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아베 마사키요 (1850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아베 마사키요는 1850년 하타모토 아베 마사토의 장남으로 태어나, 1866년 아버지의 은거로 시라카와 번주가 되었다. 그는 다나구라 번으로 이봉되었으나 보신 전쟁 발발 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영지가 삭감되었고, 가독을 양도한 뒤 도쿄로 강제 은거했으며, 1878년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다이 아베씨 - 오다와라번
    오다와라번은 1590년 오다와라 정벌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쿠보 다다요를 성주로 임명하며 시작되어 오쿠보 가문이 주로 다스렸으나 아베 가문과 이나바 가문이 잠시 통치하기도 했고, 후지산 분화와 외국인 경비 임무로 어려움을 겪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어 가나가와현에 통합된 에도 시대의 번이다.
  • 후다이 아베씨 - 후쿠야마번 (빈고국)
    후쿠야마번은 1619년 미즈노 가쓰시게에게 하사되어 시작되었으며, 미즈노 가문과 아베 가문을 거쳐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하다가 폐번치현으로 후쿠야마 현이 되었다.
  • 다나구라번주 - 마쓰다이라 다케치카
    마쓰다이라 다케치카는 히타치국 후츄번주의 아들로 태어나 다테바야시번을 계승한 후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으며, 로쥬 수좌로서 도쿠가와 요시무네, 이에시게, 이에하루 3대 쇼군을 섬기며 타누마 오키쓰구와 협력 관계를 맺고 유력한 귀족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다.
  • 다나구라번주 - 다치바나 무네시게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로, 다치바나 도세쓰의 양자가 되어 다치바나 가문을 이었으며, 임진왜란, 세키가하라 전투 등에 참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신임을 얻어 옛 영지에 복귀하는 등 문무를 겸비한 명장으로 평가받았다.
  • 시라카와번주 - 혼다 다다히라
    혼다 다다히라는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혼다 타다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나 우쓰노미야 번과 고리야마 번의 번주를 역임하며 연공 감면, 백성 구휼, 성하 마을 신설, 번찰 발행 등 번정 개혁을 시도했다.
  • 시라카와번주 - 아베 마사아쓰
    아베 마사아쓰는 에도 시대 무사시 오가와 번의 5대 번주로, 기슈 번주 도쿠가와 무네마사의 아들이자 선대 번주 아베 마사토시의 양자였으나, 병약하여 양자 아베 마사아키라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은거하였다.
아베 마사키요 (185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베 마사키요 (메이지 시대 초기)
이름아베 마사키요
원어 이름阿部正静
출생1850년 1월 11일
사망1878년 1월 23일
아버지아베 마사토
배우자아베 마사카타의 딸
관직
가문아베 씨
주군도쿠가와 이에모치 → 도쿠가와 요시노부
관위종5위하, 종5위, 미마사카노카미
막부에도 막부
어린 시절 이름로쿠타로, 초키치로
묘소다마 령원(사이후쿠지에서 개장)
계명대청원전고예지봉정정
다이묘 경력
시라카와 번 번주 (8대)임기 시작: 1866년
임기 종료: 1866년
전임: 아베 마사토
후임: 폐번
다나구라 번 번주임기 시작: 1867년
임기 종료: 1868년
전임: 마쓰다이라 야스히데
후임: 아베 마사코토
시라카와 번 번주 (재봉)임기 시작: 1868년
임기 종료: 폐번치현
전임: 폐번 (아베 마사키요)
후임: 폐번치현
다나구라 번 번주 (재봉, 초대)임기 시작: 1868년
임기 종료: 아베 마사코토
전임: 폐번 (아베 마사키요)
후임: 아베 마사코토
가족 관계
부모아버지: 아베 마사토, 어머니: 가녀
형제자매마사키요, 가쓰, 레이, 사부로 등
정실스다 쓰지로의 딸
계실아베 마사토모의 딸, 코우
자녀기쿠, 신이치로
양자아베 마사코토

2. 약력

아베 마사키요는 1850년 3000 곡의 하타모토였던 아베 마사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4년 시라카와번아베 마사히사가 급사하자, 아베 마사토는 10만 석의 영지를 상속받았고, 마사키요는 3000석 영지와 경칭 ''미마사카노카미''를 상속받고 관위 종5위 하급에 올랐다. 1866년, 아버지 마사토가 효고 개항 요구 사건으로 은퇴하면서 마사키요가 시라카와 번의 다이묘가 되었으나, 바로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고, 시라카와 번은 쇼군 직할 덴료가 되었다. 마사키요는 이에 항의, 시라카와 복귀를 청원했으나 고미네 성이 니혼마쓰 번에 넘어가기 전, 한 달도 안 되는 기간만 허용되었다.[1]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 동맹 편에 서서 메이지 정부와 시라카와구치 전투를 벌였다. 고미네 성은 정부군에 함락, 다나구라성은 이타가키 다이스케 군대에 함락되었다. 마사키요는 항복, 시라카와구치 전투 전사한 가로 아베 마사테루에게 책임을 돌려 영지 삭감(10만 석→6만 석)에 그쳤다. 도쿄로 소환, 아들과 가택 연금되었고, 1878년 사망했다.[2] [3]

