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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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계몽주의는 18세기 스페인에서 일어난 계몽주의 사상의 유입과 그 영향을 다룬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이후 부르봉 왕가가 개혁 정치를 펼치면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되었지만, 군주제는 기존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유지했다. 계몽주의는 과학적 탐구와 자유 무역을 옹호했지만, 귀족과 성직자들의 반발에 직면했고, 종교 재판은 18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카를로스 3세는 계몽전제주의를 시도했지만, 나폴레옹의 침공과 스페인 독립 전쟁(1808-1814)으로 인해 스페인 사회는 혼란을 겪었다. 영국군의 개입과 게릴라전으로 프랑스 군을 몰아냈지만, 페르난도 7세는 카디스 헌법을 거부하고 절대 왕정을 복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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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군주국은 1504년부터 1700년까지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며 스페인 제국을 형성했으나, 17세기 경제적 어려움과 전쟁으로 쇠퇴하여 카를로스 2세의 사망으로 멸망했다. - 계몽주의 - 에드먼드 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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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계몽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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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정의 |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지적, 철학적 운동인 계몽주의가 스페인에 전파되어 나타난 현상 |
시기 | 18세기 |
특징 | 이성과 지식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는 시도 전통적인 가치관과 권위에 대한 비판 과학, 교육,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전 추구 |
배경 | |
사회적 배경 | 펠리페 5세의 왕위 계승 후 부르봉 왕가의 통치 시작 중앙 집권 강화와 국가 재건 노력 사회 경제적 불균형 심화 |
사상적 배경 | 유럽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 존 로크, 아이작 뉴턴 등의 사상가들의 철학적, 과학적 업적 소개 베니토 헤로니모 페이호 이 몬테네그로 등 스페인 지식인들의 계몽사상 수용 및 발전 |
주요 인물 | |
정치 및 경제 | 엔세나다 후작 캄포마네스 백작 페드로 로드리게스 데 캄포마네스 |
사상 및 문학 | 가스파르 멜초르 데 호벨야노스 베니토 헤로니모 페이호 이 몬테네그로 호세 카달소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 |
과학 | 안토니오 데 울요아 호르헤 후안 이 산타칠리아 |
주요 내용 | |
정치 개혁 | 중앙 집권 강화 행정 효율성 증대 카를로스 3세의 개혁 정책 추진 |
경제 개혁 | 중상주의 정책 강화 국내 산업 보호 및 육성 무역 활성화 |
사회 개혁 | 교육 제도 개선 과학 기술 장려 미신과 편견 타파 노력 |
문화 및 예술 | 신고전주의 문학 및 예술 발전 왕립 스페인어 아카데미 설립 (1713년) 계몽 사상을 반영한 연극 및 오페라 공연 활성화 |
영향 및 결과 | |
사회 변화 | 사회 경제적 발전 교육 기회 확대 시민 의식 성장 |
정치적 영향 |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인한 개혁 중단 및 반동 세력 강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
한계 | 귀족과 성직자 등 특권층의 저항 대중의 무지와 무관심 개혁의 급진성에 대한 우려 |
평가 | |
긍정적 평가 | 스페인의 근대화에 기여 사회,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 도모 계몽 사상의 확산 |
부정적 평가 | 개혁의 불완전성 사회적 불평등 해소 미흡 정치적 불안정 초래 |
2.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그의 조카이자 프랑스 왕위 계승 후보였던 펠리페 5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스페인 관료들은 펠리페 5세의 즉위를 지지했지만, 루이 14세는 "피레네(스페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스페인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다.[1]
스페인 왕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6세는 이에 반발했고, 영국과 네덜란드 역시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스페인 내에서도 스페인 의회가 분열되어 내전이 일어났다. 발렌시아, 카탈루냐, 아라곤 세력은 펠리페 5세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반대하여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전쟁 초기에는 프랑스가 우세했지만,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가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10년간의 전쟁은 유럽 전역과 신대륙까지 번졌고, 마드리드는 두 차례나 함락되었다.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스페인은 많은 영토를 잃었다. 나폴리, 밀라노, 사르데냐는 시칠리아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스페인령 네덜란드 역시 오스트리아에 넘어갔다. 메노르카와 지브롤터는 영국에 양도되었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를 유지하는 대가로 이러한 영토 할양을 감수해야 했다.
