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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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장녀로, 1775년에 태어났다. 1785년 포르투갈의 주앙 왕자와 정략 결혼하여 포르투갈 왕태자비가 되었으며, 9명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 주앙 6세가 정신 이상으로 선언된 후 국정에 간섭하려 했으며,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포르투갈 왕실이 브라질로 피신했을 때 스페인 왕위 계승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포르투갈로 돌아온 후 절대왕정을 지지하며 아들 미겔 1세와 함께 주앙 6세를 유폐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826년 주앙 6세가 사망한 후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켈루스 궁전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녀의 죽음에는 자살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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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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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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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켈루스의 메게라 (A Megera de Queluz) |
전체 이름 | 카를로타 조아키나 테레사 카예타나 데 보르본 이 보르본-파르마 |
로마자 표기 | Carlota Joaquina Teresa Cayetana de Borbón y Borbón-Parma |
왕족 정보 | |
배우자 | 주앙 6세 |
왕가 | 부르봉 왕가 브라간사 왕가 |
아버지 | 카를로스 4세 |
어머니 | 마리아 루이사 데 파르마 |
생애 | |
출생일 | 1775년 4월 25일 |
출생지 | 아란후에스 궁전, 아란후에스, 스페인 |
사망일 | 1830년 1월 7일 |
사망지 | 켈루스 궁전, 신트라, 포르투갈 |
매장지 | 브라간사 왕가 판테온, 리스본, 포르투갈 |
결혼 및 자녀 | |
결혼 | 1785년 6월 9일 |
배우자 | 주앙 6세 (1785년 5월 8일 결혼, 1826년 3월 10일 사망) |
자녀 | 마리아 테레자,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공작 안토니우, 베이라 공작 마리아 이사벨, 스페인의 여왕 페드루 1세와 4세, 브라질 황제, 포르투갈 왕 마리아 프란시스카, 스페인의 여공작 이사벨 마리아, 포르투갈의 여공작 섭정 미겔 1세, 포르투갈 왕 마리아 다 아순상 여공작 아나 데 제수스 마리아, 롤레 후작 부인 |
왕위 | |
포르투갈 왕비 | 1816년 3월 20일 – 1826년 3월 10일 |
브라질 왕비 | 1816년 3월 20일 – 1822년 10월 12일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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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의 장녀로, 아랑후에스에서 태어났다. 카를로타의 친가 쪽 조부모는 카를로스 3세와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였고, 외가 쪽 조부모는 파르마 공 필리포와 프랑스의 엘리사베타였다. 카를로스 3세와 파르마 공 필리포는 형제였고, 그들의 누이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포르투갈 국왕 주제 1세의 왕비였는데, 카를로스 3세와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소원해진 양국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계획하였다. 그 결과, 카를로타는 포르투갈의 왕자 주앙과 결혼하였다.
1785년 5월 8일 카를로타는 주앙과 결혼하였고, 1788년 왕태자 주제의 죽음으로 남편이 브라간사 공작 및 브라질 공작이 되면서 포르투갈 왕태자비가 되었다. 카를로타와 주앙은 성격이 맞지 않았고, 슬하에 아홉 명의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는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
1807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피신했다. 당시 스페인 왕실 또한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카를로타는 자신이 스페인의 왕위계승자라고 여겼다. 1820년 포르투갈 왕실은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그사이 포르투갈은 절대왕정이 몰락하고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신헌법이 채택되는 등 급변해 있었다. 절대왕정을 신봉했던 카를로타는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남편 주앙 6세는 신헌법을 준수하려 했고, 카를로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아들 미겔과 손을 잡고 주앙 6세를 유폐시켰다. 그러나 영국의 개입으로 남편이 미겔에게 양위하게 하려던 그녀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주앙 6세는 아들을 추방했다.
