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페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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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리페 4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의 장남으로, 스페인 황금기 말기에 즉위하여 1621년부터 1665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스페인은 네덜란드 독립, 포르투갈 독립, 카탈루냐 반란, 프랑스와의 전쟁 등 국내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예술 후원자로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로페 데 베가 등 예술가들을 후원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측근인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의존했다. 펠리페 4세는 두 번 결혼하여 많은 자녀를 두었지만, 근친혼의 영향으로 후계 문제가 불안정했으며, 결국 그의 아들 카를로스 2세의 무능력으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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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펠리페 4세 - 피레네 조약
피레네 조약은 1659년 프랑스와 스페인 간에 체결되어 영토 분할과 혼인 동맹을 통해 프랑스의 지위를 강화하고 스페인의 영향력을 감소시켰으며, 프랑스 왕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 펠리페 4세 - 시녀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1656년에 그린 "시녀들"은 알카사르 궁전 내 화가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와 시녀들, 그리고 벨라스케스 자신과 왕 부부의 모습을 담아 구도와 원근법, 빛의 활용 등 다각적인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다. - 17세기 스페인 사람 - 엘 그레코
엘 그레코는 비잔틴 미술을 익히고 베네치아와 로마를 거쳐 스페인 톨레도에서 독창적인 화풍을 확립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이며, 매너리즘의 영향을 받아 인물을 길게 늘이고 강렬한 색채와 빛으로 종교적 감성을 표현했으며, 주요 작품으로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등이 있다. - 17세기 스페인 사람 -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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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아들로 태어나 스페인, 이탈리아, 아메리카 등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아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가톨릭 신앙을 옹호하며 종교 개혁 세력을 탄압하다가 1598년에 사망했다. - 바야돌리드 출신 - 안 도트리슈
안 도트리슈는 스페인 펠리페 3세의 딸로, 프랑스 왕 루이 13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궁정 생활을 시작했으며, 루이 14세를 낳고 남편 사망 후 섭정으로 프랑스를 통치하다가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펠리페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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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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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펠리페 도밍고 빅토르 데 라 크루스 데 아우스트리아 이 아우스트리아 |
출생일 | 1605년 4월 8일 |
출생지 | 바야돌리드 왕궁, 바야돌리드, 카스티야 왕관령, 스페인 합스부르크 |
사망일 | 1665년 9월 17일 |
사망지 | 마드리드, 카스티야 왕관령, 스페인 |
매장지 | 엘 에스코리알 |
종교 |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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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스페인 국왕 | 기타: 더 보기... |
재위 기간 | 1621년 3월 31일 – 1665년 9월 17일 |
선임자 | 펠리페 3세 |
후임자 | 카를로스 2세 |
포르투갈 국왕 | 기타: 더 보기... |
재위 기간 | 1621년 3월 31일 – 1640년 12월 1일 |
선임자 | 펠리페 2세 |
후임자 | 주앙 4세 |
가문 | |
왕가 | 합스부르크 |
아버지 | 펠리페 3세 |
어머니 |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타 |
배우자 | |
배우자 |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1615년 결혼, 1644년 사망) 마리아나 데 아우스트리아 (1649년 결혼) |
자녀 | |
자녀 | 기타: 그 외... 가족 |
적자 | 발타사르 카를로스, 아스투리아스 공 마리아 테레사, 프랑스 왕비 마르가레테 테레사, 신성 로마 황후 펠리페 프로스페로, 아스투리아스 공 카를로스 2세, 스페인 국왕 |
서자 | 후안 호세, 네덜란드 총독 알론소, 쿠엥카 주교 알폰소, 말라가 주교 |
기타 작위 | |
기타 작위 | 나폴리 국왕 시칠리아 국왕 사르데냐 국왕 밀라노 공작 부르고뉴 공작 브라반트 공작 림뷔르흐 공작 룩셈부르크 공작 나뮈르 변경백 부르고뉴 백작 플랑드르 백작 에노 백작 아르투아 백작 샤롤레 백작 |
2. 생애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루이 13세의 왕비 안 도트리슈,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안나 등이 있다. 바야돌리드 왕궁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펠리페 3세와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사이에서 장남이었다.