2. 1. 카를로스 2세의 죽음과 왕위 계승 문제

후사가 없었던 카를로스 2세는 여러 악재에 시달리며 불운한 삶을 이어갔다. 스페인은 경제 문제와 프랑스와의 전쟁 패배로 몰락하고 있었지만, 신대륙에 광활한 제국을 보유하여 여전히 유럽 정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스페인 왕위 계승은 유럽 열강들의 힘의 균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에, 17세기 유럽 정치사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카를로스 2세는 마지막 국정 활동으로 자신의 조카이자 프랑스 왕위 계승 후보였던 펠리페 5세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카스티야 왕국의 다른 왕위 후계자들과 스페인 관료들은 이를 지지했지만, 루이 14세는 "피레네(스페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1]
스페인 왕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6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에 부당하게 대우받았다고 주장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바이에른 공작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스페인 왕위로 책봉하려 했으나, 루이 14세의 야욕 때문에 결국 오스트리아를 지지하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전에 스페인 왕권을 카를 대공에게 넘기는 내용의 제2차 분할 조약을 체결했지만, 오스트리아는 이에 반발하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2. 2. 전쟁의 발발과 전개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로스 2세는 후사가 없었던 데다 여러 악재에 시달려, 마지막 국정 활동으로 자신의 조카 펠리페 5세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 후보이기도 했으며, 카스티야 왕국의 다른 왕위 후계자들 또한 합스부르크 왕가식 왕위 이양 계산법에 따라 이를 지지했다. 스페인 관료들은 스페인이 독립국으로 남아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4세는 "피레네(스페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스페인 왕위를 노리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6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스페인이나 프랑스가 유럽에서 세력을 키우는 것을 원치 않았으므로, 바이에른 공작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스페인 왕위로 앉히기 위해 암묵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영국과 네덜란드는 루이 14세가 부르봉 왕가라는 이유로 스페인 왕위 계승에 지나친 야욕을 보이자 결국 오스트리아를 지지하게 된다.
이전에 영국과 프랑스는 스페인 왕권을 카를 대공에게 넘기고 이탈리아 영토는 프랑스가 차지하며, 카를 대공은 나머지 스페인 영토를 획득하는 내용의 제2차 분할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에 참여하지 못한 오스트리아는 불쾌감을 드러냈고, 프랑스에 분할 조약을 다시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1702년 전쟁이 선포되고 유럽 강대국들이 참전하면서 스페인 의회는 분열되었고, 스페인 내부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발렌시아, 카탈루냐, 아라곤 세력은 펠리페 5세가 중앙집권화를 강화할 것을 우려하여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다. 포르투갈을 통해 스페인으로 들어온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은 1705년 스페인을 공격했지만 곧 와해되었다. 초기에는 프랑스에 유리하게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1704년 블렌하임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는 영국이 파견한 제1대 말버러 공작 존 처칠 군대의 지원으로 구원받았다. 이후 10년 동안 독일, 이탈리아, 이베리아반도, 심지어 신대륙에서도 전쟁이 벌어졌으며, 마드리드는 1706년과 1710년에 두 차례 함락되었다. 외곽 지역은 외국 군대와 각 지방의 폭동으로 황폐화되었다.
