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대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일본의 수도 도쿄를 대상으로 감행한 일련의 전략 폭격 작전이다. 1942년 4월의 첫 공습 이후, 미군은 1944년부터 B-29 폭격기를 활용하여 공습의 강도를 높였다. 특히 1945년 3월 10일의 미팅하우스 작전은 저고도 야간 소이탄 공격으로,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도시의 4분의 1이 파괴되는 등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야기했다. 이 외에도 여러 차례의 공습이 이어졌으며, 1945년 5월에는 황궁, 도쿄역 등 주요 건축물들이 파괴되었다. 도쿄 대공습은 전쟁 범죄 논란과 함께, 일본의 항복을 앞당기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전후 도쿄의 재건에도 큰 어려움을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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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전역상자 -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는 1942년 이집트 엘 알라메인에서 연합군이 추축군을 격파하고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세를 역전시킨 결정적인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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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일본 본토 공습을 계획하며 면밀한 지세 조사와 역사적 사례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에도 시대의 잦은 에도 대화재와 1923년 관동 대지진을 분석하여 일본 도시, 특히 목조 주택 밀집 지역이 화재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파악했다.[129] 이 과정은 1943년 2월 15일 자 미국 경제전쟁국의 '일본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의 경제적 의의'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미군은 소이탄을 사용한 공습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인구 밀도, 화재 위험도, 수송 기관 및 공장 배치 등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공습 대상 지역을 선정했다.[129] 당시 도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아사쿠사구(13만 5천 명)였고, 혼조구, 칸다구, 시타야구, 아라카와구, 니혼바시구, 에하라구(8만 명대)가 그 뒤를 이었다. 교외에 위치한 에하라구를 제외하고, 후카가와구 북쪽 절반을 더한 도심 일대가 소이탄 공격 지역 1호로 선정되었다.[129]
2. 1. 소이탄 폭격 활성화 도별 지역
1942년에는 네이팜을 사용한 M69 소이탄이 개발되었고, 1943년 국가방위조사위원회(NDRC) 소이탄 연구 개발부 보고서에서는 주택 밀집 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여 화재를 일으키고, 주택과 공장도 함께 태워버리는 것이 최적의 폭격 방법이라 하였다. 도쿄, 가와사키, 요코하마 등 10개 도시를 소이탄 폭격 유효 지역으로 선정하고, 인구 밀도에 따라 세분화했다.[129][130]
구분
내용
비고
최유효 지역 1
도시 중심부 상점가, 밀집 지역, 주택·공장 혼재 지역으로 1제곱마일 당 인구 밀도 9만 1천 명, 도시 인구의 25% 차지
1제곱마일 당 6톤의 소이탄으로 소각 가능
유효 지역 2
항만 시설, 창고, 화차 조차장 등이 있는 주택 지역, 주택·공장 혼재 지역, 공장 지역으로 1제곱마일 당 인구 밀도 5만 4천 명, 도시 인구의 46% 이상 차지
1제곱마일 당 10톤의 소이탄으로 소각 가능
비유효 지역
최유효 지역 1, 유효 지역 2 이외의 교외 주택 지역이나 방화 설비가 갖춰진 사무실 포함 공장 지대
2. 2. 대규모 공격 보고서
미군은 에도 시대에 빈번했던 에도 대화재나 1923년 관동 대지진을 분석하여 일본의 대도시, 특히 목조 주택이 밀집한 지역이 화재에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파악했다.[129] 이를 바탕으로 인구 밀도, 화재 위험도, 수송 기관 및 공장 배치 등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공습 대상 지역을 선정하고 폭탄 투하 효과를 계산했다.[129]
특히 인구 밀도가 중요하게 고려되었는데, 당시 도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곳은 아사쿠사구로 13만 5천 명이었다. 혼조구, 칸다구, 시타야구, 아라카와구, 니혼바시구, 에하라구가 8만 명대로 그 뒤를 이었다. 이 중 교외에 위치한 에하라구를 제외하고, 후카가와구 북쪽 절반을 더한 도심 일대가 소이탄 공격 지역 1호로 선정되었다.[129]
1943년 국방연구위원회(NDRC)는 소이탄 연구 개발 보고서에서 주택 밀집 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여 주택과 공장을 함께 불태우는 것이 최적의 폭격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전국 20개 도시를 공습 목표로 선정하고, 도쿄, 가와사키, 요코하마 등 10개 도시는 소이탄 폭격 유효도에 따라 지역을 구분했다.[44][45]
구분
설명
소이탄 필요량
최유효 지역 1
도시 중심부 상점가, 밀집 지역, 주택·공장 혼재 지역
1평방마일당 6톤
유효 지역 2
항만 시설, 창고, 화차 조차장 등이 있는 주택 지역, 주택·공장 혼재 지역, 공장 지역
1평방마일당 10톤
비유효 지역
교외 주택 지역, 방화 설비가 갖춰진 오피스가 포함된 공장 지대
-
2. 2. 1. 사용된 폭탄
미국 육군 항공대의 전통적인 교리는 군사 목표에 대한 정밀 폭격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항공기 투하용 소이탄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미군은 헨리 아놀드 장군이 직접 영국으로 건너가 영국군의 소이탄과 런던 대공습에서 회수한 독일군의 불발탄(900g 마그네슘탄)을 받아 소이탄 개발을 시작했다.[129][130]
1942년에는 네이팜을 사용한 M69 소이탄이 개발되었고, 1943년 국방연구위원회(NDRC)는 소이탄 연구 개발 보고서에서 주택 밀집 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여 주택과 공장을 함께 불태우는 것이 최적의 폭격 방법이라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전국 20개 도시를 공습 목표로 선정하고, 도쿄, 가와사키, 요코하마 등 10개 도시는 소이탄 폭격 유효도에 따라 지역을 구분했다.[44][45]
구분
설명
소이탄 필요량
최유효 지역 1
도시 중심부 상점가, 밀집 지역, 주택·공장 혼재 지역
1평방마일당 6톤
유효 지역 2
항만 시설, 창고, 화차 조차장 등이 있는 주택 지역, 주택·공장 혼재 지역, 공장 지역
1평방마일당 10톤
비유효 지역
교외 주택 지역, 방화 설비가 갖춰진 오피스가 포함된 공장 지대
-
일본에 투하된 주요 소이탄은 다음과 같다.
