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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무라 하루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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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기무라 하루코는 일본의 배우로, 1906년에 태어나 1997년에 사망했다. 70년이 넘는 배우 생활 동안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 연극계와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45년 초연된 연극 《여자의 일생》에서 누노비키 케이 역을 맡아 900회 이상 공연하며 일본 연극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영화에서도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등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1995년에는 영화 《오후의 유언장》으로 여러 영화상을 수상했다. 스기무라는 일본 신극을 대표하는 배우로서 많은 배우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만년에도 연기 열정을 잃지 않고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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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무라 하루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스기무라 하루코
본명나카노 하루코
로마자 표기Sugimura Haruko
출생일1909년 1월 6일
출생지히로시마시, 히로시마현, 일본
사망일1997년 4월 4일
사망지도쿄도 분쿄구, 일본
국적일본
직업배우
활동 기간1927년 – 1996년
1953년 5월 스기무라 하루코
결혼
배우자나가히로 키시로 (1933년 - 1942년, 사별)
이시야마 스에히코 (1950년 - 1966년, 사별)
수상
블루리본상조연 여우상
1951년 맥추, 메시, '명미와시'
일본 아카데미상회장 특별상
1998년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주연 여우상
1995년 오후의 유언장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여우 주연상
1995년 오후의 유언장
여우 조연상
1953년 니고리에, 도쿄 이야기
닛칸 스포츠 영화 대상주연 여우상
1995년 오후의 유언장
키노쿠니야 연극상개인상
1991년
요미우리 연극 대상대상, 최우수 여우상
1994년
문화청 예술제상1991년
주요 작품
영화도쿄 이야기 (1953년)
꽁치의 맛 (1962년)
연극여자의 일생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녹명관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2. 생애

스기무라 하루코는 1906년 히로시마시 니시구에서 태어났다.[2]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 부유한 목재상에게 입양되었는데, 훨씬 후에야 그들이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4] (스기무라는 자신이 게이샤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다.)[3] 양부모는 그녀를 데리고 가부키분라쿠와 같은 일본 전통 무대 예술과 서양 발레, 오페라 공연을 보러 다녔다. 또한 도쿄 음악학교(현재 도쿄 예술대학)에 입학하도록 격려했지만, 그녀는 시험에 떨어졌다.[4] 그 후 1927년 도쿄의 츠키지 소극장에 합류했다.[5][6][7]

2. 1. 초기 생애 (1906~1927)

스기무라 하루코는 1906년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 니시구에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부유한 목재상에게 입양되었으며, 훨씬 후에야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3][4] 양부모는 가부키, 분라쿠 등 일본 전통 무대 예술과 서양 발레, 오페라 공연 관람을 통해 하루코의 예술적 감수성을 길러주었다.[4]

하루코는 도쿄 음악학교(현재 도쿄 예술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 이후 1922년 히로시마 조시 고등 사범학교(현·히로시마 대학 부속 후쿠야마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부터 1927년 3월까지 히로시마 여자학원에서 음악 대용교원으로 근무했다.

1927년 츠키지 소극장의 히로시마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은 하루코는 연극계에 입문하게 된다.[5][6][7] 히로시마 여자학원 교원실에서 츠키지 소극장(극단 하이유자의 전신)의 히로시마 공연 이야기를 듣고, 같은 극단의 순회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당시 관객들은 무표정이었다고 한다.

2. 2. 츠키지 소극장과 분가쿠자 (1927~1945)

1927년, 스기무라 하루코는 츠키지 소극장 연구생으로 입단하여, 같은 달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何が彼女をさうさせたか)'에서 오르간 연주자 역할(대사 없음)로 첫 무대에 섰다. 한동안 역할을 얻지 못했지만, 뛰어난 연기력으로 점차 두각을 나타냈다. 1929년 츠키지 소극장이 분열되자, 도모다 교스케 등이 있는 츠키지자(築地座)에 참가했다.

1937년 츠키지자(築地座)가 해산된 후, 기시다 구니오, 구보타 만타로, 이와타 도요오 등이 창립한 극단 문학좌(文学座) 결성에 참여하였다. 도모다 교스케의 전사로 그의 아내 다무라 아키코는 문학좌에 참여하지 않았고, 스기무라는 문학좌의 중심 여배우로 성장하였다. 1938년 하나야기 쇼타로의 신생신파에 출연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파시스트 정부의 탄압으로 신협, 신축지 두 유력 극단이 해산되었고, 우수한 신극 배우들이 무대를 떠나거나 영화계로 진출하는 등 흩어졌다.

1940년 '파니(ファニー)'에서 주연을 맡은 이후, 문학좌의 간판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문학좌는 전쟁 협력 극단이었기에 전쟁 중 유일하게 탄압을 피했다.

1945년 4월, 모리모토 가오루 작 '여자의 일생(女の一生)' 초연에서 누노비키 케이(布引けい) 역을 맡아 큰 성공을 거두었다.

2. 3. 전후 활동과 전성기 (1945~1963)

1937년 쓰키지자 해산 후 기시다 구니오, 구보타 만타로, 시시 분로쿠 등이 창립한 극단 분가쿠자 결성에 참여하였다. 도모다 교스케의 전사로 인해 그의 아내 다무라 아키코는 분가쿠자에 참여하지 않았고, 분가쿠자의 중심 여배우로 성장하였다. 1938년 하나야기 쇼타로의 신생신파에 출연하여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파시스트 정부의 탄압으로 신쿄, 신쓰키지 두 유력 극단이 해산되었고, 우수한 신극 배우들이 무대를 떠나거나 영화계에 진출하는 등 흩어졌다. 분가쿠자 이외에 충실한 신극 운동이 보이지 않게 된 것도 스기무라에게는 행운이었다. 분가쿠자는 전쟁 협력 극단이었기에 전쟁 중 유일하게 탄압을 피했다. 1940년 『파니(ファニー)』에서 주역을 맡은 이후, 분가쿠자의 중심 여배우가 되었다. 분가쿠자에 가는 것은 스기무라 하루코를 보러 가는 것과 거의 동의어가 되었다. 또한 분가쿠자 이외의 무대에도 출연하며 일본 연극계의 중심적인 존재로 활약했다.

특히 1945년 4월 11일부터 16일까지, 도쿄 대공습시부야 동횡영화극장에서 초연된 모리모토 가오루 작 『'''여자의 일생'''』의 '''누이비키 케이''' 역은 대히트를 기록하였고, 1990년까지 상연 횟수가 900회를 넘어 일본 연극사에 금자탑을 세웠다. 극중 대사인 "누가 골라준 것도 아닌, 스스로 걸어온 길이니까. 잘못이라고 알게 되면, 스스로 잘못이 아니도록 해야지"는 평생 "여배우의 일생"을 관철한 스기무라의 대명사로 유명하다. 초연은 불과 5일이었지만 6000명을 동원했다.

