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파 사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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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베파 사천왕은 아베 신타로 사망 이후 아베파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권력 투쟁에서 주요 역할을 한 모리 요시로, 시오카와 마사주로, 가토 무쓰키, 미쓰즈카 히로시를 지칭한다. 이들은 파벌 내 갈등과 권력 다툼을 겪었으며, 주요 요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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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신타로 - 아베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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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파 사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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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별칭 | 아베파 사천왕 아베 4인방 |
로마자 표기 | Abe-ha Shitennō |
구성원 | 하기우다 고이치 세코 히로시게 니시무라 야스토시 다카기 쓰요시 |
주요 활동 | 아베 신조 전 총리 지지 및 파벌 활동 |
해체 시점 | 2024년 1월 (정치자금 스캔들 이후) |
상세 정보 | |
결성 배경 | 아베 신조의 정치적 영향력 강화 및 파벌 내 결속 도모 |
주요 역할 | 아베 신조 정권의 정책 추진 지원 파벌 내 주요 의사 결정 참여 차기 총리 후보군으로 거론 |
논란 및 비판 | 지나친 파벌 정치 조장 정치 자금 스캔들 연루 의혹 정책 결정 과정의 투명성 부족 |
해체 사유 | 정치 자금 스캔들 확산에 따른 여론 악화 파벌 존속의 명분 상실 기시다 후미오 정권의 파벌 해소 방침 |
정치적 영향 | |
아베 신조 사후 | 파벌 내 주도권 경쟁 심화 및 정치적 영향력 감소 |
향후 전망 | 각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정치 활동 지속 예상 |
2. 역사
세이와 정책연구회(이하 세이와카이)는 자유민주당 내 유력 파벌로 자리 잡았다. 아베 신타로가 파벌을 이끌던 시기, 미쓰즈카 히로시, 가토 무쓰키, 시오카와 마사주로, 모리 요시로는 '아베파 사천왕'으로 불리며 파벌 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91년 아베 신타로의 사망은 파벌 내 권력 구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사천왕 간의 경쟁과 갈등이 심화되었는데, 특히 국철 분할 민영화 등 주요 정책 현안을 놓고 이미 의견 대립을 보이던 미쓰즈카 히로시와 가토 무쓰키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어 '삼육 전쟁'이라 불리는 치열한 권력 투쟁으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파벌 내 분열이 발생했으며, 결과적으로 미쓰즈카가 모리 요시로 등과 연대하여 파벌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반면, 경쟁에서 밀려난 가토 측은 파벌을 이탈하여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미쓰즈카의 뒤를 이어 파벌 회장이 된 모리 요시로는 2000년에 총리에 취임하며 세이와카이의 위상을 높였다. 이는 후쿠다 다케오 이후 세이와카이 출신으로는 두 번째 총리 배출이었다. 비록 모리 내각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시기를 거치며 세이와카이는 당내 최대 파벌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와 같은 후임 총리들을 배출하는 기반을 다졌다. 아베파 사천왕은 각자의 정치적 부침을 겪으며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대 초반에 걸쳐 순차적으로 정계를 떠났다.
2. 1. 파벌 간 갈등과 권력 투쟁
국철 분할 민영화 정책을 둘러싸고 아베파 내에서 반대파인 가토 무쓰키와 추진파인 미쓰즈카 히로시 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었다.1991년, 파벌 영수였던 아베 신타로가 사망하자 후계자 자리를 놓고 파벌 내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가토와 미쓰즈카는 파벌 영수 자리를 두고 경쟁했는데, 이를 삼육 전쟁이라 부른다. 이 경쟁에서 수적으로 우세했던 미쓰즈카는 모리와 손을 잡고 가토를 누르고 아베파를 계승했다. 이 과정에서 가토 측은 자신의 제1 비서 자택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파벌 내 심각한 균열이 발생했다.
결국 가토 그룹은 1991년 가을 총재 선거에 출마한 미쓰즈카를 지지하지 않고 파벌을 이탈해 정진회를 결성했다. 이후 이들은 집단으로 탈당하여 신생당에 합류했고, 나아가 신진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한편, 미쓰즈카는 총재 후보로 거론되며 요직을 거쳤으나, 대장대신 시절 부처 내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정치적으로 실속했다.