2. 3. 위트레흐트 조약과 그 결과
위트레흐트 조약을 통해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와 주변 열강들은 루이 14세의 손자였던 펠리페가 스페인의 펠리페 5세로 등극하는 것과 두 나라가 하나가 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데에 뜻을 모았다. 프랑스의 광대한 영토는 큰 문제 없이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었지만, 스페인은 상당 부분의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탈리아에 있던 스페인의 속령인 나폴리와 밀라노, 사르데냐는 시칠리아와 함께 오스트리아에 빼앗겼으며, 스페인령 네덜란드 또한 오스트리아에 넘겨줘야 했다. 메노르카와 지브롤터를 영국에 양도하게 된 것도 이 때였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고 이탈리아 반도에 있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 등은 스페인의 손에 다시 들어온다. 많은 영토를 다른 열강에게 할당하는 대가로 펠리페는 나머지 스페인 제국의 영토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강화가 이뤄진 후에도 카탈루냐 사람들은 전쟁 내내 반(反)펠리페를 견지하고 있어 반대 시위를 이어 갔다. 바르셀로나는 1714년이 돼서야 다시 스페인이 장악했으며, 1714년 9월 11일이 카탈루냐 지방의 국경일이다. 그러나 오랜 반목으로 그 생산성이 땅에 떨어져 있어 경제 사정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은 누가 왕이 됐더라도 사실이었다.3. 부르봉 왕가의 개혁 정치 (1715-1788)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부르봉 왕가는 합스부르크 왕가 시대에 쇠퇴한 스페인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5] 계몽주의 시대의 영향으로 스페인과 스페인령 아메리카는 개혁을 추진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를 핵심 정체성으로 유지했다.[5]
18세기 유럽에서는 절대주의가 강화되면서, 군주들은 중앙집권화를 통해 경쟁 세력을 약화시키고, 행정 현대화, 경제 발전, 국제적 영향력 확대를 추구했다.[8] 1750년경부터 스페인에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되어 국가 번영과 강대국 지위 회복을 위한 개혁이 강조되었다.[8] 의학과 물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프랑스 철학자들과 달리 가톨릭 교회에 대한 도전은 거의 없었다.[8]
스페인의 주요 계몽주의 사상가로는 베니토 페이호오가 있었다.[6] 그는 미신 타파를 위해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사고를 장려했다.[7] 가스파르 멜초르 데 요베야노스 법무부 장관은 스페인 법률 역사를 연구하고, 귀족과 교회의 토지 축적을 비판하며 교회 토지 매각을 촉구했다.[9]
조나단 이스라엘은 카를로스 3세가 계몽주의에 큰 관심이 없었고, 그의 각료들도 계몽주의 사상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0] 그는 "계몽된 목표에 진지하게 헌신한 사람은 소수의 각료와 관리뿐"이었으며, 대부분은 "군주제, 제국, 귀족, 교육에 대한 교회 통제와 권위 강화"를 목표로 하는 절대주의자들이었다고 말했다.[10]
카를로스 3세의 건축가 후안 데 비야누에바가 설계한 프라도 미술관은 원래 자연사 박물관으로 계획되었으나, 회화와 조각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변경되었다.[34]
3. 1. 펠리페 5세 시대 (1715-1746)
펠리페 5세는 유능한 행정가로서, 행정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지역 의회를 폐지하고 법령을 개정했다. 그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출신 인재들을 장관급으로 등용하여 합스부르크 왕가 시절의 관료주의 부패를 척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왕비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여, 펠리페 5세의 치세 동안 잦은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었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잃었던 영토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파르마 공국 출신인 왕비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1] 1717년 사르데냐를 침공하고, 이후 시칠리아를 공격하여 오스트리아,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 4개국과 대립하게 되었다.[1] 1720년, 스페인은 해상과 육상에서 모두 패배하고 오스트리아와 강화 조약을 체결하며 위트레흐트 조약을 재확인해야 했다.[1]

1727-1729년, 스페인은 다시 영국-스페인 전쟁을 일으켜 세력 회복을 시도했다.[2] 1725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지중해 항만을 넘겨받기로 약속받았기에, 미노르카와 지브롤터를 영국으로부터 탈환하려 했다.[2]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끌어들였고, 오스트리아는 개입을 철회했다.[2] 영국은 스페인 제국의 영토와 금 수송선을 공격했고, 결국 1729년 펠리페 5세는 영국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2] 반면, 왕비 파르네시오는 파르마 공국, 피아첸차, 투스카니 공국을 스페인령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2]
1729년 이후, 펠리페 5세는 프랑스와의 관계 강화에 집중했다.[3]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여, 훗날 카를로스 3세가 되는 아들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주었다.[3] 1733년 루이 15세와 가족 협약(Pacte de Famille)을 체결하여 양국 관계를 강화했다.[3] 제킨스 귀의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도 프랑스와 협력하여 이탈리아 영토를 확장하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전의 이탈리아 영토를 상당 부분 회복했다.[3]
