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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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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검은 후백제의 왕족으로, 견훤과 상원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35년,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동생 견양검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하고 견금강을 살해한 뒤 후백제 2대 왕이 되었다. 이후 견훤이 고려에 투항하여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면서 황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항복했다. 신검의 최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삼국사기 견훤 열전의 주석에는 신검을 포함한 형제들이 모두 벌을 받아 죽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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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백제 국왕 - 견훤
    견훤은 신라 장군 출신으로 후백제를 건국하고 왕건과 대립하다가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고려에 투항하여 상부의 칭호를 받았으며, 후백제 멸망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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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견신검
한자 표기甄神劍
로마자 표기Gyeon Singeom
다른 이름왕태자 견성(王太子 甄成)
기본 정보
출생885년
사망몰년 미상
재위 기간935년 ~ 936년
시대정개
종교불교(佛敎)
가족 관계
부왕견훤(甄萱)
모후왕후 박씨(王后 朴氏)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기타
왕조후백제
묘호미상
시호미상
능묘미상

2. 생애

885년 견훤과 상원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젊은 시절 군사 활동에 참여했으나, 924년 조물성 공격이나 933년 서라벌 공격 시도 등에서 고려군에게 패배하며 뚜렷한 전공을 세우지는 못했다.

견훤이 넷째 아들이자 이복동생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동생 양검, 용검 및 이찬 능환 등과 공모하여 935년 음력 3월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금강을 살해하고 아버지 견훤금산사에 유폐시킨 뒤,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 신검이 후백제의 제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이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하였고, 태조 왕건에게 자신을 몰아낸 아들들을 처벌해 줄 것을 요청했다. 936년, 고려 태조는 견훤과 함께 후백제를 공격하였고,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크게 패배했다. 신검은 고려에 항복하였고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신검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려 태조는 정변의 주된 책임이 동생들인 양검, 용검과 능환에게 있다고 보고 그들만 처형하거나 귀양 보낸 뒤 살해하였다. 신검의 이후 행적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명확하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견훤 열전의 주석에는 신검을 포함한 세 형제가 모두 처형되었다는 설이 전해져,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2. 1. 출생과 초기 활동

885년 견훤과 상원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924년 7월에는 아우인 양검과 함께 고려의 조물성(曹物城)을 공격하여 고려 장수 애선을 죽였으나, 다른 장수 왕충이 굳건히 저항하여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났다.

933년 5월, 총군(統軍)이 되어 혜산성(槥山城)과 아불진(阿弗鎭)을 거쳐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탄(槎灘)에서 고려유금필이 이끄는 군대에게 크게 패배하였다. 7일 후, 서라벌에서 돌아오던 유금필과 자도(子道)에서 다시 맞붙었으나 또다시 패배하여 금달(今達), 환궁(奐弓) 등 7명의 장수가 사로잡히고 많은 전라도 병사를 잃었다.

이후 아버지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이자 신검의 이복동생으로 추정되는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었다. 아우 양검, 용검 등의 권유와 후백제의 이찬 능환 등 일부 관료들의 동조를 얻어 쿠데타를 계획했다. 마침내 935년 음력 3월, 견훤금산사에 가두고 금강을 살해한 뒤 대리청정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에는 스스로 후백제의 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신검은 견훤금산사에 유폐시켰으나, 견훤은 약 3개월 만에 탈출하여 고려의 수도 송악으로 망명하였다. 견훤은 태조 왕건에게 자신을 몰아낸 아들들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했고, 태조는 이를 받아들여 936년 군대를 이끌고 일선군(一善郡, 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으로 진격했다.

이에 신검은 전라도 병사들을 이끌고 맞섰으나(일리천 전투), 견훤의 사위였던 박영규고려에 항복하면서 시작부터 전세가 불리해졌다. 게다가 고려군 진영에 나타난 아버지 견훤의 모습을 본 후백제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 결국 많은 장수들이 싸우기도 전에 항복했고, 신검은 황산(黃山,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까지 밀려나 황산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항복하였다.

견훤은 태조에게 신검이 아비에게 반역한 죄를 물어 처벌해 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그러나 태조는 반역의 주된 책임이 신검을 부추긴 동생 양검과 용검, 그리고 능환에게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만을 처벌했다. 결국 능환은 처형되었고, 양검과 용검은 전라도로 귀양 보내졌다가 살해되었다. 신검의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 견훤 열전의 주석에는 신검을 포함한 세 형제가 모두 처형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져, 실제로는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2. 2. 정변과 즉위

견훤이 10여 명의 아들 중 넷째 아들이자 신검의 이복 아우로 추정되는 견금강에게 왕위를 전하려고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신검은 아우인 양검, 용검 등의 권유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쿠데타에는 후백제의 이찬 능환을 비롯한 일부 관료들도 동참하였다.

