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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마쓰 요시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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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게마쓰 요시노리는 일본의 축구 선수이자 야구 구단 경영인이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1952년 천황배 우승을 이끌었고, 1954년 토요 공업에 입단하여 공격수로 활약했다. 1958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1경기에 출전했다. 은퇴 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 대표, 후지타 공업(현 쇼난 벨마레) 구단 회장을 역임하며 J리그 설립에 기여했다. 201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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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마쓰 요시노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시게마쓰 요시노리
원어 이름重松 良典
가타카나 표기시게마쓰 요시노리
로마자 표기Shigematsu Yoshinori
출생일1930년 4월 2일
출생지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사망 년도2018년
포지션FW
유소년 클럽
연도1946-1948
클럽히로시마 제1중학교
연도1949-1953
클럽게이오기주쿠 대학
클럽 경력
연도1954-?
클럽도요 공업
국가대표 경력
연도1958
국가대표팀일본
출전1
득점0
수상 내역
올 게이오
대회천황배
연도1952
도요 공업
대회천황배
연도1954
대회천황배
연도1957

2. 클럽 경력

시게마쓰는 1954년 게이오기주쿠 대학 졸업 후 도요 공업에 입사하여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도요 공업은 현재의 마쓰다이다. 오바타 미노루 감독 아래에서 시모무라 유키오, 제니무라 켄지, 타루야 케이조 등과 함께 도요 공업 축구부(현 산프레체 히로시마 F.C) 초창기 황금기를 이끌었다.

도요 공업 소속으로 1954년 전일본 실업단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팀을 베스트 4에 올려놓았고, 같은 해 천황배에서는 실업팀 최초로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 비록 결승전에서 게이오 BRB에 3-5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4차 연장까지 가는 접전은 일본 축구 역사에 남는 명승부로 기록되었다.

1956년 전일본 실업단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다나베 제약 축구부의 7연패를 저지하고 도요 공업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1957년에는 전일본 실업단 준우승, 같은 해 천황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1957년 천황배 결승전은 시게마쓰의 모교인 국태사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시게마쓰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주오 대학 클럽에 역전패하며 우승을 놓쳤다.

1958년 제3회 아시아 경기 대회(도쿄)에서 일본 대표로 처음 선출되어, 5월 28일 홍콩과의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2. 1. 선수 시절

시게마쓰 요시노리는 1930년 4월 2일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전게이오의 일원으로서 1952년 천황배에서 우승했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졸업 후, 1954년 지역 클럽인 도요 공업에 입단했다. 1954년 천황배와 1957년 천황배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는데, 1954년 천황배는 도요 공업이 직장 팀으로서 첫 결승에 진출한 대회였다.

2. 2. 피폭 경험

원자 폭탄 투하 전의 히로시마시 중심부. 동심원의 중심이 폭심지. 맨 아래의 광지가 히로시마시청이며, 그 오른쪽 위의 광지가 구·히로시마 제1고등학교. 현재도 국태사고등학교로 같은 장소에 있으며, 제37회 덴노 헤이카배는 여기서 열렸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피폭되었다.

시게마쓰 등 구제 히로시마현립 제1고등학교 (현 국태사고등학교) 3학년 60명은 폭심지에서 2.2km 떨어진 후나이리 가와구치정의 군수 공장에 학도 근로 동원으로 와 있었는데, 마침 8시의 조례가 끝난 후였다. 쓰러진 설비 기계로 인해 급우 한 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공장 자체는 불길이 치솟지 않았고 붕괴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임시 피난 장소였던 시립 제1고등여학교 (현 후나이리 고등학교)에 집합한 후, 급우 2명과 함께 메이지 다리에서 타카노 다리로 들어가 미유키 다리를 건너 도망가고 있다.

3. 국가대표 경력

1958년 5월, 시게마쓰는 1958년 아시안 게임을 위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5월 28일 홍콩을 상대로 데뷔했다.[1]

4. 은퇴 후 경력

1974년 은퇴 후, 시게마쓰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구단 대표로 취임하여, 미하라 오사무에게서 프로 야구단 경영에 대해 배웠다. 선수들의 영양 섭취를 위해 자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합숙소에 투자하는 등 선수 복지에 힘썼다.

