못했다.
5. 조약의 결과 및 영향
슈테틴 조약으로 덴마크는 짧은 기간 동안 북유럽에서 최고이자 지배적인 강국이 되었지만, 칼마르 동맹을 재건하는 데는 실패했다. 세 개의 왕관 문장과 관련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스웨덴에 불리한 조건은 이후 대북방 전쟁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분쟁을 야기했다.[1]
뤼베크는 조약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스웨덴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지만, 이는 요한 3세가 전쟁 당시 동맹국이었던 포메라니아의 슈트랄준트 항구에도 동일한 특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뤼베크의 입지를 강화하지 못했다. 뤼베크에 약속된 지불금은 전혀 이전되지 않았다. 스웨덴 해적은 계속해서 뤼베크의 선적을 나포했고, 도시와 전체 한자동맹은 2류 강대국으로 격하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2]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 역시 스웨덴에 약속한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아 발트해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리보니아와 관련된 조약 조건은 무시되었고, 당시 진행 중이던 리보니아 전쟁은 계속되었다.[2]
덴마크는 첫 번째 지불금을 제외하고는 항상 늦었지만 모든 지불금을 받았다. 요한 3세는 스칸디나비아 서부 해안의 유일한 항구를 유지하기로 결심했고, 그의 노력에는 군함 판매 및 스웨덴 통화 평가 절하가 포함되었다.[2]
덴마크가 스웨덴에 대한 청구를 포기함으로써 스웨덴과의 칼마르 동맹은 최종적으로 철폐되었다. 또한 양국 관계는 이 전쟁으로 인해 악화되었다. 뤼베크는 스웨덴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지 못했다.
6. 조약 이후의 역사
슈테틴 조약으로 덴마크는 짧은 기간 동안 북유럽에서 최고이자 지배적인 강국이 되었지만, 칼마르 동맹을 재건하는 데는 실패했다. 세 개의 왕관 문장과 관련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고, 스웨덴에 불리한 조건은 일련의 향후 분쟁으로 이어져 대북방 전쟁에서 1720/21년에야 종결되었다.[1]
뤼베크는 조약으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스웨덴으로부터 특권을 부여받았지만, 요한 3세가 전쟁 당시 동맹국이었던 포메라니아의 슈트랄준트 항구에도 동일한 특권을 부여했기 때문에 뤼베크의 입지를 강화하지 못했다. 뤼베크에 약속된 지불금은 결코 이전되지 않았다. 스웨덴 해적은 계속해서 뤼베크의 선적을 나포했고, 도시와 전체 한자동맹은 2류 강대국으로 격하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2]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 역시 스웨덴에 약속한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아 발트해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리보니아와 관련된 조약 조건은 무시되었고, 당시 진행 중이던 리보니아 전쟁은 계속되었다.[2]
덴마크는 첫 번째 지불금을 제외하고는 항상 늦었지만 모든 지불금을 받았다. 요한 3세는 스칸디나비아 서부 해안의 유일한 항구를 유지하기로 결심했고, 그의 노력에는 군함 판매 및 스웨덴 통화 평가 절하가 포함되었다.[2]
참조
[1]
서적
Scandinavia Since 1500
[2]
서적
Warrior Kings of Sweden. The Rise of an Empire in the Sixteenth and Seventeenth Centuries
McFarland
[3]
서적
The Riverside Dictionary of Biography: A Comprehensive Reference Covering 10,000 of the World's Most Important People,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Day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4]
서적
A Short History of Finland
[5]
서적
Scandinavia: A Political History of Denmark, Norway and Sweden from 1513 to 1900
[6]
서적
Geschichte des dänischen Hofes
[7]
서적
A Financial History of Western Europe
[8]
서적
Lützen 1632
Norstedts Poc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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