M69 소이탄 (니가타현립역사박물관 소장)
소이탄 종류
설명
M47 소이탄(AN-M47A2)
100파운드(45kg) 네이팜탄(겔화 휘발유)으로, 미군 최초의 소이탄이다. 철제 탄통 안에 젤리 형태의 기름 약 18kg을 넣고 탄두에 화약을 장전했다. 지붕을 뚫고 들어가 폭발하여 네이팜제를 원뿔 모양으로 퍼뜨렸다.[131]
M50 소이탄(AN-M50A2)
4파운드(1.8kg) 마그네슘 소이탄으로, 영국군의 M2 소이탄을 미국 육군이 제식화한 것이다. 알루미늄 분말과 산화 철을 육각형 모양의 금속 용기에 채웠다. 지름 5cm, 길이 35cm, 무게 2kg의 소형 소이탄으로, 34발을 묶어 일정 고도에서 흩뿌렸다. 원래 독일의 콘크리트 건물을 파괴할 목적이었으나, 목조 가옥에 더 효과적이었다.[46]
M69 소이탄(AN-M69)
6.2파운드(2.7kg) 네이팜탄. 1942년에 개발된 M56 후미 점화식 폭탄의 개량형이다. 지름 8cm, 길이 50cm로, M50 소이탄처럼 육각형 금속 용기에 젤리 형태의 네이팜제와 마그네슘을 채웠다. 보통 38발을 묶어 E46-500파운드 집속탄으로 투하했다. 다른 소이탄과 달리 수평 안정판 없이 1.2m의 면 리본(스트리머)으로 낙하 속도를 조절했다. 일본 가옥 기와 지붕을 관통하기 위해 스트리머로 감속하여 M50 소이탄의 1/4 속도로 억제했다. 스트리머가 타면서 낙하하는 모습이 "불의 비"처럼 보였다고 한다. 지붕을 뚫은 후 도화선이 작동해 5초 안에 TNT 화약이 폭발하고, 마그네슘 입자가 네이팜제를 점화시켜 30m를 날아가 반경 27m의 불의 고리를 만들었다.[46] 젤리 형태의 네이팜제 때문에 "goop bomb"(끈적끈적 폭탄)이라고 불렸다.
미군은 M69 소이탄 개발 시 1943년 3월 더그웨이 시험장(유타주)에서 실전과 유사한 실험을 했다. 일본식 가옥이 늘어선 시가지를 만들고 소이탄 연소 실험을 하는 대규모 실험이었다. 일계 미국인이 많은 하와이에서 자재를 가져오고 일본에 18년 거주한 건축가가 설계했으며, 이 가옥들은 일본 마을이라 불렸다. M69 소이탄의 네이팜제에 불탄 일본식 가옥은 일본 소방대를 재현한 장비로도 쉽게 끌 수 없어 일본에 최적의 소이탄으로 인정받았다.
2. 3. 독가스 살포 계획안
연합국은 도쿄에 효과적으로 독가스를 살포하기 위한 상세한 연구를 진행했으며, 살포 시기와 기상 조건은 물론 살포할 가스의 검토를 실시하여 겨자 가스와 포스겐 등이 후보로 거론되었다.[48]미국 육군참모총장조지 마셜은 "우리가 즉시 사용할 수 있고, 미국인의 생명 손실이 확실히 감소하며, 물리적으로 전쟁 종결을 앞당길 수 있는,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은 유일한 무기는 독가스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 육군은 겨자 가스와 포스겐을 채운 다양한 크기의 항공 폭탄 8만 6천 발을 준비하는 계획도 진행했다.
또한, 미국군은 일본의 농산물에 대한 독극물 무기 사용도 계획했다. 1942년메릴랜드주 벨츠빌에 있는 미국 농무부 연구 본부에서 미국 육군의 요청에 따라 일본의 특정 농산물을 고사시키는 생물무기가 될 세균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주요 농산물인 쌀과 고구마는 세균에 대해 매우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에, 세균 대신 화학 물질 살포로 방향을 바꾸었고, 실제로 일본 경작지에 B-29로 원유와 폐유를 살포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더 나아가 연구가 진행되어 2,4-디클로로페녹시초산을 농작물 관개용수에 살포하는 계획도 추진되었다.