그가 국왕으로 즉위했을 무렵의 스페인은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황금시대라 불렸던 전성기의 끝무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의 재위 중에 네덜란드는 기나긴 80년 전쟁을 끝내고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립했다. 1640년에는 동군연합을 형성하고 있던 포르투갈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브라간사 공작을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 옹립하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105] 비슷한 시기에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 등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펠리페 4세는 즉위 후 정치에 관해서는 대부분을 자신의 시종 출신인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일임하였고, 본인은 예술가들을 육성하고 후원하는 데 힘썼다. 그의 치세 중에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호세 데 리베라,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시인 로페 데 베가, 소설가 프란시스코 데 케베도,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라바르카 등 걸출한 재능을 지닌 예술가들이 등장하였다. 그의 방대한 미술 컬렉션은 현재 스페인의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사적으로 펠리페는 유머 감각이 뛰어나고 '재미를 아는 감각'을 가진 가벼운 모습을 보였다.[9] 그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문학과 시를 유머러스하게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아카데미'라는 가벼운 문학 살롱에 사적으로 참석했다.[10] 그는 열렬한 극장 애호가였으며, 때로는 이러한 '가벼운' 오락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동시대인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11] 다른 사람들은 그의 개인적인 성격을 '천성적으로 친절하고 온화하며 상냥하다'라고 묘사했다.[12] 라틴어와 지리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프랑스어, 포르투갈어 및 이탈리아어를 잘 구사할 수 있는 등 학문적으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3] 올리바레스를 포함한 많은 동시대인들처럼 점성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14] 프란체스코 기차르디니의 정치사에 대한 텍스트를 직접 번역한 필사본이 남아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펠리페의 주요 약점을 '자신을 불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의존한다'고 묘사했는데, 최근 몇 년 동안 펠리페의 정부 내 역할에 대한 해석이 개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말은 적절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랜 기간에 걸쳐 행해진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펠리페 4세의 자녀들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두 명의 자녀만 장성했다. 유일하게 장성한 왕자인 카를로스 2세는 왕위를 이었으나 병약하여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1700년에 사망함으로써, 펠리페 4세의 자식 대에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단절되었다.[106] 펠리페 4세의 딸 마리테레즈는 프랑스 루이 14세와 결혼하였고, 그녀의 손자는 훗날 1700년에 펠리페 5세가 되어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106]
배우자 | 자녀 | 생몰년 | 비고 |
---|---|---|---|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 마리아 마르가리타 | 1621년 | |
마르가리타 마리아 카타리나 | 1623년 | ||
마리아 에우헤니아 | 1625년 - 1627년 | ||
이사벨 마리아 테레사 | 1627년 | ||
발타사르 카를로스 | 1629년 - 1646년 | 아스투리아스 공 | |
프란시스코 페르난도 | 1634년 | ||
마리아 아나 안토니아 | 1636년 | ||
마리아 테레사 | 1638년 - 1683년 |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왕비 | |