전후 첫 분가쿠자 공연은 대실패로 끝났고, 단원들은 의기소침했지만, 1947년 여름 처음으로 니혼바시 미쓰코시극장에서 열린 모리모토 가오루 추도 공연 「여자의 일생」이 대성공을 거두며 단원들에게 다시 연극을 해보자는 사기를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에는 「여자의 일생」으로 연극 부문에서 전후 최초의 일본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여자의 일생」은 1961년 여름 공연에서 500회를 넘었고, 일본 신극에서는 최초의 사례였다.

1958년 일본 신극 배우 협회 설립에 상임 이사로 참여(1995~1997년, 3대 회장) 했다. 같은 해 제10회 NHK 방송문화상을 수상했다.

60년 안보 전후로 좌익에 접근하여 안보 반대 데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0년 6월 15일(수요일) 참의원 국회 참의원 면회소 앞에서 있었던 신극인 회의 데모에 폭력단이 난입하여 80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스기무라는 극단의 젊은 여배우들의 스크럼에 둘러싸여 무사히 피했다. 중의원 남쪽 통행문에서 가바 미치코가 비참하게 사망한 것은 그 몇 시간 후였다. 분가쿠자 분열의 움직임은 안보투쟁 와중에 시작되었다. 탈퇴한 단원들은 당시 무관심을 가장한 사람들이었다. 1961년 평화 7인 위원회 창립에 참여했다.

극단의 중심적인 존재가 되었지만, 언제 배역이 내려갈까 두려워하며 항상 스스로를 다잡고 정진을 계속했다.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에 따라 배역을 정하고 라이벌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히스테릭하게 동료들을 꾸짖는 면도 있었다고 한다.

1963년 1월, 스기무라의 감정 기복이 심한 성격과 횡포라고 할 만한 극단에 대한 통솔 방식에 불만을 품은 아케가와 히로시, 기시다 교코, 나가야 노보루, 간야마 시게루, 가토 하루코, 고이케 아사오 등 중견 단원 대부분이 분가쿠자를 집단 탈퇴하여 현대연극협회·극단 운을 결성했다. 더욱이 같은 해 12월에는 그때까지 스기무라 주연의 희곡을 써 온 미시마 유키오의 신작 희곡 『기쁨의 거문고』의 우익화에 분노하여 상연을 중지시켰다.(기쁨의 거문고 사건). 이 상연 거부 문제로 이듬해 1964년 1월, 미시마를 필두로 나가야마야 쓰코, 나카무라 신로, 하가라 나쓰코, 미나미 미에 등 분가쿠자의 원로 단원들이 차례로 탈퇴했다. 이들 탈퇴자에 의해 이와타 도요오(시시 분로쿠)와 미시마를 고문으로 하는 그룹 NLT가 설립되었다. 스기무라는 이들 탈퇴 멤버 대부분과 그 후 관계를 단절했고, 특히 반 스기무라를 분명히 했던 후쿠다 쓰네아리가 대표가 된 극단 운에 참여한 멤버들에 대해서는 "NLT에 간 사람들과는 충분히 이야기했으니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지만 운에 간 사람들은 평생 잊지 않겠어요. 그렇게 비겁하게… 마치 기습 공격이었어요"라고 분명히 말했고, 공연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등 종신토록 용서하지 않았다.[15] 연극 평론가 오자사 요시오는 "처음 분열 사태에서 미시마의 존재감을 더욱 크게 했다. 분가쿠자는 이누이 이치로(戌井市郎)를 비롯해 투쟁적이지 않았고, 그대로 미시마를 따랐다면 휘말려 '방패의 모임(楯の会)'처럼 반드시 멸망했을 것이다. 분가쿠자가 계속된 것은 그때 스기무라가 직감적으로 결단했기 때문이다"라고 논하고 있다.

분가쿠자는 주요 멤버의 두 차례에 걸친 대량 이탈로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이했고, 당시 신문은 "붕괴 직전인 분가쿠자"라고 보도했지만, 오오지 키와코, 에모리 도루, 기키 기린, 오가와 마유미, 다카하시 에쓰시 등 젊은이들을 육성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했다. 특히 텔레비전 시대를 맞이한 시류를 타고 차례로 텔레비전에 신인들을 진출시킨 공로는 크다. 스기무라 자신도 뉴미디어인 텔레비전에 적극적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스기무라의 횡포에 비판적인 인물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스기무라의 극단에 대한 독재에 가까운 영향력이 더욱 강화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기쁨의 거문고 사건」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스기무라에게 "배우는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연기만 좋으면 됩니다. 동시에 배우는 배우로서 충실함으로써 사상을 잡고 인간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직 안에서 어중간하게 잡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풍자를 섞어 비판하고 있다.[16] 이 무렵부터 "분가쿠자의 여왕", "분가쿠자의 여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분가쿠자의 여제" 스기무라의 강렬한 개성이 없었다면 분가쿠자의 존속은 어려웠을 것이라고도 한다.

스기무라와 이누이 이치로 등은 폭넓은 관객층을 대상으로 한 대중극을 해보려고 했기 때문에, 연극 선택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고, 위와 같은 마찰이 생겼다.[17] 1967년 『여자의 일생』 재연은 분가쿠자가 회복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자의 일생』 1968년 전국 순회 공연은 가는 곳마다 만원이었다. 『여자의 일생』은 신극의 틀을 넘어선 연극으로 인지도가 높았고, 하루에 한 대밖에 노선버스가 없는 산골에서 할머니가 아들에게 업혀서 왔다는 등, 신극 팬이 아닌 관객들도 많이 몰려들었다. 스기무라는 이미 60세가 넘었는데, 관객들이 하나같이 말한 것은 "스기무라의 『여자의 일생』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분가쿠자에서는 매스미디어적으로 오가와 마유미, 오오지 키와코, 후지타 유코가 자주 언급되었지만, 관객 흡입력이 있는 것은 역시 스기무라뿐이었다는 화제가 되었다. 당시에는 벗기만 하면 스타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신인 여배우도 많았던 만큼, 스기무라의 연기를 본받아야 한다는 여론도 일었다. 경영의 어려움을 절실히 알고 있던 스기무라는 관객을 소중히 여겼다. 이것은 신극의 상업 연극 진출의 시작이라고 한다. 「여자의 일생」은 16세 역부터 시작되는 상황 때문에 언젠가 그만둘 생각으로 1969년 4월 공연 때 "『여자의 일생』은 이것으로 마지막입니다"라고 선언했지만, 「여자의 일생」을 하면 관객이 들어오기 때문에 1970년대 초 분가쿠자의 경제 위기 때문에 "경제적인 사정으로 한 번 더 합니다"라고 기자회견을 열고 1973년에 재연했다.