펠리페 5세는 치세 마지막에 장관들에게 내정을 맡기고 개혁을 추진했다.[4] 제논 데 소모데비야는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성공적인 외교를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고, 1743년 이후에는 엔세나다 후작으로서 왕과 왕비의 신임을 얻어 스페인 궁정을 장악했다.[4] 엔세나다는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서 중립적인 외교를 펼치며 안정적인 치안 유지에 기여했다.[4]
3. 2. 페르난도 6세 시대 (1746-1759)
페르난도 6세 (재위 1746-1759)는 아버지 펠리페 5세의 개혁 정치를 계승하여 재정을 안정시키고 경제 재건에 힘썼다. 1755년에는 가뭄으로 큰 기아에 시달리던 안달루시아 지방의 세금을 모두 감면해 주기도 했다.[1]
페르난도 6세는 국정을 장관들에게 많이 위임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이후, 페르난도 6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영국의 견제를 받고 약해진 안보 상황을 강화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엔세나다는 초기까지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했다.[1]

페르난도 6세의 궁정에는 호세 데 카르바할 이 란카스테르가 이끄는 친영파 세력도 있었는데, 이들은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스페인의 국방과 근대화를 이루려 했다. 카르바할은 포르투갈과의 협상을 통해 1750년 우루과이 남부 지방의 반다 오리엔탈 지방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다.[1]
그러나 이 협약으로 예수회가 설립하고 운영하던 우루과이 남부를 포르투갈 측과 교환하게 되면서, 예수회와 영국의 반발을 샀다. 해당 지역의 과라니족 또한 예수회의 부추김을 받아 반발하였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은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War of the Seven Reductions를 일으켰다. 이는 양국 관계를 악화시켰고, 양국 모두에서 반예수회 정책이 추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1]
1754년 카르바할이 죽은 후, 엔세나다는 해산을 명령받았다. 이후 궁정은 아일랜드인 리카르도 월을 새로운 내각의 수장으로 임명했고, 그는 중립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여 스페인이 전쟁에 휩싸이지 않도록 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페르난도 6세의 치세는 30년 전쟁 이후 가장 큰 위협에 빠진 유럽의 혼란기 동안에도 상대적으로 전쟁의 피해가 거의 없었다.[1]
1758년 왕비 포르투갈의 바르바라가 사망하자, 페르난도 6세는 크게 상심하여 국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고, 1년 뒤 사망했다.[1]
3. 3. 카를로스 3세 시대 (1759-1788)
카를로스 3세는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의 아들로, 16세 때부터 파르마 공작 지위를 갖고 있었다.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계몽전제주의를 실험하고자 했으며, 양시칠리아 왕국을 세우기도 했다. 스페인에 도착한 그는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그는 시칠리아에서 스승과 같았던 베르나르도 타누치를 만났고, 스페인으로 건너오면서 많은 이탈리아 개혁가들을 데려와 행정 시스템의 근대화를 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레오폴도 데 그레고리오였는데, 그는 군수물품 공급업자 출신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왕의 신임을 얻어 정계에 입문했다. 1755년 "Marquis of Esquilache"를 설립한 그레고리오(Marquis of Esquilache, 그의 별칭)는 1785년 죽을 때까지 주요 정계 인물로 활동한다.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했으나 스페인은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카를로스 3세는 영국에 대한 반감으로 1762년 전쟁에 개입했다. 영국이 마닐라와 하바나를 점령하면서 위협을 느낀 스페인은 결국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겨주고, 미노르카와 지브롤터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인정해야 했다.
스페인 군주는 넓은 영토를 교회에 증여했고, 특히 펠리페 4세는 교회에 많은 영토를 봉토로 주었다. 대부분의 땅은 사용되지 않았고, 귀족(Hidalgo)들이 나머지 땅 대부분을 차지했다. 인구가 급증하면서 정부 개혁의 필요성이 커졌다. 계몽주의는 반 교권주의를 상징했으며, 카를로스 3세는 이를 반영하고자 했다. 페르디난드 4세는 예수회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려 했으며, 왕실 대주교를 스스로 세웠다. 카를로스 3세는 1767년 예수회를 완전히 추방했다.

토지 개혁과 농업 개혁은 귀족과 성직자들을 자극했고, 왕실과 소원하게 했다. 카를로스 3세는 상인, 신흥 성장 세력과 가까이하며 자유 무역을 옹호하고 관세 장벽을 없앴다. 1765년 곡물 무역이 자유화되었다.

카를로스 3세는 중앙집권화를 꾀하면서도 상업 진흥 목적의 결속력 강화는 허용했다. 국가 전반의 산업 구조는 생산량이 증대되고 통화 정책이 안정적으로 정착되면서 발전했다.
그러나 1766년 전 세계적인 곡물 부족과 곡물 무역 자유화로 곡물가가 폭등하자 폭동(에스킬라체 폭동)이 일어났다. 모든 주요 도시에서 항거가 일어났고, 왕은 수도에서 대피했다. 아라곤 지방의 관리였던 페드로 파블로 아란다가 세력을 확장해 왕이 없는 동안 정부를 도맡았다.