1822년 주앙 6세가 세상을 떠났고, 브라질 황제로 있는 아들 페드루 1세가 귀국하기까지 나라의 통치는 아내 카를로타가 아닌 딸 이자벨 마리아에게 맡길 것을 당부했다. 카를로타는 남편의 임종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였고, 포르투갈 왕실에는 그녀가 주앙 6세를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후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신트라의 켈루스 궁전에서 사망했다.[1]
카를로타 호아키나와 주앙 6세 사이에는 다음과 같이 9명의 자녀가 있었다.[2]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마리아 테레자 | 1793년 | 1874년 | 사촌인 스페인 왕자이자 포르투갈 왕자 페드루 카를루스와 결혼, 이후 여동생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과부인 스페인 왕위 요구자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와 재혼 |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피오 | 1795년 | 1801년 | |
마리아 이자벨 | 1797년 | 1818년 |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의 두 번째 왕비 |
페드루 | 1798년 | 1834년 |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 |
마리아 프란시스카 | 1800년 | 1834년 |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의 첫 번째 부인 |
이자벨 마리아 | 1801년 | 1876년 | 포르투갈 섭정 |
미겔 | 1802년 | 1866년 | 포르투갈 국왕 |
마리아 다 아순상 | 1805년 | 1834년 | |
아나 데 제수스 | 1806년 | 1857년 | 포르투갈 총리 로레 공작의 부인 |
2. 1. 어린 시절

1775년 4월 25일, 아란후에스 왕궁에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내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의 둘째(생존한 장녀)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카를로타 호아키나 테레사 카예타나였지만, 아버지와 할아버지인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를 기리는 카를로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카를로타는 카를로스 3세가 가장 아끼는 손녀였다.
그녀는 종교, 지리, 그림, 승마(카를로타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를 중심으로 엄격하고 독실한 가톨릭 교육을 받았다. 스페인 군주의 닫힌 분위기와 엄격함은 가족과 온 궁정에 엄격한 행동 규범과 예절을 강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장난스럽고 활발한 아이로 묘사되었다.
2. 2. 결혼
카를로스 3세와 그의 누이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소원해진 스페인과 포르투갈 양국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정략결혼을 계획하였다. 그 결과 카를로타는 포르투갈의 왕자 주앙과, 카를로스 3세의 아들 가브리엘은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딸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1785년 5월 8일 카를로타는 주앙과 결혼하였고, 3년 뒤인 1788년 왕태자 주제의 죽음으로 남편이 브라간사 공작 및 브라질 공작이 되면서 그녀 또한 포르투갈의 왕태자비가 되었다. 카를로타와 주앙은 성격이 맞지 않았고, 아홉 번째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는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

카를로타의 재능은 마리아 1세 여왕을 대신하여 파견된 스페인 궁정 및 포르투갈 대사 앞에서 일련의 공개 시험을 치르면서 시험받게 되었다. 시험은 여왕의 둘째 아들과 결혼할 공주의 자질을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1785년 10월, 리스본의 가제타는 시험에 대한 기사를 게재했다.[1]
1785년 5월 8일에 대리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3일 후인 5월 11일, 10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와 그녀의 수행원들은 리스본으로 스페인을 떠났다. 스페인 궁정을 떠나는 날,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어머니에게 붉은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그림을 벽에 걸어두도록 부탁했는데, 스페인의 마르가레타 테레사 공주의 그림(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더 아름답다고 주장했다) 대신이었다. 공주의 수행원에는 유명한 스페인 신학자이자 학자인 펠리페 시오 신부, 시녀인 에밀리아 O'뎀시, 그리고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개인 시녀인 안나 미켈리나가 포함되었다. 포르투갈의 주앙 공자와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공식 결혼식은 1785년 6월 9일에 열렸다. 그녀는 겨우 10세였고 남편은 18세였다. 신부의 어린 나이 때문에 결혼의 완수는 1790년 1월 9일까지 연기되었고, 그 후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아이를 임신하고 낳을 수 있게 되었다.[1]
