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도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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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베 도모지는 일본의 소설가, 평론가, 번역가로, 1903년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나 1973년 사망했다.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소설 '겨울의 숙소', '하얀 탑' 등을 발표하며 모더니즘 문학을 선도했다. 셜록 홈즈 시리즈 번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메이지 대학 교수로 영문학을 강의했으며, 영화 '여인의 정원' 등 여러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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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도모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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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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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베 도모지 |
출생 | 1903년 6월 26일 |
출생지 | 오카야마현 가쓰타군 유노고촌 |
사망 | 1973년 4월 23일 |
사망지 | 도쿄도 주오구 쓰키지 |
묘지 | 가와사키시의 슌주엔 |
직업 | 소설가, 평론가 |
모교 |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 졸업 |
데뷔 작품 | 화생 (化生) |
주요 작품 | 주지적 문학론 (主知的文学論) (1930년) 겨울의 숙소 (冬の宿) (1936년) 풍설 (風雪) (1939년) |
배우자 | 오하마 스미코 |
자녀 | 아베 요시오 (阿部良雄, 장남), 아베 노부오 (阿部信雄, 차남) |
친척 | 기무라 이사오 (木村毅, 종형) |
영향 | |
관련 링크 | |
위키프로젝트 | 문학 |
2. 생애
아베 도모지는 1903년 오카야마현 미마사카시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한 일본의 소설가이자 번역가, 평론가이다. 중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과 형의 지도로 어린 시절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대학 시절 영국 시인 에드먼드 블런던의 영향을 받아 영국 모더니즘과 지성주의 문학을 접하게 되었다.[2]
1930년 단편소설 「日独対抗競技|니치-도쿠 타이코 쿄기일본어」(일독 대항 경기)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고, 같은 해 『主知的文学論|슈치테키 분가쿠론일본어』(지성주의 문학론)을 출간하며 초기 모더니즘 작가로서 주목받았다.[2] 그의 대표작으로는 일본 가족의 복잡한 내면과 당시 사회상을 반영한 『冬の宿|후유노 야도일본어』(겨울의 숙소, 1936)가 꼽힌다.[1][3] 이 작품은 그의 전후 작품 세계의 기반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베의 작품 경향은 인본주의와 사회 비판으로 선회했다. 그는 군국주의와 인간 착취에 반대하며 인간 존엄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에세이 《인간 멸시에 저항하며》, 1955), 소설 『白い塔|시로이 토일본어』(하얀 탑, 1963) 등을 통해 반전 메시지와 사회 비판 의식을 드러냈다.[1] 또한 허먼 멜빌의 『백경』(1941년 초역)을 비롯해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아서 코난 도일 등 영미 문학 작품을 다수 번역하여 일본에 소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사회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 일본 펜 클럽 대표로 활동하고[7], 메이데이 사건 관련 특별 변호인으로 참여했으며, 미국-일본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 반대 운동과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4][3] 메이지 대학에서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1971년 식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 1973년 4월 23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 미완성 유작 『捕囚|호슈일본어』(포로)는 사후 출판되었다. 아베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으며, 장남 아베 요시오는 프랑스 문학자, 차남 아베 노부오는 미술 평론가로 활동했다.