마리아 안나 | 마르가리타 마리아 테레사 | 1651년 - 1673년 |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황후 |
마리아 암브로시아 | 1655년 | ||
펠리페 프로스페로 | 1657년 - 1661년 | 아스투리아스 공 | |
토마스 카를로스 | 1658년 - 1659년 | ||
카를로스 | 1661년 - 1700년 | 스페인 국왕 | |
마리아 칼데론 |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 1629년 | 서자 |
2. 1. 즉위 초반과 올리바레스 백작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펠리페 4세는 1621년 열여섯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펠리페 4세는 즉위 후 정치에 관해서는 대부분을 자신의 시종 출신인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일임하였고, 본인은 예술가들을 육성하고 후원하는 데 힘썼다.[105]펠리페 4세는 아버지 펠리페 3세의 총신이었던 프란시스코 데 산도발 이 로하스, 초대 레르마 공작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돈 발타사르 데 수니가가 이끄는 새로운 귀족 연합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 데 수니가는 자신의 조카인 가스파르 데 구스만 이 피멘텔, 올리바레스 백작-공작을 펠리페 왕세자에게 소개했고,[18] 올리바레스는 빠르게 펠리페의 가장 신뢰받는 고문이 되었다. 펠리페 4세는 왕위에 오르자 왕의 서명이 필요한 모든 서류를 먼저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보내도록 명령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19]

즉위 초기에 펠리페 4세는 아침에 올리바레스에게 깨어나 그날의 일을 논의했고 하루에 두 번 더 그를 만났지만,[18] 나중에는 이 일상이 줄어들어 국왕은 매일 올리바레스와 정책에 대해 짧은 회의만 한 번 가졌다.[19] 펠리페 4세는 1641–1642년 동안 정책에 더 많이 개입했고, 전통적으로 묘사된 것보다 정책 결정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8] 그러나 그는 시의적절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해 여전히 비판을 받는다.[21]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의 긴밀한 관계는 부엔 레티로 궁전에 그들의 초상화를 나란히 배치한 것으로 나타났다.[23] 하지만 두 사람은 성격 차이와 정책에 대한 의견 차이로 인해 많은 다툼과 논쟁을 벌였다.[24]
펠리페 4세의 초기 정책은 펠리페 2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보수적인 외교 정책과 국내의 전통적 가치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1609년부터 유지되어 온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에 대한 정책을 거부하고 30년 전쟁에 참전했으며, 다부처 체제인 왕립 평의회와 경쟁하여 스페인 전역에 ''군타''(소위원회) 정부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급진적인 면모도 보였다.
1640–1643년의 위기 속에서 올리바레스가 실각한 후, 펠리페 4세는 처음에는 스스로 통치하겠다고 발표하여 사실상 자신의 수석 장관이 되었다. ''군타'' 정부 시스템은 해체되기 시작했지만, 결국 루이스 데 아로를 통한 통치로 되돌아갔고, 위원회 시스템의 반개혁은 중단되었다.
2. 2. 대외 관계와 30년 전쟁
펠리페 4세는 30년 전쟁 대부분의 기간을 통치했다. 펠리페 3세의 마지막 해에 발타사르 데 수니가는 페르디난트 2세 편에서 보헤미아 봉기와 팔츠 선제후령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도록 설득했다. 펠리페 4세가 즉위하자, 데 수니가와 올리바레스 백작은 스페인을 신성 로마 제국과의 동맹 관계에서 더 공격적인 외교 정책을 펼치도록 설득했다. 이는 1621년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적대 행위를 갱신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1643년까지 스페인은 '네덜란드 우선' 전략을 추구했다.[32] 필리페 4세는 호전적인 인물은 아니었으며, 영토 어딘가에서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언급했고,[33] 카스티야 국민들이 전쟁 지원으로 큰 대가를 치렀다고 슬퍼했다.[34]1620년대는 스페인 외교에 좋은 시기였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성공적이었고, 1624년 브레다 공방전에서 브레다를 탈환했다. 