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나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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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사나사이는 돌궐 출신으로, 당나라에 귀순하여 활약한 장군이다. 그는 609년에 태어나, 서돌궐과 동돌궐의 혼란 속에서 세력을 키우려 했으나 실패하고 당나라에 투항했다. 당나라에서 그는 고창, 고구려, 구자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655년에 사망하여 당 태종 묘에 함께 묻혔다. 사후에는 원으로 추존되었고, 아들 아사나도진은 장군으로 활약했다.
돌궐 처라 카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에 지혜와 용맹으로 이름이 났으며, 돌궐의 관직인 탁설(拓設, 타르두쉬 샤드)에 임명되어 고비 사막 북쪽에 아기(牙旗)를 세웠다. 일릭 카간의 아들 욜룩 샤드과 함께 철륵, 위구르(회골), 복골, 동라 등 여러 부족들을 나누어 통치하였다.
돌궐의 출라 카간(처라가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11세에 지혜와 용맹으로 이름이 났다. 돌궐의 관직인 탁설(타르두쉬 샤드)에 임명되었고 고비 사막 북쪽에 아기(牙旗)를 세웠다. 힐리 카간(일릭 카간)의 아들인 욕곡설(욜룩 샤드)과 함께 철륵 ・ 위구르 ・ 복골 ・ 동라 등 여러 부족들을 나누어 통치하였는데, 10년 동안 가렴주구를 행하지 않고 부귀를 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힐리가한이 군사력을 키워 주변 국가를 압박하는 와중에 아사나사이는 힐리가한에게 몇 번이나 이를 간언하였으나 힐리가한은 듣지 않았다.
2. 출생과 초기 생애
"부락이 풍요롭다면 나는 그것으로 되었다"며 가렴주구를 행하지 않고 부귀를 추구하지 않으며 10년 동안 무리들을 통솔하였다. 힐리가한이 군사력을 키워 주변 국가를 압박할 때, 아사나사이는 힐리가한에게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1. 동돌궐에서의 권력 투쟁
626년, 철륵, 위구르, 설연타 등이 돌궐에 반역하여, 욕곡설을 마렵산에서 격파하였다. 사얼은 욕곡설을 구원하려 했지만, 설연타에게 패했다.[1] 628년, 잔당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해 가한부도성에 주둔했다.[1] 630년, 힐리가한이 당나라에 멸망하고, 서돌궐의 통엽호 카간도 죽자, 해리필돌육 카간과 니숙 카간 형제가 정권을 다퉜다.[1] 사얼은 군사를 이끌고 이를 습격하여 서돌궐의 절반을 차지하고 10만 명 이상의 무리를 거느리며 도포 카간이라고 자칭했다.[1] 정예 기병 5만을 선발하여 설연타에 대한 복수전을 벌였으나, 100일 만에 병사들 사이에 전쟁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퍼져 도망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1] 설연타의 습격을 받아 대패하여 1만 명의 병사만 거느린 채 고창으로 도망했고, 서돌궐도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1]
2. 2. 서돌궐에서의 재기
626년, 철륵, 위구르, 설연타 등이 돌궐에 반기를 들고 욕곡설을 마렵산에서 격파했다. 아사나사이는 욕곡설을 구원하려 했지만, 설연타에게 패했다.[1] 628년, 잔당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가한부도성에 주둔했다. 630년, 일릭 카간이 당나라에 멸망하고, 서돌궐의 톤 야브구 카간도 사망하자, 해리필돌육가한과 니숙가한 형제가 정권을 놓고 다투었다. 아사나사이는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습격하여 서돌궐의 절반을 차지하고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스스로 도포가한이라 칭했다.[1]
정예 기병 5만을 가려 설연타에 복수전을 시도했으나, 100일 만에 병사들 사이에 전쟁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도망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설연타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1만 명의 병력만 거느린 채 고창으로 도망쳐야 했다. 결국 635년 아사나사이는 무리를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했다.[1]
2. 3. 설연타와의 전투와 패배
626년, 철륵, 위구르, 설연타 등이 돌궐에 반기를 들었고, 욕곡설을 마렵산에서 격파하였다. 아사나사이는 욕곡설을 구원하려 했지만, 설연타에게 패하였다.[1] 628년 잔당을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가한 부도성에 주둔하였다. 630년 힐리가한이 당나라에 멸망하고, 서돌궐의 통엽호 카간도 사망하자, 해리비돌륙 카간과 니숙 카간 형제가 정권을 놓고 다투었다. 아사나사이는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습격하여 서돌궐의 절반을 차지하고 10만 명이 넘는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스스로 도포 카간이라 칭하였다.
정예 기병 5만을 뽑아 설연타에 복수전을 시도하였으나, 100일 만에 병사들 사이에 전쟁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퍼져 도망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설연타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하고 1만 명의 병사만을 거느린 채 고창으로 달아났다.[1] 서돌궐도 더 이상 그가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3. 당나라 귀순과 활약
626년에 철륵・회골・설연타 등이 돌궐의 지배를 이탈하고 욕곡설을 마렵산에서 격파하자, 아사나사이는 욕곡설을 구원하고자 나섰으나 도리어 설연타에 패하였다. 628년 잔당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가한부도성에 주둔하였다. 630년에 힐리가한이 당에 멸망하고 서돌궐의 통엽호 카간(톤 야브구 카간) 또한 사망하자, 해리필돌육가한과 니숙가한 형제가 정권을 놓고 다투었다. 아사나사이는 병사를 거느리고 이를 습격해 서돌궐의 절반을 차지하고 10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으며, 스스로를 도포가한이라 칭하였다. 정예 기병 5만을 가려 설연타에 맞서 복수전을 시도하였으나 100일만에 병사들 사이에 전쟁을 혐오하는 분위기가 퍼지고, 도망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설연타의 습격으로 크게 패하고 1만의 병사만을 거느린 채 고창으로 달아나야 했다. 서돌궐도 더 이상 그가 다스릴 수 없게 되었다. 635년 아사나사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당에 귀순하였다.