935년(태조 18년) 음력 3월, 신검은 아버지 견훤금산사에 가두고 동생 견금강을 살해하였다. 이후 대리청정을 하다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후백제 제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금산사에 유폐되었던 견훤은 약 3개월 뒤 탈출하여 고려의 수도 송악으로 망명하였다.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자신을 배신한 아들들을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고, 고려 태조는 이를 받아들여 936년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후백제군은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과 맞섰으나,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고려로 귀순하면서 초반부터 전세가 불리해졌다. 특히 고려군 진영에 나타난 견훤의 모습을 본 후백제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 결국 많은 장수들이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였고, 신검은 황산(현재의 논산시 연산면 일대)까지 밀려나 황산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하고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신검을 포함한 아들들의 처벌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 태조는 반란의 주된 책임이 신검을 부추긴 동생 양검과 용검, 그리고 능환에게 있다고 판단하여 그들만 처벌하였다. 능환은 처형되었고, 양검과 용검은 진도로 귀양 보내졌다가 살해되었다. 신검의 이후 행적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사기견훤 열전의 주석에는 신검을 포함한 세 형제가 모두 처형되었다는 설이 전해지며, 실제 기록 부재로 미루어 볼 때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2. 3. 후백제의 멸망과 최후

견훤이 이복동생인 견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신검은 동생 양검, 용검 및 이찬 능환 등과 공모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935년 음력 3월, 신검은 견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했다. 이후 대리청정을 하다가 같은 해 음력 10월 17일 후백제 2대 왕으로 즉위했다. 신검은 자신의 즉위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후당에 사신을 보내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의동생이자 견훤의 사위인 박영규고려왕건에게 내통하면서 내부 분열이 시작되었다.

금산사에 유폐된 지 약 3개월 만에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의 수도 송악으로 망명했다.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반역한 아들들의 처벌을 요청했고, 고려 태조는 이를 받아들여 936년 군대를 이끌고 후백제 정벌에 나섰다. 고려군은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지역인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격했다.

후백제군은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과 맞섰으나, 박영규의 내통으로 이미 전세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결정적으로 고려군 진영에 나타난 견훤의 모습을 본 후백제 병사들은 싸울 의지를 상실했다. 결국 장수 애술 등 많은 이들이 싸우기도 전에 항복했으며, 신검은 황산(黃山,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까지 밀려나 황산 전투를 치렀으나 크게 패하고 고려 태조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후백제는 멸망했다.

견훤은 고려 태조에게 신검의 처벌을 요청했으나, 태조는 반역의 주된 책임이 신검을 부추긴 동생 양검, 용검능환에게 있다고 보았다. 이에 능환은 처형되었고, 양검용검은 귀양 보내진 뒤 살해되었다. 신검의 최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삼국사기견훤 열전의 주석에는 신검을 포함한 삼형제가 모두 처형되었다는 설이 전하는데, 이후 신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실제로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게 여겨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형을 면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3. 가족 관계

wikitext

관계이름생몰년 / 재위 기간
조부아자개(阿慈介)? ~ 935
조모상원부인(上院夫人)? ~ ?
부왕견훤(甄萱)867 ~ 936 (재위: 892 ~ 935)
모후상원부인 박씨(上院夫人 朴氏)? ~ ?
동생견양검(甄良劍)? ~ 936
동생견용검(甄龍劍)? ~ 936
여동생국대부인? ~ ?
매제박영규(朴英規)? ~ ?
이복동생견금강(甄金剛)? ~ 935
숙부능애(能哀)? ~ ?
계조모남원부인(南院夫人)? ~ ?
이복 숙부용개(龍蓋)? ~ ?
이복 숙부보개(寶蓋)? ~ ?
이복 숙부소개(小蓋)? ~ ?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oma & Sekey
[2] 서적 Overlooked Historical Records of the Three Korean Kingdoms https://books.google[...] Jimoondang
[3] 서적 A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Macmillan International Higher Education
[4] 서적 Atlas of Korean History https://books.google[...] Stallion Press
[5] 서적 The Land of Scholars: Two Thousand Years of Korean Confucianism https://books.google[...] Homa & Sekey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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