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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우라키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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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타우라키오스는 803년 아버지 니케포로스 1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으며, 811년 아버지와 함께 불가리아 원정에 참여했다가 플리스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퇴위하여 812년에 사망한 동로마 제국의 황족이다. 그는 807년 이레네의 친척 테오파노와 결혼했고, 811년 플리스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후 미하일 1세 랑가베에게 양위하고 수도원에서 지내다 다음 해 사망했다. 스타우라키오스는 니케포로스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공동 황제로 활동했으며, 화폐 주조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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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우라키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스타우라키오스가 제관을 쓰고 있는 금화 이미지
스타우라키오스, 공동 황제 시절의 솔리두스 금화
칭호로마인의 황제
재위 기간811년 7월 26일 – 811년 10월 2일
대관식803년 12월 25일
이전니키포로스 1세
이후미하일 1세
출생790년대 초반
사망812년 1월 11일
매장지브라카 수도원
배우자아테네의 테오파노
왕조니케포로스 가문
아버지니키포로스 1세
통치
섭정니키포로스 1세 (803 – 811)
공동 통치니키포로스 1세와 함께
니케포로스 왕조
연대표니키포로스 1세 (802–811)
스타우라키오스와 함께 (803–811)
스타우라키오스 (811)
미하일 1세 (811–813)
테오필락트와 스타우라키오스와 함께 (811–813)
계승이전: 이사우리아 왕조
이후: 레오 5세와 아모리아 왕조

2. 생애

803년 니케포로스 1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었고, 807년 이레네의 일족인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811년 아버지 니케포로스 1세와 함께 제1차 불가리아 제국 정벌에 나섰으나, 플리스카 전투에서 아버지는 전사하고 자신도 척추가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었다. 간신히 아드리아노폴리스로 후퇴하여, 그곳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는 비잔틴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외부에서 즉위한 첫 번째 사례였다.

스타우라키오스는 왕위에 앉아 있다. 16세기 무서운 이반 연대기(Facial Chronicle)의 삽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으나, 부상으로 인해 정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황제 계승 문제를 놓고 분쟁이 발생했다. 황후 테오파노는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스타우라키오스는 미하일 1세 랑가베에게 양위하고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812년 1월 11일, 플리스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한 괴저로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스타우라키오스가 여동생 프로코피아에게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스타우라키오스는 790년대 초, 아마도 791년에서 793년 사이에 니케포로스 1세와 알려지지 않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는 딸 프로코피아와의 혼동 때문에 종종 프로코피아로 언급된다.[1] J. B. 베리는 그가 누나 프로코피아보다 어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1] 스타우라키오스는 그의 부계 조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1] 그의 아버지 니케포로스는 이레네 여제 치하에서 로고테테스 투 게니쿠grc(재무 장관)를 역임했으며, 802년 쿠데타를 통해 제위에 올랐다.[1]

니케포로스 1세는 제국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빈민층을 위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1] 그는 이레네가 시행했던 도시 관세 및 토지세를 폐지하고, 빈민들이 엘리트들을 고발하는 소송을 심리하는 새로운 법정을 설립했다.[1]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빈민을 옹호한다고 칭찬했지만, 반대자들은 부유층에 대한 그의 조치를 비난했다.[1]

2. 2. 공동 황제 즉위 (803년)

803년, 니케포로스 1세는 바르다네스 투르코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스타우라키오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제위 계승을 공고히 했다.[1] 스타우라키오스는 하기아 소피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타라시오스에 의해 대관식을 거행했다.[1]

테오파네스 고백자는 스타우라키오스가 외모, 힘,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으나, 이는 테오파네스의 개인적인 적대감 때문일 수 있다.[1]

공동 황제로서의 스타우라키오스의 또 다른 ''솔리두스''

2. 3. 테오파노와의 결혼 (807년)

