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금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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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금필은 고려 초기의 무장으로, 고려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청주 반란 진압, 여진족 회유, 후백제군 격파 등 다양한 군사적 활동을 통해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여진족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고려의 삼한 통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유금필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과 충절을 인정받아 삼중대광 통합 삼한 익찬공신에 봉해졌으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딸은 태조의 비 동양원부인이며, 드라마 태조 왕건과 제국의 아침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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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금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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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 유금필 / 유검필 |
한자 | 庾 黔弼 |
가타카나 | 유, 그무비루 |
로마자 표기 | 2000년식: Yu Geumbil / Yu Geomgil MR식: Yu Kŭmp'il |
귀족 정보 | |
이름 | 유금필 |
현지어 표기 | 庾黔弼 |
다른 이름 | 유검필 |
별명 | 미상 |
출생일 | 미상 |
출생지 | 신라 평주 |
사망일 | 941년 음력 4월 6일 |
사망지 | 미상 |
재위 (시작) | 901~918 |
재위 (종료) | 918~941 |
배우자 | 미상 |
자녀 | 유긍(庾兢) 유관유(庾官儒) 유경(庾慶)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
주군 | 태조(太祖) |
정당 | 무소속 |
작위 | 고려의 개국공 |
최종 계급 | 고려 중군장 |
시호 | 충절공(忠節公) |
가문 | 평산(平山) 무송(茂松)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조물성 전투(曹物郡 戰鬪) 청주 전투(淸州戰鬪) 고창 전투(古昌 戰鬪) 운주 전투(運州 戰鬪) 일리천 전투(一利川 戰鬪) |
서훈 내역 | 994년 태사(太師)로 추서 |
기타 이력 | 고려 태조의 국구 |
2. 생애
평주(황해북도 평산군) 출신의 군인이다. 923년에는 북방에서 여진족을 상대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여 고려에 귀부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925년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서 후백제 군을 공격하여 서부 전선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후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특히 936년에는 여진족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 군을 격파하여 고려 태조의 삼한 통일을 돕는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로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통합 삼한 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에 봉해졌으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는 영예를 안았다.
2. 1. 초기 활동과 고려 건국
유금필의 이름이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918년 고려 건국 이후이다. 《고려사》 권92 열전 제5 홍유 열전 및 견금 열전에 따르면, 당시 청주에서 반란의 움직임이 보이자 태조 왕건은 유금필과 홍유에게 군사 1,500명을 주어 이를 미리 방지하도록 했다.이 기록을 통해 비록 유금필이 고려 개국공신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전 태봉 시절부터 태조를 따르던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초기 주요 활동 무대가 서부 전선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해당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개국공신은 총 2,011명으로, 등급별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3등 공신은 2,000명에 달하지만, 정확한 전체 명단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각 성씨의 족보나 묘지명 등을 통해 일부 인물만 확인되고 있다. 고려 개국 정변 성공 후 혁명 정부 구성 과정에서 기록된 문무 관료들과 그 자녀들까지 모두 개국 협력자로 간주할 수 있으므로, 유금필 역시 개국 3등 공신 2,000명 중 한 명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3]
2. 2. 북방 평정과 외교적 수완
923년(태조 6년)에 마군장군이 된 유금필은 개정군 3천 명을 이끌고 골암진 동산에 성을 쌓았다. 그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북방의 여진족 추장 300명을 불러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가 무르익어 추장들이 술에 취하자, 유금필은 그들을 위협하여 복종을 받아냈다. 이러한 외교적 수완을 통해 부족들로부터 1,500명의 귀순자를 얻었으며, 여진족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인 3천여 명도 돌려받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건은 유금필이 북방 문제에 정통했음을 보여주며, 이후에도 그가 여러 차례 북방 지역의 군대를 지휘하는 배경이 되었다.2. 3. 조물성 전투와 서부 전선 활약
유금필은 활동 초기에 서부 전선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925년(태조 8년) 음력 10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에 임명되어 후백제의 연산진(청주시)을 공격하여 그곳의 장군 길환(吉奐)을 죽였다. 이어서 임존군(예산군)을 공격하여 후백제 군사 3,000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이 승리 이후, 유금필은 조물성(현재의 경상북도 문경시, 상주시 또는 김천시 조마면 일대로 추정) 방면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던 왕건을 돕기 위해 군대를 이동시켰다. 유금필이 조물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백제의 견훤은 고려에 화친을 요청하였다. 견훤이 직접 왕건의 진영으로 와서 화친을 맺으려 하자, 유금필은 "사람의 마음은 예측하기 어려운데, 어찌 경솔하게 적과 가까이하려 하십니까?"라며 왕건을 만류하였다. 이는 당시 왕건 진영의 군사적 상황이 매우 어려웠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일화이다.