2. 1. 초기 생애 (1903-1927)
1903년 6월 26일, 오카야마현 가쓰타군 유고촌 오아자 나카야마(현 미마사카시 나카야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학교 자연사 교사인 아베 료헤이, 어머니는 모리 하요였으며, 아베 도모지는 차남이었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생후 2개월 만에 시마네현 다이샤정으로, 9세 때는 효고현 히메지시 보즈마치로 이사하며 유년기를 보냈다.학창 시절에는 요란 초등학교, 구제 히메지 중학교(5년 과정을 4년 만에 수료)를 거쳐 나고야의 구제 제8고등학교 문과 갑류(영문학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21년, 폐 질환(심각한 질환은 아니었음) 회복을 위해 1년간 휴학했는데, 이때 형 고헤이의 영향으로 단카를 쓰기 시작하며 문학에 입문했다. 당시 단카 시인 시마기 아카히코를 존경했으며, 레프 톨스토이와 안톤 체호프의 소설을 즐겨 읽었다. 1923년에는 자신의 시를 잡지 《고유카이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192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대학(당시 도쿄제국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특히 관심을 가졌다. 당시 영문학을 가르치던 영국 시인 에드먼드 블런던을 만나 외국 사상과 태도를 접하는 중요한 계기를 맞았다. 아베는 블런던의 격식 없고 친근한 태도와 그의 평화주의 사상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를 존경했으며, 훗날 블런던을 "일본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그들의 최고의 모습을 이끌어냈다"고 평가했다. 이 시기 아베는 영국 모더니즘, 특히 T.E. 흄, 허버트 리드, T. S. 엘리엇 등과 관련된 지성주의 개념에 익숙해졌다. 또한 도쿄제국대학 문예부 잡지 『주문』(朱門)에 첫 소설 「화생」(化生)을 발표하기도 했다.[2]
1927년, 시인으로서의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논문으로 도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2. 2. 초기 작품 활동 (1925-1936)
아베 도모지는 모더니스트로서 작가 경력을 시작했다.[3] 1925년 11월, 대학 재학 중 그는 첫 작품인 火勢|가세이일본어와 에세이 共鳴器の魂|교세이샤노 타마시일본어를 문학부 잡지 朱門|슈몬일본어에 기고했다. 이 시기 그는 1967년 好きな女の胸飾り|스키나 온나노 무나카자리일본어로 노마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작가 후나바시 세이이치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아베와 후나바시 등은 당시 문단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반대하며 모더니즘 문학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2]1926년 아베는 젊은 작가 카지이 모토지로와 나카타니 타카오, 그리고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인 미요시 타츠지가 참여한 동인 잡지 青空|아오조라일본어와 관계를 맺었다. 1927년 青空|아오조라일본어가 폐간된 후, 1928년에는 후나바시 세이이치, 이부세 마스지, 콘 히데미 등과 함께 또 다른 동인 문학 잡지 文芸都市|분게이 도시일본어에 작품을 기고했다. 1929년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자살 사건에 영향을 받아 主知的文学論|슈치테키 분가쿠론일본어(지성주의 문학론)을 집필했으며, 이 글은 미요시 타츠지와 하기와라 사쿠타로가 전년도에 창간한 잡지 詩と詩論|시토 시론일본어에 게재되었다.
아베의 공식적인 문단 데뷔작은 1930년 1월, 전위 문학 잡지 신초에 발표한 日独対抗競技|니치-도쿠 타이코 쿄기일본어(일독 육상 경기)이다. 이 작품으로 그는 신코 게이주츠(신흥 예술) 운동에서 유망한 젊은 작가로 즉시 주목받았다.[2] 소설의 내용은 노교수의 젊은 아내가 독일 육상 선수, 특히 그중 한 명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내면적으로 유혹에 굴복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젊은 여성이 노인과 맺는 정략결혼의 불행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같은 해 아베는 여러 모더니즘 스타일의 단편 소설을 발표했으며, 主知的文学論|슈치테키 분가쿠론일본어은 다른 에세이들과 함께 묶여 코세이카쿠 출판사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1936년에 발표된 冬の宿|후유노 야도일본어(겨울의 숙소)는 아베의 마지막 모더니즘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작품 세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소설은 타락하고 방탕하며 잔인한 남편 키리시마 카몬과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으면서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 마츠코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일본 가족의 모습을 그린다. 마츠코의 인내심은 끝이 없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화자는 이들의 삶을 차분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찰하며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러한 냉정한 형식적 객관성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본능과 지성이라는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요소 간의 대립, 그리고 적대적인 힘과 억압된 욕망이 뒤섞인 인간 정신의 비합리적인 복잡성을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1] 다른 한편으로, 冬の宿|후유노 야도일본어는 마사코가 주변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시도와 그 과정에서의 조작, 노력의 부정적인 결과, 건강 악화, 그리고 결국 가족의 붕괴와 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당시 일본 사회에 만연해가던 민족주의적 파시즘에 대한 아베의 비판을 담고 있으며, 나아가 국가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는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
2. 3. 전후 활동 (1945-1973)
아베 도모지의 전후 저작 활동은 인본주의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는 군국주의와 인간 착취에 반대하며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는데, 이는 에세이 《인간 멸시에 저항하며》(人間蔑視に抗して, 1955)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소설 《하얀 기둥》(白い塔)은 반군국주의적 시각을 명확히 하고 금융 및 사업 독점의 폐해를 비판했다.[1] 아베는 지적으로 독립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자세를 견지하며 문학의 부활을 주장한 작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문학과 작가가 사회에 기여하고 사회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신념은 소설뿐만 아니라 다수의 에세이와 이론서에서도 나타난다.1944년 5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예상되는 폭격을 피해 가족들을 효고현 히메지로 피난시키고 자신은 도쿄에 남았다. 같은 달 부친상을 당했다. 1945년 7월에는 자신도 도쿄의 집중 폭격을 피해 오카야마현 미마사카로 이주했으며, 일본의 항복 3개월 후인 11월에 히메지에서 가족과 다시 만났다. 아베는 1930년 오하마 스미코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요시오(1932년생, 학자/프랑스 문학 교수), 노부오(1948년생, 평론가/브리지스톤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와 딸 히로코(1937년생), 미치코(1941년생), 노리코(1944년생)를 두었다.