807년, 스타우라키오스는 이레네 여제의 친척인 아테네의 테오파노와 결혼했다.[1] 이 결혼은 황실 신부 선발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테오파노와의 결혼은 니케포로스 1세와 스타우라키오스의 통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1]

2. 4. 플리스카 전투와 단독 황제 즉위 (811년)

811년, 니케포로스 1세는 불가리아 칸국을 침공했으나, 플리스카 전투에서 대패하고 전사했다.[1] 스타우라키오스는 이 전투에서 척추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1] 생존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로 후퇴했다.[1] 스타우라키오스는 살아남은 군인들 앞에서 니케포로스 1세의 군사적 판단을 비난하며 황제로 추대되었다.[1] 이는 절박한 상황으로 인해 비잔틴 황제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외부에서 즉위한 첫 번째 경우였다.[1]

2. 5. 짧은 통치와 퇴위 (811년)

스타우라키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간신히 돌아왔지만, 부상으로 인해 정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황제 계승 문제를 놓고 대립이 일어났다. 스타우라키오스의 황후 테오파노는 스스로 황제가 되려 했지만,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국 스타우라키오스는 테오파노를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미하일 1세 랑가베를 지지하는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811년 10월 2일, 스타우라키오스는 퇴위하고 수도원으로 물러났으며, 미하일 1세에게 제위를 넘겨주었다.[1]

2. 6. 죽음 (812년)

스타우라키오스는 811년 플리스카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한 괴저812년 1월 11일에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스타우라키오스가 여동생 프로코피아에게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3. 유산

스타우라키오스는 아버지 니케포로스 1세의 그늘에 가려져 그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재위 기간이 두 달 남짓이었기 때문에 제국에 큰 영향을 남길 수 없었다. 《연대기》의 묘사를 보면 스타우라키오스가 전략적 이해력을 갖추고 있었고, 아마도 그의 아버지처럼 의지가 강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외에 그의 성격은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러한 이유로 역사가 매튜 마시는 "그는 제국 역사에서 짧고 그림자 같은 인물로 남아있다"고 평했다.[1] 니케포로스와 스타우라키오스는 대체로 비잔티움 제국의 국경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고, 아바스 왕조의 하룬 알 라시드와 같은 강력한 적에게 굴욕적인 양보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4. 화폐학

스타우라키오스(왼쪽)와 니케포로스 1세(오른쪽)의 이미지가 새겨진 솔리두스 금화


니케포로스 1세와 스타우라키오스의 공동 통치 시대에 발행된 솔리두스 금화는 스타우라키오스가 뒷면에, 니케포로스가 앞면에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이수리아 왕조의 동전과 유사하다.[1] 이 동전에서 스타우라키오스는 ''데스포테스'' 칭호를, 니케포로스는 ''바실레우스'' 칭호를 받았다. 두 황제는 모두 클라미스를 착용하고 아카키아를 들고 있지만, 니케포로스는 십자형 십자가를, 스타우라키오스는 글로부스 크루시게르를 들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1]

공동 통치 기간 동안 은화는 주조되지 않았다. 화폐학자 필립 그리슨은 밀리아레시온 은화가 스타우라키오스의 대관식을 위해 주조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니케포로스의 구두쇠 같은 성격 때문에 주조되지 않았다고 추측한다. 스타우라키오스의 단독 통치 기간에는 알려진 동전이 주조되지 않았는데, 이는 치명상을 입은 황제를 위해 새로운 주화를 만들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슨은 황후 조에 포르피로게니타(1042)와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1042)의 노미스마 발견을 근거로, 약 2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에도 통치자를 위한 동전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스타우라키오스의 동전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죽어가는 황제가 단순히 아버지의 이름으로 이전 동전을 계속 주조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화폐학자 마리아 브레이는 황제의 생존 자체가 불확실했기 때문에 새로운 동전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한 스타우라키오스 단독 통치 시대의 동전이 없는 것은 고고학적 자료 부족의 결과일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러한 동전이 발견되지 않아 가능성은 희박해진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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