1950년중국, 유럽을 돌아보는 투어인 아시아 문화 교류단에 참가하여 중국의 연극인들과 교류했다. 1956년 중국에서 유명한 극작가 하옌에게 "일본과 중국은 관계가 가장 나쁘기 때문에 무언가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연극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참여하겠습니다"라고 직소했고, 국교가 없어 방문이 어려운 시대에 신극의 중국 공연에 의욕을 불태웠다. 이것이 1960년 10월 중국의 혁명적 극작가 관한경을 기념하는 최초의 신극 방중단(분가쿠자, 극단 민예, 도쿄예술좌, 포도의 모임(ぶどうの会), 배우좌 71명의 합동 공연)으로 실현되었고, 『여자의 일생』을 일본어로 공연했다. 『여자의 일생』은 일부 개정 문제로 마찰이 있었다. 1965년에도 제2차 방중 신극단 일원으로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에서 공연을 했고, 『여자의 일생』은 이야기를 상당히 바꿔 중국에서도 상연되었고, 중국의 매스미디어에서도 스기무라는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1972년 9월, 일중 국교 정상화가 실현된 가을에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연회 자리에서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가 일본식 옷(和服)을 입은 스기무라에게 다가가 백색 국화를 선물했다. 스기무라는 이 꽃을 압화하여 계속 소중히 간직했다. 1977년에는 저우언라이 총리의 미망인 덩잉차오를 문병했고, 덩잉차오에게 집에 핀 한 다발의 백색 국화를 선물받았다. 문화대혁명 이후인 1981년 4월 16년 만에 세 번째 방중은 스기무라가 개인적으로 나눈 약속을 강제로 이행한 것이었다. 중국 측의 초청 형식을 취했지만 숙박비만 중국 측이 부담했고, 여행 경비는 자비 부담했다. 분가쿠자의 단독 공연을 목표로 했지만, 이 어려운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스기무라가 센다 고레야를 내세워 극단 청년좌와 극단 동료를 더한 네 극단으로 일본 신극단 방중 공연 실행 위원회(스기무라 단장)를 급조했다. 『화가 청수의 아내』 한 작품만 상연할 예정이었지만, 업계의 노련한 사람으로 알려진 청년좌가 연극에 『붕나야, 나무에서 내려와라』를 억지로 끼워 넣었기 때문에, 특이한 조합의 2본립 공연이 되었다. 1983년에는 민주음악협회에 협력을 요청하여 베이징 인민예술극원을 초청했다.[18] 스기무라의 중국 편향은 전쟁 중 기시다 구니오가 대정익찬회에서 리더십을 잡는 등 분가쿠자가 전쟁 협력 극단이었던 것에 대한 속죄라는 설도 있다. 중국을 좋아해서 개인적으로도 자주 중국을 여행했고, 외진 곳까지 발걸음을 했다. 1960년대부터 스기무라와 중국을 여러 번 여행한 모리 미쓰코는 "선생님은 2000계단이나 돌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산 위에 호텔을 잡거나, 중국식 호텔을 좋아해서 화장실이 항아리여도 괜찮았어요. 욕조는 마개를 해도 물이 차지 않고 새기 때문에 수건이나 뭔가를 감아서 겨우 물을 채웠어요. 몇 년 후에는 그대로 두었는데, 선생님은 또 천을 감아서 마개를 했어요. 저는 조금 싫어서, 부탄에 같이 갔을 때 현지에서의 연극을 보러 갔는데 숙박하고 있는 곳에서 도보로 사막 같은 곳을 한 시간 걸었어요. 선생님에게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88세에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 된 『오후의 유언장』도 중국 각지를 방문하고 귀국한 그대로 로케이션 촬영지인 다테시나 고원으로 향했다.

1969년 5월에는 이미 스기무라의 자서전 텔레비전 드라마 『여배우 나의 길』이 NHK 「은하 드라마」에서 방영되었고, 스기무라(미쓰기 아키코)를 하야시 미치코가 연기했다. 1화 30분, 총 15화. 스기무라 본인은 출연하지 않았다. 당시 자료에는 "현역 여배우의 반생을 텔레비전으로 하는 것은 드물다"라고 적혀 있다. 이 해 1월에 출판된 스기무라의 저서 『내가 선택한 길』을 오노다 이사무가 각색했다. 스기무라의 반생이라면 당연히 일본 신극사가 되기 때문에, 신극사를 장식한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게 되어 이름은 바꾸지만 관계자나 신극 팬에게는 한눈에 알 수 있었기 때문에 합카와 아키라 프로듀서가 현존 인물은 본인에게, 고인의 경우는 부인이나 유족을 찾아가 한 사람씩 허락을 받았다. 그 중에서 스기무라가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다무라 아키코는, 처음에는 극 중에 자신의 모델이 나오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모델이 되는 인물은 누구나 대단한 인물들이어서 출연을 주저하는 배우들이 속출했다. 히지카타 요시(소우가타)를 연기한 고다마 기요시는 "프로야구로 치면 루키가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이나 쓰루오카 가즈토 감독이 되는 것과 같다. 너무나 감히 할 수 없어서 어려웠습니다"라고 말했다. 기시 데루코(키베)를 연기한 배우좌의 히노 요시에는 대선배에게 조심스럽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묻자 키시로부터 "나는 말이야, 젊었을 때 예뻤어"라고 말을 들었다. 스기무라의 애인 모리모토 가오루(오리토 미츠루)를 연기한 기타무라 가즈오는 스기무라로부터 "모리모토는 미남이었어요. 당신이 하면 익살꾼이 되니까 조심해주세요"라고 엄포를 들었다. 마루야마 사다오(나루야마 료스케)를 연기한 니시무라 아키라는 본인과 면식이 있어 본인을 닮게 화장이 되었다. 합카와 프로듀서는 "올드 팬들에게는 향수를, 젊은이들에게는 신극사의 공부가 되면 좋겠습니다. 다만 스기무라씨를 포함해 실존 인물도 많기 때문에 문제가 될 만한 것은 삼갔습니다. 이런 드라마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현역 여배우의 반생을 영상화한 최초의 사례로 보이며, 이후에도 있었는지 알 수 없는 희귀한 사례로 생각된다.

신극의 사실주의 연극에 기초하면서 신파와 가부키의 기법을 연구했다. 히로시마 사투리는 평생 사라지지 않았지만, 세월을 들여 갈고 닦은 리듬 있는 대사 기술과 뛰어난 사실주의 연기는 비할 데 없었고, 섬세한 감정을 교묘하게 표현하는 독특한 활기 있는 연기 스타일을 만들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무대뿐 아니라 영화와 텔레비전에서도 폭넓게 활동했다. 영화 데뷔는 쓰키지 소극장 시절인 1927년 오사나이 가오루 감독의 「여명」이거나, 1932년, 초대 미즈타니 야에코와 공연한 「낭자」이거나, 1937년, 쇼치쿠의 「아사쿠사의 등불」이거나, 자료에 따라 기록이 다르다. 1940년, 국책 영화 「오쿠무라 이오코」(도요다 시로 감독, 동보 영화사)로 첫 주연을 맡았다.

