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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스 조약 (14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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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스 조약 (1482년)은 부르고뉴 공작 마리의 사망 이후 프랑스 왕 루이 11세와 막시밀리안 1세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부르고뉴 공작령과 피카르디를 차지했고, 막시밀리안은 플랑드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얻었다. 또한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테는 프랑스 왕 샤를 8세와 약혼했으나, 이후 샤를 8세가 브르타뉴 공 안과 결혼하면서 이 약혼은 파기되었다. 막시밀리안은 1493년 상리스 조약을 통해 부르고뉴 백작령, 샤롤레, 아르투아를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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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스 조약 (1482년)
조약 정보
조약 이름아라스 조약
조약 종류평화 조약
위치아라스
서명1482년 12월 23일
교전국
교전국 1프랑스 왕국
교전국 2합스부르크 가
서명자
프랑스 대표프랑스
합스부르크 가 대표막시밀리안 1세
비준
프랑스루이 11세
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
결과
결과부르고뉴 공국 영토 분할
프랑스의 이익
조약 내용
주요 내용부르고뉴 공국프랑스 왕국 간의 평화
부르고뉴 공국 영토의 분할
마르그레테 폰 외스터라이히와 샤를 8세의 결혼 약속
아르투아 백국과 프랑슈콩테를 프랑스에 할양
프랑스가 플랑드르 백국, 에노 백국, 브라반트 공국, 룩셈부르크 공국, 홀란트 백국, 젤란트 백국, 에노 백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
배경
배경낭시 전투에서 용담공 샤를의 사망 이후 부르고뉴 공국의 후계 분쟁

2. 배경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 왕국신성 로마 제국 양쪽에 걸쳐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1477년 1월 5일,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사망하자, 부르고뉴 본토, 플랑드르 백국, 아르투아 백국, 피카르디 등 프랑스 내 영토는 프랑스 국왕에게 몰수되었다.[1] 그러나 샤를은 사망 전 프리드리히 3세와 부르고뉴의 마리, 막시밀리안 대공의 결혼을 주선했고, 이 결혼은 1477년 8월 19일에 이루어졌다.

2. 1. 부르고뉴 공국의 상속 분쟁

발루아 가문의 분가인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출신의 공작들은 프랑스 왕국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1477년 1월 5일,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플랑드르, 아르투아, 피카르디 등의 영토는 상속 문제로 인해 프랑스 왕에게 반환되었다.[1] 그러나 샤를은 사망 전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에게 자신의 딸 부귀공 마리와 막시밀리안 1세의 결혼을 약속한 상태였다.

루이 11세는 샤를의 사망 소식을 듣고 군대를 보내 마리를 납치하고 부르고뉴를 차지하려 했다.[2] 마리의 구원 요청을 받은 막시밀리안은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1477년 8월 19일 마리와 결혼했다.[3]

1479년, 마리와 막시밀리안은 네덜란드 의회의 지지를 받아 긴가트 전투에서 루이 11세의 군대를 격파하고 네덜란드와 부르고뉴를 지켰다.[4] 그러나 1482년 3월 27일, 부귀공 마리가 아버지의 유산을 아들 필리프에게 남기고 사망하면서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4][5] 막시밀리안은 필리프의 섭정으로서 네덜란드 의회와 프랑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2. 2. 막시밀리안 1세의 개입

1477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사망하자,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군대를 보내 부르고뉴를 차지하려 했다.[2] 샤를의 상속녀인 부귀공 마리의 구원 요청을 받은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 군을 물리치고 같은 해 8월 19일 마리와 결혼했다.[3]

1479년 긴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 1세는 루이 11세의 군대를 격파하여 네덜란드와 부르고뉴를 지켜냈다.[4] 그러나 1482년 3월 27일 마리가 사망하면서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4][5] 막시밀리안 1세는 아들 필리프의 섭정으로서 네덜란드 의회와 프랑스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2. 3. 마리의 사망과 섭정 문제

1477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이 낭시 전투에서 사망하자, 프랑스 왕 루이 11세는 군대를 보내 상속녀 부귀공 마리를 납치하고 부르고뉴를 차지하려 했다.[2] 마리의 구원 요청을 받은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 군을 물리치고 그해 8월 19일에 마리와 결혼했다.[3]

1479년 기네가트 전투에서 막시밀리안 1세는 루이 11세의 군대를 격파하며 네덜란드와 부르고뉴를 지켜냈다.[4] 그러나 1482년 3월 27일, 마리가 사망하고 그녀의 아들 필리프에게 유산을 남기면서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4][5] 막시밀리안은 필리프의 섭정으로서 네덜란드 의회나 프랑스로부터 인정받아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3. 조약 체결