아란다는 궁정에서 아라곤 세력가로서 지방 분권화를 원했다. 폭동 진압 검사이던 호세 모니노는 폭동을 감시하고 왕의 개혁 정치를 옹호하여 세를 얻었다. 레오폴도는 그를 1767년 로마 대사 자리에 앉힌다. 1773년 모니노는 예수회 관련 교황령을 반려하도록 하는 데 성공하여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이 된다.
1777년 새 내각 대표가 된 플로리다블랑카 백작은 스페인 관료제의 실질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1778년 내각제를 도입했고, 1782년 스페인 국영은행인 산 카를로스 국립은행을 설립했다. 예수회 추방 이후 악화된 교육 제도를 위해 새로운 교사를 선출하고 근대 교육제도를 정립했다. 또한 외국인들이 스페인 제국 하의 신대륙에서 자유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플로리다블랑카는 조지 3세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카를로스 3세는 미국 독립 전쟁을 기회로 여겨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동맹에 맞서 독립 세력에 재정 지원을 했다. 스페인령 루이지애나의 고문관 베르나르도 데 갈베스는 1762년 영국에 빼앗긴 요새들을 되찾고, 그 해 바하마를 다시 찾아온다. 1783년 파리 강화 조약을 통해 플로리다를 비롯해 70년 전쟁으로 빼앗긴 영토의 상당 부분을 되찾았다.
4. 계몽주의와 스페인 사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고 1715년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가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이 스페인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계몽주의는 군주제에 일관된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군주제는 기존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따랐다.[6]
스페인의 주요 계몽주의 사상가로는 베네딕토회 수도사이자 교수였던 베니토 페이호오 (1676–1764)가 있었다. 그는 미신을 타파하기 위해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사고를 장려한 것으로 유명한 대중화가였다. 그의 저서 《우주의 비판적 극장》(1726–39)은 "물리학과 수학은 스페인에서는 거의 이방인과 같다"고 개탄했다.[7]
18세기는 유럽에서 절대주의가 강화되던 시기였으며, 스페인에서도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은 1750년경에 약화된 형태로 전파되어 스페인의 번영을 증진하고 주요 강대국의 이전 위치로 되돌릴 개혁을 강조했다. 의학과 물리학에 관심이 집중되었으며, 약간의 철학도 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방문객이 영향력이 있었지만, 프랑스 철학자들처럼 가톨릭교나 교회에 대한 도전은 거의 없었다.
스페인의 주요 지식인 중 한 명이었던 가스파르 멜초르 데 요베야노스 법무부 장관은 스페인 왕립 역사 아카데미에서 한 연설에서 "애국자"들에게 법률 역사를 연구할 것을 촉구하고, 스페인이 "원시 순수성으로 헌법을 보존"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난했다. 그는 저서 《농업법안 조사 보고서》(1795)에서 귀족과 교회가 토지를 축적하여 대부분의 스페인 사람들이 토지가 없는 상태로 둔 것을 개탄하며, 모든 교회 토지의 매각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9]
조나단 이스라엘은 카를로스 3세 국왕은 계몽주의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그의 각료들은 대륙의 다른 지역에 영향을 미친 계몽주의 사상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은 "계몽된 목표에 진지하게 헌신한 사람은 소수의 각료와 관리뿐이었다. 대부분은 무엇보다도 절대주의자였으며 그들의 목표는 항상 군주제, 제국, 귀족, 그리고 교육에 대한 교회 통제와 권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10]