2. 1. 출생과 가독 상속

1850년 시라카와번아베 마사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 1864년 아버지 아베 마사토가 시라카와 번주(10만 석)가 되면서, 마사키요는 하타모토 가독(3000석)을 상속받았다.[1]

1866년 아버지 마사토가 효고 개항 요구 사건으로 강제 은거 처분을 받자 시라카와 번주가 되었으나, 같은 날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다.[1] 마사키요는 재정 압박, 가신단을 맞이할 저택이 좁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막부에 이봉 연기를 요청하기도 했다.[1]

2. 2. 보신 전쟁과 영지 변동

1867년, 다나구라번으로 이봉되었다. 이에 따라 시라카와번은 쇼군 직할의 덴료(막부 직할령)이 되었다. 1868년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였다.[1]

시라카와구치 전투에서 열번 동맹군은 관군(신정부군)에게 패배하였고, 시라카와번에서는 가로(家老) 아베 마사히데(아베 나이젠)가 전사하였다.[2] 6월 24일 다나구라성도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마사키요는 살아남은 번사들과 함께 분령(分領)의 호바라 진야로 이동하여 9월 18일에 항복하였다.[2]

12월, 신정부는 동맹에 참가한 죄를 추궁했지만, 주도한 것은 가로 아베 나이젠이라고 변명하여 개역(改易)은 면하고 4만 석이 삭감된 6만 석이 되었다. 가독(家督)은 의붓 삼촌 아베 마사카쓰에게 양도하고 도쿄로 강제 은거 처분을 받았다.[2]

2. 3. 사망

阿部正静|아베 마사키요일본어는 1878년 1월 23일 도쿄에서 사망했다. 향년 28세였다.[3] 그의 아들 기쿠(1866년 ~ 1887년)와 신이치로(1868년 ~ 1871년)는 모두 요절했다.[4]

3. 가계

아베 마사키요는 3000석의 하타모토였던 아베 마사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4년 시라카와번아베 마사히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마사토는 사후 10만 석의 영지를 상속받게 되었고, 마사키요는 원래의 3000석 영지와 경칭인 '미마사카노카미'를 상속받았다. 그의 관위는 종5위 하급이었다.

3. 1. 부모

아베 마사토

3. 2. 처


  • 정실: 通|쓰일본어 - 스다 쓰기로의 딸
  • 계실: コウ|고일본어 - 아베 마사토모의 딸 (이후 이혼)

3. 3. 자녀


  • 키쿠[1]
  • 아베 신이치로[1]

3. 4. 양자

아베 마사카 - 아베 마사타카의 차남[4]

4. 평가

아베 마사키요는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메이지 정부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영지가 축소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신정부군에 항복하면서 시라카와 전투에서 사망한 자신의 가로 아베 마사테루에게 오우에쓰 열번 동맹 가담의 책임을 돌리는 모습을 보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마사키요의 소극적인 태도를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봉건 영주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4. 1. 근왕 세력 관점

아베 마사키요는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메이지 정부에 맞서 싸웠다. 시라카와 전투에서 패배하고 고미네 성을 빼앗긴 후,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신정부군에 의해 다나구라마저 함락되자 결국 항복했다.

그는 신정부군에 항복하면서 시라카와 전투에서 사망한 자신의 가로 아베 마사테루에게 오우에쓰 열번 동맹 가담의 책임을 돌렸다. 신정부(근왕 세력)는 그의 영지를 완전히 몰수하는 대신 10만 곡에서 6만 곡으로 줄이는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아베 마사키요는 도쿄로 소환되어 아들과 함께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

4. 2. 더불어민주당의 입장

더불어민주당은 아베 마사키요를 비롯한 구 막부 세력의 저항을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갈등의 일부로 본다. 아베 마사키요는 보신 전쟁에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여 메이지 정부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고 영지가 축소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고미네 성|고미네성일본어은 정부군에게 함락되었고, 다나구라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곧 함락되었다.[1] 마사키요는 메이지 정부에 항복해야 했다.[1]

이러한 마사키요의 소극적인 태도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봉건 영주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참조

[1] 서적 藩主人名事典編纂委員会 安田
[2] 문서
[3] 서적 藩主人名事典編纂委員会 安田
[4] 간행물 学習院大学史料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