두 사람 사이에는 9명의 자녀가 태어났다.[2]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마리아 테레자 | 1793년 | 1874년 | 사촌인 스페인 왕자이자 포르투갈 왕자 페드루 카를루스와 결혼, 이후 여동생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과부인 스페인 왕위 요구자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와 재혼 |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피오 | 1795년 | 1801년 | |
마리아 이자벨 | 1797년 | 1818년 | 스페인 국왕 페르난도 7세의 두 번째 왕비 |
페드루 | 1798년 | 1834년 |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 브라질 황제 (페드루 1세) |
마리아 프란시스카 | 1800년 | 1834년 |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의 첫 번째 부인 |
이자벨 마리아 | 1801년 | 1876년 | 포르투갈 섭정 |
미겔 | 1802년 | 1866년 | 포르투갈 국왕 |
마리아 다 아순상 | 1805년 | 1834년 | |
아나 데 제수스 | 1806년 | 1857년 | 포르투갈 총리 로레 공작의 부인 |
2. 3. 포르투갈 궁정 생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1785년 5월 8일 포르투갈의 왕자 주앙과 결혼했다. 1788년 왕태자 주제의 죽음으로 남편이 브라간사 공작 및 브라질 공작이 되면서 그녀 또한 포르투갈의 왕태자비가 되었다.
하지만 브라간사 궁정의 분위기는 쾌활한 스페인 궁정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1] 계몽주의 시대의 원칙에 기반한 새로운 사회의 표본을 제시했던 유럽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포르투갈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여전히 모든 종류의 오락을 금지하는 규범을 강요했다.[1] 희극 연출은 물론 춤과 파티도 금지되었다.[1] 마리아 1세 여왕의 통치는 포르투갈의 보수적인 귀족 및 성직자 집단의 부상으로 특징지어졌는데, 이는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고모할머니인 과부 마리아나 빅토리아 여왕이 정의했듯이 극도로 "지루한" 환경이었다.[1]
이런 상황에서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사치와 파우스트에 익숙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종교적이고 엄격한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와의 관계는 매우 다정했는데,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1] 카를로타의 활기찬 성격은 여왕의 드문 휴식 시간에 기여했다.[1]
그녀의 자유로운 습관과 관습은 궁정의 다른 여성들과 달랐다.[2] 여성의 행동에 관해 매우 전통적인 포르투갈 남성들은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공공장소에서 자유롭게 다니고, 정치 분야에서 활동하며, 가족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에 반감을 가졌다.[2] 대부분의 포르투갈 여성들은 사회생활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행동은 궁정에서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유발했다.[2] 그중 일부는 프랑스 장군 장-앙도슈 쥐노의 아내인 아브란테스 공작부인과 같이 편견을 가진 이들도 있었는데, 그녀는 나중에 포르투갈을 침공했다.[2] 리스본에 있는 동안 쥐노 부인은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행동 방식과 옷차림을 비웃었고, 그녀를 극도로 못생긴 여자라고 비난했다.[2]
2. 4. 브라질 공주 시절
1788년 그의 맏형 주제가 사망하자, 주앙은 어머니의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곧 그는 브라질 공과 제15대 브라간사 공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788년에서 1816년까지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의 아내로서 브라질 공주로 알려졌다.마리아 1세 여왕이 1792년에 정신 이상으로 선언된 후, 주앙 왕자는 1799년에야 섭정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왕의 이름으로 정부를 장악했다. 이러한 변화는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야심차고 때로는 폭력적인 성격에 부합했다. 포르투갈 궁정에서 그녀는 국정에 자주 간섭하여 남편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이러한 정치 개입 시도는 포르투갈 귀족들과 심지어 국민들에게까지 불쾌감을 주었다.