미쓰즈카의 뒤를 이어 모리 요시로가 파벌 회장이 되었고, 2000년에는 총리 자리에 올랐다. 이는 세이와카이(아베파의 전신) 소속으로는 후쿠다 다케오 이후 처음이었다. 모리 정권은 단명했지만, 후임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하에서 모리와 시오카와 마사주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베파 사천왕의 이후 행보는 다음과 같다.
인물 | 주요 행보 | 은퇴 시기 |
---|---|---|
미쓰즈카 히로시 | 대장대신 역임 후 불상사로 사임, 파벌 내 영향력 유지 | 2003년 중의원 선거 불출마 |
시오카와 마사주로 | 고이즈미 정권 하에서 영향력 행사 | 2003년 중의원 선거 불출마 |
가토 무쓰키 | 파벌 이탈 후 정진회 결성, 신생당, 신진당, 자유당, 보수당 참여 | 2000년 총선거 낙선 |
모리 요시로 | 파벌 회장 계승 후 총리 취임, 이후 정권에서 막후 영향력 유지 | 2012년 중의원 선거 불출마 |
2. 2. 삼육 전쟁
국철 분할 민영화 문제를 둘러싸고 반대 입장이었던 가토 무쓰키와 이를 추진하려던 미쓰즈카 히로시 사이의 갈등이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1991년, 아베 신타로가 사망하자 아베파의 후계 자리를 놓고 가토와 미쓰즈카의 대립, 이른바 '''삼육 전쟁'''이 본격화되었다. 이 경쟁에서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앞선 미쓰즈카는 모리와 손을 잡고 가토에게 승리하여 아베파를 계승했다. 이 과정에서 가토 측은 자신의 제1 공설비서 자택에 도청 장치가 설치되었다고 주장하는 등 파벌 내 갈등의 골이 매우 깊어졌다.
결국 가토와 그를 따르는 세력은 1991년 가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한 미쓰즈카를 지지하지 않고 파벌을 이탈해 정진회를 결성했다. 이후 이들은 집단으로 탈당하여 신생당에 합류했고, 나아가 신진당 창당에도 참여했다.
2. 3. 모리 요시로 총리 시대와 그 이후
아베 신타로 사후 아베파(현 세이와카이)의 후계 자리를 놓고 미쓰즈카 히로시와 가토 무쓰키 사이에 격렬한 다툼(삼육 전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모리는 미쓰즈카와 손을 잡고 가토에게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미쓰즈카가 대장대신 시절 불상사 책임으로 실각하자, 모리가 파벌 회장 자리를 이어받았다.2000년, 모리는 세이와카이 출신으로는 후쿠다 다케오 이후 처음으로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모리 내각은 지지율 부진 등으로 단명에 그쳤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모리의 영향력은 계속되었다. 후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에서는 시오카와 마사주로와 함께 막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후 아베 신조, 후쿠다 야스오 정권 시기에도 배후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모리는 2012년 중의원 선거를 끝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한편, 삼육 전쟁에서 패배한 가토 무쓰키는 파벌을 이탈하여 신진당, 자유당, 보수당 등을 거쳤으나, 2000년 총선거에서 낙선하며 정계를 떠났다. 미쓰즈카 히로시와 시오카와 마사주로는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 은퇴했다.
3. 주요 인물
세이와 정책연구회는 아베 신타로 사후, 파벌을 이끌 리더 그룹이 필요했다. 이때 파벌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아베파 사천왕'으로 불린 네 명의 주요 정치인이 부상했다. 이들은 파벌의 운영과 일본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베파 사천왕은 다음과 같다.
이들 각자의 상세한 정치 경력과 주요 직책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4천왕
제62대 건설대신제54대 통상산업대신
제105대 문부대신
내각관방 부장관(정무 담당)
제34·37대 자유민주당 간사장
제38대 자유민주당 총무회장
제37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제43대 자치대신
제54대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제50대 내각관방장관
제109대 문부대신
제51대 운수대신
제11대 국토청 장관
제45대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제111대 외무대신
제48대 통상산업대신
제56대 운수대신
제35·38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