인간에게 사용할 세균무기 개발도 진행되었다. 탄저균을 채우기 위한 폭탄 용기 100만 개가 주문되었고, 다운폴 작전까지는 그 배 이상의 탄저균이 채워진 폭탄이 생산될 계획이었다. 이러한 생물 무기와 화학 무기의 사용에 대해, 1944년 7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등과의 작전 회의를 위해 하와이로 향하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태운 중순양함 볼티모어 함상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미국 육해군 최고 사령관(대통령) 부참모장 윌리엄 D. 리히는 "대통령 각하, 생물 무기와 화학 무기의 사용은 제가 지금까지 들어온 기독교 윤리에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모든 전쟁 법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의 비전투원에 대한 공격이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면 적도 사용할 것입니다"라며 루스벨트에게 반대 의견을 제기했지만, 루스벨트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애매한 답변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결국 생물 무기와 화학 무기가 사용되기 전에 전쟁은 종결되었다.
3. 공습의 경과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공습으로 B-25 폭격기가 도쿄를 처음으로 공습하여 아라카와구 등에 피해를 입혔고, 39명이 사망했다.[49][105] 1944년 마리아나 제도-팔라우 제도 전투에서 미군이 사이판을 점령하면서 B-29의 작전 범위에 도쿄를 포함한 일본 본토 거의 전역이 들어오게 되었다.[50]
3. 1. 배경
1942년 4월 18일, 둘리틀 공습으로 B-25 폭격기가 도쿄를 처음으로 공습하여 아라카와구, 오지구, 고이시카와구, 우시고메구에 피해를 입혔다.[49] 사망자는 39명이었다.[105]
1943년 8월 27일, 미 육군 항공대 사령관 헨리 H. 아놀드는 일본 도시 산업 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지속적인 폭격을 주장하며, 소이탄(나팜탄) 사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1944년 마리아나 제도-팔라우 제도 전투에서 미군이 사이판을 점령하고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B-29의 작전 범위에 도쿄를 포함한 일본 본토 거의 전역이 들어오게 되었다.[50] 일본에서는 마리아나 제도 함락의 책임을 물어 1944년 7월 18일 도조 내각이 총사퇴했다.[50]
3. 2. 샌 안토니오 작전
1944년 11월 24일, B-29 111기가 각각 2.5톤의 폭탄을 싣고 사이판섬에서 출격했다. 주요 목표는 나카지마 비행기의 무사시 제작소였다. 작전명은 '''샌안토니오 1호 작전'''이었다.[51] 1호기 돈트리스 도티에는 제73폭격항공단 사령관 에메트 오도넬 준장이 탑승하여 직접 조종간을 잡았다.
도쿄 상공은 심한 날씨였는데, 특히 B-29 조종사들을 놀라게 한 것은 고고도에서 120노트(220㎞/h)로 불던 강풍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제트 기류로 밝혀졌는데, 그 강풍을 탄 B-29는 대지 속도가 720㎞/h에 달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고장으로 폭격을 단념하는 항공기가 속출했다. 출격한 B-29 111기 중 무사시 제작소에 도달한 것은 24기뿐이었고, 노르덴 폭격 조준기로 정밀 조준 폭격을 실시했지만, 폭탄이 목표에서 크게 벗어나 명중률은 2% 정도에 불과했다. 주요 목표인 공장 시설의 피해는 경미했다.[49]
주요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64기는 2차 목표인 항만 및 도쿄 시가지에 폭탄을 투하했지만, 이 중 35기는 구름 위에서 레이더 폭격을 하여 정확도가 떨어져 피해는 적었다. 이 공격으로 사망자 57명, 부상자 75명이 발생했다.[49]
동부군 사령부는 오가사와라 제도의 레이더와 대공 감시소로부터 대편대 접근 정보를 받고 도쿄 공습으로 판단, 예하 제10비행사단에 요격을 명령하고 정오에 공습 경보를 발령했다.[49] 제302해군항공대도 요격에 참가하여 100대 이상의 일본군 전투기가 B-29를 공격했지만, B-29는 9,150m의 고고도로 비행했기 때문에 일본군 공격은 큰 효과가 없었다.
일본군은 진천제공대의 미타 요시오 병장이 쇼키로 자폭 공격을 하여 B-29 1기를 격추하는 등 격추 5기, 손상 9기의 전과를 보고했지만,[49] 미국 측 기록에 따르면 자폭으로 인한 손실 1기와 고장으로 인한 불시착 1기 등 총 2기가 손실되었다.[49]
11월 29일 밤부터 30일 새벽까지 제73폭격항공단 소속 29대가 도쿄 시가지에 야간 폭격을 가했다. 이는 항공기 공장 등 특정 시설이 아닌 도쿄 시가지에 대한 무차별 소이탄 공격으로, 작전명은 '브루클린 1호 작전'이었다.[49] B-29는 칸다구(神田区)와 니혼바시구(日本橋区)를 폭격했고, 화재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49] 10,000m 고고도 폭격이었지만, 도쿄에 비가 내려 구름 위에서 레이더 폭격을 했고 공격기 수도 적어 피해는 사망자 32명, 가옥 2,952호로 한정적이었다.[49] 일본군도 우천으로 제대로 요격하지 못해 B-29의 손실은 1기뿐이었다.[49]
12월 3일의 '샌 안토니오 3호 작전'에서는 B-29가 스기나미구(杉並区), 이타바시구(板橋区) 등의 시가지에 폭탄을 투하하여 사망자 184명이 발생했다.[49] 이처럼 주요 목표는 군사 목표였지만, 시가지 폭격도 이루어져 1944년 말까지 도쿄 시가지에는 10차례의 공습이 있었다.