계몽주의는 과학적 탐구와 세계에 대한 접근 방식을 강조했는데, 이는 종교적 세계관과 상충될 수 있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은 책을 검열하고 비정통적인 사상을 억압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계몽주의 사상은 스페인에서 점점 더 널리 퍼졌다. 1770년대에 보수주의자들은 반격을 가하여 검열과 종교 재판을 이용하여 계몽주의 사상을 억압하려 했다.[11] 그러나 "프랑스 ''백과전서''는... 원한다면 독자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12]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애덤 스미스, 콩디야크, 레이날, 뷔퐁, 린네의 저술은 스페인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통되었다.[13]
1755년 리스본 지진과 쓰나미는 포르투갈 수도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으며 이베리아 반도 전체와 그 너머까지 영향을 미쳤다. 지식인들은 이 지진이 신의 징벌인지 자연 현상인지에 대해 논쟁했다.[14]
국왕은 일련의 자체적인 과학 원정을 후원했으며, 일반적으로 외국인에게 닫혀 있던 해외 제국에 라 콩다민이나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같은 외국 과학자들의 출입을 허가했다. 칠레와 페루(1777–88), 뉴그라나다(1783–1816),[15] 및 뉴 스페인(1787–1803)에 대한 광범위한 왕립 식물 탐사가 있었으며,[16] 학자들은 현재 이를 새롭게 검토하고 있다.[17] 이는 마드리드 왕립 식물원과 왕립 자연사 박물관에 보관될 수많은 상세한 식물 그림과 표본을 생산했다.[18] 말라스피나 탐험은 스페인 해군 사령관 알레한드로 말라스피나가 5년(1789–94) 동안 이끈 중요한 과학 원정으로, 박물학자와 식물 삽화가들이 스페인 국왕을 위해 정보를 수집했다.[19][20][21][22][23][24] 항해에 참여한 삽화가 중에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훈련받은 호세 데 포조가 있었으며, 그는 항해에 참여한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수많은 식물 이미지뿐만 아니라 해안 풍경, 민족지학적 이미지, 탐험선의 모습(''Descubierta''와 ''Atrevida'')과 파타고니아에서의 자화상을 제작했다.[25][26] 멕시코에서 말라스피나 탐험은 멕시코 시티에 식물원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으며, 국립 역사 박물관의 설립에도 영향을 미쳤다.[27][28] 국왕은 또한 1804년에 식민지 인구에게 천연두 예방 접종을 실시하기 위해 발미스 원정을 지원했다.
18세기에 스페인 정부의 후원하에 수행된 많은 과학 연구는 예산 제약으로 인해 출판되거나 배포되지 못했다. 20세기 후반부터 스페인과 스페인 제국의 과학사에 대한 연구가 번창하여, 1차 자료가 학술판으로 출판되거나 재발행되었으며, 상당수의 중요한 학술 연구가 출판되었다.[29] 예외적으로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1799–1804년 스페인 아메리카에 대한 자비 원정 중에 자신의 과학적 발견과 관찰을 직접 출판했다.
부르봉 시대 초기에 스페인은 이미 18세기 초에 국립 도서관(1711년), 왕립 스페인 학술원(1713년), 왕립 역사 아카데미(1738년)을 설립하여 지적 연구를 체계화하고 장려하는 제도를 만들었다.[30] 18세기 후반에 설립된 기관들은 과학 지식을 증진하기 위해 설계되었으며, 예를 들어 마드리드 왕립 식물원(1755년)이 있으며, 이곳에서 말라스피나 탐험대의 표본들이 컬렉션을 늘렸다.[31] 멕시코에서 왕실은 바스크 베르가라 연구소를 기반으로 한 광산 학교(1792년)를 설립했는데, 과학자 파우스토 엘루야르가 이끌었으며, 스페인의 가장 귀중한 상품인 은 채굴에 대한 과학 지식을 증진하기 위한 것이었다.[32]
스페인의 역사 기록을 부활시키려는 시도와 카를로스 3세의 일반적인 중앙 집권화 정책의 일환으로, 서인도 제도 문서 보관소가 1785년 세비야에 설립되어 스페인의 해외 제국과 관련된 문서를 모았다.[33]
5. 나폴레옹 침공과 스페인 독립 전쟁 (1808-1814)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과 프랑스 지중해 함대는 로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에 대패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은 해상 전력을 크게 상실하고, 프랑스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었다. 마누엘 데 고도이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참여했다가 탈퇴하기를 반복하며 불안정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 나폴레옹은 고도이와 스페인 왕실에 대한 불신을 키웠고, 페르난도 7세는 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나폴레옹과 대립각을 세웠다.