그러나 1620년대 말, 필리페 4세 정부는 만토바 계승 전쟁 (1628–1631) 동안 플랑드르에서의 전쟁과 프랑스와의 관계 중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필리페 4세의 고문들은 스페인 길을 네덜란드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플랑드르 전쟁을 우선시할 것을 권고했지만, 이는 루이 13세를 적대하게 만들었다.[35] 1630년대 중반, 스페인은 뇌르틀링겐 전투 (1634년)에서 프로테스탄트 연합 군대를 격파하는 등 새로운 성공을 거두었지만, 프랑스와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올리바레스는 필리페 4세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이 전부 아니면 전무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36]
1635년부터 시작된 프랑스-스페인 전쟁 (1635년)은 초기 스페인의 성공으로 파리를 위협했지만, 로크루아 전투 패배 후에도 스페인은 강력한 적수로 남았다. 그러나 1640년부터 스페인 영토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전쟁 유지가 어려워졌다. 필리페 4세는 프랑스의 위협에 대응하여 '네덜란드 우선' 전략을 포기하고, 플랑드르 군대에 대한 자원을 삭감했으며, 프랑스가 지원하는 카탈루냐 반군과의 전투를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37] 로크루아 전투 직후, 필리페 4세는 올리바레스를 해고하고 평화 조약을 모색했다. 루이스 데 아로가 체결한 베스트팔렌 조약은 80년 전쟁과 독일에서의 전쟁을 해결했지만, 프랑스와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필리페 4세는 1648년 프롱드 반란 동안 프랑스의 약점을 감지하고 전투를 계속했으며, 1651년 카탈루냐에서 프랑스에 대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38] 그러나 1658년 덩케르크 포위전 (1658년)에서 잉글랜드-프랑스 연합군에게 덩케르크를 잃은 후, 필리페 4세는 평화를 원했다.[39] 1659년 피레네 조약과 마리아 테레사 데 에스파냐와 루이 14세의 결혼으로[40] 프랑스와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펠리페 4세와 올리바레스 백작은 군대 문제의 근본 원인이 지도력 부족(falta de cabezas)에 있다고 결론 내렸다. 국왕은 더 많은 그란데들을 군 고위직에 진출시키려 했지만, 이들은 군사 기술을 배우는 데 수년을 할애하려 하지 않았다. 1630년대에 국왕은 승진 규칙을 면제하고 높은 봉급을 지불하며 그란데들을 진급시켰지만,[41] 로크루아 전투와 같은 전투에서 이들의 지휘 능력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1640년, 펠리페 4세는 포르투갈과 카스티야 사이의 국경을 군사 지구로 나누었다.[42] 각 지구는 카스티야 측 최고위 귀족이 감독했다.[43]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 가스파르 알폰소 페레스 데 구스만은 아야몬테에서 알가르브 지구를 관리했다.[44] 아야몬테 훈타는 6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군사 평의회 서기인 마티아스 곤살레스 데 메드라노가 훈타의 서기 역할을 했다.[42][45]
2. 3. 국내 문제와 스페인의 쇠퇴
펠리페 4세가 국왕으로 즉위했을 무렵, 스페인은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황금시대라 불렸던 전성기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의 재위 중에 네덜란드는 기나긴 80년 전쟁을 끝내고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립했다. 동군연합을 형성하고 있던 포르투갈에서 1640년에 쿠데타가 일어나 브라간사 공작을 포르투갈 국왕 주앙 4세로 옹립하며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다.[105] 비슷한 시기에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나는 등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는 쇠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펠리페 4세는 즉위 후 정치에 관해서는 대부분을 자신의 시종 출신인 올리바레스 백작에게 일임하였다. 펠리페 4세는 아버지 펠리페 3세로부터 전 세계에 걸쳐있는 거대한 제국을 물려받았지만, 그가 겪은 가장 어려운 도전은 스페인 자체의 국내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17세기 초 스페인은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왕국과 발렌시아, 카탈루냐, 안달루시아의 자치주, 그리고 나폴리, 네덜란드, 밀라노 등 여러 영토의 집합체였다. 이 모든 지역은 카스티야 군주제와 펠리페 4세의 개인적 결합이라는 제도를 통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52] 각 지역은 서로 다른 세금, 특권, 군사적 배치를 가지고 있었다.