3. 3. 미팅 하우스 작전
1945년 1월 20일, 커티스 르메이 소장이 제21폭격집단 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미군의 폭격 전략은 큰 변화를 맞이한다. 르메이는 고고도 정밀 폭격 대신 저고도 야간 소이탄 공격으로 전략을 전환했는데, 이는 일본의 방공 능력이 저고도에서 취약하다는 점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르메이는 폭격 고도를 낮추면 제트 기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엔진 부하를 줄여 연료를 절약하며, 더 많은 폭탄을 실을 수 있고, 폭격 정확도도 높일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일본군의 야간 전투 능력이 미흡하다고 판단, B-29의 방어 화기를 제거하고 폭탄 탑재량을 늘렸다.
이러한 새로운 전술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첫 공습이 1945년 3월 10일의 '''"미팅 하우스 2호 작전"'''이다. 이 작전은 목조 가옥 밀집 지역인 시타마치를 불태우는 것이 목표였다. 미군은 일본 중소기업이 군수 산업 생산 거점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민간인 대량 살상을 통해 전쟁 지속 의지를 꺾는 것이 주 목적이었다.
미팅 하우스 2호 작전으로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도시의 4분의 1이 파괴되는 등 도쿄는 잿더미가 되었다.
3. 3. 1. 1호 작전
1945년 2월 25일, 미군은 "미팅 하우스 1호 작전"을 실시하여 도쿄 시가지에 소이탄 공격을 감행했다. 원래는 나카지마 비행기 무사 제작소를 고고도에서 정밀 폭격할 계획이었으나, 기상 악화로 인해 목표를 급히 도쿄 시가지로 변경했다.[55]
이 작전에는 당시 최대 규모인 229대의 B-29가 출격하여 간다역을 중심으로 넓은 지역을 불태웠다. 이로 인해 간다구, 혼조구, 요츠야구, 아카사카구, 니혼바시구, 무코지마구, 우시고메구, 아다치구, 고지마치구, 혼고구, 아라카와구, 에도가와구, 시부야구, 이타바시구, 가츠시카구, 조토구, 후카가와구, 토시마구, 타키노가와구, 아사쿠사구, 시모타구, 스기나미구, 요도바시구 등이 피해를 입었다.[49] 궁성(宮城)도 피해를 입어 주마료 마구사합숙소가 소이탄에 의해 불탔고, 궁내청, 오오미야 고쇼, 치치부궁 별장 등이 손상되었다.[105]
이 공습으로 195명이 사망하고 432명이 부상당했으며, 20,681호의 가옥이 피해를 입었다. 인명 피해는 이전에 있었던 "긴자 공습"보다 적었지만, 화재로 인한 가옥 피해는 더 컸다.[49]
미팅하우스 1호 작전은 갑작스러운 기상 악화로 인해 목표가 변경된 것이었고, 공격 방식도 이후의 저고도 무차별 소이탄 공격과는 달랐다.[55] B-29 탑승원들에게도 특별한 설명 없이 이전 작전의 연장선으로 인식되었다.[55] 작전 중에는 계속해서 날씨가 좋지 않았고, 작전 목표가 갑자기 변경된 탓에 B-29 편대 구성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부 부대는 정연하게 폭격했지만, 대부분은 단독으로 공격하는 등 통제가 되지 않아 기대만큼의 성과는 없었다.[53]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3월 10일부터 시작되는 대규모 무차별 소이탄 폭격의 예고편과 같은 역할을 했다.[57] 악천후와 B-29의 통제 불능은 일본군의 방공망을 분산시켰고, 이날 B-29 손실은 공중 충돌로 인한 2대에 불과했다.[49]
3. 3. 2. 2호 작전
1945년 3월 10일, 미군은 '미팅 하우스 2호 작전'을 실시하여 도쿄의 시타마치 지역에 대규모 소이탄 공격을 감행했다.[38] 이 작전은 목조 가옥이 밀집한 도쿄 동부 지역과 그곳에 산재한 작은 공장들을 함께 불태우는 것을 목표로 했다.[43]
미군은 이 공격에 대해 일본 중소기업들이 군수 산업 생산 거점이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댔지만, 실제 목표는 주민 대량 살상을 통해 전쟁 지속 의지를 꺾는 것이었다.[43]
미팅 하우스 2호 작전에는 325대의 B-29 폭격기가 출격했으며, 이 중 279대가 도쿄 시가지에 1,665톤의 소이탄을 투하했다.[58] 투하된 폭탄은 대부분 약 226.80kg의 E-46 집속탄으로, 고도 약 609.60m 에서 약 762.00m에서 38개의 M-69 소이탄을 살포했다. M-69 소이탄은 얇은 지붕을 뚫고 지면에 떨어져 3~5초 후 발화하여 나팜탄 덩어리를 뿜어냈다. 소량의 M-47 소이탄도 투하되었는데, 이는 무게 약 45.36kg의 젤리화된 가솔린과 백린 폭탄으로, 충격과 동시에 발화했다.