전후,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도요다 시로, 미조구치 겐지, 이마이 다다시 등 거장들로부터 기존 영화 배우들에게 없는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아, 일본 영화사를 수놓는 140편 이상의 작품에 출연했고, 영화사에도 그 이름을 남겼다. 모리 마사유키와 함께 영화에 가장 기여한 신극 배우이기도 하다. 기타미 하루이치는 1947년 「연극연구」에서 "쓰키지식 연출과는 전혀 상반되는 유형의 영화 연출가의 연기 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적절한 지도에 의해, 스기무라는 뛰어난 자질과 좋은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고 논하고 있다. 쓰무라 히데오는 "스기무라 하루코는 일본 신극 배우가 과연 영화 연기의 감각과 신경을 체득할 수 있는지 여부라는 난제를 가장 먼저 해결한 여배우이다. 신극 배우의 대사의 힘을 토키(토키이)적으로 잘 조화시키고 처리하고, 간(間)의 호흡을 익히고, 그리고 표정의 미묘한 맛을 클로즈업을 잘 소화할 수 있는지 여부라는 과제에 먼저 성공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일찍 영화계에 들어간 마루야마 사다오, 시오미 요, 호소카와 지카코, 히가시야마 지에코, 우스다 겐지 등이 넘을 수 없었던 선을 마침내 1, 2년 만에 돌파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논하고 있다. 스기무라처럼 다른 장르의 배우와 공연한 신극 배우는 없다.

특히, 「도쿄 이야기」, 「맥추」를 비롯한 오즈 야스지로 작품의 단골(9편)이었고, 오즈 조에서 단 한 명, 낭독에 불참과 "꿰매기"(겸업)를 허락받은 배우였다. 오즈는 분가쿠자의 자원 탈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스기무라에게 격려의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1995년, 당시 89세에 신도 가네토의 「오후의 유언장」으로 주연을 맡아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닛칸 스포츠 영화 대상, 키네마 준보에서 주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분가쿠자 공연을 통해 대표작이 되는 작품들을 연이어 만나게 된다.

  • '''여자의 일생'''(1945년 4월, 주역·누이비키 케이 역) 분가쿠자. 모리모토 가오루의 창작 희곡. 초연 당시 대본은 전후판과 여러모로 큰 차이가 있다. 시부야의 영화관을 빌려 진행된 초연(당초 상연 예정이었던 국민신극장〈전시 체제로 쓰키지 소극장에서 개칭〉은 1945년 3월 10일의 공습으로 소실되었다)에서는 상연 중에 공습 경보로 중단되는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TV 방송을 위해 녹화된 1961년 당시의 기록 영상이 현존한다. 2번에 걸친 분열/대량 탈퇴 이전의 공연이기 때문에 자료적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스기무라 사후 NHK에서 재방송되었고, DVD로도 발매되었다). 상연 횟수 947회. 분가쿠자가 걸어온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분가쿠자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재산 연목"。「여자의 일생」은 공습이 심해진 1944년 늦가을에 기혼자인 모리모토가 애인인 스기무라를 위해 쓴 것으로, 공습이 심했기 때문에 속필인 모리모토가 2~3장 쓰면 스기무라나 극단의 젊은 단원이 가방에 넣어 극단으로 가져가 복사를 했다. 탈고를 맞이하여 스기무라는 감사를 전하고 싶었고, 모리모토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마침 찹쌀배급이 있어 오하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웃의 아주머니에게 만드는 법을 배우고, 옷장 안에서 전기 난로를 사용하여 삶았다. 당시 전기 난로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모리모토는 오하기를 기뻐하며 먹었다. 상연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분가쿠자에 있는 사람은 모두 출연하도록 하자고 해서, 연출의 이누이 시로와 연구생이었던 시이노 히데유키 등도 출연했다. 처음에는

2. 4. 분가쿠자 분열과 새로운 도전 (1963~1997)

1963년, 스기무라 하루코의 극단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은 현대연극협회·극단 운의 단원들이 대거 탈퇴하고,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신작 희곡 '기쁨의 거문고(喜びの琴)' 상연을 둘러싼 문제로 미시마를 비롯한 주요 단원들이 극단 NLT를 결성하며 탈퇴하는 등 분가쿠자는 큰 위기를 맞았다.[46] 이러한 분열 속에서도 스기무라는 젊은 배우들을 육성하며 분가쿠자를 재건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등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1974년에는 히가시야마 치에코(東山千栄子), 1대 미즈타니 야에코에 이어 세 번째로 문화공로자(文化功労者)로 선정되었다. 1995년에는 문화훈장(文化勲章) 수여가 결정되었으나, "훈장은 마지막에 받는 상이고, 저에게는 너무 과분합니다. 훈장을 메고 무대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 현역으로 연기를 계속하고 싶을 뿐입니다."라며 거절했다.[46]

1995년, 스기무라는 신도 가네토 감독의 '오후의 유언장(午後の遺言状)'에서 만 89세의 나이로 주연을 맡아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닛칸 스포츠 영화 대상, 키네마 준포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노년에도 식지 않는 연기 열정을 보여주었다.

1967년 5월에는 오테마치 산케이홀(サンケイホール#大手町|大手町サンケイホール)에서 열린 니시카와 에이코의 일본무용 리사이틀에 게스트로 출연하여 히노 토미코 역을 맡아 '규헤이가와'를 연기했다. 1970년 6월에는 아리요시 사와코(有吉佐和子)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연극 '화가 청주(華岡青洲)의 아내'에서 주연 오쓰기 역을 맡아, 시어머니의 며느리 학대 연기로 관객석에서 격앙된 반응을 얻기도 했다. 나고야 중일극장(中日劇場)에서는 이례적으로 밤 공연이 추가되기도 했으며, 전국 순회 공연으로 2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1972년 12월에는 아리요시 사와코의 단편 "카메유의 죽음"을 각색한 연극 '옛 미국에 소매는 적시지 않으리(ふるあめりかに袖はぬらさじ)'에서 주연 오조노 역을 맡아 열연했다.

1976년 2월에는 도요코 극장(東横劇場)에서 상연된 '꿈·도우추켄 우에몬(夢・桃中軒牛右衛門)'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창가(浪曲) 가수 도우추켄 우에몬, 즉 미야자키 토텐(宮崎滔天)을 주인공으로 한 창작극으로, 스기무라는 친중파 배우로 여겨졌지만, 공연 5일 전 주일 중국대사관(駐日中華人民共和国大使館)으로부터 공연 중단 항의를 받았다. 항의는 당시 지도자였던 마오쩌둥(毛沢東)의 묘사를 둘러싼 것으로, 신해혁명을 희화화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문학좌는 세 차례 중국대사관과 협상을 가졌지만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일부 항의를 수용하여 공연을 진행했다.

1979년 3월에는 썬샤인 극장(サンシャイン劇場)에서 상연된 '탈린행 배(ターリン行きの船)'에서 주연 리자 바실리나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알렉세이 아르부조프(アレクセイ・アルブーゾフ)의 "구식 코미디(古風なコメディ)"를 개제한 작품으로, 오노에 쇼류쿠(2대)(尾上松緑 (2代目))와의 2인극이었다.

1981년 9월에는 미쓰코시 극장(三越劇場)에서 상연된 '신석 금색야차(新釈 金色夜叉)'에서 아카가시 미츠에 역을 맡았다. 이 작품은 미야모토 켄이 문학좌에 처음으로 쓴 작품으로, 오자키 코요(尾崎紅葉)의 '금색야차(金色夜叉)'에서 조연에 불과한 고리대금업자 아카가시 미츠에를 주인공으로 하는 스핀오프 작품이다.