1975년에는 조 루츠를 감독으로 영입하여 팀에 변화를 주고자 했다. 져도 분해하지 않는 선수들의 모습에 투쟁심을 가진 루츠가 변화를 가져올 것을 기대했으며, 일본인들이 외국인의 말을 잘 듣는 경향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루츠는 심판 폭행 사건으로 사임했고, 이후 고바 다케시 코치가 감독으로 취임하여 카프는 센트럴 리그 첫 우승을 달성했다. 시게마쓰는 선수 영입 및 트레이드를 통해 전력을 강화하여 재임 중 3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81년, 시게마쓰는 후지타 공업(이후 ''벨마레 히라츠카'')으로 이동하여 1997년 구단 회장이 되었다가,[2] 1999년 구단을 떠났다.[2]

4. 1. 일본 축구 협회 및 JSL

현역 은퇴 후, 회사 일에 전념했다.

동양공업 도쿄 지사의 경리과에 있던 경험을 인정받아, 일본 축구 협회(일본 축구 협회)에 들어가 일본 사커 리그(JSL) 창설의 설립 준비 위원회 경리 담당자가 되어 니시무라 쇼이치, 나가누마 켄, 오카노 슌이치로 등과 진두 지휘하여 설립을 실현시켰다.。이후 초대 JSL 총무 주사(JSL 운영 주간이며, 현재로 말하면 J리그 회장에 해당한다.)를 맡은 니시무라 쇼이치의 뒤를 이어 2대 JSL 총무 주사로 초기 JSL 운영을 담당했고,, 동시에 일본 축구 협회 이사로서 협회 업무도 수행하는 등 다방면으로 활약했다.。

또한 협회 재직 중이던 1968년, 토와 부동산 축구부(후의 후지타 SC/벨마레 히라츠카, 현 쇼난 벨마레)의 설립에 쿠로키 요시히코나 이시이 요시노부 등과 함께 참여했다.。

1972년 일본 축구 협회는 법인화되었고, 1976년 일본 축구 협회의 정변, 즉 대일본 축구 협회 탄생 이후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대학 리그 중심의 협회가 JSL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인 팀 관계자(마루노우치 3인방)의 손에 넘어간 사건이 발생했다.。이 사건에 시게마쓰도 관여했으며, 우시키 소키치로는 시게마쓰가 주모자라고 추측하고 있다.。

4. 2.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4년 은퇴 후, 시게마쓰는 지역 야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회장이 되었다.[2] 니시노 조의 뒤를 이어 같은 해 히로시마 도요 카프 구단 대표로 취임했다.

시게마쓰는 미하라 오사무에게 몰래 만나 프로 야구 구단 경영에 대해 배웠다. 2군 합숙소의 초라한 식사에 놀란 시게마쓰는 "젊은 선수들에게 듬뿍 먹여야 한다"며 그 자리에서 은행에 가서 자택을 담보로 돈을 빌려 합숙소에 쏟아부었다. 그 돈으로 구단 직원의 급여도 좋게 했다.

1974년 조 루츠를 코치로 채용한 것은 나중에 감독을 시키려는 생각이었다. 1975년 시게마쓰와 네모토 리쿠오 전 카프 감독 두 사람은 함께 루츠가 팀을 극적으로 바꿀 인재로 인식했고, 네모토가 다음 카프 감독으로 마쓰다 고헤이 구단주에게 추천했기 때문에 일본 야구계에서는 최초의 메이저 리그 출신 외국인 감독이 되는 루츠 감독 취임이 결정되었다. 시게마쓰가 루츠를 감독으로 하고 싶었던 이유는, 져도 분해하지 않는 선수의 모습이 참을 수 없고 투쟁심을 가진 루츠가 변화를 가져올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며, "일본인에게는 콤플렉스가 있어서 외국인의 말을 잘 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감독을 "성주", 코치를 "성대"에 비유하여 "성대는 괜찮지만, 성주에 외국인은 납득이 안 간다"며 반발을 받았다.

시게마쓰는 루츠의 요청에 의해 실무자로 움직였다. 아니야 소하치, 오이시 야타로, 시라이시 시즈오 등을 트레이드하고, 반대로 오시타 다케시, 미야모토 유키노부, 고다마 요시히로, 와타나베 히로키 등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는 등 7명을 방출하고 7명을 영입했다. 또 리치 셰인과 게일 홉킨스의 현역 메이저리거를 영입, 스태프도 교체하여 일신시켰다. 또한 루츠는 팀 컬러를 감색에서 타오르는 투지를 나타내는 빨간색으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시게마쓰는 거의 모든 요구에 응했다. 팀은 크게 탈바꿈했지만 정작 루츠는 1975년 4월 27일 사에키 가즈시 투수의 볼 판정으로부터 심판에게 폭행을 가한 것을 시작으로 사임했다.