1482년 12월 23일, 합스부르크 가의 막시밀리안 1세는 프랑스루이 11세아라스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부르고뉴 공작령과 피카르디를 차지했고,[4] 막시밀리안은 플랑드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차지했다. 또한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테루이 11세의 외아들 샤를 8세의 혼인이 합의되었는데, 프랑스는 지참금으로 아르투아, 샤롤레, 프랑슈콩테를 받기로 했다.[4]

막시밀리안은 아내 마리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1479년 기네가트 전투에서 루이 11세의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1482년 3월 27일 마리가 사망하고 아들 필립에게 상속이 이루어지자, 막시밀리안은 아들의 섭정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프랑스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막시밀리안은 아라스 조약을 통해 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대공녀를 샤를 8세와 결혼시키고, 지참금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고뉴 백국을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프랑스는 부르고뉴의 대부분 영토를 유지했지만, 플랑드르 백국은 막시밀리안에게 넘어갔고, 곧 반란을 일으켰다.

비록 약혼은 이후 파기되었고 샤를 8세는 브르타뉴의 안과 결혼했지만, 부르고뉴 상속은 사실상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부르고뉴 왕국이나 독립적인 부르고뉴 공국의 꿈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이 조약에 불만을 품었고, 1493년 샤를 8세에게 생리 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부르고뉴 백국, 샤롤레와 아르투아 백국을 되찾았다.

4. 조약의 영향 및 이후 전개

막시밀리안은 아내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1479년 기네가트 전투에서 루이 11세의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가 사망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아라스 조약으로 부르고뉴 상속 문제는 프랑스에 유리하게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막시밀리안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비록 프랑스와의 약혼은 파기되었지만, 이 조약은 부르고뉴 왕국이나 독립적인 부르고뉴 공국의 꿈을 완전히 종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6]

4. 1. 네덜란드 반란과 내전

막시밀리안은 1485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네덜란드에 대한 아들의 섭정권을 얻어냈지만, 결과적으로 네덜란드가 반란을 일으켜 내전을 치러야 했다. 1490년, 막시밀리안은 브르타뉴 여공인 안과 결혼하려 했으나 프랑스의 샤를 8세브르타뉴를 침공하여 무산되었다.[6] 샤를 8세가 브르타뉴 여공 안과 결혼함에 따라 아라스 조약(1482년)에서 합의된 약혼은 깨어졌고,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테가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6]

1482년 3월 27일 부르고뉴의 마리가 사망하며 아들 필립에게 유산을 남기자, 막시밀리안은 아들의 섭정으로 인정받기 위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프랑스와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아라스 조약을 통해 딸 마르가레테를 샤를 8세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하고, 지참금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부르고뉴 백국을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프랑스는 부르고뉴 대부분의 영지를 유지했지만, 막시밀리안에게 넘어간 플랑드르 백국은 예외였고, 곧 반란을 일으켰다. 막시밀리안은 1493년에 샤를 8세상리스 조약을 맺어 부르고뉴 백작령과 더불어 샤롤레아르투아 등을 되찾았다.[6]

4. 2. 브르타뉴 문제와 정략결혼 파기

1490년, 막시밀리안은 브르타뉴 여공 안과 결혼하려 했으나, 프랑스샤를 8세브르타뉴를 침공하여 무산되었다. 샤를 8세가 브르타뉴 여공 안과 결혼하면서 아라스 조약(1482년)에서 합의된 약혼은 파기되었고,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테는 네덜란드로 귀국하였다.[6] 1498년에 샤를 8세가 사망하자 과부가 된 브르타뉴 공 안은 루이 12세와 재혼하였다.[6]

4. 3. 상리스 조약 (1493년)

막시밀리안은 1493년에 샤를 8세상리스 조약을 맺어 부르고뉴 백작령, 샤롤레, 아르투아 등을 되찾았다.[6] 1498년에 샤를 8세가 사망하자 과부가 된 안은 루이 12세와 재혼하였다.[6]

4. 4. 루이 12세의 재혼

1498년에 샤를 8세가 사망하자 그의 왕비였던 브르타뉴의 안은 루이 12세와 재혼하였다.[6]

참조

[1] 논문 Burgundy and the Inalienability of Appanages in the Reign of Louis XI https://doi.org/10.2[...] JSTOR 2023-02-03
[2]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3] 서적 이야기 독일사 청아출판사
[4]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5] 서적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4-10-15
[6] 서적 프랑스의 역사 까치글방 2013-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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