1985년 2월에는 어니스트 톰프슨(:en: Ernest Thompson)의 희곡 '웨스트사이드 왈츠(:en: The West Side Waltz)'에서 주연 마가렛 역을 맡았다. 1990년 4월에는 도호(東宝) 공연 '꽃무지개'에서 히데치요 역을 맡아 모리 미코(森光子)와 공연했다. 1992년 6월에는 쇼치쿠(松竹) 공연 '연서매매인 이치요'에서 주연 마에다 나츠 역을 맡았다.

2. 5. 사망 (1997)

1997년 1월 19일, NHK 드라마 '가시·여자의 유언장(棘・おんなの遺言状)' 촬영 중 빈혈과 요통을 호소하며 입원, 하차했다. 대역은 미나미 미에(南美江)가 맡았다. 2월에 십이지장궤양(十二指腸潰瘍)이라고 발표되었지만, 실제로는 췌장암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3월에 신바시 연예장(新橋演舞場)에서 예정되어 있던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華岡青洲の妻)' 공연도 긴급 하차했고, 대역은 후지마 시(藤間紫)가 맡았다.

3월 16일부터 의식이 혼탁해졌고, 4월 4일 0시 30분, 두부 췌장암으로 인해 도쿄도(東京都) 분쿄구(文京区)의 일본의과대학 부속병원(日本医科大学付属病院)에서 향년 91세로 사망했다. 본인에게는 암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아, 사망 직전까지 대본을 읽으며 배우로서의 삶을 살았다. 사후 정부(政府)로부터 은배(銀杯) 한 벌이 하사되었다. 묘소는 후지령원이다.

스기무라 하루코 사후인 1998년, 젊은 연극인 육성에 힘썼던 스기무라의 유지를 존중하여 신인상 격인 '''스기무라 하루코 상(杉村春子賞)'''이 제정되었다.

3. 주요 작품

주요 출연 영화
연도제목역할비고
1932나미코
1937아사쿠사의 불
1938우구이스
1940결혼식 날
1940오쿠무라 이오코주연
1940나병 섬의 봄요코가와의 아내
1940오히나타무라
1941나의 사랑의 나무
1941시라사기
1941지로 이야기
1942난카이의 꽃다발노부코 홋타
1942어머니의 지도이사노 키시
1944격류
1944군대세츠
1945감정계의 장미
1945바다의 부르는 소리
1946오소네가의 내일후사코 오소네
1946우라시마 타로의 영광
1946젊음의 후회는 없다노게 부인 (류키치의 어머니)
1947네 개의 사랑 이야기유키코의 어머니 (에피소드 1)
1947조엔
1947봄의 각성
1947세 개의 손가락의 남자이토코
1948유혹토키에
1948손을 잡는 아이들
1948위대한 X타카
1948시간의 조각가: 전후편
1948검은 구름 고개
1948국운 고개
1949베니 아직 사라지지 않다
1949요츠야 카이단오마키
1949신작 요츠야 카이단: 후편오마키
1949늦은 봄마사 타구치
1950여자의 식
1950다시 만날 때까지오노 스가
1950바다의 목소리를 들어라코하기 나카무라
1951에리코와 함께 제1부 + 제2부하루에 마츠무라
1951자유 학교
1951초여름타미 야베
1951바다 위의 불꽃놀이코노 쿠지라이
1951만찬마츠 무라타 (미치요의 어머니)
1951목숨 아름다워라미네 이무라
1952청춘 회의타미요
1952겐로쿠 수이코덴온우이
1952바람 다시 한번
1952금의 알: 황금 소녀츠루코 후지무라
1952젊은 사람
1953센바 즈루치카코 쿠리모토
1953몬텐루파: 북경의 노래
1953그대에게 바치는 목숨이 된다면
1953도쿄 이야기시게 카네코
1953여자의 일생타마에 (신타로의 어머니)
1953진흙탕의 만오하츠 (이야기 3)
1954게이샤 코나츠라쿠 카미오카
1954늦은 국화
1954슌킨 이야기오에이
1954군쇼
1955메이지 일대기 여자오히데
1955경찰 일기모요 스기타 (중개인)
1955양귀비연춘공주
1955게이샤 코나츠: 혼자 자는 밤의 코나츠라쿠 카미오카
1955그녀는 들국화 같았다마사오의 어머니
1956아오가시마의 아이들 – 여자 교사의 기록치에 야마다
1956초봄타마코 타무라
195648세의 저항사토코 (코타로의 아내)
1956흐르는 강소메카
1956여자의 발자취
1957혼잡한 전차오토메 (어머니)
1957도쿄 황혼시게코 타케우치
1958슬픔은 여자에게만치요코
1958꽃의 보조리에 이케가미
1958여름 구름토요
1958잠자는 교시로 불뢰 회계: 마켄 지옥소노에
1959굿모닝키쿠에 하라구치
1959미모에 죄가 있다후사 요시노
1959아냐코로오사이
1959카시마나다의 여자
1959세 가지 보물내레이터
1959떠돌이풀오요시
1960텐포 록카센 – 지옥의 하나미치오쿠마
1960딸 아내 어머니카요 타니
1960딸들, 아내들 그리고 어머니카요 타니
1960발에 걸린 여자소매치기 하루코
1960풍류 후카가와타
1960바나나
1961쿠츠카케 토키지로오로쿠
1961여름의 끝카토 시게
1961붓다바이데히
1961반역지
1962가정의 사정요시이 부인
1962여자의 자아키 (이시카와가의 고사이)
1962내일이 있을 한
1962딸과 나키요 키타가와
1962추방자교사의 아내
1962가을 오후토모코
1963해군
1963어머니요시에
1964향기타로마루
1964악녀하츠 미무라
1964괴담부인 (이야기 4)
1965사무라이 암살자츠루
1965미모와 슬픔과 함께오토코의 어머니
1965빨간 수염킨 (마담)
1965무와 당근
1966어둠 속의 산 눈이네의 어머니
1966진초게아키 우에노 (다프네)
1967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내레이터
1969히토리코
1973화석의 숲
1974악명: 섬 폭풍이토
1974화석시어머니
1992보쿠토 키단카후의 어머니
1995마지막 편지요코 모리모토



『오소네가의 아침』(1946년)


『우리 청춘 후회없다』(1946년)


『손을 잡는 아이들』(1948년)


『만춘』(1949년)


『동경 이야기』(1953년)


『흐르다』(1956년)