통치 초기에 국왕의 총신인 올리바레스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펠리페는 이 시스템의 가장 혼란스러운 측면을 개혁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했다. 왕실 평의회의 악명 높은 느림에 좌절한 펠리페는 올리바레스가 소규모 위원회인 ''juntas''(후안타스)의 설립을 지원했다. 1620년대에 필리페는 스페인 생활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혁하려는 열망에 영향을 받아, 청교도적 성향의 상당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1623년, 그는 스페인 내 모든 합법적인 사창가를 폐쇄했고, 사치품에 대한 사치 금지법을 연장했으며, 교황의 사제 성적 행위를 더 엄격하게 규제하려는 노력을 지원했다.[56]
1630년대에 필리페의 국내 정책은 30년 전쟁의 재정적 압박, 특히 프랑스와의 전쟁 증가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받았다. 전쟁 비용은 막대했고, 대부분 카스티야에 부담되었지만, 이 출처로부터 더 많은 자금과 병력을 조달할 수 있는 왕관의 능력은 점점 제한되었다.[54]
1640년에 위기가 닥쳤다. 올리바레스가 프랑스 침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카탈루냐에 개입하려 하자 반란이 일어났고, 수년간의 수확자 전쟁이 발발했다. 카탈루냐 반군과 프랑스 왕실군의 동맹은 진압하기 어려웠고, 포르투갈 귀족들의 전쟁 지원을 동원하려던 올리바레스는 두 번째 봉기를 촉발했다. 리스본의 귀족들은 필리페를 추방하고 브라간사 왕가에게 왕위를 넘겼으며, 이는 이베리아 연합 60년의 종말과 포르투갈 복구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63] 1640년 포르투갈에서 주앙 4세가 펠리페 4세의 뒤를 이었다.[62]
사건에 의해 큰 충격을 받은 필리페는 1643년에 그의 왕실 총신인 올리바레스를 해임하여 스페인 엘리트와 타협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필리페 초기 시절의 개혁의 불꽃은 다시 타오르지 않았다. 카탈루냐 반란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1652년, 스페인군은 바르셀로나를 탈환했고 필리페는 반군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앞으로 전통 관습과 권리를 존중할 것을 약속했다.[65]
통치 체제에 중세의 봉건제의 잔재를 짙게 남긴 채였던 스페인은,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잉글랜드 왕국이나 네덜란드, 또는 프랑스 왕국에 결정적으로 뒤쳐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는 독립하고(포르투갈 왕정복고 전쟁), 카탈루냐는 대반란을 일으키며(수확인의 전쟁), 프랑스-스페인 전쟁을 종결시킨 피레네 조약으로 루시용 지방 등을 프랑스에 할양하게 되는 등, 펠리페 4세의 치세는 스페인의 쇠퇴가 결정적인 시기와 겹쳤다.
2. 4. 근친혼과 후계 문제
펠리페 4세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랜 기간에 걸쳐 행해진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펠리페 4세의 자녀들 대부분이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두 명의 자녀만 장성하였다.[105] 유일하게 장성한 왕자인 카를로스 2세는 왕위를 이었으나 병약하여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1700년에 사망함으로써, 펠리페 4세의 자식 대에서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단절되었다.[106]1615년, 10세의 펠리페는 13세의 프랑스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는 1646년 1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2]
1649년, 엘리자베트와 외아들이 모두 사망한 후 44세의 펠리페는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조카이자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인 14세의 마리아 안나와 재혼하였다.[3] 마리아 안나는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카를로스 2세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그러나 카를로스 2세는 병약하여 왕위 상속이 불확실한 상황이었다.[4]
배우자 | 자녀 | 생몰년 | 비고 |
---|---|---|---|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 마리아 마르가리타 | 1621년 | |
마르가리타 마리아 카타리나 | 1623년 | ||
마리아 에우헤니아 | 1625년 - 1627년 | ||
이사벨 마리아 테레사 | 1627년 | ||
발타사르 카를로스 | 1629년 - 1646년 | 아스투리아스 공 | |
프란시스코 페르난도 | 1634년 | ||
마리아 아나 안토니아 | 1636년 | ||
마리아 테레사 | 1638년 - 1683년 |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왕비 | |
마리아 안나 | 마르가리타 마리아 테레사 | 1651년 - 1673년 |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황후 |
마리아 암브로시아 | 1655년 | ||
펠리페 프로스페로 | 1657년 - 1661년 | 아스투리아스 공 | |
토마스 카를로스 | 1658년 - 1659년 | ||
카를로스 | 1661년 - 1700년 | 스페인 국왕 | |
마리아 칼데론 | 후안 호세 데 아우스트리아 | 1629년 | 서자 |