루츠 퇴단 후, 현장 스태프의 의견을 수렴하여 고바 다케시 코치를 다음 감독으로 마쓰다 구단주에게 추천했다. 고바 감독 아래에서 카프는 비원이었던 센트럴 리그 첫 우승을 달성했다. 또한 구단이 안고 있던 창설 이래의 누적 적자를 단번에 해소했다. 그 후에도 히라야마 사토시가 스카우트한 짐 라이틀과 헨리 개럿 영입, 에가와 유타카 등의 트레이드를 감행하여 전력을 정비하여, 재임 중 3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1975년 리그 우승, 1979년 일본 시리즈 우승, 1980년 일본 시리즈 우승)으로 카프의 황금 시대를 가져왔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아카헤르 선풍의 숨은 조력자"라고도 불린다. 그라운드에 서 있는 떡 벌어진 어깨의 시게마쓰를 보고 어느새 "얏코 연씨"라고 친근하게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81년 말 사임, 후임은 노자키 다이이치가 되었다.

4. 3. 후지타/쇼난 벨마레

1981년, 시게마쓰는 후지타 공업(이후 ''벨마레 히라츠카'')으로 이동하여 1997년 구단 회장이 되었다.[2] 1999년, 구단을 떠났다.[2]

1981년부터 후지타 공업(현 후지타)으로 이직했다. 일본 축구 협회 전무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1993년 J리그 설립에 관여했다. 재임 중 1995년 넬시뉴의 일본 대표팀 감독 내정 소동, 이른바 "썩은 귤" 사건에도 관련되었다.

1997년 6월, 후지타의 자회사인 J리그 벨마레 히라츠카 사장에 취임했다. 이 시기 팀은 황금기를 맞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는 고지마 노부유키, 홍명보, 나카타 히데토시, 로페스 와그너 등 한일 양국에서 4명의 대표 선수를 배출, J리그 상위권에 꾸준히 진입했다. 1998년 나카타의 AC 페루자 이적에도 힘썼다. 다만 이 기간 동안 모회사였던 후지타의 경영 부진이 팀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998년 말, 후지타가 경영 재건을 위해 벨마레에 대한 출자를 줄이면서 운영비를 절감하고자 주력 선수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그 결과, 고지마, 홍명보, 로페스, 나즈카 요시히로, 타사카 카즈아키, 쿠몬 히로아키가 잇따라 이적했고, 1999년 J1에서 연간 최하위를 기록하며 J2로 강등되었다. 같은 해 후지타도 사적 정리(임의적 도산 처리)를 실시하여 한때 팀 존속 위기가 거론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시게마쓰는 팀 존속을 위해 노력했다.

4. 4. 말년

1974년 은퇴 후, 시게마쓰는 지역 야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회장이 되었다. 1981년, 후지타 공업(이후 ''벨마레 히라츠카'')으로 이동하여 1997년 구단 회장이 되었다. 1999년, 구단을 떠났다.[2] 2002년 FIFA 월드컵 개최에도 힘썼다. 2000년 J리그 참여 이후 일본 축구 협회에 참여했지만, 임기 만료 및 정년으로 인해 모두 퇴임했다. 2011년에는 히로시마현 축구 협회 고문에 취임했다.

이후 고령자 시설에 입소하여 가족 외에는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이었다. 2015년 JSL 발족 50주년 파티가 열렸지만, 시게마쓰는 참석하지 않았다.[3]

2018년에 사망했다. 시게마쓰의 유언에 따라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쇼난 벨마레 관계자가 2019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쇼난이 타이틀을 획득한 2018년 J리그컵 결승(10월 27일) 수 주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5. 통계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연도출전
195810
합계10

[1]

5. 1. 국가대표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연도출전
195810
합계10



1958년 5월, 시게마쓰는 1958년 아시안 게임을 위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 대회에서 그는 5월 28일 홍콩을 상대로 데뷔했다.[1]

No.개최일개최 도시경기장상대 팀결과감독대회
1.1958년 5월 28일도쿄도국립 가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0-2가와모토 다이조아시안 게임


참조

[1] 웹사이트 Japan National Football Team Database http://www.jfootball[...]
[2] 웹사이트 湘南ベルマーレ20周年記念コラム「志緑天に通ず」 http://www.bellmare.[...] 2023-12-28
[3] 웹사이트 JSL発足50年記念パーティーを開催 https://www.jleague.[...] J리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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