1808년, 스페인과 프랑스는 포르투갈 분할 점령에 합의하고 공동으로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군은 포르투갈을 신속하게 점령했지만, 페르난도 왕자가 프랑스로 떠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스페인 전역에서는 고도이에 반대하는 민중 봉기가 발생했고, 결국 고도이는 체포되었다. 카를로스 4세는 아들 페르난도 7세에게 양위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페르난도 7세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임명하여 스페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스페인 민중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5]
나폴레옹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여 자신의 형 호세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자, 스페인과 해외 제국 모두에서 정통성 위기가 발생했다. 페르난도 7세 폐위 후 민주적인 섭정 역할을 한 카디스 코르테스는 1812년 자유주의 헌법을 비준하여 군주제와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제한했다. 1814년 페르난도 7세는 권력을 되찾자 자유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절대주의 통치로 복귀했다. 스페인 나폴레옹 시대 동안 스페인 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독립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 아메리카의 상당 부분이 독립을 쟁취하고 입헌 공화국을 수립했다.[5]
5. 1. 나폴레옹의 침공과 스페인 왕실의 몰락
카를로스 3세가 1788년 사망하고 7개월 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카를로스 3세의 장남은 뇌전증으로 왕위를 이을 수 없었고, 둘째 아들 카를로스 4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사냥에만 몰두한 카를로스 4세 대신 왕비 마리아 루이사가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마리아 루이사는 평민 출신 군인 마누엘 데 고도이와 불륜 관계였고, 고도이는 왕비의 총애를 받아 1792년 내각 최고 지위에 올랐다. 카를로스 4세 치하에서 최고 권력자였던 호세 모니노는 카스티야 지방에서 인기가 높았으나, 고도이는 아란다와 연합하여 그를 횡령죄로 몰아 실각시켰다.

카를로스 3세 시대의 개혁 정치는 카를로스 4세 시대에 들어서면서 퇴색했다. 왕비와 고도이는 관료주의 개혁에 관심이 없었고, 플로리다블랑카를 반왕실 세력으로 규정했다. 아라곤 지역 세력은 카를로스 3세의 개혁에 반대했다.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된 후,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항했으나 군사력이 약해 패배했다. 고도이는 프랑스와 바젤 조약을 체결하고 산토 도밍고를 넘겨주었다.

스페인은 1796년 산 일데폰소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영국은 스페인의 해상 진출을 봉쇄했다. 1797년 스페인 함대는 영국에 패배했고, 1800년 스페인령 루이지애나는 프랑스에 넘어갔다.
스페인은 프랑스를 대신해 포르투갈에 영국 선박과의 통상 교섭 중단을 요구했고, 1801년 전쟁을 일으켜 올리벤사를 점령했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잠시 평화가 찾아왔으나, 1804년 영국은 스페인 보물선을 공격했다.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은 영국에 대패했고,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한 의존을 재고하게 되었다.

고도이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서 탈퇴했다가 1807년 다시 가입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고도이와 스페인 왕실을 불신했고, 고도이를 반대하는 페르난도 왕자를 주목했다.
1808년 스페인과 프랑스는 포르투갈을 분할 점령했다. 페르난도 왕자는 프랑스로 갔고, 고도이를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스페인에서 고도이 반대 혁명이 일어나 그는 체포되었다. 카를로스 4세는 아들을 위해 퇴위했으나, 나폴레옹은 페르난도 7세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임명했다. 이에 스페인 민중들은 항거하기 시작했다.
5. 2. 스페인 민중의 저항과 독립 전쟁
조제프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의 군주로 즉위하자 스페인 민중들은 이에 반발하여 전국적인 항거를 일으켰다.[5]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봉기는 프랑스 군대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스페인 민중들의 저항 의지를 더욱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5]각 지방에서는 군부(軍部)가 결성되어 조제프의 왕위 계승을 부정하고 프랑스에 대한 저항을 주도했다. 사제들 또한 "신을 믿지 않는" 프랑스를 비난하며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세비야 군부는 1808년 스페인 최고 군부임을 선언하고, 각 지방과 신대륙 속령의 군부들도 이를 인정하여 페르난도 7세를 대신하는 임시 정부를 수립했다.[5]