펠리페 4세는 예술품 수집에 대한 '놀라운 열정'과 연극에 대한 사랑으로 기억되고 있다.[66] 그는 무대에서 로페 데 베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등 저명한 극작가들을 선호했으며, 여러 희극 작품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정 연극에서는 당시 상업 연극에서는 사용되지 않던 이탈리아에서 온 새로운 발명품인 원근법적 배경을 사용했다. 일부 작가들은 바로크 왕실 연극의 환영을 공연이 강화하도록 설계된 왕권의 환영과 비교하기도 했다.[67] 다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펠리페가 극작가에게 제공한 재정적 후원은 한때 생각했던 것보다 덜 광범위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6]
펠리페 4세는 아버지로부터 광대한 스페인 제국을 물려받았지만,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 국내 문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7세기 초 스페인은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등 여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지역은 서로 다른 세금, 특권, 군사적 배치를 가지고 있었다.[52] 이러한 느슨한 시스템은 1640년대까지 스페인이 재정적 반란이 적었다는 결과를 낳았다.[53]
펠리페 4세는 두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고, 수많은 사생아를 낳았다.
펠리페 4세의 딸 마리테레즈는 프랑스 루이 14세와 결혼하였고, 그녀의 손자는 훗날 1700년에 펠리페 5세가 되어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시조가 되었다.[106]
3. 예술 후원
예술적으로 펠리페는 그의 궁정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후원하여 유명해졌다. 세비야 출신의 벨라스케스는[68] 상호 교류를 통해 올리바레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1624년 국왕에 의해 마드리드로 소환되었다.[69] 벨라스케스는 펠리페와 함께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으며, 피레네 조약 기념비를 그리는 등 펠리페를 위해 많은 작품을 남겼다. 국왕과 벨라스케스는 말, 개, 예술에 대한 공통된 관심을 공유했으며, 사적으로 수년 동안 편안하고 편안한 관계를 형성했다.[12]
펠리페는 에우제니오 카세스, 빈첸초 카르두치, 곤잘레스 코크스, 안젤로 나르디를 포함한 다른 많은 저명한 화가들도 후원했다. 또한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서 그림을 수집하여 사망 당시 4,000점이 넘는 그림을 모았으며, 일부는 이를 '메가 컬렉션'이라고 칭했다.[70]
펠리페는 동시대인들에게 ''엘 레이 플라네타'', 즉 '행성 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71] 그의 궁정에서 이루어진 많은 예술과 전시물은 스페인과 외국인 모두에 대한 권력과 권위를 투영해야 할 필요성이라는 맥락에서 해석되었다.[72] 펠리페의 궁정을 완전히 퇴폐적인 것으로 인식했던 이전의 해석은 대부분 대체되었지만, 당시의 예술과 상징은 확실히 스페인 권력의 더 넓은 위협과 쇠퇴를 반영하지 못했다.[5]
실제로, 이 기간 동안의 제한적인 스페인 군사적 성공은 왕실 예술가들에 의해 과도한 정도로 기념되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출신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플랑드르 군대를 찬양하는 작품을 제작했으며, 여기에는 세바스티안 브랑크스, 피터 스네이어스, 얀 민세 몰레나르, 빌렘 혼디우스가 포함된다. 브레다 재탈환만으로도 벨라스케스와 프랑스 판화가 자크 칼로의 주요 작품이 탄생했으며, 다양한 연극과 책도 함께 나왔다.[41]
'행성 왕'은 또한 그의 예술과 궁정 의례를 전시할 새로운 궁전에 투자했다. 올리바레스를 통해 펠리페는 마드리드에 있는 ''부에노 레티로 궁전''의 건설을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아직 프라도 근처에 남아 있다. 1631년에 소규모로 작업이 시작되었으며,[72] 웅장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왕좌의 방'은 1635년에 완공되었다.[5] 궁전에는 자체적인 '극장, 무도회장, 갤러리, 투우장, 정원 및 인공 호수'가 포함되었으며,[71] 유럽 전역의 예술가와 극작가의 중심지가 되었다. 궁전은 펠리페 통치의 어려운 시기 중 하나에 건설되었다. 엄격한 전시 경제 시대의 비용과 불만을 품은 대중의 항의를 감안할 때,[76] 이는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전달하려는 시도의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펠리페 4세 치하의 스페인은 문화면에서 황금시대를 맞이했다. 회화에서는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 알론소 카노,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호세 데 리베라 등이 활약했고, 스페인령 네덜란드 궁정에는 루벤스가 있었다. 문학에서는 로페 데 베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케베도 등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했다.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와 루벤스를 보호하여 걸작을 많이 그리게 했고, 당대 최고의 안목을 가진 자로서 유럽 최고의 미술 컬렉션을 구축하여 훗날 프라도 미술관의 초석을 다졌다.