스기무라 하루코는 츠키지 소극장 시절인 1927년 고야마우치 가오루 감독의 「여명」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혹은 1932년 초대 미즈타니 야에코와 공연한 「나미코」, 1937년 쇼치쿠의 「아사쿠사의 등불」 등으로 영화에 출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0년에는 국책 영화인 「오쿠무라 이오코」(도요다 시로 감독, 도호 영화사)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전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도요다 시로, 미조구치 겐지, 이마이 다다시 등 거장 감독들의 영화에 출연하여 일본 영화사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오즈 야스지로 작품에는 9편에 출연하며 단골 배우로 활약했다. 1995년에는 신도 가네토 감독의 「오후의 유언장」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닛칸 스포츠 영화 대상, 키네마 준보에서 주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주요 출연 텔레비전 드라마
연도제목역할방송사비고
1958오중탑KR(현・TBS)
1960문학좌 아워 본아미쓰지의 도적일본 텔레비전[53]
1961삼파TBS
1963청춘방과후NHK 종합
1964무지개의 설계NHK 종합
1967도쿠가와의 부인들NET(현・텔레비전 아사히)
1969히로시마 텔레비전[54] ※ 제24회 예술제 우수상 수상, 제7회 갤럭시상, 제2회 텔레비전 대상 우수 프로그램상[55]
1971츠쿠시 누구의 아이일본 텔레비전
1972아리가토 제2시리즈오야마 교TBS
1973후처의 울 곳간자키 묘일본 텔레비전
1974-1993여자의 집TBS
1974구혼여행일본 텔레비전
1974가족맞춤TBS
1975민들레일본 텔레비전
1975내일이 있으니TBS
1975해바라기의 시일본 텔레비전
1976어머니께서・아카자와 요시오아카자와 시마TBS
1976정말로TBS
1976삼남삼녀사위 한 마리TBS
19767정목의 길모퉁이에서, 가출딸과 게다바키 야로의 기묘한 사랑이 싹텄다일본 텔레비전
1979카타구르마일본 텔레비전
1979소중히일본 텔레비전
1979여자들의 충신장TBS[56]
1980카타구르마II일본 텔레비전
1980대나무 팽이일본 텔레비전
1980-1981혼자 와라 둘이 와라 모두 와라TBS
1981카타구르마III일본 텔레비전
1981세키가하라기타노 만도코로(北のまんどころ)TBS
1982봄이여 오라타치바나 와카일본 텔레비전특별출연
1983스승님은 명탐정 (1) 삼선 살인사건TBS
1984스승님은 명탐정 (2) 상속 살인사건TBS
1986타인 가족II요미우리 텔레비전
1987봄의 자매요미우리 텔레비전
1987감옥 속의 끈질긴 면면TBS
1987오늘 아침의 가을나카가와 타키NHK 종합[57] ※ 제14회 방송문화기금상 드라마 프로그램 부문 본상, 제27회 일본 텔레비전 기술상(녹음)・장려상(촬영), 제25회 갤럭시상 장려상[58], 프라하 국제 텔레비전제 대상 수상, 마이니치 예술상 수상, NHK 회장상 수상 작품[59]
1987충신장・여자들・사랑TBS
1987-1988여자는 열심히TBS
198840년 만의 사랑요미우리 텔레비전
1988감옥 속의 끈질긴 면면3TBS
1989요즘 진구 이야기 봉봉후지 텔레비전
1989기다리면 바다 길의 가을 햇살요미우리 텔레비전
1990감옥 속의 끈질긴 면면5TBS
1991세상을 건너는 건 귀신뿐이다타치바나 와카TBS특별출연
1991귀족의 계단TBS
1995봄이여, 오라NHK 종합 연속 TV 소설



'''연극'''

년월일은 스기무라가 처음으로 연기했을 때의 것이다.

3. 1. 연극

년월일은 스기무라가 처음으로 연기했을 때의 것이다.

3. 2. 영화

스기무라 하루코는 츠키지 소극장 시절인 1927년 고야마우치 가오루 감독의 「여명」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혹은 1932년 초대 미즈타니 야에코와 공연한 「나미코」, 1937년 쇼치쿠의 「아사쿠사의 등불」 등으로 영화에 출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0년에는 국책 영화인 「오쿠무라 이오코」(도요다 시로 감독, 도호 영화사)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전후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기노시타 게이스케, 오즈 야스지로, 나루세 미키오, 도요다 시로, 미조구치 겐지, 이마이 다다시 등 거장 감독들의 영화에 출연하여 일본 영화사에 이름을 남겼다. 특히 오즈 야스지로 작품에는 9편에 출연하며 단골 배우로 활약했다. 1995년에는 신도 가네토 감독의 「오후의 유언장」에 주연으로 출연하여 마이니치 영화 콩쿠르, 닛칸 스포츠 영화 대상, 키네마 준보에서 주연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다음은 스기무라 하루코가 출연한 주요 영화 목록이다.