스페인 민중들은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에 맞섰다. 수적으로는 프랑스군이 우세했지만, 스페인 민중들의 끈질긴 게릴라전은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1812년, 최고 군부는 카디스 헌법을 선포했다. 이 헌법은 입헌군주제를 표방하고, 발언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남성의 보통 참정권 등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비록 로마 가톨릭교회는 여전히 국교로 지정되었고 이단은 범죄로 취급되었지만, 이단 심판은 폐지되었다.[5] 카디스 헌법은 스페인 헌정 역사상 최초로 자유주의적 기본권을 보장한 헌법으로, 이후 스페인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5. 3. 영국군의 개입과 전쟁의 종결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스페인 해군과 프랑스 지중해 함대가 궤멸되면서,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한 의존을 재고하게 된다. 마누엘 데 고도이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서 한때 탈퇴했다가 1807년 다시 가입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고도이와 스페인 왕실에 대한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페르난도 7세는 영국을 중요시했고, 나폴레옹은 스페인 왕실이 프랑스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1808년, 스페인과 프랑스는 포르투갈 분할 점령에 합의하고 영국 지원 하에 계획을 실행한다. 프랑스와 스페인 군은 포르투갈을 빠르게 장악했지만, 페르난도 왕자가 프랑스로 떠나면서 고도이를 몰아내기 위해 프랑스에 청탁한다는 소문이 퍼진다. 스페인 전역에서 고도이에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나고, 결국 고도이는 폭도들에게 체포된다. 카를로스 4세는 아들을 위해 퇴위했지만, 나폴레옹은 페르난도에게 퇴위를 강요하고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왕으로 앉힌다. 이에 스페인 민중들은 항거하기 시작한다.[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나폴레옹의 형제인 호세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자, 스페인과 해외 제국 모두에서 정통성 위기가 발생했다. 페르난도 7세가 폐위된 후 민주적인 섭정 역할을 한 카디스 코르테스는 1812년 자유주의 헌법을 비준하여 군주제와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제한했다. 페르난도 7세는 1814년 권력을 되찾자 자유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절대주의 통치로 돌아갔다. 스페인 나폴레옹 시대 동안 스페인 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독립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 아메리카의 상당 부분이 독립을 쟁취하고 입헌 공화국을 수립했다.[5]
6. 결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프랑스 부르봉 왕가는 카를로스 2세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스페인 왕위를 차지했다. 부르봉 왕가는 스페인과 프랑스 왕관의 통합을 금지하고, 유럽 내 스페인 영토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스페인을 통치하게 되었다.[5] 부르봉 왕가는 합스부르크 시대 말기에 쇠퇴한 스페인 제국을 부흥시키기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은 스페인 아메리카 계몽주의를 비롯한 스페인과 스페인의 해외 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스페인과 스페인 아메리카는 로마 가톨릭교를 핵심 정체성으로 유지했다.[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하여 그의 형제 호세프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자, 스페인과 해외 제국은 정통성의 위기를 겪었다. 페르난도 7세가 폐위된 후 카디스 코르테스는 1812년 자유주의 헌법을 제정하여 군주제와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제한했다. 페르난도 7세는 1814년 권력을 되찾은 후 자유주의 헌법을 폐기하고 절대주의 통치로 복귀했다. 스페인 나폴레옹 시대 동안 스페인 아메리카 대부분 지역에서 독립 전쟁이 발발했고, 1814년 페르난도 7세가 왕위에 복귀했을 때 스페인 아메리카의 상당 부분이 독립하여 입헌 공화국을 수립했다. 누에바 에스파냐 (멕시코)와 페루는 예외적으로 1821년(멕시코)과 1824년(페루)에 각각 독립했다. 멕시코는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가 잠시 군주제를 시행했지만, 1824년 멕시코 헌법에 따라 연방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1715년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가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이 유입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의 계몽주의는 군주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군주제는 기존 권위와 위계질서를 유지했다.[6] 베니토 페이호오는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사고를 장려하여 미신을 타파하려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우주의 비판적 극장》(1726–39)에서 스페인의 과학적 낙후성을 지적했다.[7]
18세기 스페인은 절대주의 강화, 중앙집권화, 행정 현대화, 경제적 조치 촉진, 국제적 영향력 확대를 추구했다.[8] 계몽주의 시대 사상은 1750년경 스페인에 영향을 미쳤지만, 주로 스페인의 번영과 강대국 지위 회복을 위한 개혁에 초점을 맞췄다. 의학과 물리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철학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영향은 있었지만, 프랑스 철학자들과 같은 가톨릭교나 교회에 대한 도전은 거의 없었다.
가스파르 멜초르 데 요베야노스는 스페인의 주요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법률 역사를 연구하고 "원시 순수성으로 헌법을 보존"하는 데 실패한 스페인을 비판했다. 그는 《농업법안 조사 보고서》(1795)에서 귀족과 교회의 토지 축적을 비판하고, 교회 토지 매각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9]
역사학자 조나단 이스라엘은 카를로스 3세가 계몽주의에 거의 관심이 없었고, 그의 각료들도 계몽주의 사상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대부분의 각료들이 절대주의자였으며, 군주제, 제국, 귀족, 그리고 교육에 대한 교회 통제와 권위를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지적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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