그녀는 종종 정부 결정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섭정왕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을 의도로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그를 체포하고 그의 어머니처럼 그가 통치 능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1805년 이 음모가 발각되었다. 빌라 베르데 백작은 조사를 시작하고 관련된 모든 사람을 체포할 것을 제안했지만,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남편이 공개적인 스캔들을 피하고자 그녀의 체포를 반대하고, 그녀를 켈루스 궁전과 라마량 궁전에 가두는 것을 선호했으며, 자신은 마프라 궁전으로 이사하여 그녀와 사실상 별거했기 때문에 구제되었다.
카를로타와 주앙은 성격이 맞지 않았고, 아홉 번째 아이가 태어나고서부터는 사실상 별거에 들어갔다.[1]
2. 5. 브라질에서의 삶
1807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인해 포르투갈 왕가는 포르투갈을 떠나 브라질로 피신했다.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히스패닉 아메리카에 있는 스페인 영토의 행정권을 얻으려 시도했는데, 이는 카를로티즘으로 알려진 프로젝트였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의 통제를 받고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이자 오빠인 페르난도는 나폴레옹에 의해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스스로 억류된 가족의 상속자라고 여겼다. 그녀의 계획 중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아르헨티나 북부를 점령하여 스스로를 "라 플라타 여왕"으로 칭하는 것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포르투갈-브라질군은 라플라타강의 동쪽 강둑을 시스플라티나로 일시적으로 합병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며, 이 지역은 1822년 이후 브라질 제국에 유지되었고, 1828년 우루과이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2. 6. 포르투갈의 여왕
1807년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피신했다. 당시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친정인 스페인 왕실 또한 프랑스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자신이 스페인의 왕위계승자라고 여겼다.[1] 이후 포르투갈 왕실은 14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포르투갈은 절대왕정이 몰락하고 자유주의에 바탕을 둔 신헌법이 채택되는 등 급변해 있었다. 절대왕정을 신봉했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1] 그러나 남편 주앙 6세는 신헌법을 준수하려 했고,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절대왕정을 지지하는 아들 미겔과 손을 잡고 주앙 6세를 유폐시켰다.[1] 그러나 영국의 개입으로 남편이 미겔에게 양위하게 하려던 그녀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주앙 6세는 아들을 추방했다.[1]1822년 주앙 6세는 세상을 떠났고, 브라질 황제로 있는 아들 페드루 1세가 귀국하기까지 나라의 통치는 아내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아닌 딸 이사벨 마리아에게 맡길 것을 당부했다.[1] 카를로타 호아키나 또한 남편의 임종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였고, 포르투갈 왕실에는 그녀가 주앙 6세를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졌다.[1]
포르투갈 왕가가 14년 만에 포르투갈로 돌아왔을 때,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그들이 떠났을 때와 많이 변한 나라를 마주했다. 1807년, 포르투갈은 절대주의 아래 안정적으로 살고 있었다. 나폴레옹 군대와 스페인의 카디스 코르테스에 의해 조성된 정치적 태도는 혁명적인 사상을 포르투갈에 가져왔다. 1820년 자유주의 혁명이 포르투에서 시작되었다. 입헌 포르투갈 코르테스가 공포되었고, 1821년에는 포르투갈에 최초의 헌법이 부여되었다. 여왕은 극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고 포르투갈에서 반동적인 반응을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헌법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어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막내 아들 미겔과 동맹을 맺었는데, 그는 어머니의 보수적인 견해를 공유했다. 1824년, 미겔의 군 지휘관 지위를 이용하여 그들은 권력을 잡고 왕을 궁궐에 사실상 포로로 만들었으며, 여왕은 그에게 미겔을 위해 퇴위하도록 시도했다. 왕은 아내와 아들에 맞서 영국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되찾았고, 마침내 아들을 외국으로 내쫓았다. 여왕 또한 잠시 망명해야 했다.[1]
2. 7. 사망