4. 평가
통치 초기에 펠리페 4세는 총신 올리바레스의 영향을 받아 왕실 평의회의 느린 의사 결정을 개선하기 위해 소규모 위원회인 ''juntas''(후안타스)를 설립했다.[54] 올리바레스는 또한 제국 전역에서 공정한 세금을 지원받아 14만 명의 군인을 창설하는 '무력 동맹'을 제안했지만, 각 지역 의회의 반대로 철회되었다.[55] 1620년대에 펠리페 4세는 사창가 폐쇄, 사치 금지법 연장 등 청교도적 성향의 법률을 통과시켰다.[56]
펠리페 4세는 스페인 통화를 안정시키려 했지만, 인플레이션이 치솟았다.[57] 1627년 올리바레스는 제노바 공화국 은행가들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 파산을 선언했고, 제노바의 부채가 제거되자 토착 은행가들에게 자금을 요청하려 했으나 실패했다.[58] 1628년 스페인 보물선이 네덜란드에 나포되면서 스페인의 자금 조달 능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1630년대에 펠리페 4세의 국내 정책은 30년 전쟁의 재정적 압박, 특히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큰 영향을 받았다.[54] 전쟁 비용은 대부분 카스티야에 부담되었고, 왕권은 재정적 제약과 높은 세금을 시행하고 왕실 재산을 매각했다.[59][60]
1640년에 올리바레스가 프랑스 침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카탈루냐에 개입하려 하자 수확자 전쟁이 발발했고, 포르투갈 귀족들은 펠리페 4세를 추방하고 브라간사 왕가에게 왕위를 넘겨 포르투갈 복구 전쟁이 시작되었다.[63] 1641년에는 안달루시아에서 필리페에 대한 반란이 시도되었다.[63]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여 펠리페 4세는 1643년 올리바레스를 해임하고,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발표하며 ''junta'' 정부 시스템을 해체하고 구 왕실 평의회 시스템을 복원했다.[31] 그러나 카탈루냐 반란은 계속되었고, 1652년 스페인군은 바르셀로나를 탈환한 후 펠리페 4세는 반군에게 사면령을 내렸다.[65]
펠리페 4세는 통치 말년에 종교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40] 그는 '기적의 성모' 그림에 특별한 경건함을 바쳤고, 마리아 데 아그레다 수녀와 22년 동안 600통이 넘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영적인 조언을 구했다.[73][15][75] 또한 펠리페 4세는 성인 추대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스페인의 위신을 높이고자 했다.[74]
마드리드 조약 (1630년)에서 펠리페 4세는 "스페인의 가톨릭 왕"으로 불렸고,[78] 뮌스터 조약 (1648년)에서는 "스페인의 왕, 돈 펠리페 4세와 포르투갈과 알가르브의 왕 돈 펠리페 3세"로 불렸다.[78]
1649년 포토시 조폐국 사기 사건 이후, 1651년에서 1652년 사이에 팜플로나 조폐국은 ("신의 은총으로 다스리는 카스티야와 나바라의 왕 펠리페")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전을 발행했다. 나바라 코르테스는 이 위반 행위에 대해 헌장을 항의했다. 이에 왕은 1652년에 ("신의 은총으로 다스리는 나바라의 왕 펠리페 6세")라는 문구가 새겨진 동전을 잠시 발행하여 보상했다.[79]
5. 자녀
1615년에 첫 번째 부인인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서 발타사르 카를로스를 포함한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발타사르 카를로스는 16세에 요절했다.
