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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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혜왕후 류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왕후이다. 개풍군 정주 출신으로, 태조가 궁예 휘하에 있을 때 만나 결혼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왕후가 되었으며, 국사 보좌와 태조의 정책 수립에 기여했다. 후당 명종으로부터 하동군부인으로 책봉되었고, 고려 건국을 보필한 공으로 태조의 존경을 받았다. 자녀는 없으며, 태조와 합장된 현릉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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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종은 고려 태조 왕건의 장남이자 제2대 왕으로, 왕위 계승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박술희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으나, 측근 세력과 이복동생들의 왕위 위협 속에서 재위 2년 만에 사망했다. - 후삼국 시대 - 강씨 (후고구려)
강씨는 신천 강씨 출신으로 후고구려 왕비이자 궁예의 부인이며 청광, 신광 형제의 어머니였으나, 궁예의 폭정에 간언하다 간통 의심을 받아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신혜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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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칭호 | 고려 왕후 |
휘 | 미상 |
별칭 | 대부인(大夫人), 정주부인(貞州夫人) |
시호 | 신혜(神惠) |
존호 | 신혜왕태후(神惠王太后) |
가문 | 정주 류씨 |
능묘 | 현릉(顯陵) |
생애 | |
출생 | 생년 미상 신라 정주시 |
사망 | 몰년 미상 개성 |
매장지 | 현릉 |
혼인과 계승 | |
배우자 | 태조 |
자녀 | 없음 |
왕후 즉위 | 918년 |
전임 | 왕조 건국 |
전임 (태봉) | 강비 (태봉의 마지막 왕후) |
전임 (신라) | 죽방부인 (신라의 마지막 왕후) |
후임 | 장화왕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류천궁 |
어머니 | 미상 |
기타 | |
종교 | 불교 |
2. 생애
신혜왕후는 정주 (현 개풍군) 출신의 유천궁의 딸로 태어났다. 유천궁의 집안은 매우 부유하여 고을 사람들이 장자(長者)댁이라고 불렀다.
왕건이 궁예 휘하의 장군이었을 때, 후백제 정벌을 위해 정주 지역을 지나다 우연히 신혜왕후를 만나게 되었다. 왕건은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혜에 반해 혼인하였다.
이후 태봉 말기, 궁예의 공포정치에 반발한 신숭겸, 홍유, 배현경 등이 왕건에게 궁예를 몰아낼 것을 제안했을 때, 왕건이 망설이자 신혜왕후가 직접 갑옷을 입혀 혁명을 독려하였다.
918년 고려 건국 후 왕후가 되었으며, 후당 명종에게서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책봉되었다. 신혜왕후는 남편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워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았다.
생몰년은 미상이며, 태조와 함께 현릉에 합장되었다. 자녀는 없었다.
2. 1. 가계와 혼인
태조와 신혜왕후의 만남은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던 시절 이루어졌다. 《고려사》에는 두 사람이 버드나무 아래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정주 지역을 지나던 왕건은 버드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던 중 시냇가에서 신혜왕후를 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지혜에 반한 왕건은 그날 신혜왕후의 아버지인 유천궁의 집에 머물렀고, 유천궁은 딸에게 왕건과 함께 밤을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후 왕건은 전장으로 떠났고, 소식이 없자 신혜왕후는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왕건은 그녀를 찾아 혼인하였다.태봉 말기, 신숭겸, 홍유, 배현경 등이 궁예의 폭정에 반발하여 궁예를 몰아내자고 찾아왔을 때 왕건이 주저하자, 신혜왕후는 "의(義)로써 탐학함을 물리치는 것은 예로부터 당연한 일입니다. 아녀자인 저도 싸울 것인데, 하물며 대장부께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며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 혁명을 일으키도록 독려하였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왕후가 되었다. 태조 16년, 후당 명종은 왕경 등을 보내 신혜왕후를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책봉하였다. 책봉 글에는 신혜왕후가 내조와 좋은 계책으로 국사를 보좌하고, 남편을 섬기는 데 유순하고 현명하여 특별한 명예를 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신혜왕후는 고려 건국을 도운 공로로 태조에게 존경받았다. 자녀는 없으며, 태조와 함께 현릉에 합장되었다.