에 첫 소이탄이 투하된 것을 시작으로, 시타마치 지역(현재의 고토구)에도 폭격이 시작되었다. 공습 경보는 첫 폭탄 투하 8분 후인 0시 15분에 발령되어 늦었다.[58]
강풍의 영향으로 화재는 목표 지역을 넘어 동쪽과 남쪽으로 퍼져 시타마치의 대부분을 불태웠다.[43] 이 공습으로 인해 도시의 약 가 파괴되었고, 약 1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11][12]
미팅하우스 작전에 투입된 339대의 B-29 중 총 282대가 목표 지점에 도착했으며, 그중 27대는 일본군 방공망에 격추되거나 기계 고장 또는 화재로 인한 상승 기류에 휘말려 손실되었다.
이 공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단일 공습으로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공격이었다.[13] 드레스덴,[14] 함부르크, 히로시마 또는 나가사키 단일 사건보다 더 큰 피해를 입혔다.[15][16]
3. 4. 이후 도쿄 공습
1945년 4월 13일, 5월 24일, 5월 25일에도 도쿄에 대규모 소이탄 공격이 가해져 고쿄 일부와 메이지 신궁 등이 피해를 보았다.[71][72] 이후에도 중소 도시에 대한 소이탄 공격이 계속되었다.
4월 13일의 공습 작전명은 '파디션 작전'이었다.[71] B-29 327기가 출격하여[71] 2,119톤의 폭탄을 투하했는데, 그 중 96.1%가 소이탄이었다.[71] 이 공격으로 29.5km2가 불탔다.[71] 도쿄 제1육군조병창, 도쿄 제2육군조병창을 포함한 병기 공장들과 고쿄의 일부, 오미야 고쇼, 메이지 신궁이 피해를 보았다.[71]신주쿠 교엔에는 피난민들이 몰렸으나, 경비원이 "천황폐하의 고구마가 심어져 있다"는 이유로 문을 닫아 한때 혼란이 있었다.[71]
5월 24일과 25일의 공습은 도쿄에 대한 마무리 소이탄 공격이었다.[71] 5월 24일 새벽에는 B-29 558기,[71] 5월 25일 야간에는 B-29 498기가 투입되었다.[71] 5월 23일에 3,645톤,[71] 5월 25일에 3,262톤의 소이탄이 투하되었는데,[71] 이는 3월 10일 투하량의 4배에 달하는 양이었다.[71]
'''1945년(쇼와 20년) 4월 13일 이후 주요 공습에 의한 도쿄도의 피해 상황'''[54]
4월 13일 (임무 번호 56번)
5월 24일 (임무 번호 181번)
5월 25일 (임무 번호 183번)
사망자
2,459명
762명
3,651명
부상자
4,746명
4,130명
17,899명
피해 가옥
200,277호
64,487호
165,545호
피재자
666,986명
224,601명
620,125명
5월 25일 공습에서는 한자몬에 소이탄이 떨어져 표궁전에서 오궁전까지 불탔다.[71]근위사단까지 동원되어 진화에 나섰지만, 4시간 후에야 진화되었다.[71]쇼와 천황과 향순황후는 어문고 부속고에 피난하여 무사했지만, 궁내성 직원 등 34명과 근위사단 병사 21명이 사망했다.[71]스즈키 간타로 수상의 수상 관저도 소실되었고, 아나미 비키 육군대신은 사직을 신청했지만 쇼와 천황이 위로하여 생각을 바꾸었다.[71]
이후에도 가고시마, 오무타, 하마마쓰, 요카이치 등 중소도시 58곳에 대한 소이탄 공격이 계속되었다.[75]
3. 4. 1. 일본군에 의한 요격
일본군은 전투기와 고사포를 동원하여 B-29에 대한 요격에 나섰다. 1945년 1월 27일 공습에서는 B-29 격추 22대를 보고했지만, 미군 기록상 손실은 9대였다.[75] 2월 25일 '미팅 하우스 1호' 작전에서는 악천후와 B-29 편대 비행의 어려움으로 일본군 요격이 분산되면서 B-29 손실은 2대에 불과했다.[75]
5월 24일, 일본 육해군은 전력을 다해 요격에 나섰고, 쿠로에 야스히코 소좌는 사식전투기 '질풍'으로 B-29 3기를 격추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76] 일본군은 총 30기 격추를 보고했으나, 미군 기록에서는 17기 손실, 69기 손상으로 나타났다.[76] 5월 25일, 일본군은 47기 격추를 보고했고, 미군도 26기 손실, 100기 손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76] 그러나 미군 기록상 일본군 공격에 의한 격추는 3기뿐이었고, 나머지는 원인 미확인 손실로 처리되었다.[76] 일본군 측 주장에 따르면, 제302해군항공대만 B-29 16기 격추를 보고했고,[76][77] 육군 고사포도 하루에만 14,476발의 고사포탄을 소비하며 격렬하게 대응했다.[76]
일본군은 레이더 기술을 활용하여 요격을 시도했다. 영국제 GL Mk.II 레이더를 데드 카피하거나 독일로부터 울츠부르크 레이더 기술 지원을 받아 전파표정기를 개발하여 방공전에 투입했다.[78] 고사포와 탐조등 조준에 사격관제 레이더를 활용하고, 레이더 유도 사격 훈련을 실시했다.[79]
하지만 미군은 재밍 장치를 장착한 B-29를 투입하여 일본군의 레이더를 교란했다. '레이븐'(까마귀)이라 불리는 장교가 재밍 장치를 조작했고, ECM기로 개조된 B-29 '고슴도치'가 전파 방해를 통해 일본군 방공망을 무력화했다.[79]
결과적으로 B-29의 고성능과 미군의 재밍 전술로 인해 일본군의 요격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5월 29일 요코하마 대공습부터는 P-51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B-29의 손실이 더욱 감소했다.[79] 일본군은 방공 전투를 제한하는 방침을 세우면서 B-29에 대한 요격은 더욱 어려워졌다.[79] 태평양 전쟁 전체에서 B-29의 전투 손실률은 1.32%였지만,[78] 도쿄 공습에서는 3.3%로 급증하여 일본 수도권 방어가 쉽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79]
4. 전후
전쟁이 끝난 뒤, 사진작가 이시카와 코요(일본어: 石川光陽, いしかわ こうよう)는 연합군 최고사령관(GHQ)에 넘기지 않고 보관했던 사진 33장을 일반에 공개하여 3·10 공습(도쿄 대공습)의 비극을 알렸다.[49] 이 사진들은 도쿄 대공습의 참상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지만, 이시카와 자신은 그러한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1942년 둘리틀 공습부터 1945년 5월 25일 공습까지 도쿄에서 총 600장이 넘는 사진을 찍었다.[49]
에도 도쿄 박물관과 스미다 지방 문화 박물관에서는 도쿄 대공습 관련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2001년에는 도쿄평화기념관 건립 계획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49]