636년에 당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 와서 좌효위대장군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무리들은 영주 북쪽에 배치되고 아사나사이 자신은 장안에 머물렀다. 태종의 여동생인 형양공주를 아내로 맞아 당의 부마도위가 되어 금원(禁苑)에 있는 병사들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후 고창 정벌, 고구려-당 전쟁, 구차 정벌 등에 참전하였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뒤에 아사나사이는 돌궐의 풍속에 따라 자신도 태종을 따라 죽기를 청하였으나 고종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우위대장군으로 전임하였으며, 655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보국대장군 ・ 병주도독의 지위가 추증되었으며 소릉에 배장되었는데, 총산을 본떠 그의 무덤 봉분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원(元)이라 하였다.
아들로는 아사나도진이 있었고, 좌둔위대장군에 올랐다고 한다. 670년 우위위대장군 설인귀를 따라 토번을 쳤으나 대비천 전투에서 가르친링에게 패하였다.
3. 1. 고창 정벌
640년 교하도행군총관(交河道行軍総管)이 되어 고창을 쳐서 차지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다투어 포상을 챙기려 하는 와중에 아사나사이는 아직 천자의 조를 받지 못했다면서 가지지 않으려 했고, 별도의 칙이 있고 나서야 자신의 포상을 챙기러 나섰다.[2] 태종은 이러한 아사나사이의 청렴함을 크게 칭찬하고 고창에서 얻은 보도(宝刀)와 능견(綾絹)을 그에게 하사하였으며 북문(北門) 좌둔영(左屯営)의 검교를 맡기고 필국공(畢国公)에 봉하였다.[2]
3. 2. 고구려-당 전쟁 참전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참가하여, 전투 중에 화살을 맞았으나 뽑아버리고 다시 싸워 분전하여 공을 세웠다. 퇴군 이후 홍려경(鴻臚卿)을 겸임하게 되었다.[2]
3. 3. 구차 정벌
647년, 곤구도행군대총관(崑丘道行軍大総管)이 되어 실크로드 왕국인 구자(쿠차)를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다.[2] 648년 아사나사이는 서돌궐 영내로 들어와 처밀(処蜜) ・ 처월(処月)을 공격해 부수고 언기(焉耆) 방면으로 해서 구자 영내로 들어가 그들을 기습하고 진군해 적석(磧石)에 머무르며 이주자사(伊州刺史) 한위(韓威)를 선봉으로 내세우고 우효위장군(右驍衛将軍) 조계숙(曹継叔)을 후위로 세웠는데, 다갈성(多褐城)에서 구자의 왕 백가려포실필(白訶黎布失畢)이 무리 5만을 거느리고 맞아 쳤는데 한위와 조계숙은 구자 군사들과 죽기로 싸워서 격파하였다.[2] 아사나사이는 구자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곽효각에게 성의 수비를 맡긴 채 자신은 달아난 백가려포실필을 추격해 대발환성(大撥換城)에서 백가려포실필과 구자의 대신 나리(那利) 등을 사로잡고 구자의 다섯 대성(大城)을 함락시켰다.[2] 좌위낭장(左衛郎将) 권지보(権祗甫)를 보내 여러 수장들에게 이해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70개 성의 항복을 받아내고는 돌에 공적을 새기고 개선하였다.[2] 곽효각은 전리품인 금과 옥을 몸에 두르고 아사나사이에게도 이를 주었으나 아사나사이는 받지 않았다. 태종은 이를 듣고 「두 장의 우열은 남에게 물을 것도 없겠지」라고 말했다.[2]
4. 죽음과 사후 평가
655년에 사망하였으며, 사후 보국대장군(輔国大将軍) ・ 병주도독(并州都督)의 지위가 추증되었다.[3] 당 태종의 능인 소릉에 배장되었는데, 총산을 본떠 그의 무덤 봉분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원(元)이라 하였다.[3]
당 고종은 아사나사이가 죽으면 당 태종 옆에 묻히거나 그의 묘를 지키는 자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만류하고 그를 우위대장군으로 임명했다.
아들로는 아사나도진이 있었고, 좌둔위대장군(左屯衛大将軍)의 지위에 올랐다고 한다.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처라 카간(출라 카간) | 돌궐의 카간 |
백부(큰아버지) | 힐리 카간(일릭 카간) | |
아내 | 위양장공주(형양장공주) | 당나라 공주 |
아들 | 아사나도진 | 좌둔위대장군 역임. 670년 토번과의 전쟁에서 설인귀의 부장으로 참전했다가 대비천 전투에서 패함. |
아들 | 아사나 부전[4] |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서적
Military culture in imperial China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
[2]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 a history of central Asia
Rutgers University Press
1970
[3]
문서
[4]
간행물
How Officials Rose to Success and Migrated to the Center: Considering the Tombs of Meritorious Officials at Zhaoling
https://muse.jhu.edu[...]
2022
[5]
서적
五胡興華:形塑中國歷史的異族
https://www.google.c[...]
知書房
200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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