- 부: 유천궁
- 남편: 태조
2. 2. 고려 건국과 왕후 책봉
신혜왕후 류씨는 경기도 정주(현 개풍군) 출신으로 경기도 지역의 삼중대광(三重大匡) 유천궁의 딸이었다. 유천궁의 집은 큰 부자이어서 고을 사람들이 장자(長者)댁이라고 불렀다.왕건과는 그가 궁예의 휘하에 있던 시절 만나게 되었는데 《고려사》에는 두 사람이 버드나무 아래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적고 있다. 후백제를 침공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정주 땅을 지나다가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우연히 시냇가에 있는 류씨를 보게 되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과 지혜에 한눈에 반하여 그날 유천궁의 저택에서 묵었다. 그리고 유천궁은 그날 밤 자신의 딸인 류씨를 왕건과 동침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왕건은 그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곧바로 전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왕건이 떠난 뒤 한참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자 비관하여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왕건이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황급히 그녀를 찾아서 데려와 혼인을 하였다.
태봉 말기 궁예의 공포정치에 반발하여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자고 찾아왔을 때 왕건이 주저하자 이를 보고 있던 류씨가 "의(義)로써 탄학함을 물리치는 것은 예부터 매우 당연한 일로써, 아녀자인 나도 싸울 터인데 하물며 대장부는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남편을 독려하며 손수 갑옷을 입히고 혁명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918년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자 본부인인 류씨도 왕후가 되었다. 태조 16년, 후당 명종이 태복경 왕경 등을 보내 왕후(后宮)로 책봉하였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남의 처가 되어 남편을 잘 섬겨서 부귀를 누리게 된 사람을 그 집안의 가장 좋은 아내라고 보리라. 봉읍(封邑)의 제도는 옛법에 있는바 이제 좋은 배필을 한층 더 빛내주어 국왕의 벼슬에 상응하게 하노라. 대의군사(大義軍使) 특진(特進) 검교(檢校) 태보(太保) 사지절(使持節) 현토주(玄兎州) 도독(都督) 상주국(上柱國) 고려 국왕(高麗國王)의 처(妻) 하동 유씨는 내조(內助)하는 말이 정당하였으며 방조한 바도 실로 많았다. 국가 대사를 좋은 계책으로 보좌하였으며 부인으로서 총애와 우대를 받아 왔었다. 임금을 보좌하여 충절을 이루었으며 남편을 섬기는데 유순하고 현명하였다. 이에 일반적 관례를 초월하여 특수한 명예를 주노니 더욱 근왕(勤王)의 뜻을 가다듬어 나간다면 이것이 국은에 보답하는 규범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대를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봉하노라.”
이처럼 신혜왕후는 고려의 창업을 보필한 공으로 지아비 태조의 많은 이들로부터 극진한 존경과 아낌을 받았다.
2. 3. 사망과 능
태조와 합장된 현릉에 묻혔으며, 자녀는 없다. 생몰년은 미상이다.3. 가족 관계
아버지 | 삼중대광 류천궁 |
---|---|
어머니 | 미상 |
남편 | 태조 (877 ~ 943) |
자녀 | 없음 |
4. 평가
신혜왕후는 정주의 지방 수령 유천궁의 딸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왕후는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로로 백성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았다.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정주 지역을 지나던 중, 우연히 만난 신혜왕후의 지혜와 미모에 반해 그녀의 아버지 집에 머물렀다. 유천궁은 딸에게 왕건과 동침을 명했고, 얼마 후 왕건은 전장으로 떠나 서로 연락이 끊겼다. 신혜왕후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비구니가 되었으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왕건이 그녀를 찾아와 혼인했다.
태봉 말기, 신숭겸,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궁예의 폭정에 반발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왕건은 주저했다. 이때 신혜왕후는 "의(義)로써 탐학함을 물리치는 것은 예로부터 해온 일"이라며 남편에게 갑옷을 입혀 혁명에 참여하도록 격려했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신혜왕후는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훌륭한 계책으로 국사를 보좌하고, 남편의 중요한 국책 수립을 도왔으며, 정절, 유순함, 지혜를 갖춘 '''하동군부인'''(河東郡夫人)으로 존경받았다. 그러나 이들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5. 등장 작품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박상아가 신혜왕후 역을 맡았다.
5. 1.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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