  • 마이 퍼스트 러브 어페어 (1995)
  • 쓰여진 얼굴 (1995)
  • 세키가하라 (1981)
  • 화석 (1975)
  •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1967)
  • 사무라이 (1965)
  • 우츠쿠시사 토 가나시미 토 (1965)
  • 붉은 수염 (1965)
  • 향료의 향 (1964)
  • 무와 당근 (1964)
  • 파계 (1962)
  • 꽁치의 맛 (1962)
  • 고하야가와가의 가을 (1961)
  • 반역아 (1961)
  • 발에 닿은 여자 (1960)
  • 부초 (1959)
  • 안녕하세요 (1959)
  • 권적운 (1958)
  • 만원전차 (1957)
  • 동경의 황혼 (1957)
  • 흐르다 (1956)
  • 이른 봄 (1956)
  • 양귀비 (1955)
  • 만국 (1954)
  • 탁한 강 (1953)
  • 동경 이야기 (1953)
  • 젊은이 (1952)
  • 밥 (1951)
  • 초여름 (1951)
  • 다시 만날 때까지 (1950)
  • 요츠야 괴담 2 (1949)
  • 요츠야 괴담 (1949)
  • 만춘 (1949)
  • 4개의 사랑 이야기 (1947)
  • 우리 청춘 후회없다 (1946)
  • ''나미코'' (1932)
  • ''아사쿠사의 불'' (1937)
  • ''우구이스'' (1938)
  • ''결혼식 날'' (1940)
  • ''오쿠무라 이오코'' (1940)
  • ''나병 섬의 봄'' (1940) – 요코가와의 아내
  • ''오히나타무라'' (1940)
  • ''나의 사랑의 나무'' (1941)
  • ''시라사기'' (1941)
  • ''지로 이야기'' (1941)
  • ''난카이의 꽃다발'' (1942) – 노부코 홋타
  • ''어머니의 지도'' (1942) – 이사노 키시
  • ''격류'' (1944)
  • ''군대'' (1944) – 세츠
  • ''감정계의 장미'' (1945)
  • ''바다의 부르는 소리'' (1945)
  • ''오소네가의 내일'' (1946) – 후사코 오소네
  • ''우라시마 타로의 영광'' (1946)
  • ''젊음의 후회는 없다'' (1946) – 노게 부인, 류키치의 어머니
  • ''네 개의 사랑 이야기'' (1947) – 유키코의 어머니 (에피소드 1)
  • ''조엔'' (1947)
  • ''봄의 각성'' (1947)
  • ''세 개의 손가락의 남자'' (1947) – 이토코
  • ''유혹'' (1948) – 토키에
  • ''손을 잡는 아이들'' (1948)
  • ''위대한 X'' (1948) – 타카
  • ''시간의 조각가: 전후편'' (1948)
  • ''검은 구름 고개'' (1948)
  • ''국운 고개'' (1948)
  • ''베니 아직 사라지지 않다'' (1949)
  • ''요츠야 카이단'' (1949) – 오마키
  • ''신작 요츠야 카이단: 후편'' (1949) – 오마키
  • ''늦은 봄'' (1949) – 마사 타구치
  • ''여자의 식'' (1950)
  • ''다시 만날 때까지'' (1950) – 오노 스가
  • ''바다의 목소리를 들어라'' (1950) – 코하기 나카무라
  • ''에리코와 함께'' 제1부 + 제2부 (1951) – 하루에 마츠무라
  • ''자유 학교'' (1951)
  • ''초여름'' (1951) – 타미 야베
  • ''바다 위의 불꽃놀이'' (1951) – 코노 쿠지라이
  • ''만찬'' (1951) – 마츠 무라타, 미치요의 어머니
  • ''목숨 아름다워라'' (1951) – 미네 이무라
  • ''청춘 회의'' (1952) – 타미요
  • ''겐로쿠 수이코덴'' (1952) – 온우이
  • ''바람 다시 한번'' (1952)
  • ''금의 알: 황금 소녀'' (1952) – 츠루코 후지무라
  • ''젊은 사람'' (1952)
  • ''센바 즈루'' (1953) – 치카코 쿠리모토
  • ''몬텐루파: 북경의 노래'' (1953)
  • ''그대에게 바치는 목숨이 된다면'' (1953)
  • ''도쿄 이야기'' (1953) – 시게 카네코
  • ''여자의 일생'' (1953) – 타마에, 신타로의 어머니
  • ''진흙탕의 만'' (1953) – 오하츠 (이야기 3)
  • ''게이샤 코나츠'' (1954) – 라쿠 카미오카
  • ''늦은 국화'' (1954) – 킨
  • ''슌킨 이야기'' (1954) – 오에이
  • ''군쇼'' (1954)
  • ''메이지 일대기 여자'' (1955) – 오히데
  • ''경찰 일기'' (1955) – 모요 스기타, 중개인
  • ''양귀비'' (1955) – 연춘공주
  • ''게이샤 코나츠: 혼자 자는 밤의 코나츠'' (1955) – 라쿠 카미오카
  • ''그녀는 들국화 같았다'' (1955) – 마사오의 어머니
  • ''아오가시마의 아이들 – 여자 교사의 기록'' (1956) – 치에 야마다
  • ''초봄'' (1956) – 타마코 타무라
  • ''48세의 저항'' (1956) – 사토코, 코타로의 아내
  • ''흐르는 강'' (1956) – 소메카
  • ''여자의 발자취'' (1956)
  • ''혼잡한 전차'' (1957) – 오토메, 어머니
  • ''도쿄 황혼'' (1957) – 시게코 타케우치
  • ''슬픔은 여자에게만'' (1958) – 치요코
  • ''꽃의 보조'' (1958) – 리에 이케가미
  • ''여름 구름'' (1958) – 토요
  • ''잠자는 교시로 불뢰 회계: 마켄 지옥'' (1958) – 소노에
  • ''굿모닝'' (1959) – 키쿠에 하라구치
  • ''미모에 죄가 있다'' (1959) – 후사 요시노
  • ''아냐코로'' (1959) – 오사이
  • ''카시마나다의 여자'' (1959)
  • ''세 가지 보물'' (1959) – 내레이터
  • ''떠돌이풀'' (1959) – 오요시
  • ''텐포 록카센 – 지옥의 하나미치'' (1960) – 오쿠마
  • ''딸 아내 어머니'' (1960) – 카요 타니
  • ''딸들, 아내들 그리고 어머니'' (1960) – 카요 타니
  • ''발에 걸린 여자'' (1960) – 소매치기 하루코
  • ''풍류 후카가와타'' (1960)
  • ''바나나'' (1960)
  • ''쿠츠카케 토키지로'' (1961) – 오로쿠
  • ''여름의 끝'' (1961) – 카토 시게
  • ''붓다'' (1961) – 바이데히
  • ''반역지'' (1961)
  • ''가정의 사정'' (1962) – 요시이 부인
  • ''여자의 자'' (1962) – 아키, 이시카와가의 고사이
  • ''내일이 있을 한'' (1962)
  • ''딸과 나'' (1962) – 키요 키타가와
  • ''추방자'' (1962) – 교사의 아내
  • ''가을 오후'' (1962) – 토모코
  • ''해군'' (1963)
  • ''어머니'' (1963) – 요시에
  • ''향기'' (1964) – 타로마루
  • ''악녀'' (1964) – 하츠 미무라
  • ''괴담'' (1964) – 부인 (이야기 4)
  • ''사무라이 암살자'' (1965) – 츠루
  • ''미모와 슬픔과 함께'' (1965) – 오토코의 어머니
  • ''빨간 수염'' (1965) – 킨, 마담
  • ''무와 당근'' (1965)
  • ''어둠 속의 산 눈'' (1966) – 이네의 어머니
  • ''진초게'' (1966) – 아키 우에노, 다프네
  •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 (1967) – 내레이터
  • ''히토리코'' (1969)
  • ''화석의 숲'' (1973)
  • ''악명: 섬 폭풍'' (1974) – 이토
  • ''화석'' (1974) – 시어머니
  • ''보쿠토 키단'' (1992) – 카후의 어머니
  • ''마지막 편지'' (1995) – 요코 모리모토