4. 1. 위령
신원 불명의 희생자 유골은 관동 대지진 희생자를 모신 「지진 재해 기념당」에 함께 봉안되었다. 1951년, 지진 재해 기념당은 [https://www.gotokyo.org/kr/spot/358/index.html 도쿄도 위령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도쿄도 위령당에서는 매년 3월 10일에 추도 행사가 열리고 있으며, 인접한 [https://www.gotokyo.org/kr/spot/1257/index.html 도쿄도 부흥 기념관]에는 관동 대지진 및 도쿄 대공습에 대한 전시가 있다. 이 밖에도 대규모 피해 지역에는 주로 주민들이 직접 만든 위령비가 많이 설치되어 있다.
도쿄도는 1990년(헤이세이 2년), 공습 희생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것을 목적으로 3월 10일을 「도쿄도 평화의 날」로 정하는 것을 조례로 정했다. 도쿄도는 스미다구의 요코아미초 공원에 「도쿄 공습 희생자를 추도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비」를 설치하고, 유족 등의 신청에 의해 밝혀진 1942년부터 1945년의 공습 희생자 명부(2013년 3월 시점에서 79,941명 등재)[49]를 납부했다. 2019년 3월 현재 81,147명, 2020년 3월에는 81,273명이 등재되었다.[79] 도쿄도는 명단 등재를 받고 있다. (접수에 대해 [https://www.seikatubunka.metro.tokyo.lg.jp/bunka/bunka_seisaku/0000000662.html 도쿄도 생활문화국 도쿄공습희생자 명단])
매년 요코아미초 공원은 대법회가 열리는 3월 10일(도쿄도 평화의 날)과 9월 1일에 도쿄 공습 희생자 명단이 들어있는 '도쿄 공습 희생자를 추모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비'의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79]
1948년부터 1951년까지 도쿄 공습으로 사망한 10만 5,400명의 유골이 스미다구의 요코아미초 공원에 안치되었다. 2001년 3월, 공습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가 공원에 세워졌다.[19] 이 공원에는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 목록이 있는데, 유족들의 신청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2020년 3월 기준 8만 1,273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20] 유족들은 도쿄도 정부에 신청하여 희생자 명단에 이름을 추가할 수 있다.[21]
4. 2. 보상 문제
2007년 3월 9일, "도쿄 공습 피해자 유족회" 소속 피해자 및 희생자 유족 112명(평균 연령 74세)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총 12.32억엔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며 도쿄지방법원에 집단 소송을 제기했다.[80] 미국군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자가 집단으로 일본 국가에 책임을 묻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들은 구 일본군 및 군속은 국가 보상을 받고 있는 반면,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동원된 민간인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도쿄 대공습이 국제법 위반의 무차별 융단폭격이었음을 법원에 인정받고, 잘못된 국책으로 전쟁을 시작한 정부의 책임을 추궁"하고자 했다.[80] 법적 근거는 헤이그 육전 규약 제3조 위반인 무차별 공격이었던 도쿄 대공습에 대해 피해자는 손해배상 청구권이 있지만,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에 따라 공습 피해에 대한 외교 보호권을 포기했다는 점, 이는 헌법 17조의 공무원의 불법 행위에 해당하며, 또한 전시재해보호법에 따라 국가는 구제 의무를 지지만 이를 태만히 했다는 등의 주장이었다.[80]
2009년 12월 14일 1심 판결에서 청구가 기각되었고,[81] 원고 측은 항소했으나 항소 역시 기각되었다. 2013년 5월 9일 최고재판소가 원고 측의 상고를 기각하여 원고 측의 전면 패소가 확정되었다.[82] 기각 이유에는 공습 피해자 구제는 법원에서 판단할 수 없고, 국회가 입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점이 포함되었는데, 패소한 원고 측 변호단도 "국민의 수인 한도라는 종래의 판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평가했다.[83]
2013년, 아베 신조 2차 내각은 공습이 "국제법의 기초 중 하나인 인도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고 밝혔지만, 당시 국제법상 공습이 불법이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하기 어렵다고도 언급했다.[26][27]
4. 3. 전쟁 범죄 문제
공습은 명목상으로는 군사 시설이나 군수 산업에 대한 공격이었지만, 도쿄 대공습은 도쿄 자체를 섬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차별 폭격으로, 많은 비전투원인 민간인이 희생되었으며, 전쟁범죄가 아니냐는 지적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89] 2007년 도쿄 대공습 소송에서도 무차별 공격은 헤이그 육전 규칙 3조 위반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22년 헤이그 공중전 규칙이 채택되어, 군사 목표 이외의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차별 공습은 금지되었다.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해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였다. 국내법에서도 군인, 군속 및 그 유족에 대한 특별 보호 정책이 시행된 반면, 비군인에 대해서는 불충분한 대책만이 강구되었다는 논의가 있다.