전후 아베는 활발한 사회 활동을 펼쳤다. 1950년 4월,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다른 작가들과 함께 히로시마에서 열린 일본 펜 클럽 회의에 참석하여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을 이어갔으나, 냉전 시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4] 1950년 여름 유럽을 여행하고 연말에 도쿄로 돌아왔는데, 당시 유럽에서는 한국 전쟁이 일본까지 확전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기에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일본의 상황에 놀라기도 했다.[5] 1953년에는 1952년 5월 1일 메이데이 시위 당시 공산주의 지도부가 황궁 진입을 시도했던 '메이데이 사건'과 관련하여 특별 변호인으로 법정에 섰다. 이 사건은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로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1959년 3월에는 아오노 키요시와 함께 미국-일본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서면 항의를 발표하며 평화 운동에 목소리를 냈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는 열정적이고 거침없는 비판가였다. 1965년 5월, 학자 히다카 로쿠로, 잡지 《헤이와》(平和, "평화") 편집자 나카노 요시오와 함께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고 통일된 반전 운동을 촉구했다. 1966년 10월에는 나카노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대 파업을 촉구했으며, 1968년 3월에는 메이지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과학자 오다 미노루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대 전국 운동을 호소했다.[3] 1969년에는 아내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과거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블런든을 방문하기도 했다.
1971년 11월, 아베는 식도암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투병 중에도 집필 활동을 이어가 생애 마지막 해에는 소설 《호슈》(捕囚)를 구술했으나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1973년 4월 23일 사망했으며, 미완성 유작 《호슈》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2. 4. 개인사
1903년 6월 26일, 오카야마현 가쓰타군 유고촌 오아자 나카야마(현 미마사카시 나카야마)의 유노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학교 자연사 교사 아베 료헤이였고, 어머니는 모리 하요였다. 그는 차남이었다. 아버지의 직장 발령으로 가족은 생후 2개월 만에 시마네현 다이샤정으로 이사했고, 이후 돗토리현 요나고시와 시마네현 기즈치를 거쳐 9세 때 효고현 히메지시로 이사했다.그는 요란 초등학교, 히메지 중학교(현 효고현립 히메지니시 고등학교)를 5년제 과정에서 4년 만에 수료하고, 나고야의 제8고등학교(현 나고야 대학) 문과 갑류(영문학과)를 거쳐 1924년 도쿄 제국대학(현 도쿄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형인 고헤이의 영향으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어 단카를 배웠고, 시마키 아카히코를 존경했으며 레프 톨스토이와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애독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21년에는 폐 질환 회복을 위해 1년간 휴학했으나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으며, 이 시기 형의 지도로 단카를 쓰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자신의 시를 잡지 《고유카이 잡지》에 게재했다.
도쿄 제국대학 시절에는 19세기 영국 낭만파 시인들에게 특히 관심을 가졌으며, 당시 영문학을 가르치던 영국 시인 에드먼드 블런던을 통해 서구 사상과 문화를 접했다. 아베는 블런던의 격식 없고 친근한 태도와 그의 평화주의에 감명받아 그를 존경하게 되었으며, 훗날 블런던을 "일본의 가장 좋은 친구이자 일본인의 최고의 모습을 이끌어낸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이 시기에 영국 모더니즘, 특히 T.E. 흄, 허버트 리드, T.S. 엘리엇과 관련된 지성주의 개념을 접했다.[2] 1927년, 시인으로서의 에드거 앨런 포에 대한 논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 중 첫 소설 「화생」을 대학 문예부 잡지 『주문』에 발표하며 소설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 27세의 나이로 잡지 『신초』에 「일독 대항 경기」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같은 해 "주지적 문학론"을 발표하고 오하마 스미코와 결혼했다. 슬하에 장남 아베 요시오(1932년생, 프랑스 문학자, 도쿄 대학 명예 교수), 차남 아베 노부오(1948년생, 미술 평론가, 전 브리지스톤 미술관 학예 부장) 등 2남 3녀(히로코(1937년생), 미치코(1941년생), 노리코(1944년생))를 두었다. 그의 종형은 작가 기무라 다케시이다.