3. 3. 텔레비전 드라마


  • 세키가하라 (1981년, TBS) - 기타노 만도코로(北のまんどころ) 역
  • 오중탑 (1958년, KR(현・TBS))
  • 문학좌 아워 본아미쓰지의 도적 (1960년 8월 26일, 일본 텔레비전)[53]
  • 삼파 (1961년, TBS)
  • 청춘방과후 (1963년, NHK 종합)
  • 무지개의 설계 (1964년, NHK 종합)
  • 도쿠가와의 부인들 (1967년, NET(현・텔레비전 아사히))
  • 비 (1969년, 히로시마 텔레비전)[54] ※ 제24회 예술제 우수상 수상, 제7회 갤럭시상, 제2회 텔레비전 대상 우수 프로그램상[55]
  • 츠쿠시 누구의 아이 (1971년, 일본 텔레비전)
  • 아리가토 제2시리즈 (1972년, TBS) - 오야마 교 역
  • 후처의 울 곳 (1973년 6월 30일, 일본 텔레비전) - 간자키 묘 역
  • 여자의 집 (1974년-1993년, TBS)
  • 구혼여행 (1974년, 일본 텔레비전)
  • 가족맞춤 (1974년, TBS)
  • 민들레 (1975년, 일본 텔레비전)
  • 내일이 있으니 (1975년, TBS)
  • 해바라기의 시 (1975년, 일본 텔레비전)
  • 어머니께서・아카자와 요시오 (1976년 6월 20일, TBS) - 아카자와 시마 역
  • 정말로 (1976년, TBS)
  • 삼남삼녀사위 한 마리 (1976년, TBS)
  • 7정목의 길모퉁이에서, 가출딸과 게다바키 야로의 기묘한 사랑이 싹텄다 (1976년, 일본 텔레비전)
  • 카타구르마 (1979년 5월 7일~10월 29일, 일본 텔레비전)
  • 소중히 (1979년 11월 5일~1980년 5월 5일, 일본 텔레비전)
  • 여자들의 충신장 (1979년 12월 9일, TBS)[56]
  • 카타구르마II (1980년, 일본 텔레비전)
  • 대나무 팽이 (1980년, 일본 텔레비전)
  • 혼자 와라 둘이 와라 모두 와라 (1980년 - 1981년, TBS)
  • 카타구르마III (1981년, 일본 텔레비전)
  • 봄이여 오라 (1982년, 일본 텔레비전) - 타치바나 와카 역(특별출연)
  • 스승님은 명탐정 (1) 삼선 살인사건 (1983년, TBS)
  • 스승님은 명탐정 (2) 상속 살인사건 (1984년, TBS)
  • 타인 가족II (1986년, 요미우리 텔레비전)
  • 봄의 자매 (1987년, 요미우리 텔레비전)
  • 감옥 속의 끈질긴 면면 (1987년, TBS)
  • 오늘 아침의 가을 (1987년 11월 28일, NHK 종합) - 나카가와 타키 역[57] ※ 제14회 방송문화기금상 드라마 프로그램 부문 본상, 제27회 일본 텔레비전 기술상(녹음)・장려상(촬영), 제25회 갤럭시상 장려상[58], 프라하 국제 텔레비전제 대상 수상, 마이니치 예술상 수상, NHK 회장상 수상 작품[59]
  • 충신장・여자들・사랑 (1987년, TBS)
  • 여자는 열심히 (1987-1988년, TBS)
  • 40년 만의 사랑 (1988년, 요미우리 텔레비전)
  • 감옥 속의 끈질긴 면면3 (1988년, TBS)
  • 요즘 진구 이야기 봉봉 (1989년, 후지 텔레비전)
  • 기다리면 바다 길의 가을 햇살 (1989년, 요미우리 텔레비전)
  • 감옥 속의 끈질긴 면면5 (1990년, TBS)
  • 세상을 건너는 건 귀신뿐이다 (1991년 3월 7일, 3월 14일, TBS) - 타치바나 와카 역(특별출연)
  • 귀족의 계단 (1991년, TBS)
  • 봄이여, 오라 (1995년, NHK 종합 연속 TV 소설)

4. 수상 내역

스기무라 하루코는 1948년 《여자의 일생》(A Woman's Life)으로 일본예술원상을 수상했다. 1951년에는 《만찬》(Repast)과 《초여름》(Early Summer)으로 제2회 블루리본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1954년, 《진흙탕》(An Inlet of Muddy Water)과 《도쿄 이야기》로 제8회 매일영화콩쿠르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1968년에는 《여자의 일생》(A Woman's Life)으로 아사히문화상을 수상하였다.

1974년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1996년에는 《마지막 노트》(A Last Note)로 제50회 매일영화콩쿠르 여우주연상, 제69회 키네마준포 베스트 텐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8년 매일영화콩쿠르 특별상과 일본 아카데미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이외에도 NHK방송문화상(1959년), 매일예술상(1969년), 야마지 후미코 영화상 문화상(1988년), 기이노쿠니야 연극상(1991년), 예술제상(1991년), 명예도민(1992년), 요미우리 연극대상(1994년), 제8회 닛칸스포츠 영화대상 여우주연상(1995년), 제5회 일본영화평론가대상 특별여우상(1995년) 등을 수상했다.

5. 평가 및 영향

스기무라 하루코는 일본 신극을 대표하는 배우로서 70여 년의 연기 인생 동안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일본 연극계와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19] 특히 1945년 초연된 여자의 일생의 누노비키 케이 역은 900회 이상 상연되며 일본 연극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는 무대뿐만 아니라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활약하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나루세 미키오 등 일본 영화 황금기를 이끈 거장 감독들의 작품에 출연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50][51]

모리 미츠코는 코지마노 하루에서 스기무라의 연기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하며, 그녀를 연기의 스승으로 존경하고 본보기로 삼았다고 말했다.[20] 타카미네 히데코 또한 같은 영화에서 한센병에 걸린 딸 역할을 연기한 스기무라에게 감동하여 배우 일에 본격적으로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21]

오카다 마리코오즈 야스지로에게 "감독님의 작품에서 누가 4번 타자입니까?"라고 묻자, 오즈는 망설임 없이 "스기무라 하루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23] 키시 케이코는 『화석』(1975년)에서의 스기무라 연기를 극찬하며, 인생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친절함이 느껴진다고 말했다.[25] 반도 타마사부로는 스기무라를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듯한 여자를 공부한다고 말했다.[39]

가츠 신타로는 스기무라를 크게 숭배했으며, 이시이 후쿠코는 스기무라의 희로애락을 뒷모습으로 표현하는 능력과 젊음, 품위를 겸비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26][27] 키타무라 카즈오는 스기무라가 91세의 나이에도 대본을 놓지 않고 더 좋은 연기를 위해 고민하는 열정적인 배우였다고 회상했다.[29]

요시나가 사유리는 스기무라를 아름다운 동작의 선생님으로 꼽으며, 그녀에게서 동작과 연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30][31] 카모시타 신이치는 스기무라의 대사 전달 능력을 극찬하며, 누구에게 물어도 이견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기교를 지녔다고 평가했다.[33] 7대 타케모토 스미다유는 스기무라의 연기를 "연기하지 않고, 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34][35]

키키 키린은 스기무라의 수행원으로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산마의 맛 촬영 현장을 보았으며, 스기무라에게서 "배우에게는 정년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37] 야마다 요지는 오즈 야스지로의 장례식에서 스기무라가 보여준 연기자다운 면모를 언급하며,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모두에게 슬픔을 전달하고 장례식을 완성시켰다고 설명했다.[38]

오오타케 시노부는 스기무라에게 질투를 느꼈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여배우로서 계속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비결이 그런 감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39] 나카무라 마사토시는 스기무라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으며, "누가 골라 준 것도 아닌데—"라는 여자의 일생 대사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42] 와타나베 토오루는 스기무라에게서 "눈앞의 상대역을 (연기로)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은 손님들에게도 전해지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했다.[43][44]

스기무라는 봉사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 1954년 문학좌에서 자선 공연 여자의 일생을 개최하고, 클리닉카를 제작하여 전국의 의료 취약지를 지원하는 데 기여했다.[49] 또한, 아동 연극 보급 활동에 힘쓴 이토 하즈코에게 "당신의 일생에서 『숲은 살아 있다』의 이토 하즈코, 『여자의 일생』의 스기무라 하루코라고 불리는 배우는 그렇게 흔치 않다"며 아동극에 전념하도록 격려했다.[49]

만년에도 식지 않는 연기 열정으로 오후의 유언장에서 주연을 맡아 일본 영화계 최고 권위의 상들을 휩쓸며 나이를 초월한 배우의 표상으로 존경받았다. 그녀는 죽기 직전까지 무대에 서는 등, 노년에도 젊은 역을 소화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52]

6. 한국과의 관계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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