1964년 12월 4일, 일본 본토 폭격을 포함한 대일 무차별 폭격을 지휘한 미 공군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대장에 대해 제1차 사토 내각이 훈일등 욱일장 서훈을 의결하여, 7일에 수여가 이루어졌다.[90]항공자위대 육성에 협력한 공로였다.
당시 비난 여론이 있었고 국회에서 추궁도 있었지만, 사토 에이사쿠 수상은 "현재 미국과 우호 관계에 있어, 공적이 있다면 과거는 과거로서 공에 보답하는 것이 당연하다. 대국의 국민과는 언제까지나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의 관계, 공적을 생각해 조치해 나가야 한다"고 답변했다. 고이즈미 준야 방위청 장관도 "공적과 전시의 사정은 별개로 생각해야 한다"고 답변했다.[91] 훈일등 수여는 천황 친수가 관례이지만, 쇼와 천황은 르메이와 면회하지 않았다. NHK 취재에서 르메이는 전쟁 책임에 대한 질문에 훈장을 보여주었다.[92]
폭격 직후 르메이는 "근대 항공전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며 공습의 성과를 자랑했지만, 민간인 대량 학살에 대해서는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면서도 일본군이 필리핀에서 미군과 필리핀 민간인을 상대로 자행했다는 잔혹 행위를 빗대어 "(대량 학살이) 나의 결심을 전혀 둔하게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우리는 군사 목표를 노리고 있었다. 단순한 살육을 위해 민간인을 살육할 목적은 없었다… 많은 여성과 아이를 죽이게 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야만 했다"고 말하며, 당시 일본 공업 생산의 특징이었던 가내 공업 시스템의 파괴가 목적이었고 어쩔 수 없었다고도 말했다.
르메이는 일본 폭격에 도덕적 고려가 영향을 미쳤느냐는 질문에 "당시 일본인을 죽이는 것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내가 골머리를 앓았던 것은 전쟁을 끝내는 일이었다"며 "전쟁에서 패했더라면 나는 전쟁범죄인으로 재판받았을 것이다. 운 좋게도 우리는 승자가 됐다"고 말했다. 또 "군인은 누구나 자기 행위의 도덕적 측면을 다소간 따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쟁은 모두 도덕에 반하는 것이다"라고 답했다.[93] 르메이는 "우리는 일본 항복을 재촉하는 수단으로서 화재 밖에 없었던 것이다"라고 회고했다.[94]
일본 본토 폭격에 관해 르메이는 인도에 위배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쟁에서의 필요성을 우선해 현장에서 효과적인 전술을 고안하고 실행한 책임이 있지만, 폭격은 항공군 사령관 헨리 아놀드에게 명령받은 임무였고, 르메이의 역할이 과대하게 거론되는 경향이 있다. 르메이 취임으로 B-29의 공격법이 야간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도시 폭격(무차별 폭격)의 틀은 합동 참모 본부의 결정, 소이탄 공격 준비, 도쿄와 나고야에서 한셀의 무차별 폭격 시도 등 르메이 취임 전부터 진행돼 왔다.