1822년 주앙 6세가 세상을 떠나자, 브라질 황제로 있던 아들 페드루 1세가 귀국할 때까지 이자벨 마리아에게 섭정을 맡겼다. 카를로타는 남편의 임종을 지키지 않았으며, 포르투갈 왕실에는 그녀가 주앙 6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신트라의 켈루스 궁전에서 사망했다.[1]3. 자녀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1785년 포르투갈의 주앙 6세와 결혼하여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마리아 테레자 | 1793년 4월 29일 | 1874년 1월 17일 | 사촌 페드루 카를루스와 먼저 결혼했고, 여동생 마리아 프란시스카의 미망인이었던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와 두 번째로 결혼했다. |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베이라 공 | 1795년 3월 21일 | 1801년 6월 11일 | 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남동생 페드루가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
마리아 이사벨 데 브라간사 | 1797년 5월 19일 | 1818년 12월 26일 | 페르난도 7세와 결혼했다. |
페드루 1세 | 1798년 10월 12일 | 1834년 9월 24일 | 나폴레옹 전쟁 이후 스페인에 머물렀다. 1822년 브라질 독립을 선포하고 브라질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또한 1826년 포르투갈의 페드루 4세로 즉위했다. |
마리아 프란시스카 | 1800년 4월 22일 | 1834년 9월 4일 |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와 결혼했다. |
이자벨 마리아 | 1801년 7월 4일 | 1876년 4월 22일 | 1826년부터 1828년까지 포르투갈 섭정을 지냈으며 미혼으로 사망했다. |
미겔 1세 | 1802년 10월 26일 | 1866년 11월 14일 |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찬탈자로 알려졌으며, 1828년에서 1834년 사이에 포르투갈 국왕이었다. 그는 자유주의 전쟁 이후 퇴위해야 했다. |
마리아 다 아순상 | 1805년 6월 25일 | 1834년 1월 7일 | 미혼으로 사망 |
아나 데 제수스 마리아 | 1806년 10월 23일 | 1857년 6월 22일 | 룰레 공작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
4. 평가 및 유산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복잡하고 논쟁적인 인물로, 그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녀는 강한 의지와 정치적 야망을 가진 여성으로, 당시 유럽의 격동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성격과 행동은 때때로 논란을 일으켰으며, 특히 보수적인 성향과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은 비판받기도 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남긴 유산은 오늘날에도 여러 측면에서 논의된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 드물게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 방식과 정치적 결정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4. 1. 대중문화
- 카를라 카무라티 감독의 1994년작 장편 영화 ''카를로타 호아키나, 브라질의 공주''는 공주의 어린 시절부터 (신화적인) 자살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전설을 섞어 그녀의 삶을 요약한다. 마리에타 세베로가 성인 카를로타 역을, 루드밀라 다예르가 아역 카를로타 역을 맡았다.[1]
- 베티 라고는 헤지 글로부에서 제작한 2003년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지옥의 다섯 번째''에서 카를로타 역을 맡아 포르투갈 왕가의 브라질 이주 이야기를 다루었다.[1]
- 수자나 히베이루는 2016년 글로부 텔레노벨라 ''자유, 자유''에서 카를로타 역을 맡았으며, 이 작품은 포르투갈 왕가가 브라질로 가는 내용을 다룬다.[1]
- 데보라 올리비에리는 2017년 글로부 텔레노벨라 ''노부 문두''에서 카를로타 역을 맡아 1817년 브라질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펼친다.[1]
5. 가계도
1대 | 2대 | 3대 | 4대 |
---|---|---|---|
1. 스페인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 2.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 | 4.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3세 | 8.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 |
3.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 5. 작센의 마리아 아말리아 | 9. 엘리자베트 파르네세 | |
6. 파르마 공작 필리포 | 10.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3세 | ||
7. 프랑스의 루이즈 엘리자베트 | 11.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 | ||
12.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 (= 8) | |||
13. 엘리자베트 파르네세 (= 9) | |||
14.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 | |||
15. 마리 레슈친스카 |
참조
[1]
문서
Treaty of Rio de Janeiro (1825)
http://pt.wikisource[...]
[2]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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