1649년, 펠리페 4세는 첫 부인과 아들이 모두 사망하자, 조카딸인 마리아나와 재혼했다.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마리아나와의 사이에서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카를로스 2세 등을 낳았지만, 카를로스 2세는 병약하여 왕위 계승에 어려움이 있었다.
펠리페 4세는 정부(情婦)들과의 사이에서 최소 30명 이상의 사생아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2] 그중 마리아 칼데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후안 호세는 왕자로 인정받았다.[4]
5. 1. 첫 번째 결혼: 프랑스의 이사벨 (엘리자베트)
1615년 펠리페 4세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딸인 엘리자베트와 첫 결혼을 했다. 펠리페 4세는 엘리자베트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 아들은 발타사르 카를로스 한 명뿐이었는데, 그는 1646년 1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엘리자베트는 1643년 다른 스페인 귀족들과 공모하여 올리바레스를 궁정에서 몰아낼 수 있었고, 잠시 동안 펠리페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2]
펠리페 4세와 엘리자베트 사이의 자녀들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생일 | 사망 | 기타 |
---|---|---|---|
마리아 마르가리타 | 1621년 8월 14일 | 1621년 8월 15일 | |
마르가리타 마리아 카탈리나 | 1623년 11월 25일 | 1623년 12월 23일 | |
마리아 에우헤니아 | 1625년 11월 21일 | 1627년 8월 21일 | |
이사벨 마리아 테레사 | 1627년 10월 31일 | 1627년 11월 1일 | |
![]() | 1629년 10월 17일 | 1646년 10월 9일 | 아스투리아스 공 |
프란시스코 페르난도 | 1634년 3월 12일 | 1634년 3월 12일 | |
마리아 아나 안토니아 | 1636년 1월 17일 | 1636년 12월 5일 | |
![]() | 1638년 9월 10일 | 1683년 7월 30일 | 루이 14세의 왕비 |
5. 2. 두 번째 결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1649년, 첫 번째 왕비 이사벨과 외아들이 모두 사망한 후, 펠리페 4세는 조카딸인 마리아나와 재혼했다.[3] 이 결혼은 정치적인 이유와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펠리페 4세의 열망에 따른 것이었다.[3]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는 1649년 10월 7일에 결혼했다.마리아나는 펠리페 4세에게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카를로스 2세 두 명뿐이었다.[4]
사진 | 이름 | 출생 | 사망 | 기타 |
---|---|---|---|---|
![]() | 마르가리타 테레사 | 1651년 7월 12일 | 1673년 3월 12일 | 레오폴트 1세의 황후 |
마리아 암브로시아 | 1655년 12월 7일 | 1655년 12월 21일 | ||
![]() | 펠리페 프로스페로 | 1657년 11월 28일 | 1661년 11월 1일 | 아스투리아스 공 |
페르난도 토머스 카를로스 | 1658년 12월 23일 | 1659년 10월 22일 | ||
![]() | 카를로스 2세 | 1661년 11월 6일 | 1700년 11월 1일 | 스페인 국왕 |
카를로스 2세는 병약하여 사망 위험이 잦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이 불확실한 상황이었다.[4]
5. 3. 사생아
펠리페 4세는 바야돌리드 왕궁에서 펠리페 3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정부(情婦)를 두도록 권장받아 최소 30명 이상의 사생아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2]그 중 배우 마리아 칼데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후안 호세는 왕자 신분으로 자랐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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