1936년 『문학계』에 연재하고 같은 해 간행된 『겨울의 숙소』(冬の宿일본어)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일본 평론』에 『풍설』(風雪일본어)을 연재하고 간행했다. 이후 소설 창작과 번역 활동을 병행하며 메이지 대학 교수로 영문학을 강의했다. 1941년에는 허먼 멜빌의 『백경』을 일본어로 처음 번역했으며, 이는 그의 대표적인 번역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4년 5월, 예상되는 폭격을 피해 가족들은 히메지로 피난했으나 아베는 도쿄에 남았다. 같은 달 부친이 사망했다. 1945년 7월, 아베는 도쿄의 집중 폭격을 피해 오카야마현 미마사카로 이주했으며, 일본의 항복 3개월 후인 11월에 히메지에서 가족과 재회했다.
전후 아베의 저작은 인본주의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는 군국주의와 인간 착취에 반대하며 인간 존엄에 대한 존중을 촉구했으며(에세이 《인간 멸시에 저항하며》(人間蔑視に抗して일본어), 1955), 소설 《하얀 기둥》(白い塔일본어)을 통해 반군국주의적 시각과 금융/사업 독점의 폐해를 비판했다.[1] 그는 문학이 사회에 기여하고 발전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견해를 소설 외 다수의 에세이와 이론서를 통해 피력했다.
1950년 4월, 아베는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다른 작가들과 함께 일본 펜 클럽 회의 참석차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전쟁과 평화"를 주제로 강연했다. 같은 해 8월 18일에는 기타무라 기하치와 함께 제22회 국제 펜 클럽 대회에 전후 일본 대표로 처음 참석했다.[7]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으나, 냉전 시기에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는 데 신중했다.[4] 1950년 여름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온 그는, 유럽에서 한국 전쟁이 일본까지 확전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터라 일본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상태인 것에 놀랐다고 술회했다.[5]
1953년에는 여자 기숙사를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 『인공 정원』(人工庭園일본어)을 발표했고, 이듬해 동명의 작품집을 간행했다. 『인공 정원』은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에 의해 『여인의 정원』(女の園일본어)이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1954년 3월 개봉했고, 그해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2위에 올랐다. 같은 해, 메이데이 사건과 관련하여 특별 변호인으로 법정에 섰다. 번역 활동도 활발히 하여 "세계 문학 전집"(가와데 쇼보 신샤)의 편자로 참여했으며, 도쿄 소겐샤의 소겐 추리 문고판 셜록 홈즈 시리즈 초기 번역자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9년 3월에는 아오노 스에요시와 함께 미국-일본 상호 협력 및 안전 보장 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서면 항의를 발표했다. 아베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열정적이고 솔직한 비판가였다. 1965년 5월, 학자 히다카 로쿠로, 잡지 『헤이와』(平和|헤이와일본어, "평화") 편집장 나카노 요시오와 함께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고 통일된 반전 운동을 촉구했다. 1966년 10월에는 나카노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대 파업을 촉구했으며, 1968년 3월에는 메이지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과학자 오다 미노루와 함께 베트남 전쟁 반대 전국 운동을 호소했다.[3] 1969년에는 아내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며 대학 시절 스승이었던 에드먼드 블런던을 다시 만났다.
1971년 11월, 식도암 진단을 받고 입원했다. 1973년 4월 23일, 도쿄도 주오구 쓰키지의 국립 암 센터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8] 생의 마지막 해에 구술했던 미완성 소설 『호슈』(捕囚|호슈일본어)는 사후에 출판되었다. 사후 가와데 쇼보 신샤에서 『아베 도모지 전집』 전 13권이 출간되었다.
3. 번역 활동
「워터 베비」는 나중에 『물의 아이』(이와나미 소년 문고)로 출간
후에 신초 문고로 출간
후에 이와나미 문고로 출간
후에 이와나미 문고로 출간
후에 창원 추리 문고로 출간
후에 이와나미 문고로 출간
후에 카도카와 문고, 창원 추리 문고로 출간
후에 이와나미 문고로 출간
후에 이와나미 문고로 출간
후에 가와이데 문고로 출간
후에 중공 문고로 출간
후에 이와나미 소년 문고로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