2013년 5월 7일, 제2차 아베 내각은 도쿄 대공습에 대한 답변서를 의결했다.[96] 답변서에서는 "국제법의 근저에 있는 기본 사상의 하나인 인도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한편, "당시 국제법을 위반해 행해졌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고 지적해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사실상 피했다.[96]
5. 피해
도쿄 대공습으로 인한 피해는 막심했다. 인명 피해는 물론, 수많은 건물과 시설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마크 셀든은 ''Japan Focus''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136]
> 일본과 미국의 당국이 제시한 사망자 수 약 10만 명은, 양측 모두 사망자 수를 축소할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을 고려할 때, 인구 밀도, 풍향, 생존자들의 증언에 비추어 볼 때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95년 도쿄신문 조사에서는 전국적으로 55만 9,197명, 도쿄에서 11만 6,959명이 피해를 입었다고 보도했다.[136]
황궁, 메이지 신궁, 도쿄역 등 많은 역사적, 문화적 건축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137]
뒤쪽의 정면은 누구 - 에이나미 카요코의 자전적 아동서 및 극장판 애니메이션 작품이다.[43]
유리 토끼 - 타카기 토시코의 아동문학 및 실사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극장판 애니메이션 작품이다.[43]
마지막으로 본 거리 - 각본가 야마다 타이치의 소설 및 텔레비전 드라마화 작품이다. 주인공 일가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인 1944년의 도쿄로 시간이동을 한다.[43]
전쟁과 청춘 - 하야토메 카츠모토의 소설 및 영화화 작품이다.[43]
스톡홀름의 밀사 - 사사키 유즈루의 소설이다. 극중에서 야마와키 준조, 마리코 부부가 도쿄 대공습을 겪는다.[43]
너의 이름은 - 1952년에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 및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 무대, 텔레비전 드라마 작품이다. 앞부분에서 도쿄 대공습이 일어나, 주인공 우지에 마치코와 고구 춘주가 만난다.[43]
영화 너의 이름은(1953-1954년, 오바타 히데오 감독), 도쿄 대공습 유리 토끼(1979년, 타치바나 유스케 감독), 전쟁과 청춘(1991년, 이마이 타다시 감독)은 상기 참조.[43]
해적이라 불린 사나이 - 2016년, 야마자키 타카시 감독. 햐쿠다 나오키 원작 소설의 영화화, 앞부분의 1945년 5월 도쿄 대공습 장면에서 등장, 일본군의 야간 전투기 겟코가 격추하지만 역습을 받아 전멸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겟코가 격추에 출격한 5월 25일 야간 공습에서, 요코스카 해군 항공대의 야간 전투기대 쿠로토리 시로 소위와 쿠라모토 주쥬 히초장이 탑승하는 겟코가 B-29를 5기 격추, 1기 격파의 전과를 올리고 무사히 귀환하고 있다.[43]
그날의 오르간 - 2018년, 히라마츠 에미코 감독[43]
텔레비전 드라마 너의 이름은(1962년, 후지테레비), 너의 이름은(1966년, 닛테레), 너의 이름은(1976년, NET텔레비), 유리 토끼(1980년, NHK), 마지막으로 본 거리(1982년, 테레아사)는 상기 참조.[43]
NHK 연속 텔레비전 소설[43]
* 너의 이름은(1991년 방영) - 상기 참조
* 오신 주인공 오신의 집은 불타지 않았지만, 공장이 소실된다. 그 후 만주에서 귀국한 집주인에 의해 오신 일가는 집을 잃게 된다.
* 수련(1999년 방영) - 어머니를 찾기 위해, 태어난 고향을 떠나 상경하지만, 도쿄 대공습을 겪는다(그 후, 장남 코타로를 데리고 홋카이도로 피난한다).
* 순정 키라리(2006년 방영) - 극중에서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도쿄 대공습이 일어난다.
* 오히사마(2011년 방영) - 주인공의 절친이 도쿄 대공습에 피해를 입고, 전화 속에서 목숨을 구해준 은인에게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그려지고 있다.
* 하나코와 안(2014년 방영) - 제1화 앞부분 및 제24주 후반에서, 1945년 4월 15일의 도쿄 대공습을 만나 오모리의 자택 겸 인쇄 회사가 불타버린다.
* 나츠조라(2019년 방영) - 제1화 앞부분에서 주인공 나츠가 어머니와 함께 도쿄 대공습의 전화에서 도망치지만 어머니와 헤어지고, 어릴 적 친구에게 이끌려 함께 학교 수영장에 뛰어들어 목숨을 건진 장면이 실사와 애니메이션으로 그려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본 거리 - 2005년, 테레아사. (상세 내용 상기 참조)[43]
도쿄 대공습 - 2008년, 닛테레. 감수 에이나미 카요코.[43]
3월 10일 도쿄 대공습 말해지지 않았던 33장의 진실 - 2008년, TBS[43]
올림픽의 인질 - 2013년, 테레아사, 오쿠다 히데오 원작. 주인공 오치아이 마사오가 15세 때, 여동생 아리미와 함께 도쿄 대공습을 만나, 어머니가 죽는다는 회상 장면이 있다(이 에피소드는 드라마 오리지널 요소이며, 원작에서는 오치아이 마사오의 과거에 대해 언급되어 있지 않다).[43]
도쿄가 전장이 된 날 - 2014년, NHK[43]
두 개의 호두 - 2007년, 테레아사[43]
전쟁·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의 일(2014년 도쿄 서적 / 츠카모토 치에코 / 문·츠카모토 야스시 / 작·그림)[43]
3월의 라이온쇼와 이문 염열의 시대(하쿠센샤 / 니시카와 히데아키 / 원안·감수: 우미노 치카) - 제3권(2016년 10월 5일 발행)의 회상 장면에, 1945년(쇼와 20년) 3월 10일의 야간 공습(시타마치 공습)의 묘사가 있다.[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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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災等による焼失文化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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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災等による焼失文化財―20世紀の文化財過去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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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まちづくり・地域づくり(6)「こわれない」を目指す下町のまちづくり--東京都墨田区京島地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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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銀座木村屋あんぱん物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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ギリシア正教入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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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特集 東京大空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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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略爆撃と日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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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8回 平塚空襲 その2(平塚空襲に投下された焼夷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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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襲の歴史―終わらない大量虐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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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都戦災史 戦災日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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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処理の残された課題―日本と欧米における一般市民の戦争被害の補償―
国立国会図書館レファレン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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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戦後の東京都の神社にみる境内建物の高層化について-上-
東京都神社庁「東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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