2. 4. 청주 전투와 중앙군 합류
927년 왕건이 백제와 신라의 연결선을 끊기 위한 작전을 수행하다 실패했을 때, 유금필의 이름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그가 당시 서부전선을 지키는 책임자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태조 왕건의 남쪽으로 향하는 작전을 저지하고 오히려 경상도 일대를 장악해가던 견훤은 서부전선에서도 공세를 이어갔다. 이에 태조 왕건은 928년 유금필에게 탕정군(湯井郡)에 성을 쌓도록 명령했다.2. 5. 고창 전투와 후삼국 통일의 주역
평주(황해북도 평산군) 출신의 군인인 유금필은 초기부터 군사적 수완을 보였다. 923년에는 여진족을 회유하여 많은 이들을 고려에 귀부시켰으며, 925년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서 후백제군을 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이후 후백제의 김훤, 애식, 한장이 3천여 명의 병력으로 청주를 공격했을 때, 유금필은 꿈에서 큰 사람의 계시를 받고 이를 알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는 즉시 청주로 나아가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독기진까지 추격하여 300여 명을 사살하거나 사로잡았다.
당시 충주에 머물고 있던 왕건은 유금필로부터 승전 보고를 받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동수 싸움에서 신숭겸과 김락 두 명장이 전사하였으므로 국가를 위하여 깊이 근심하였더니 지금 그대의 말을 듣고 나의 마음이 조금 안심되었다.”
이 발언과 유금필의 초기 활동이 왕건과 별개로 이루어진 독자적인 군사 행동이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당시 그는 아직 왕건 휘하 중앙군의 핵심적인 위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중앙의 주력 전장보다는 다른 전선에 주로 투입되었음을 시사하며, 훗날 그가 참소를 당하게 되는 배경과 연결될 수 있다.[4]
그럼에도 유금필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936년에는 흑수, 달고, 철륵 등 여진족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후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삼중대광(三重大匡) 통합 삼한 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에 봉해졌으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는 영예를 안았다.
2. 6. 귀양과 충절
929년 말, 후백제의 견훤이 고창군(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을 포위 공격하자 고려 태조는 직접 구원군을 이끌고 나섰다. 예안에서의 전략 회의에서 대상(大相) 공훤과 홍유는 전투가 불리해질 경우를 대비해 퇴로를 미리 정비하자고 제안했으나, 유금필은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그는 "병기는 흉한 기구이며 전투는 위험한 일이라 하였으니, 구차히 살려는 마음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싸워야만 승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적과 마주하고 있는데, 싸워보지도 않고 먼저 기세가 꺾여 달아날 걱정만 하면 어찌되겠습니까? 만약 뒤쫓아 가 구원하지 않고, 고창군의 3천명 넘는 군사들을 고스란히 적에게 넘겨준다면, 어찌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길 바라옵니다"라고 주장하며 즉시 진군하여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태조는 유금필의 의견을 받아들여 공격을 결정했다. 930년 음력 1월에 벌어진 병산 전투에서 유금필은 군대를 이끌고 저수봉에서 용맹하게 돌격하여 후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후백제군은 8천여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으며, 이로 인해 경상도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전투 후 태조는 고창에 입성하여 유금필의 손을 잡고 "오늘의 승리는 그대의 공이다"라며 그의 공적을 높이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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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신라 구원'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해당 섹션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2. 8. 운주 전투와 서부 전선 제압
925년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서 후백제군을 공격하여 큰 군공을 세웠다.2. 9. 견훤 탈출 지원과 나주 공략
(작성할 내용 없음 -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견훤 탈출 지원과 나주 공략'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2. 10. 일리천 전투와 후백제 멸망
936년에는 흑수, 달고, 철륵 등 여진족의 정예 기병을 지휘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하는 등 고려 태조를 지원하여 삼한 통일에 공을 세웠다. 이러한 공로로 삼중대광(三重大匡) 통합 삼한 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에 봉해졌으며, 공신으로서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3. 의의와 평가
유금필은 평주(황해북도 평산군) 출신의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단순히 무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수완도 겸비한 인물이었다. 923년에는 여진족을 회유하여 많은 수를 고려에 귀부시키는 성과를 올렸으며, 925년에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서 후백제를 상대로 군사적 공을 세웠다.
특히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936년 벌어진 일리천 전투는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건 마지막 대규모 결전이었는데, 이때 유금필은 대상(大相)으로서 참전하였다. 그는 흑수, 달고, 철륵 등 북방 민족의 정예 기병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후백제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후백제의 멸망과 고려 태조의 삼한 통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금필은 삼중대광(三重大匡) 통합 삼한 익찬공신(統合三韓翊贊功臣)이라는 높은 벼슬과 공신호를 받았으며, 사후에는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이는 그가 고려의 건국과 통일 과정에 얼마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4. 가계
(작성할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부재함)
5. 유금필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서적
고려사
[2]
서적
정조실록
1796-08-04
[3]
문서
유금필은 고려태조의 9번째 부인인 동양원부인 유씨(東陽院夫人庾氏)의 아버지인데, 29명의 태조 부인들 중에서도 그리 서열이 높지 않다. 또한 개국공신 서열에서도 1등, 2등에 없는 것을 두고 그 공이 적기 때문으로 보기도 하나 이는 논공행상에서의 잡음을 미연에 막기 위해 유금필이 스스로 희생하고 자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유금필같은 공신이 3등이라면 논공행상에서 누가 감히 서운함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유금필이야 말로 태조에게 진정한 신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4]
서적
삼국사기,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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